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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한 가지 방법?
“망량선사에게 다시 인과율을 갚는 것이다.”
“뭣!”
“넌 24번째 삶의 막바지에 망량선사에게 인과율을 바쳤고, 그 대가로 네 [특이점]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 때문에 지금 성좌의 이변이 일어나며 '적'이 다가올 위기에 처했지. 망량선사에게 빚을 진 대가를 상환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으니, 빚을 다른 방법으로 빨리 상환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특이점]이 종래에 다가오는 건 막을 수가 없겠지만 그 속도는 늦출 수 있을 거야.”
“무슨 소리지? 난 이미 놈에게 인과율을 바쳤는데 갚는다는 게 가능해?”
내가 제갈부의 말에 혼란스러워서 되묻자, 제갈부가 말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나쁠 건 없겠지.”
“…….”
제갈사가 큭큭 웃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거군. 겸사겸사 수수께끼투성이인 망량선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는 거고. 받아들이든 아니든 이쪽은 실익 혹은 단서를 얻을 수 있어서 이득인 거겠지.”
제갈부가 힐끔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아마 이 생각은 했을 텐데?”
“했지. 하지만 백웅이 이번 생에 스스로 강해져서 절대지경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한 이상 쓸데없이 다시 보물을 모으는 잡스러운 동선(動線)을 짜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사실 백웅에게 있어서는 시간낭비라고 할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계책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결국 무의미할 확률이 높으니까.”
제갈사의 말이 맞는지 제갈부가 잠시 움찔하다가 반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도해 볼만한 계책이다.”
“그야 그렇지. 해방 금요를 손에 넣었으니까.”
제갈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백웅, 네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 제갈부의 헌책을 받아들이겠나?”
“으음….”
“제갈부의 계책은 기껏 얻은 해방칠요를 인과율 상환에 바친다는 게 전제가 된다. 그 점을 유념하고 결정해라. 난 개인적으로 찬성이든 반대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만.”
“…….”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 말은 제갈사는 현재 인과율의 상환 자체를 중요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의 시점은 여전히 내가 절대지경에 오르는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사실 꼼수에 있어서는 제갈사가 제갈부보다 나으면 나았지 덜하지 않겠지만 기존의 자세를 견지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혼란을 겪지 않게끔 하려는 책사로써의 배려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해 볼만 한 거 같아. 하지만 지금은 하지 않겠어.”
“왜지?”
“만일 계책이 성공해서 인과율의 상환이 성공하게 되면 해방 금요를 잃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아라사 제국에서 싸우게 될 마왕급 존재 두 명을 상대로 불리할거야.”
“동료를 잃기 싫다 그거군.”
“그래.”
전체적으로 내 전생의 회차를 줄인다는 점에서는 사실 제갈부의 계책이 성공하는 게 훨씬 좋다. 설령 아라사 제국의 팔부신중과 싸워서 패배한다고 해도 인과율의 상환이 성공한다면 나는 좀 더 여유롭게 죽음과 삶을 반복하면서 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 전생자인 나를 위해서 현재의 동료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니, 나는 그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해방 금요를 갖고 있으면 어쩌면 사상자 없이 적을 쓰러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사 제국에서 결전을 치르고 난 후에 시도해도 늦진 않다고 생각해.”
“그래? 늦지 않다고?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적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데 언제 쳐들어올지 어떻게 확신한다는 거냐? 당장 내일 특이점이 찾아와서 널 찢어발길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맞는 말이라서 나는 찔끔했지만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윽…. 하지만 왠지 당장은 안 올 거 같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서 오지 않겠어?”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놈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어떻게 아나? 지금도 이미 그 정도 힘을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지.”
“…….”
“감이란 거군. 큭큭. 아주 좋아.”
제갈사는 킬킬 웃더니 말했다.
“그럼 주군의 뜻에 맞춰서 계획을 수정하자고.”
우리는 일단 보물을 좀 더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전력을 강화시켜야 하는데다가 모아놓은 보물을 아라사 제국의 전투 이후에 제갈부의 계책대로 망량선사에게 인과율 상환에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화요부터다. 해방금요의 힘을 빌려 화요의 결계를 깨고 화요를 획득한 후 화룡신검까지 같이 얻는다. 하는 김에 전국옥새 등 황궁의 보물도 다 손에 넣는 게 좋겠군.”
“칠요를 막 얻는 게 신격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까?”
