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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망량이 지선이 되다니!
나는 그의 성취에 솔직하게 축하해주기로 했다.
“축하하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구천현녀의 제자가 된 거요?”
망량이 등용문을 통과해서 천계의 신선이 되고, 덩달아서 구천현녀의 제자가 되어서 시해지술을 배우는 게 본래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생각하자 내 일이 아닌데도 괜히 크게 기뻤다.
“그렇소. 다만 지금은 배우다가 도중에 중원 초 지방의 감시를 명받고 지상에 내려오게 되었소.”
“시해지술은….”
“쓸 수 있소.”
“오오!”
시해지술!
24회차에서 겪었던 바로는 말 그대로 뭐든지 가볍게 해낼 수 있는 범용성 높고 강력한 술법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술법이 아니라 구천현녀의 권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 익힐 수 없어야 정상이지만 망량은 이전 회차의 전생에서 그걸 익힌 경력이 있었기에 기대를 했던 것이다.
시해지술을 쓸 수 있는 아군이 있다면 앞으로 든든해진다!
내가 내심 잘 풀려가는 기분에 기분이 좋아지자 망량이 말했다.
“현재 상황을 좀 알고 싶소. 내게는 시간이 없소.”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이오?”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초 지방의 감시라는 건 천계 지선의 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이오. 나는 구천현녀의 제자인 만큼 융통성을 발휘해서 최대 49일 정도는 임무를 유예할 수 있으나, 그 이후에는 꼼짝없이 50년이고 100년이고 초 지방의 모든 산신령이나 하급신선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오. 그 때가 되면 이런 식으로 당신과 접촉하거나 도와주는 건 굉장히 힘들어질 거요.”
나는 그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아니…, 예전의 지선 망량은 자유롭게 황궁에 출입했잖소? 그 때랑은 뭐가 다른 거요.”
“그 때의 지선 망량은 임무 자체가 황궁의 견제와 섬멸이었기 때문이오. 뭐가 임무냐의 차이인데, 내 경우는 그런 과격한 작전에 투입되는 게 아니라 후방의 관리직에 임명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지선으로서의 권역이 제대로 주어져버리면, 난 그 때 부터 거기서 거의 움직일 수 없소.”
“끄응, 그럼 곤란한데….”
망량이 강한 아군이 된 건 좋지만 천계의 중간관리자가 되어서 옴짝달싹 못한다면 있으나 마나다. 이래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시오. 하려면 49일 만에 할 건 다 할 수 있소. 나중에도 정 안되면 천계를 탈주하면 그만이고.”
“알았소. 현재 상황을 알려주겠소.”
파앗
나는 망량에게 흑요석으로 현재까지의 기억을 전달했다. 망량은 기억을 잠시 음미하다가 말했다.
“그렇군. 그럼 숙부에게 같이 갑시다.”
나는 망량의 말대로 바로 비등을 써서 제갈사가 있는 장소인 장령곡으로 갔다. 제갈사는 우리를 보자 히죽 웃었다.
“현이가 꿈에 그리던 장원급제를 해서 돌아온 건가?”
“장원급제 정도를 꿈에 그리진 않았습니다, 숙부.”
“뭐 그렇겠지. 너도 장원급제를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너무 눈에 띄면 천문관 일족으로서 황궁 내에서 해코지를 당할까봐 3등인 탐화에 그친 거잖아? 아무튼 축하한다.”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한테서 상황설명은 다 들었을 것 같고 무슨 말을 하러 찾아왔지?”
망량은 자신이 천계에서 겪은 일을 제갈사에게 말해준 후 본론을 꺼냈다.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하려고 왔습니다.”
“도와줄 일이라…. 없는 건 아닌데.”
제갈사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냐, 역시 안 되겠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형국이긴 하지만 넌 안 돼.”
“왜입니까?”
“넌 이미 임지를 부여받은 천계의 상당한 고위직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구천현녀의 총애 받는 제자라면 이미 대라신선도 네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야. 네가 힘을 써서 끼어들면 천계에서도 그 일을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득보다 실이 크니까 넌 그냥 백웅한테 술법이나 좀 가르쳐주고 가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제갈사에게 말했다.
“제갈사.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니 상황이 많이 힘든가?”
“조금. 황궁의 마도세력화를 최대한 막으면서 이쪽 정체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 뜻밖에 검마가 유능해서 잘 버티고 있지만 솔직히 처음부터 버거운 일이었어. 게다가 요즘은 황궁과 풍신류가 용인을 대놓고 운용하기 시작해 버려서….”
