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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힘으로 무쌍패를 깰 생각인가?!
나는 무쌍패를 시전하며 전신을 훑어 내리는 극강의 패도적인 힘을 태극에 맞추려 했다. 그리고 완전히 힘이 무(無)의 영역에 도달하는 순간, 제천대성의 패권(覇拳)이 날아 와서 내 정면으로 부딪혔다.
우우 -
제천대성의 권력은 압도적이었다. 여태껏 내가 무쌍패로 감당해 본 모든 공격 중에서 가장 강력했으며 심지어 아수라의 절대지경 공격조차도 단순파괴력에서는 그의 권에 미치지 못했다. 생물체에게 허용된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주먹 만으로 지진을 일으켜서 재난을 일으킬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쌍패는 힘의 크기와 관계 없이 상대방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는 절기! 나는 내 눈 앞에 태극(太極)이 떠오르자 미증유의 거력을 상대로도 완전히 힘을 무효화시킨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천대성은 똑같은 정권공격을 한 번 더 가했고,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연속 공격을 막아내었다.
파앗
제천대성은 뒤로 물러나면서 히죽 웃었다.
“크흐, 역시 그거 일대일 상황에서는 절대방어군? 천계에서 장삼봉 아저씨가 삼십삼천(三十三天) 신장(神將)들을 때려눕히는 걸 구경할 때부터 알았지만.”
“알았으면 이제 그만…. 할 말이 있습니다.”
“난 없는데.”
장난스럽게 대꾸한 제천대성이 팔을 휘적휘적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약점은 찾았다. 이제 한 번 깨볼까나.”
“뭐?”
약점이라고?
나는 왠지 욱하는 마음이 들어서 반문했다.
“오기만 부리는 거 아닙니까? 방금 했던 공격이 전력이 아니었다고 허세를 부리는 겁니까?”
“허세 아냐. 방금 전은 분명히 내 전력을 다한 주먹이었지.”
“그럼….”
“이봐, 정신 집중하라고. 그래야 재밌지.”
스으윽
제천대성은 방금 전처럼 주먹을 치켜든 자세를 잡았다. 다시금 근육이 불룩거리며 가공할 힘을 축적했지만, 나는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쌍패가 ‘힘’에 상극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대한 힘일지라도 무효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 공격의 10배 위력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위이잉!
그러나 제천대성은 다음 순간, 분열(分裂)했다. 그 자세 그대로 분신들이 만들어져서 나를 포위했는데, 어찌나 많은지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최소한 수백 개 이상의 분신들이 나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흥!!’
올 테면 와 봐!!
나는 되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 대 다(一對多)의 상황은 지겹게 수련해왔어!’
무쌍패를 상대하는 자들은 일대일에서 무조건 공격이 무효화되니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무쌍패는 결코 숫자 때문에 밀리는 얕은 절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손발과 행동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쌍패가 적용되는 공간은 사실상 내 주변의 일 장 (一丈).
투두두둥
잠시 후 제천대성의 수백 개나 되는 분신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정권의 파도가 덮쳐오는 것 같았고, 삽시간에 내 주위가 어둠으로 물드는 게 느껴졌다. 가히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으나 나는 내가 절대 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위전변!
그 순간 내 몸이 태극(太極)을 구현화하며 하나의 체계로 변모했다. 그리고 손발을 쓰지 않아도 무쌍패의 기운이 내 몸을 원형으로 감싸며 내 호흡이 완전히 멈췄다. 호흡이 멈췄다기보다는 전신이 천지인(天地人)의 기운과 직접 소통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약점을 노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제된 태극이 허공에 흐르며 사방에서 덮쳐오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의 공세를 완전히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기이한 백색 광채가 내 몸 주위에서 무쌍패를 일으키며, 근접해 온 제천대성의 분신을 소리 소문 없이 집어삼켰다. 동시에 나는 변화된 힘을 다시 전환시키며 내 안의 패도(覇道)를 쌓았고, 패도는 태극의 근원이 되어 양신(陽身)을 굳건히 만들었다.
아무런 힘의 소모 없이 적의 공격을 무효화!!
나는 기력을 하나도 쓰지 않고 제천대성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는 생각에 뿌듯했지만, 그 순간 갑작스럽게 본체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느릿하게 날아드는 걸 알아냈다.
쿠구궁….
아주 느리다.
시간이 멈춘 듯한 체감이 아니라 실제로 느리다.
삼류무사조차 감지하고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느리고 둔탁한 휘두르기 - 어째서 대성은 이런 공격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고 무쌍패를 펼쳐서 그 공격을 무효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무쌍패의 공간에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들어온 순간, 나는 내가 펼쳐둔 무쌍패의 장(場)이 기묘한 부조화를 일으키는 걸 알아챘다.
“……?!”
뭐지?!
원인을 모르겠지만 무쌍패로 만들어낸 무위전변의 공간이 아주 천천히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당황스러웠지만 재빨리 무쌍패를 다시 펼쳐서 균형을 복구하려 했다.
…안 된다!
‘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보려 했으나 무쌍패의 조화가 맞춰지지 않았다. 음신과 양신의 비율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패도의 균형을 잘못 맞추면 몸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 제천대성의 여의봉은 느릿하게 전진하여 어느 새 내 명치끝에 닿았고, 나는 설마 하는 눈으로 제천대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은 제천대성이 여의봉 끝으로 전사경(纏絲勁)을 써서 내 호신강기를 통째로 찢어버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쿠콰콰쾅!!
“커허허헉!!”
나는 일백 장이나 피를 토하며 날아가서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래도 마지막에 최소한의 경락방어를 한 덕에 목숨은 부지했으나, 이건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다. 제천대성은 무술에도 조예가 있는지 전사경으로 호신강기를 찢는 수법을 터득했기에, 거의 맨몸으로 여의봉을 맞은 셈이었다.