“어차피 흉신이 전면에 나설 게 확실시되었는데 무슨 상관이냐? 직접 칠요를 모아서 칠요의 시련에 도전하는 걸 경계하는 게 아니라면, 칠요 그 자체에는 삼황오제의 휴전약속이라는 의미밖에 없어. 정작 흉신을 위시한 서방의 [옛 지배자] 측에서 조약을 깰 의사가 있는 거라면 이제 와서 천계나 삼황오제가 칠요에 신경 쓸 여력은 없다.”
“흐음.”
“그것도 일단 해방을 시키지 않고 소유만 한다면 더더욱 간섭당할 확률은 줄어들겠지. 백웅 너의 이번 생을 포기한다는 전제하라면 한 번에 해방시켜버리는 것도 가능해.”
“제천대성이 문제인데.”
“그래, 그 원숭이가 천계의 투선이니, 아마 예전처럼 화요의 결계가 외력으로 깨질 때 바로 나타나겠지. 게다가 칠요성애자니까 더더욱 성가셔.”
제갈사가 히죽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놈은 주군의 화려한 말빨로 구워삶아 보라고. 아니면 미친 척하고 흑요석을 줘. 그 수밖에 없다.”
“…….”
“한 번 했는데 두 번도 되지 않겠냐? 정 안되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해치우던가.”
“제길, 말이 쉽지….”
예전에 제천대성을 아군으로 받아들인 건 순전히 운이었다. 내가 목숨 걸고 그를 진심으로 설득하려고 나섰는데, 운이 좋아서 제천대성이 날 도와주려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설득한다고 해서 그를 멈출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아가리 놀리지 말라고 여의봉에 맞고 머리통이 터질 수도 있었다.
제갈사가 힐끔 천우진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월요가 신경 쓰이는군. 지금 당장 움직여서 마니산 첨성단에 있는 월요의 소재와 근처동향을, 천우진 네가 파악해 줘야겠다.”
“십이율주가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원래라면 짜증을 냈을 천우진이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반문할 뿐이었다. 쓸데없는 걸로 괜히 버럭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내가 십이율주였다면 움직였겠지. 아직 월요의 소유권이 누군가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화요보다 월요의 획득을 우선하여 움직인다.”
“잠깐만 기다려라. 한 식경이면 확인 가능하다.”
파밧
천우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한 식경 후, 천우진이 다시 장내에 나타나서는 말했다.
“없다. 그리고 강화도 일대는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수호자]는?”
“흔적도 없더군. 아마 소멸된 듯하다.”
“역시…. 그 때 돌아가자마자 십이율주가 월요를 회수해버린 거였군. 그럼 어쩔 수 없지.”
제갈사가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움직이자. 한시가 급하다.”
파앗!!
우리는 우선 황궁으로 가서 황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보물을 획득했다. 제갈부가 애초에 황궁의 간부였기 때문에 다른 때와는 달리 일부러 잠입할 필요도 없었으며 느긋하게 전국옥새, 초상기인 등을 얻어냈다. 나는 제갈부에게 물었다.
“연금술사는 왜 안 보이지?”
그러자 제갈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놈은 몇 년 전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황궁을 떠났다. 그 이후의 행방은 나도 모른다.”
“…그거, 위험하지 않나? 연금술사가 그랬던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아마 나도 모르게 아버지 제갈유룡이 뭔가 꾸미고 있는 거겠지.”
“짐작 가는 거 있어?”
“없다. 알았다면 일부러 네게 흑요석을 받으려고 찾아가진 않았겠지. 아버지에 대한 불신도 널 찾아간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겠군.
나는 수긍한 후 황궁 지하에 있던 전국옥새를 얻어냈다. 그리고 전국옥새의 소유주가 된 후 말했다.
“전국옥새여. 제갈유룡은 어디 있는가?”
전국옥새의 검색능력으로 숨어있는 흑막인 제갈유룡을 찾아본다!
[검색 중….]
잠시 후 전국옥새가 대답했다.
[동위체(同位體)가 총 1,283 개체 검색되었습니다. 더 검색하시겠습니까?]
“…….”
역시 팔괘의 지식으로 만들어낸 복제 몸뚱이가 너무 많아서 제갈유룡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려웠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국옥새에게 물어봤다.
“놈의 본체, 그러니까 영혼을 가진 놈만 찾을 수는 없어?”
