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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이건… 심각하다.
확실히 인간의 것이 아니다. 공포마저 느껴진다.
‘그런 거라면…, 절대지경의 위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그만한 수련의 제약이 붙는다면….’
무쌍패와는 다른 형태의 절대방어가 가능하다!
그것도 무쌍패와는 달리 실패할 경우의 제약도 없다!
내가 천의무봉의 심각성을 깨닫고 멍하니 서 있자 진소청이 먼하늘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도 율주의 천의무봉을 뚫을 자신은 없지만, 그 자리에서 도발했던 이유는 그의 천의무봉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쓰러뜨릴 수 없소.”
“그랬구려.”
십이율주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그토록 비인간적인 절대경지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걸까?
‘어찌됐든 삼대세력의 주인들은 전부 괴물들이군….’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됐소. 슬슬 준비해서 쳐들어갑시다.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한 번 행동하는 것만 못할 것이오.”
“알았소.”
다음 날, 백련교주의 사자로 용비천이 찾아왔다. 용비천은 백련교주가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고, 나는 용비천에게 공격이 내일이라는 사실과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용비천은 백련교주에게 복귀하러 갔다.
그 날 저녁 망량과 함께 미호, 천우진이 찾아왔다. 그들 모두가 내일의 공격에 참여하려고 바삐 달려와 준 것이다. 나는 그들 중 누구도 별로 나이 먹은 기색이 없는 걸 보자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미호가 말했다.
“백웅. 팽조를 죽이기에는 아직 전력이 다 갖춰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이대로 공격해도 괜찮느냐? 칠요 한두 개 정도는 무리해서라도 갖고 오는 게 좋지 않았겠느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십이율주를 끌어들인 이상 월요를 억지로 가져오는 건 말도 안 되고 화요도 지금 뚫기에는 시간이 없어. 목요는 애초에 율주의 소유이며 금요는 팽조가 갖고 있으며 토요는 암천향에 있지. 갖고 있는 수요만 갖고 해결해야 해.”
“그러니까, 애초에 왜 십이율주나 백련교주를 끌어들였냔 말이다? 팽조 정도는 우리끼리 꼼수를 쓰면 쉽게 해치울 수 있는 놈인데.”
미호가 투덜거리자 나는 힐끔 제갈부를 바라보았다. 제갈부가 한걸음 앞서서 좌중에 있던 자들에게 말했다.
“그건 내 계책이다.”
“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의 간부였던 놈이 아군 책사랍시고 하는 말을 믿으라고.”
“흑요석을 받은 이상 같은 처지지.”
아무렇지도 않게 미호의 말을 받아넘긴 제갈부가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팽조를 바로 날려버릴 수 있는 계책도 갖고 있다. 팽조를 감당하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다만 이번 공격의 주된 목적은 팽조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배후의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배후의 적이라고?”
미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어떤 놈이 팽조를 조종해서 침략해 왔단 말이냐?”
“그래. 십중팔구는 그렇다.”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까? 팽조를 죽이는 것도 어려운데 생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자 제갈부가 말했다.
“아니. 조종자가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인과율의 연쇄로 인한 결과일 가능성도 높다. 팽조 본인이 조종당한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 실질적으로 배후의 적을 찾아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뭐냐 그건.”
“그래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거다.”
제갈부의 눈이 번득였다.
“…속임수에는 속임수.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해야지.”
다음 날, 남해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등을 이용해서 모든 반천맹 간부와 주요고수, 그리고 황궁의 전력을 이동시켰다. 일단 현재 제갈부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일시적으로 반천맹과 손을 잡은 것으로
제갈유룡에게 위장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황궁과의 연계도 수월했다. 어찌되었든 표면상으로는 황궁과 반천맹이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군 전력은 대략 이백여 명이었다. 생각 외로 수가 많았으며, 이 정도 전력이면 백련교나 십이율과도 한판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음 순간 명령을 내렸다.
“공격!”
타다닷!!
정예 중의 정예만 뽑아왔기에 이들 중 절정고수 이하인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황궁의 마도병들은 뛰어난 생명력과 신체능력을 갖고 있기에 전방에서 좋은 돌격수이자 방패가 되어줄 게 분명했다.
