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02화 (80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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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그 날부터 태극권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태극권에 존재하는 24개의 형(形)을 펼치는 건 별다른 게 아니었고 24개의 동작을 펼치는 것뿐이었기에, 펼쳐내는데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수월하게 1번의 형을 펼치고 나서 힐끔 장삼봉의 환영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에 틀린 점은 없었어. 대충 하지도 않았고.’

나는 일부러 대충 펼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 엉성하게 펼쳤음에도 장삼봉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침묵만이 감돌았다.

“…….”

대충 해도 되는 거야?

첫 날은 일천 번을 펼치는데 대략 열 시진이 걸렸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정자세를 맞춰서 하는데 조금은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두 시진 정도가 남자 나는 앉아서 약간 쉬었고, 장삼봉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백웅이여. 자꾸 나를 볼 필요 없소. 이 수련에서 나는 그대를 감독하지 않을 것이고, 그대가 어떻게 태극권을 펼치든 그건 그대의 마음이오.]

“무슨 말입니까? 장 진인이 내 성취를 봐주지 않는다면 이게 어찌 수련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수련은 태극권의 자세나 잡으려는 수련이 아니오. 그대는 이미 형태를 얻는 수련을 할 단계가 아님을 스스로 알 것이오.]

장삼봉 진인이 말을 이었다.

[굳이 질문을 하려거든 타인에게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하시오.]

“무슨…,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질문도 아껴두기를 바라오. 단지 매일 일천 번 시전해야 한다는 것만 잊지 마시오.]

더 이상의 문답은 없었다. 장 진인은 말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 뿐 딱히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기색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도리어 방관하는 태도가 신경 쓰여서 괜히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라고?’

왜 그래야 하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생전 처음 겪는 경험에 나는 아리송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쨌든 잠시 쉬고 있으니 날이 밝아왔다. 나는 아침햇빛을 맞으면서 다시 태극권의 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쳇! 대충해도 상관없다면야 빨리 과제를 해치우고 남는 시간에 고급응용기술을 수련하겠어.’

시간이 아깝다!

파바밧

아무리 기본무공인 태극권이라고 해도 24개의 동작을 정자세로 펼치느냐 대충하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내가 내공을 돋우어서 초절정고수의 움직임으로 태극권을 연속해서 펼치자 채 한 식경 만에 일백 번도 넘게 할 수 있었고, 나는 얼추 이백 번을 채웠다 싶자 잠깐 멈추고 칠대절학을 다시 다듬어보기로 했다.

‘역시 장삼봉은 아무 말도 안 하네….’

정말로 방관하는 듯하다. 이렇게나 빠르게 펼쳤기 때문에 움직임은 빨라도 형태를 제대로 잡지 않은 일도 많았다. 나는 다소 안심하고는 그동안 배웠던 칠대절학 파생기 중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다듬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듬기 시작하고 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어느 새 몇 시진이 훌쩍 지나있고 하루의 종료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앗!”

젠장, 어쩔 수 없지! 빠르게 펼치는 수밖에!!

휘이이잉

나는 남은 시간동안 죽어라고 태극권의 형을 펼쳤다. 그리고 정신없이 펼치다보니 일천 번을 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여 대충 펼쳤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지 또다시 장삼봉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하루가 시작할 때 재빨리 태극권을 일천 번 펼쳐버리면 되겠군!

남는 시간에는 다른 수련이다!

파바밧!

나는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서 재빨리 태극권을 일천 번 펼치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자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일천 번을 끝내는 게 가능했고, 남는 시간은 모두 자유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흘 정도가 지났을 때, 망량이 내게 말했다.

“백웅. 그건 좀 아닌 것 같소.”

망량은 자신의 말대로 초 지방으로 떠나기 전에 나와 함께 태극권을 수련해주고 있었다. 물론 나는 마음이 급해서 빨리 펼치고 있었지만 망량은 신중하게 정자세를 잡으면서 끈질기게 천 번을 시행하고 있었다. 나는 망량을 돌아보았다.

“장삼봉 진인이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했소. 굳이 정자세를 잡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소?”

“…백웅.”

망량은 뭔가 답답한 듯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본디 이 수련은 스스로 깨닫는 것 같지만, 당신 말대로 지금은 시간이 없소. 이대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거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동료로써 한 마디 하겠소.”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렇소.”