제갈사는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상관하지 마. 십 년의 시간을 주기로 우리가 약속했으니, 넌 그 때까지 수련만 해라.”
“…알았어.”
제갈사가 걱정하는 건 내가 일시적인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끼어들었다가 단번에 균형이 뒤틀어져서 억제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어도 지금까지처럼 나름대로 얻는 건 있겠지만 이번 삶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나는 동료들이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버티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망량과 함께 사천의 장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망량이 말했다.
“백웅. 오행변화에서 어려움을 겪는 듯하는데, 내가 좀 도와주겠소.”
“어떻게 도와줄 수 있소?”
“오행변화 또한 팔괘로 해석될 수 있소. 당신이 지금 의념으로 오행변화를 시키는 걸 쓸데없이 어려워하는 이유는 오행의 균형이 맞물리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감으로 다 때우는 수련보다는 내게서 이론을 좀 배우는 게 편할 것이오.”
나는 망량의 말대로 그에게서 오행변화를 쉽게 익히기 위한 가르침을 받았다. 예전에 했던 도학공부의 심화 같았는데, 어려울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이해하기 쉽게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망량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지 칠 주야 만에 오행변화를 터득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럴 수가…!!’
절반도 이해되지 않아서 3년간 공부하고도 부족해서 1년 더 할 각오였는데, 망량이 가르쳐주니 칠 주야 만에 떼버리다니?
나는 망량의 능력에 전율을 느꼈다. 의념으로 오행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술법으로 일으키는 건 근본적으로 다른 일일 텐데, 완전히 다른 계통의 기술을 한순간에 파악하고 요점을 정리해서 내게 가르쳐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멍하니 있자 장삼봉 진인이 흡족해하며 말했다.
[구천현녀님의 제자라더니 훌륭하구려. 그대라면 백 년 이내에 대라신선의 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장 진인께 과한 칭찬을 받는군요.”
[가능하다면 다음 수련도 그대가 백웅을 보조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나는 두 신선들과 함께 다음 수련진도에 입문했다. 이제 오행변화를 익혀서 교주의 오행변화에 대응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는 교주의 절대지경 기술인 현겁에 대항할만한 기술을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장삼봉 진인이 환영을 소환해서 내게 설명을 시작했다.
[백웅. 백련교주의 현겁이 어떤 기술이라고 생각하오?]
“음….”
나는 백련교주가 현겁을 썼던 당시의 전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시간이 느려지는 기술 같았습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해 보시오.]
“공간을 지배해서 주변공간을 모두 찰나의 순간으로 밀어 넣고 자신만 극한으로 가속하여 상대적인 빠르기를 얻습니다.”
[과연. 그 기술의 요체는 잘 파악하고 있구려. 그러면 현겁을 상대로는 어떻게 싸워야 하겠소?]
“…….”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백련교주의 현겁이 어떤 기술인지는 알고 있음에도 그걸 상대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공간을 지배해서 시간감각과 의식의 초월을 얻는 무지막지한 기술을 상대로 일개 무인이 어떻게 싸우는가? 그 앞에서는 어떠한 초식도 무지몽매한 칼춤이 될 뿐이다. 심지어 사도 달기조차도 현겁을 상대로는 그저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멸혼보를 쓴다고 해도 현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장삼봉이 말했다.
[통상적인 초식의 경지에서는 그걸 감당할 수 없소. 그렇기에 현겁을 상대로 할 때는 절대지경이 전제가 되지.]
“네? 절대지경?”
[그렇소. 현겁은 결국 절대지경에서 얻는 의념의 천주로 공간을 지배하는 속성을 극대화시킨 것. 그렇기에 자신의 천주가 견고하며 의지를 의지로 맞상대할 수 있다면 대등하게 싸울 수 있소. 조금 느려지긴 하겠지만 불리하진 않게 되지. 그 증거로 현겁이 무적의 기술 같아도 의외로 절대지경의 고수를 상대로는 자주 펼치지 않잖소? 무공을 모르는 인외의 괴물한테는 잘 먹히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가 놀라자 장삼봉이 말했다.
[물론 현겁에 잘못 걸리면 절대지경의 고수라 해도 즉사하겠지만 펼쳐진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상황에 따라서는 절호의 반격을 먹이는 것도 가능하오. 백련교주 또한 이런 특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남발하기 보다는 대결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작전으로 운용하오. 물론 상대가 백련교주보다 하수일 경우 현겁은 절망 그 자체겠소만….]
“음.”