‘목표는 함대 내부!’
작전을 펼치는 지역은 대략 십 리 정도였다. 여기에서부터 전진해서 함대 내부까지 공격해 들어가고, 마도사들을 유인해내서 척살한 다음 팽조를 암살하는 게 기본적인 계획이었다. 물론 겨우 십 리 정도의 거리인데도 사방팔방에서 온갖 괴물과 총병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걸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까가강
타당!!
푸콱!!
으악 -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전투소리와 함께 총 소리와 피륙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혈무가 자욱한 가운데 기습을 감행했기 때문인지 한층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강했고 전투 또한 치열했다. 적의 총병들은 일개병사를 상대로라면 강력했지만 기습인데다가 무림고수들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총을 한 대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초절정고수들은 호신강기로 총을 다 정면에서 막아내 버리기도 했다.
나는 마물을 베며 빠르게 앞으로 전진하며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마력을 중화하는 건 잘 돼 가냐?”
“빌어먹을. 네놈도 음신지력을 잘 쓸 수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게만 시키는 거냐.”
“투덜거리지 마. 강력한 적이 나오면 내가 대신 할 테니까.”
정탐한 바에 따르면 남해항 일대에 펼쳐져 있는 자욱한 혈무(血霧)는 그 자체로 사악한 사법결계이자 마법으로, 침입자의 생명력과 이성을 빼앗는 능력이 있었다. 본래 정상적인 무림인은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이 혈무지대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군 또한 주술에 정통한 환신 천우진이 있었기에 천우진이 혈무를 술법으로 중화시키면서 아군들이 멀쩡히 싸울 수 있게 지원해주는 중이었다.
쿠쾅!!
[크르르르…. 크르르….]
그 때 시꺼먼 옷을 입은 마도사들이 항구 근처에서 출현하면서 덩치가 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마물을 데려왔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암석으로 이뤄진 것 같았지만 여기저기에 흉측한 촉수들이 융기하고 있어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물을 본 무영검제가 호기롭게 달려들며 외쳤다.
“하하! 덩치만 크면 뭘 하나!”
스칵!!
쿠궁
무영검제가 날린 검강이 소리 소문 없이 십여 장짜리 마물을 절단시켜 버렸다. 그러나 일격에 끝나버린 듯한 그 거대마물은 이윽고 쪼개진 두 조각이 각각 재생하더니, 순식간에 두 마리의 마물로 분열해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무영검제는 크게 당황했다.
“…뭣?! 어떻게 저런….”
무영검제는 당황하면서도 다시 검을 휘둘러 두 마리의 마물을 또 베어버렸지만 이번에는 네 마리가 될 뿐이었다. 물리공격이 소용없다는 걸 알아챈 무영검제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쉬리리릭!
쉬리릭!
뿐만 아니라 어두운 안개의 항구 여기저기에서 마치 빨판이 달린 촉수 같은 게 수천 개나 기어 나와서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마도(魔道)가 창궐하는 악몽 같은 장소에 온 것이었다. 이미 민간인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마물의 제물이 되어버린 듯 했다.
그러자 반인반요 형태로 변한 미호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꼬리 위에 아홉 개의 화염을 띄우며 눈을 빛냈다.
[카핫!!]
미호가 눈을 빛내는 순간 아홉 개의 화염은 회전하더니 사방에 있던 마물들을 관통하는 화염광선처럼 변했다. 폭음과 함께 마물들은 미호의 공격에 거의 전멸해 버렸고, 혈무조차도 미호의 힘에 날아가 버리는 게 느껴졌다.
‘강하다!’
내 동료들이 미호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베노 세이메이와 동맹을 맺고 음양술의 대법을 시전했다더니, 그 말 대로였다. 음신지력을 흡수하면 훨씬 더 강하겠지만, 미호 또한 가진 재료만으로도 강해지는 게 가능한 것이다.
마도사들은 마물이 당하자 몸을 액체처럼 변화시키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 때는 사마경이 기문둔갑으로 팔괘를 펼쳐서 액체를 허공에서 붙잡아 버렸다. 기문둔갑 또한 마법능력을 제어하는 공능이 있기에 마도사들의 수법에 쉽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잘 가시오.”