[식별 불가능합니다. 모든 동위체에 인공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길…. 그럼 일단 중원지도에 놈의 동위체가 존재하는 장소를 표시해 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피잇!
잠시 후 눈앞의 반투명한 중원지도에 제갈유룡의 몸뚱이가 점으로 표시되었다. 나는 그 점을 주의 깊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예전에 봤던 제갈유룡의 거점 위치와 다른 점은 없군….’
또한 거점 바깥으로 나와 있는 별개의 점도 없다. 제갈유룡은 아마 거점 중 한 군데에서 은거하고 있으리라. 지금 당장 움직여서 제갈유룡의 거점을 하나하나 때려 부수며 제갈유룡의 모가지를 벨 수도 있겠지만, 제갈유룡을 완전 소멸시킬 수 없는 이상 무의미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시 검색하지. 연금술사 생 제르맹의 위치를 알아내라.”
피빗!
역시 예전에 검색했듯이 두 명의 생 제르맹이 검색에 떴다. 나는 한 쪽이 ‘인간’이자 진짜 생 제르맹이며, 다른 쪽이 황궁의 연금술사이며 ‘호문클루스’인 생 제르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 생 제르맹은 서방에 있었고 가짜는 제갈유룡의 거점 중 한 군데에 거처하는 것으로 보였다.
‘본체 제갈유룡은 당연히 가짜 생 제르맹과 함께 있는 거겠지.’
제갈유룡과 연금술사가 둘이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내가 전국옥새로 알아낸 사실을 제갈사에게 이야기하자, 초상기인으로 몸을 갈아탄 제갈사가 말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제갈유룡의 모든 본거지를 오늘 내에 다 때려 부수고 연금술사를 포획한다.”
“그래도 돼? 괜히 제갈유룡만 자극하는 건….”
제갈사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이제 황궁세력을 접수했으니 놈의 움직임을 신경 쓸 이유도 사라졌어. 적의 강력한 간부였던 제갈부는 우리 편이 된 데다, 흉신에 비하면 제갈유룡은 잔챙이에 불과하니, 괜히 헛수작 부리게 놔두는 게 더 귀찮겠지? 부활하고 싶으면 부활하라고 그래. 화요도 챙기러 가야하니 바로 최대전력으로 부수러 가자.”
“알았어.”
콰과광!!
우리는 곧장 제갈유룡의 거점 중 연금술사가 있는 곳으로 다 같이 쳐들어갔다.
“아니?!”
그리고 연금술사가 당황하는 사이에 진소청이 달려들어서 연금술사의 전신을 쏜살같이 점혈해 버렸다. 나머지는 곳곳에 있는 제갈유룡의 복제체를 때려 부쉈고 나는 전국옥새를 이용해서 남은 개체수를 확인하면서 마지막 한 놈까지 없애려 했다.
‘반격이 없군.’
제갈유룡이 임의로 복제체를 움직여서 반격하려 할 법도 했지만 인형들은 그저 눈을 감은 채 파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단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본체가 여기에 없기 때문에 굳이 반격하지 않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튄 것 같군….”
예전보다 훨씬 기민하고 빠른 도주였다. 아무래도 내가 과거 전생에 천우진과 단 둘이서 쳐들어갔을 때는 반격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아군 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깨닫고 철저히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친 듯 했다.
“예상했던 거 아니냐? 연금술사는 나한테 넘겨 줘.”
내가 제갈사에게 축 늘어진 연금술사를 넘겨주자 제갈사가 말했다.
“팽조와 연금술사는 내가 고문하며 정보를 알아내면 된다. 일단 나머지 거점을 다 부수자.”
“그러지.”
콰과광
우리는 제갈유룡의 거점을 그 날 한나절에 걸쳐서 다 박살냈다. 본체를 잡지는 못했지만 이로써 제갈유룡은 큰 기반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섣불리 우리 일에 끼어들지 못할 게 분명할 정도로 약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제갈유룡의 거점을 부수는 게 끝나자마자 나는 상관가문의 지하로 가서 전시안을 시전했다. 전시안을 쓰자 암천향 봉인결계에 엽편처럼 조각나 있던 화룡신검이 보였고, 전시안의 힘으로 화룡신검에 접촉해서 꺼낼 수 있었다.
‘음신지력이 강해져서 그런가? 별로 예전처럼 아프진 않군….’