“앞서 말했듯 장 진인이 정자세를 잡으라곤….”

“정자세 문제가 아니오.”

단호하게 말한 망량이 말했다.

“장삼봉 진인은 감독하지 않는다 했고 그대의 자세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 했소. 이게 그대에게 그저 수련의 자유만을 부여한 거라고 생각하오? 그건 자유도 방관도 아니오. 그가 당신에게서 뭘 지켜보려 하겠소?”

“……?”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 그걸 잘 생각해 보시오. 지금 당신처럼 하면 사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나도 장삼봉 진인은 결코 수련을 멈추라고 하지 않을 것이오.”

망량은 그 말을 끝내고는 다시 태극권을 묵묵히 수련하기 시작했다.

나는 망량의 말을 듣자 혼란에 빠졌다.

‘뭐?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거지?’

태극권을 일천 번 펼치고 나서 남는 시간에 고급기술을 수련한다는 것뿐인데 뭐가 잘못이지? 자세를 이상하게 펼친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지금까지와의 수련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나는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다.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나 자신에게 뭘 물어야 하는 걸까.

‘좋아! 옆에서 하고 있는 망량처럼 정자세를 지켜서 일천 번을 해 보자.’

역시 자세 문제겠지?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한 번 한 번에 정신을 집중해서 완벽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정자세를 지켜서 하니까 당초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려서, 첫 날보다 도리어 시간이 남지 않았다. 나는 예상했던 피로감에 이를 악물었다.

‘젠장할! 역시 태극권 동작이 아무리 쉬워도 자세를 정확하게 하면 힘들지…. 그것도 천 번이나.’

무예에 있어서 정자세는 상당히 큰 체력과 집중력, 정신력을 동시에 소모한다. 그렇기에 수련이 아니라 체벌의 일환으로 정자세 수련을 요구하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그래서 정자세로 하는지 아닌지를 몹시 고민했던 것이지만 망량이 경고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힘들진 않소?”

“전혀…, 이런 수련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보통 사람은 절반만 해도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질 수련인데 그대도 대단하구려.”

망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오. 현재의 내게는 체력의 개념이 없소.”

“음?”

“백웅, 내 팔을 만져 보시오.”

나는 망량의 팔을 만져보았다. 멀쩡히 만져지길래 뭔가 했는데, 갑자기 그의 팔이 연기처럼 팍 꺼지더니 사라졌다.

스아앗!

내가 놀라서 망량을 쳐다보자 그가 다시 팔을 구현화시키면서 말했다.

“지선(地仙)이 된다는 건 이런 뜻이지. 나는 혈육(血肉)으로 이뤄진 신체를 갖고 있으나, 동시에 선체(仙體)라고 하는 특수한 몸이 되어 있소. 등용문을 통과한 순간, 나는 일반적인 인간을 초월하는 영력체를 부여받은 거고, 원한다면 전신을 기화(氣化)시키는 것도 가능하오. 또한 반쯤은 영체에 접해있기 때문에 보통 인간의 체력은 내게 적용되지 않기도 하오.”

“대, 대단하군.”

“내 천계에서의 지위가 상승하여 상선(上仙)이나 대라신선이 된다면 완전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영체로 변화하게 될 거요. 그 때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게 되겠지만, 동시에 큰 제약이 생기지.”

나는 망량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야 대라신선이 강림할 수 있다는 건 그런 뜻이구려.”

“맞소. 계급 낮은 자의 장점이라고 할까, 난 아직 인간의 몸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에 대라신선보다는 비교적 세상일에 쉽게 끼어들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물론 더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백웅. 무작정 내 수련을 따라할 필요는 없소. 내가 열심히 정자세를 지키면서 하는 건 그저 그대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니 이것도 정답은 아니오.”

“하지만 장삼봉은 아무 말도….”

“허어, 왜 그렇게 그를 신경 쓰시오? 그는 당신이 뭔 짓을 하든 처음부터 아무 말도 안 했소.”

“…….”

나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정자세를 지키는 것이 옳은 수련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옳단 말이오?”

“아직도 모르겠소? 그걸 생각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수련이란 말이오.”

“……?”

“백웅. 침착해지시오. 그리고 마음속의 번뇌와 초조함을 털어내는 것에 집중하시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쨌든 지금 상황을 조금은 파악한 것 같았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건가…?’

