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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팽조는 손이 잘려나간 직후 입을 달싹이며 기묘한 고대의 주문을 외웠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주변에 여섯 개의 기둥이 소환되었고, 백련교주는 물론이고 삼대호법사자들의 공격이 단번에 튕겨나갔다. 팽조는 분노한 듯 거세게 소리질렀다.
[ 이 곳을 내 거점으로 삼으려 했건만 이제 필요없다! 다 죽여주마!]
위이이잉
기둥에서 고대의 글자가 튀어나와서 사방으로 산발했다. 본래라면 그 공격을 삼보절기로 피하면서 접근할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나는 어쩐지 저 글자를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런 주술공격을 검기나 검강으로 베는 건 본디 불가능한 일이지만 왜인지 지금의 나라면 그게 가능할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 참(一斬)!
정신을 모아서 전신의 근육을 짜내듯 내려친 한 번의 참격이었다. 내 공격은 그대로 눈앞의 모든 장애물을 뚫고 기둥을 강타했고, 기둥은 짧은 폭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놀랍게도 정말로 주술을 검으로 베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팽조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나는 그의 일 보 앞까지 전진해서 그대로 팽조를 베었다.
쥬웅
기묘한 소리와 함께 시공간이 크게 뒤틀렸다. 이 왜곡은 굴공참의 공간왜곡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으로, 신의 후예인 팽조의 권능으로 공간이 뒤틀리는 것이었다. 무공으로 만들어내는 사소한 왜곡과는 달리 팽조의 권능은 내 공격을 통째로 없애버리고는 도리어 거력을 담은 팔으로 내 머리통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 지난번에 이것 때문에 팽조한테 밀리기만 했었지.'
완전히 헛점을 노렸는데도 단번에 반격해버리는 사기적인 신성!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 공격에 허둥대며 피할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곧장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면서 지난 십 년간 노력해왔던 걸 생각했다.
터엉
뺨이 에리긴 했지만 나는 그대로 팽조의 공격을 맞고도 멀쩡하게 몸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심지어 머리통이 울리는 타격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 거인에 가까운 팽조의 괴력을 화경(化經)으로 흘려넘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호인들이 전설적으로 여기는 경지인 화경의 극치, 무충화경(無衝化經)이었고 화경을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크게 제거한 기술이었다.
지지징
내가 기세를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청운검을 휘두르자 검강의 잔영이 무려 열 개나 남았다. 청운검은 검기나 검강의 잔영을 남겨 실제와 같은 타격을 주는 능력이 있는 공격보패였으므로, 팽조가 아무리 강력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도 베이고 말 것이다.
[ 헉... 이런..]
꽈앙!!
팽조는 당황했는지 허우적거렸으나 때는 늦어서 내 공격이 크게 팽조를 타격했다. 내가 노린 건 팔괘자수선의가 감쌀 수 없는 목 부분이었으나 그 부분도 사실 팔괘자수선의의 방어력이 적용되는 듯 둔탁하고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방어가 깨져버린 듯 팽조의 목 위에 투명한 구체가 떠올랐다가 마치 유리처럼 깨져서 떨어졌다. 청운검에 내 내공, 그리고 음신지력의 보조효과까지 받쳐줬기 때문에 팔괘자수선의의 방어력으로도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의 맹공을 받으면서 약해진 탓도 있으리라.
휘청거리는 팽조는 빈틈투성이였다. 나는 그대로 팽조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고, 순간 팽조가 거세게 외쳤다.
[ 잠깐!! 항복하겠...]
푸콱!!
나는 검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팽조의 목을 베어서 날려버렸다. 하늘에 뜬 팽조의 목은 잠시 날아가더니 땅에 퉁퉁거리며 굴러다녔다.
' 좋아, 이겼다.'
기습공격으로 이기긴 했지만 역시 팔괘자수선의만 깨면 팽조 자체는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닌 것이다. 놈이 금요의 힘을 제대로 살리는 상태에서 정면으로 붙었다면 힘들었겠지만, 상황을 적절히 만들어나가는 것도 실력이었다.