[일례로 그 동영의 절대지경 고수. 그 자의 특기는 쾌검이었고 극쾌와 검력에 있어서는 백련교주를 뛰어넘었소. 그런 자를 상대로 현겁을 펼쳤다가 만일 실패하면 도리어 백련교주가 일 초 만에 목이 잘릴 것이오. 그 자는 현겁이 펼치는 공간의 장악력을 극살지경의 심검으로 토막 칠 수가 있잖소? 다만 백련교주는 유리한 경우에만 골라서 현겁을 펼칠 수 있으니, 그걸 약점이라고 할 순 없소….]
나는 장삼봉의 말에 곤란한 기색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 절대지경이 아니라서 그렇게는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렇소. 그러나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지금부터 그 방법을 전수하겠소.]
장삼봉 진인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그의 양손이 태극을 그렸고, 이윽고 양옆으로 뻗은 채 태극권의 기수식을 잡았다. 장삼봉이 말했다.
[바로…, 태극권이오!]
“…….”
[백웅 그대는 오늘부터 사 년 동안 열심히 태극권을 수련하시오. 매일 마다 태극권의 형을 하루에 1000번씩 펼치는 것이오.]
“사 년 동안 매일…말입니까?”
[그렇소! 아마 잠잘 시간도 없을 것이오.]
“…아니, 그게….”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어째서?! 왜 그래야 합니까? 태극권은 기초무공 중의 기초무공이잖습니까.”
아니 이걸 무공이라고 할 수 있나? 그냥 건강증진을 위한 운동에 불과하다.
어쩌면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기초무공이 바로 태극권이었다. 길가는 문사나 아줌마나 아낙이나 꼬맹이도 대개 익히고 있다. 24초라고 하는 기본적인 형태는 있으나 여기에 무공의 묘의 따위는 없고 그저 전신의 관절을 풀어주고 몸을 유연하게 하며 양생을 위한 호흡용 동공이 섞여있을 뿐이다. 이런 걸 수련해서 고수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연히 내가 익히고 있는 초고급 무공들에 비하며 쓰레기라고 치부해도 좋은 무공이었다. 육체적으로야 힘들겠지만 무공을 수련 안 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장삼봉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믿든 말든 지금의 그대가 절대지경이 아닌데도 현겁을 상대로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소!]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유를 말한다 한들 그 이유에 상념이 사로잡힌다면 수련을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 그대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수련은 여기서 끝이오.]
“으으윽…!!”
[시간을 낭비한다 생각하오? 그리 생각해도 상관없소.]
말도 안 된다.
태극권을 이제 와서 내가 수련한다고?
삼재검법을 다시 수련하는 거랑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기본기를 단련하면서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에 무수한 파생절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 파생절기만 익혀도 단기간에 대단한 고수가 될 수 있을 건데 뭐하려고 태극권을 하루에 천 번씩 연습하란 말인가!! 사 년 동안 그 짓을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말이 쉬워서 사 년이지 봄여름가을겨울의 성상이 지나는 걸 네 번씩 지켜보면서 산야에서 매일 잠도 안자고 수련하는 건 사람을 미치게끔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때려 치려고 했다.
“제길! 그딴 수련은 안….”
그 때였다.
망량의 손길이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망량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지 마시오. 그냥 나랑 같이 해 봅시다.”
“망량…, 당신….”
“내가 초 지방으로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수련을 해 보겠소.”
“그, 그럴 필요는.”
그가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숙명에 버거워하는 건 알고 있소. 남의 운명까지 등에 지고 있어서 초조해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소. 자신의 일만 신경 써도 모자랄 판에 동료들의 목숨과 운명도 걱정하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소? 허나 내가 무신이라고 하더라도 초조해하는 자에게 무예의 극의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
“나 또한 선계에서 수련할 때 계속 동료들 생각이 났소. 내가 빨리 한사람 몫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앞섰지. 허나 초조해 할수록 미래만 눈에 보이고 현재가 보이지 않게 되었소. 그리고 망집을 버리니 그때부터 술법실력이 빠르게 늘었다오.”
망량의 눈이 빛났다.
“백웅.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건 현재요.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산다면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오. 마치 티끌이 쌓여 마침내 숲을 이루듯, 당신의 미래는 바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오.”
“……!!”
“지금은 장 진인의 말에 믿고 따라주시오. 실패하면 그때 원망해도 괜찮소.”
나는 내가 얼마나 시야가 좁아져 있었는지를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해 보겠소!!”
지금부터 시작이다.
하루에 천 번 씩, 쉬지 않고 태극권을 4년 동안 연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