나는 머리가 나쁘지만 분위기는 약간 읽은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 내 맘 대로 해버려서는 안될 분위기로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해도 대충 해도 안 되는 거라면 난 뭘 해야 할까?

“으음….”

나는 또 하루 동안 열심히 정자세를 갖춰서 태극권을 천 번 펼쳤다. 그리고 하루가 한 시진 정도 남자, 별개의 수련을 하지 않고 절벽의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공수련을 하려고 앉은 게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복잡하기에 명상이나 하고 싶다.

“…….”

매일 천 번씩 태극권 수련. 이게 정말 답일까?

그렇다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 나는 내심 진저리를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재검법 하나만 붙잡고 있다가 인생 전체가 망해버렸던 첫 번째 삶의 악몽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초무공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고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방황하면서 갈팡질팡하느니 차라리 앞날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뛰어드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별로 수련을 한 것도 아니고 생각만 계속 했다. 그리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부에 침잠해 들어갔고, 이윽고 별 쓰잘데기 없는 상념과 고민이 마구 내면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면의 목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내 귓전을 때리는 듯한 환상마저 느껴진다. 내가 멍하니 앉아있을 때, 옆에서 망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웅. 해가 뜨고 있소.”

“…….”

그럼 또 다시 태극권을 수련해야겠군….

나는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태극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날과는 달리, 나는 태극권을 반복해서 펼치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을 느꼈다. 귀찮다는 감정 이상으로 여태껏 내가 살아왔던 인생과 경험, 그리고 앞날걱정이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왜 이렇게 힘들지….’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손발을 휘감은 느낌이 들어서 점차 손끝이 무뎌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삼십여 일이 흘러 있었고 망량이 떠날 날이 다가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망량은 그 날의 태극권 수련을 마치고 새벽에 나를 불러서는 말했다.

“백웅. 그럼 남은 사 년도 힘내시오. 나는 이만 지선의 임무를 하러 가겠소.”

“…….”

정말 내가 사 년을 할 수 있을까?

겨우 한 달을 했는데도 이렇게나 심력이 고갈되고 피폐해졌는데?

첫 날의 자신감이 완전히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박탈감 때문에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망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좀 걱정했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괜찮소.”

“힘든 수련을 겪은 적은 많았으나 이렇게 정신이 힘든 건 처음이오.”

망량이 껄껄 웃었다.

“후후! 천계에서 술법수련을 해본 내 입장에서는 그대가 참 모순적인 존재라는 걸 느끼오.”

“응?”

“사실 지금껏 당신이 겪어왔던 모험의 난이도과 고난을 생각하면, 이 수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정상이건만…, 당신은 혼돈과 절망보다는 인간의 괴로움에 더 깊게 반응하는구려.”

“…….”

“그럼 나중에 봅시다.”

망량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망량이 떠나간 후에도 하루고 이틀이고 말없이 계속 고민하면서 번뇌 속에서 발버둥쳤다. 태극권을 수련하는 걸 어떻게 하는지는 뒷전이고 머릿속에서 심마(心魔)가 들끓는 게 느껴졌다.

아!

살기 싫다!

그런데 죽기도 싫다!

‘장난하냐!!’

나는 또다시 석 달 동안 계속 수련하면서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미친 듯이 귀찮아서 살기 싫은데도 동시에 죽고 싶지도 않아하는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내면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별의별 잡소리가 다 튀어나오는 것이다.

어느 새 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 쎄지고 싶다.”

쎄지기만 하면 이런 고생할 일도 없을 건데….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동시에 내 자신에 환멸감을 느꼈다. 아무리 이딴 소리를 입으로 해 봐야 현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계속 수련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환멸을 하다가도 곧 마음이 확 식어서는 말없이 하루에 태극권을 일천 번 수련하게 되었다.

투두두둥

투두둥

또다시 육 개월이 지났다. 나는 어느 새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태극권을 저절로 펼칠 지경이 되었다.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도리어 나(我)라는 것에 더욱 집착하며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뭐지?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나’는 뭘 원하고 있는가?

아무리 수련하고 또 수련해도 나 자신만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잊어버리려 할수록 무의식에서 나만이 계속 떠올랐다. 자아(自我)가 모든 상념의 싹을 틔우면서 번뇌를 가속시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모든 생각이 괴로움의 근본임을 느끼면서도 그 괴로움을 버릴 수 없는 나 자신의 실체를 점차 바라보게 되었다.