덥석
나는 팽조를 척살하자마자 그의 목을 잡아채서 목갑에 집어넣었다. 내 등뒤에서는 주인잃은 팽조의 몸뚱이가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비틀거리는 광경이 꽤나 기괴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팽조는 신의 현손인데다 대라신선이라서 목을 벤다고 바로 죽진 않는다. 목을 베어도 하루 정도는 살아있으리라. 그리고 아군에 이혼대법의 달인인 제갈사가 있었으니 목만 있어도 살려두고 고문하는 게 가능했다.
남은 건 보패 팔괘자수선의와 금요를 회수하고 남해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내가 목갑에 팽조의 목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리자, 백련교주가 말을 걸어왔다.
[ 대단한 실력이군. 아직까지 절대지경이 아닌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군요."
[ ... 나름대로의 자격지심인가? 그런 점도 마음에 드는군.]
" 교주. 팽조 토벌전은 일차적으로 끝났습니다. 마무리를 도와주십시오."
[ 아니. 아직인 듯 하다...]
" 네?"
쿠구구구구...
그 때 바다 밑에서 시꺼먼 물방울이 끓어오르듯 무수히 떠올랐다. 뽀글거리며 기이한 소리가 해저(海底)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잠시 후 커다란 파도와 함께 무언가가 수면으로 튀어나왔다.
쿠르릉!!
" 앗, 화호초가!!"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보패 화호초가 완전히 부숴졌다!! 게다가 부숴진 화호초를 통째로 들고 무언가가 몸을 솟구치고 있었는데, 그건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 아닌 이형(異形)의 존재였다. 팔이 무려 6개나 되는데다가 3개의 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 괴물은 6개의 팔 중에 하나를 뻗어서 화호초를 들고 있었는데 대단한 괴력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화호초의 크기와 무게는 거대함선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 흐음...]
쿠릉...
이윽고 허공에 떠 있던 놈은 화호초를 다시 바다로 내던졌고 파도가 다시 격렬하게 요동쳤다. 놈은 아까 봤던 금색 날개인간의 멱살을 잡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금요로 소환된 존재를 바다 밑에서 제압해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저 막강해보이는 존재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아수라!! 팽조는 제압되었소! 이제 우리 모두 물러날 때가 된 것이오!"
저건 아까 우리를 가로막았던 천축의 절대고수 파순의 진짜 정체, 팔부신중 아수라였다. 놈은 인간형을 버리고 본체로 되돌아가서 순식간에 보패 화호초를 파괴하고 금요로 특수소환된 새벽의 명성을 때려눕힌 것이다.
물론 저 전투력은 팽조 따위와는 격을 달리했으므로 나는 가급적 아수라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팽조의 힘으로 튼튼하기 짝이없는 거대보패 화호초를 단숨에 부수거나 사도급 존재를 일격에 제압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저 놈은 삼황오제를 제외하고 지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적수 중에서 최강급의 신적존재였다.
' 저 새끼는 괴물이야. 제발...'
팔부신중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투파 마왕과 싸웠다가는 끝장이다.
아수라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 팽조가 죽었으니 금요를 누가 가지느냐는 문제가 남았구나. 그렇지 않은가?]
" ......!!"
역시 칠요에 욕심을 부리는가?!
나는 일전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눈이 캄캄해졌지만 잠시 후 아수라의 말이 이어졌다.
[ 하지만 나는 거기엔 별 관심이 없다. 원한다면 백웅 네가 가져라.]
" 헉!"
아니 진심인가?!
' 와!'
그냥 칠요도 아니고 해방상태의 칠요인데 그냥 소유권분쟁을 포기한다고?!
욕심이 저렇게 없다니?!
나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서 들뜨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어진 아수라의 말에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 ... 하지만 금요는 포기해도 무신에게 향하는 길은 포기할 수 없지.]
" ......"
[ 백웅, 네가 금요를 얻고싶다면 네게 협력해주겠다. 그 대신에 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무신을 만날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안돼...!!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 그, 그건 다음에 말씀드리겠다 말했소."
[ 왜 굳이 다음으로 미뤄야 하지? 해방칠요를 얻게 도와주는 대가라면 도리어 싼 게 아닌가?]
싼 게 맞다.
하지만 무신을 만나게 해준다는 게 뻥이었으니까 그렇지!
이 자리만 넘기면 아수라를 구워삶을 계책을 생각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정공법으로 바로 해결을 요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 맞다! 팽조에게 받을 보수가 있다고 했소. 내가 그 보수를 찾아내서 넘겨드리겠소."