부들거리며 땅바닥을 기고 있는 내 앞에 다가온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봐. 깼잖아?”
“어…어떻게.”
“무쌍패는 완벽한 기술이지만 그건 장삼봉 아저씨가 펼칠 때의 얘기지. 펼치는 놈이 완벽하지 못한 게 눈에 보였거든.”
제천대성이 히죽 웃었다.
“천여 년 전 요괴왕으로 태어나서 무수히 싸워오면서, 나 또한 ‘힘’을 다루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힘’의 흐름도 볼 줄 알아.”
“……”
“‘힘’의 흐름을 조정해서 공역(空域)을 흐트러뜨린 것뿐이야. 힘을 공(空)으로 만들면, 네 무쌍패란 것도 그저 공기에 불과하잖아? 계속 분신으로 갈구면서 힘으로만 미는 척 하다가 힘을 빼는 거지! 상대가 무(無)로 다가올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
“크윽…."
나는 제천대성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왜 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힘’은 '마음(心)’에 달린 것, 절대적 평정심을 가져야 무쌍패가 완전 해지는 것이오.]
장삼봉 진인이 나를 수련시키며 귀에 박히도록 했던 말이었다. 무쌍패가 주변의 모든 악의를 차단하지만 그 원동력은 완벽한 태극을 이루기 위한 수행자의 평정심에 달려 있었다. 평정심이 흐트러지면 모든 게 악재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는 게 무쌍패였다.
‘제천대성도… 무예의 달인이다.’
제천대성은 무쌍패까진 아니었으나 세계에 흐르는 힘과 의념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 무쌍패가 강(强)에 대처하여 조화를 이루려 할 때 도리어 유(柔)와 음(陰)의 묘리를 담아서 자신의 공격에 살기를 없애고 무(無)로 만들었다. 무쌍패가 상대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계속 흐트러진 것은 상대가 강능 단유도 유능제강도 아닌 무(無)로 다가오는 경우를 내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침착했다면, 혹은 장삼봉 진인이었다면, 상대가 어떤 수를 썼는지 침착하게 읽고는 거기에 맞춰서 무쌍패의 조화를 다시 무위전변으로 조정했을 것이다. 제천대성이 내게 미숙하다고 조롱한 것은, 제천대성의 속내를 섣불리 판단하고 그의 속임수를 냉철히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야생의 세계에서 살기를 없애고 자신의 힘에 강약의 완급을 두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능력이었다. 그런 야생의 세계, 요마귀혼이 난무하는 세계를 제패하고 요괴왕의 자리에 오른 제천대성이 무쌍패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제천대성이 천재적인 전투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나는 피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제천대성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 당신과 목숨 걸고 싸우고 싶습니다.”
진심이다.
이 자리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무쌍패를 발휘하며 다시 제천대성과 겨뤄보고 싶다. 그것은 십여 년간 죽어라 무쌍패를 수련해온 자로서의 오기이자 무인의 호승심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하면 되지? 지금 설마 목숨을 안 걸고 있었냐?”
제천대성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지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걸 걸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난 죽으면 안 됩니다.”
“흐음….”
“부탁입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우린 천계에 반역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여의봉을 출수할 것 같던 제천대성이 눈에 흥미로운 기색을 띄웠다. 그는 여의봉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너희가 안에서 훔쳐간 화요 내놔. 그럼 진정성을 믿어 주지.”
“그러지요. 동료들을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거 참 말 많네. 빨리 내놔.”
휘익!
내가 곧장 목갑에서 화요를 꺼내서 던져주자, 제천대성은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방금 천계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는데 수호자 공공이라는 아저씨가 봉인을 풀고 탈주해 버렸대. 그것도 네가 한 짓이냐?”
“그렇습니다.”
“신통방통한 놈일세. 신화시대의 저주를 풀 능력도 있단 말인가?”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제천대성이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 좀 풀어봐. 아는 거 다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안 나서도 너희는 어차피 천계에 찍혀서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도와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들어보고.”
“그럼…, 쿨럭.”
나는 품에서 흑요석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다가 전신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기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역시 방금 전 제천대성에게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풀썩 무릎을 꿇자 제천대성이 말했다.
“죽겠냐? 죽으면 뭐 죽는 대로.”
“컥…, 안 죽습니다…. 이걸….”
나는 오기로 버텨내면서 삶을 부지하려고 애썼다. 모든 내공을 생명력 회복을 위해 퍼부으면서 살려고 했다. 상태가 계속 악화되는 중이라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내가 흑요석을 주자 제천대성은 잠시 후 기억을 전송받고는 황당해했다.
“아니, 이건…, 뭔….”
“…길게 설명드릴 시간… 없습니다.”
나는 흐릿한 눈을 떠서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화요는 가지셔도 되니…, 제발 북방의 싸움에 한 손을 빌려주십시오….”
“…….”
제천대성이 갑자기 성질을 냈다.
“제길! 일이 꼬였잖아.”
“네…?”
“니가 흑요석 기억 주고 있을 때 난 임무수행중이라 천계와 모든 신통력을 열어놓고 통신 중이었단 말이다! 아 제기랄! 다른 때라면 괜찮았을 건데 하필이면 그 때….”
“…어….”
쿠구구궁
그 때였다.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천지간에 어둠이 가득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 황색 기운이 가득 흐르더니 신령 스러운 오색구름이 갑자기 나타났고, 구름의 계단이 땅까지 내려왔다.
[칙령이다.]
잠시 후 구름 너머의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소리가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인간 백웅의 옥황상제(玉皇上帝) 알현을 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