화룡신검을 얻어낸 우리는 남쪽 대륙으로 갔다. 나는 음신지력을 끌어올리며 해방 금요를 손에 들고 강력한 힘을 끌어내려 했다.
우우우웅!!
“으윽…!!”
손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음신지력으로 제어를 하고 있는데도 금요가 본격적으로 해방된 힘을 내뿜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자 금요에 응축되어 있던 힘을 그대로 화요의 결계로 내뿜었다.
꽈과광!!
완전히 파괴된 건 아니었으나 결계에 명백히 큰 균열이 일어난 게 육안으로 보였다. 나는 한 번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음신지력을 끌어내서 금요의 광선을 발사했다.
후두둑….
“됐어.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균열은 생겼군. 빨리 비등으로 들어가서 화요와 용화수를 다 갖고 나와라.”
“알았어.”
파밧
나는 화요결계 내부로 이동해서 곧장 복숭아나무의 나무 등걸을 잘라서 용화수의 씨앗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화요에 화룡신검을 접촉시켜서 여동빈을 불러서 응축된 화기를 이용해서 화룡신검을 회복시키게 부탁했다.
우웅!
나는 그 작업이 끝나자마자 화요를 손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예상했던 장애물이 등장했다.
쿠콰콰쾅!!
갑자기 벽을 깨부수면서 거대한 거인이 대검을 들고 나타났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거인은 크게 포효했다.
[감히 잔머리를 굴려서 비보(秘寶)를 훔치려 하다니! 나 공공, 화요의 수호자로서 네놈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처형하겠다!!]
역시!
예전에도 똑같은 방법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내가 전욱의 사도가 되어 있었고 모든 사전허락을 맡고 왔기에 공공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화요봉인지에 찾아왔기에 공공은 격렬히 분노한 것이다!
‘비등이 안 써져.’
아무래도 공공이 자신의 힘을 발휘해서 순간이동 능력을 막아놓은 게 분명했다.
스르릉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만일에 저 자와 싸운다면 그 전투를 십연전에 넣을 수 있을까요?”
내 중얼거림에 이미 강림해서 내 배후에 있던 여동빈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인정해주지…. 한 번 싸워볼 텐가?]
“아뇨. 제게 지금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냥 한 번 물어봤습니다.”
[…그렇겠군.]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나는 천계의 투선이며 저 자는 삼황오제의 명을 받아 칠요를 지키는 문지기. 넓게 보면 같은 소속이니 그와 싸우는 걸 도와줄 명분이 존재치 않는다.]
역시 그렇게 되겠군.
마찬가지로 투선이었던 예 또한 예전에 적궁백시로 화요의 결계를 뚫다가 말고 제천대성의 이야기를 듣자 곧장 돌아서서 강림해있던 나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일이 생각나서 여동빈에게 물었다.
“제 행동이 천계에 대한 반역이라 생각하십니까? 절 신열로 죽이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천계에 그 정도의 의리는 없다.]
“…….”
[그대, 장삼봉을 부르지 말라. 그에게 공연히 고뇌케 하지 말라. 그는 순수한 무인일지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스스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여동빈을 돌려보냈다. 여동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공공과 마주한 상태에서 불러봤는데 역시 그는 별다른 의욕이 없었다. 아마 투선 예처럼 천계에서 지키는 금지(禁地)에 침입한 인간에게 분노해서 죽이려 드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적어도 여동빈은 그 정도로 천계에 충성을 바치고 있진 않은 것이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여동빈은 천계에 충성심이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천계에 충성하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의 목적은 뭐지…?’
여동빈의 대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무신과 한 번이라도 접촉할 수밖에 없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공공에게 말했다.
“잠깐, 공공이여!!”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은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향해 히죽 웃었다.
“난 당신에게 새겨진 축융의 주박을 풀어줄 수 있소. 그 대신에 내 편이 되시오.”
[……?!]
잠시 후 나는 공공을 구워삶아서 화룡신검에 깃든 화룡진인의 힘을 빌려 공공의 주박봉인을 풀어버렸다. 자유의 몸이 된 공공은 놀라운 듯 자신의 몸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고, 고맙다.]
“방금 했던 약속 잊지 말아주십시오.”
[물론이다. 네가 팔부신중과 싸우는 일을 도와주겠다.]
“별 말씀을. 그럼 저랑 바깥에 좀 나가주십….”
[난 바쁘다!! 주군 염제께 갔다 오겠다.]
콰앙
“…….”