[ 보수는 이미 받았다.]
아수라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자기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는 금빛 날개인간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 이건 '새벽의 명성'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고대의 존재. 천상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던 놈이다. 지금은 존재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본래 힘의 2할도 쓰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고위존재다. 나는 이 놈을 잡아먹고 더욱 힘을 키울 것이다.]
" ......"
[ 팽조가 내게 보수로 이 놈을 먹이로 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화호초를 부수면서 끼어든 건가?!
아수라는 두 개의 팔으로 팔짱을 꼈다.
[ 해방칠요까지 얻는다면 난 천하무적이 되겠지만, 네가 무신으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다고 하니 특별히 인심써서 칠요는 주겠다. 그러니 빨리 그 방법을 말해라!]
아수라는 진심으로 양보를 한다는 기색이었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좋은 교환조건은 있을 수가 없었으리라. 세상에 고위존재가 해방칠요를 필멸자에게 양보하는 건 처음 본 것이다! 삼황오제조차 탐내는 물건일진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그러나 나는 애초에 뻥을 친 상태였으므로 도저히 아수라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으아, 울고 싶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넘길 방법이 없을까?
' 아 그래!!'
나는 미친듯이 머리를 회전시키던 중 문득 좋은 방법이 생각나서 말했다.
" 무신을 만나는 방법... 그것은 바로 백련교의 사대신기(四大神器)를 모두 모으는 것이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밀고나간다!
[ ......?!]
흠칫
그 순간 아수라는 물론이고 은근슬쩍 열심히 듣고 있던 백련교주까지 크게 놀란 듯 주춤거렸다. 그리고 아수라가 곤혹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 아니... 그건... 분명히 야차의 임무였을 터. 내가 이제 와서 그녀의 일에 끼어들 수는...]
" 야차의 임무라고? 그녀가 백련교 사대신기에 관여했소?"
[ ......]
아수라는 침묵했다. 나는 그 반응을 보자 내심 확신할 수 있었다.
' 아수라는 사대신기에 대해 뭔가 알고 있어! 어쩌면 그 행방도!'
아예 모른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수는 없다. 아무래도 창힐의 명령을 받은 야차가 백련교 사대신기에 관련해서 무언가 음모를 꾸몄고, 아수라는 동료인 만큼 그게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아수라가 말했다.
[ 확실한가? 정말로 사대신기를 모으면 무신과 만날 수 있나?]
" 그렇소!"
나는 이왕 뻥을 친 김에 그럴듯하게 믿을 수 있게끔 하려고 머리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 무신을 처음으로 만나는 조건은 불명확하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오. 그래서 무신을 만나고싶다면 따로 찾아내야한다는 생각에 나는 여러 방법을 찾아보았는데, 그러던 중 백련교와 무신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냈소!! 무신이 사대신기에 자신을 만날 단서를 남겼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오."
전부 다 뻥이다!
내가 그냥 지어낸 거다!
그치만 속아 넘어가 줘!
[ 오오...!!]
아수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인지 자신의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듣고 있던 백련교주가 참지 못했는지 급히 끼어들었다.
[ ... 백웅!! 처음 듣는 얘기군!! 설마 그게 신녀의 예언인가?!]
" ......"
[ 미륵과 진공가향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히익!
백련교주가 쓸데없는 말 하면 다 들통날 건데!!
나는 속으로 간이 쪼그라들만큼 찔끔하면서도 얼굴은 태연하게 둘러대었다.
" 교주! 안 그래도 교주께 하려 했던 말이었습니다. 일단 계속 들으시지요."
[ 으으음...!!]
" 아수라여. 내게 지금 금요를 양보해준다면 앞으로 우리는 좀 더 협력적인 관계를 쌓는 게 가능할 것이오. 사대신기는 외우주의 혼돈 속으로 사라진 것 같기에 현재로써 그 행방은 오리무중! 하지만 당신과 우리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 시간과 노력을 아껴서 빠르게 사대신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 .......]
아수라는 깊은 침묵을 하며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 이봐! 다들 속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구 저편에서 홀연히 나타나서는 금세 삼사(三師)와 함께 걸어와 있었다. 장내에 나타난 개탈을 입은 사나이는 은하구절편을 든 채 내게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백웅. 넌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이지?"
십이율주 하은천이 장내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