또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던 장삼봉에게 말했다.

“장삼봉!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완전히 잊을 수 있습니까?”

절대지경이고 지랄이고 나는 이제 괴롭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나 스스로의 ‘질문’을 그만 듣고 싶다!

나는 장삼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배우면 날로 더해지고(爲學日益) 도를 알면 날로 덜어지니(爲道日損)…, 덜고 또 덜어서(損之又損) 그것으로 무위에 이르는 것이오(以之於無爲).]

“무위…?”

[그렇소….]

장삼봉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는 아주 느릿하게 첫 초식을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소(無爲以無). 이를 이해했소?]

“…모르겠습니다.”

[그걸로 좋소.]

장삼봉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가 말한 것에서 마음속에 강하게 다가오는 게 있었다.

무위(無爲)!

나는 너무나 형태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을까? 눈에 보이는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젠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와 문답을 반복하고 있다. 질문도 대답도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내 무의식이었다. 멈출 방법을 몰라서 미칠 것 같았지만, 무위(無爲)라는 개념이 약간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형태가 없어도 좋다.

나는 그저 나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자아 이외의 무의식도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 양가성과 양면성을 인정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스스스스

어느 새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정확하고 빠르게 태극권을 펼치고 있었고, 내 옆에서 장삼봉이 나와 똑같이 태극권을 펼치고 있었다. 명백히 이상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연일체가 되어서 무아지경으로 빠져들면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의 끝까지 처박히고만 있었다.

투웅!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무의식에서 의식이 빠르게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 새 산야는 새하얀 설원(雪原)이 되어 있었고 나는 나이를 먹은 상태였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옆에 있던 장삼봉이 말했다.

[아쉽구려. 이제 한 발짝 남았건만, 그대에게 쌓여있던 망집은 내 예상보다 더욱 깊었던 모양이오….]

“한 발짝이라니요?”

[백웅. 이 초식을 받아보시오.]

그렇게 말한 장삼봉은 다짜고짜 나를 공격했다.

칠대절학

합체기(合體技)

혼원파천강(混元破天罡)

강(强)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어마어마하게 패도적인 기운이 강기의 파도가 되어서 내게 덮쳐왔다. 내가 가진 어떤 호신강기를 동원하더라도 저 먹빛 기운에 대항할 수 없었고, 심지어 멸혼보로 피하려 해도 이미 늦어 있었다. 본래라면 이런 상황에 삼보절기로 어떻게든 흘려내려 하겠지만 그마저도 미지수라는 게 느껴졌다.

산맥을 절단시킬만한 위력의 절세신공이다!

날 죽이려는 건가?

하지만 그런 당혹감과는 별개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서 펼쳐진 일 초식이 태극권의 기수식인 태극기세(太極起勢)라는 걸 깨닫고는 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말도 안 돼!

태극권 기수식으로 저 압도적인 혼원파천강을 감당한다고?

육의성천도로 막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하지만 태극기세의 흐름에 따라 내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지고 왼손이 그를 뒷받침하듯 뒤따라갔다. 두 개의 손은 이내 내 몸통을 축으로 다리까지 쭉 뻗어져서 균형을 잡았고, 내 손발 사이에는 완연한 조화가 감돌았다. 나는 한 치의 더함도 뺌도 없는 경지를 구축한 채 천천히 혼원파천강의 강한 부분을 받아내었다.

무위전변(無爲轉變)

힘이 서서히 사라진다.

‘힘’이라고 하는 개념 그 자체가 먹혀버리는 느낌이다.

나는 이윽고 혼원파천강의 힘이 내 몸을 투과하여 뒤편으로 튀어 나가버리고, 내 몸은 천지상하를 양손으로 제압한 채 중심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은한 태극(太極).

나는 태극 그 자체가 된 상태에서 자아의 부침(浮沈)이 반복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동하며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던 자아가 천천히 되돌아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랐다.

“이, 이건!!”

[연자여. 어떻소?]

“설마 이게…!!”

이윽고 장삼봉 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무쌍패(無雙覇). 지난 삼 년 동안 그대가 자아를 잊은 끝에 겨우 입문시킬 수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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