사마경은 손을 휘저었고, 이윽고 팔괘도의 중심에 마도사였던 액체들이 빨려 들어가서 소멸해 버렸다. 망량이나 제갈부 또한 마찬가지 방법으로 마물들을 일소했다.
십 리 중에서 오 리를 전진한 상황에서 아군이 압도적으로 밀어버리는 모양새가 나왔다. 나는 이대로라면 양대 세력의 도움이 없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내 생각을 정정하게끔 만드는 존재가 삼 리 지점에서 출현했다.
우우우우 -
그 자의 주변에는 마물도 혈무도 없었다. 단지 여덟 자루의 검을 장비한 채 길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을 뿐이었다. 마물인가 싶었지만 어디를 봐도 인간인 모습이라서 반천맹원들은 의혹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외부로 투기조차도 새어나오지 않아서 허약해 보였다.
[카아아악!!]
허약함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황궁에서 끌고 온 용인과 마인들이었다. 초절정고수에 맞먹는 신체능력을 지닌 용인과 마인이 순식간에 십여 체나 그 자에게 덤벼들었고, 그 자는 오래지 않아 찢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
푸콰콱
일섬(一殲)과 함께 십여 마리의 마도병은 그대로 수천 조각의 고기 조각으로 변해서 바람과 함께 흩날리고 말았다. 놀라운 건 그 수많은 고기 조각이 후두둑거리며 휘날리는데도 그 자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니!!”
“모두 힘을 모아 덤벼라!”
삼십여 명의 반천맹의 정예고수들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경악해서 진(陣)을 짜서 덤비려 했지만 그 순간 독고성과 무영검제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만둬라!”
“너희로는 상대가 안 된다!”
스스스
반천맹의 육대간부가 의문의 괴인을 포위하며 전심전력을 다 모으는 듯 했다. 그러나 괴인은 미동도 하지 않는데도 등곽, 독고성, 무영검제 등은 모두 전신에 땀을 송골송골 흘리는 기색이었다.
의문의 괴인이 권태로운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용병이다. 너희와 목숨 걸고 싸울 이유는 없으니, 이 뒤로 가지 않겠다면 그냥 보내주겠다.”
“…….”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괴인이 일 검을 내뻗으면 무조건 한 명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다들 직감하고 있었고, 문제는 그런 괴인의 공격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고작 혼자서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괴인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굳은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내 힘을 시험해보고 싶지만…’
나는 호승심이 끓어올라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으나 이내 발을 거두었다. 그러자 진소청이 말했다.
“잘 했소.”
“무모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본심으로는 저 자와 싸워보고 싶소….”
내가 아쉬움에 한탄하듯 말하자 진소청이 말했다.
“…아직 이 [연극]의 끝을 보지 못했소. 끝을 보기 전에 당신은 죽으면 안 되오. 그리고 당신의 첫 상대는 정해져 있지 않소?”
“음…, 저 자를 어떻게 치우느냐가 문제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저벅….
그 때, 혈무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자는 근처에 세 명의 가면 쓴 자들을 대동한 채 뒤편에 수십여 명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백련교주였고, 그는 무면탈 내부에서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군. 그대 같은 절대고수가 이 세상에 존재했단 말인가?]
“백련교주인가.”
[무례를 무릅쓰고 그대의 성명별호를 듣고 싶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천하의 백련교주가 먼저 통성명을 원하다니!
그러자 자칭 ‘용병’이라는 자는 서서히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 개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나는 파순(波旬). 천축의 지배자.”
[과연…. 명성은 들었다.]
“백련교주 그대 정도면 내 검의 이슬이 되기에 충분할 터.”
그랬다.
나타난 괴인은 바로 파순, 천축무림의 지존이자 팔부신중(八部神衆) 아수라(阿修羅)!
팔부신중 중에서 무력으로 상위권을 차지하는데다 인간의 몸으로도 천축무림을 석권한 괴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재미있군.]
파순의 말에 백련교주의 몸은 서서히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기이한 광채가 무면탈 내부에서 일렁였고, 그의 전신에서 혼돈의 역광이 일그러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혼돈과 태허가 응결되는 듯한 형상이 일순간 보인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한 수 부탁하지….]
중원최강자와 천축최강자의 일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