공공은 내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심 그를 욕했다.
‘개새끼…. 말 진짜 안 듣네!’
정해진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바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결계 바깥에는 동료들이 하나의 존재를 포위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익히 알고 있던 제천대성이 서 있었다. 화요의 결계가 파괴되자 천계에서 제천대성을 내려 보내서 침입자를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아 저기….”
제천대성은 결계 안에서 나온 나를 발견하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어, 반가워! 그리고 죽어 이 도둑놈 새끼야!”
콰과광
곧장 여의봉이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내 옆구리를 후려쳤다. 나는 급히 무충화경을 이용해서 그 파괴력을 흘려내면서 삼보절기 및 온갖 절학을 동원했는데, 그러고도 여의봉의 파괴력을 이기지 못해서 근처 돌산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커허억…!!”
나는 순식간에 눈앞에 별이 보이면서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문답무용이구나! 으윽….’
생각했던 중 최악의 경우였다. 얘기할 틈이라도 준다면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지만 제천대성은 주범으로 판단된 나를 일단 죽여 놓고 생각하려는 것이다!
팽조와 싸울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강한 일격이었고, 전신이 납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워낙 여의봉에 담긴 물리력이 압도적이라서 백만 근의 힘을 흘려보내는 무예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버린 것이었다. 전신의 뼈와 살이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기랄! 무쌍패를 쓰기에는 너무 찰나였어.’
제천대성이 내 말을 몇 마디 정도는 들어줄 거라 생각했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무쌍패를 완전히 숙련했다고 보기 힘든지라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급히 쓸 수는 있겠지만 무쌍패는 양날의 검인지라 펼치는 것 자체가 생사를 건 모험인 것이다.
‘공공 개새끼…. 같이 좀 나와 줬으면….’
어떻게든 말할 틈은 벌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내고 있을 때 제천대성이 뛰어오르며 나를 재차 공격하려 했다.
“막아!!”
동료들이 사력을 다해서 제천대성에게 덤벼들어서 막으려 했다.
“오호, 합공이냐? 나도 합공 좀 할 줄 알지!”
후욱
비아냥거리던 제천대성은 머리털 한 움큼을 뽑더니 훅 불어서 그대로 분신술을 시전했다.
퍼퍼퍼펑
제천대성의 분신들이 곧장 동료들에게 두당 두 마리씩 달라붙어서 역공을 가했다. 그러자 아군들 중 최강수준인 진소청, 천우진 등은 어떻게든 버티는 기색이었지만 나머지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려서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크윽.”
“이런.”
무영검제나 독고성 등이 강력한 검강을 내뿜으며 분신들을 베려 했지만 그들 또한 제천대성 분신의 합공에 삼 초 내에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의외로 잘 싸우는 건 미호였는데, 그녀의 여우 불꽃이 분신술에는 상극인 듯, 순식간에 분신을 불태우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있었다.
빠악
“크어억….”
이윽고 무영검제가 원숭이 분신의 발차기에 갈비뼈를 얻어맞고 주저앉는 게 눈에 보였다.
철썩 철썩
잠시 후 그는 원숭이한테 멱살을 잡힌 채 뺨을 맞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무영검제는 강호무림에서 손꼽히는 초고수였으나 제천대성의 분신술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제천대성의 분신술, 너무 강력한 술법이다!
분신술을 쓰는 놈은 몇 명 본 적 있었지만, 그의 분신술은 차원을 달리하는 위력이었다. 저만한 숫자의 분신을 쓰면서도 분신 하나하나의 위력이 굉장히 높았다.
그나마 저것도 전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예전에 월요의 수호자를 쓰러뜨릴 때 제천대성이 수백 이상의 분신을 소환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최강의 투선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힘이었고, 적이 될 때는 그 이상 무서워질 수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바위산에서 몸을 일으킨 후 태극권의 자세를 잡았다.
‘할 수밖에 없어!’
대화가 통할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버티면서 제천대성이 날 인정하게 하는 수밖에!
내 자세를 본 제천대성이 껄껄 웃으며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하하하, 장삼봉 아저씨의 기술을 쓰려고 하는군? 재밌겠어.”
그는 손을 번쩍 들더니 눈빛에 흉광을 일으켰다. 그의 팔에 근육이 울룩불룩거리며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그의 주먹이 철권(鐵拳)처럼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나, 한 번쯤 그거 정면으로 깨보고 싶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