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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사실 나는 죽는 방법을 딱히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갈사의 제안은 꽤 당황스러웠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생포당할 염려 없이 쉽게 죽을 수만 있다면 기존의 절대고수들에게 도전하는 게 전혀 부담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제갈사에게 의혹을 말했다.
“죽는 방법을… 21가지나 연구할 필요 있어?”
나는 제갈사가 준 저주의 약통을 들며 말을 이었다.
“이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거 같은데…. 저주까지 걸고 죽으면 대체 어떤 놈이 날 살릴 수가 있겠어.”
“흐흐. 왜 내가 반 년 씩이나 열심히 연구해 왔는지 잘 파악하지 못했군.”
제갈사는 흉소(凶笑)를 흘리며 말했다.
“그 약병을 써서 저주를 걸어서 죽는다고 치자. 십이율주는 그 저주를 파해하고 되살릴 가능성이 있다.”
“아….”
“물론 놈에게 그런 주술능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체적 역량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더욱이 목요를 가지고 신단수 근처에 있다면 전에 봤던 대로 엄청난 회복능력까지 쓸 수 있으니까 가능하겠지.”
그건 생각지 못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서 있다가 말했다.
“그, 그냥 내가 내공을 손에 모아서 내 천령개를 내려치면 안 될까? 아프긴 하지만….”
천령개(天靈蓋)!
두정골(頭頂骨)의 다른 이름으로써 인체 최대의 급소 중 하나였다. 내가 여태껏 별개의 자살방법을 생각지 않았던 이유는 내 자신의 천령개를 박살내서 머리통을 터뜨릴 경우 아주 빠르고 확실하게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화타의문에 전해져 오는 바에 따르면 천령개가 파괴되는 순간의 고통은 전신의 피부에 침 100개를 밀어 넣는 것보다 몇 배나 아프다고 했기에 여태껏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그래. 그게 무림인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자살법이지. 확실히 두상이 박살나면 그 어떤 의료술로도 살리기가 마땅치 않아. 하지만….”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네가 죽은 그 즉시 반생반사(半生半死)로 회생시키는 술법(術法)이 있다면 어떻게 할 테냐?”
“…….”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즉시회생이 전제가 된다면 천령개를 터뜨리든 심맥을 폭파하든 상관이 없어. 되려 구시술을 쓰는 환혼술사나 나 같은 마도사는 그걸 노리기도 하지.”
“그, 그건 억지야. 내가 죽으면 일어나는 일은….”
“아, 맞아. 우리는 그 사실을 전제로 여태껏 왔지. 하지만 네 기억을 잘 살펴보면 제가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고 한동안 의식이 끊긴 후에도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었어. 그걸 고려하면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단 말이야. 애초에 네 전생능력이 무엇을 ‘죽음’으로 판정하는지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넌 이혼대법을 시전 할 수 있어. 또한 네게는 이혼대법이 통한단 말이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통해! 이게 왜 중요한지 알아? 네가 육체의 주도권이 없으며 영(靈)의 상태인 경우에도 딱히 ‘죽음’으로는 판정하지 않는단 소리다.”
“아….”
“직접 달기와 몸을 바꿔본 적이 있잖아? 그리고 바꾼 몸의 주인이 죽을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시험해본 바가 없어. 그리고 이혼대법의 결과가 어떤지는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지…. 현이가 도덕성 때문에 이 실험을 하게 놔두지 않겠다만.”
복잡한 얘기지만 확실히 위험성이 있다는 걸 납득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제갈사가 마치 쐐기를 박듯 말했다.
“또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수준의 절대자에서나 논하는 이야기야. 상대가 신격이나 삼황오제 수준으로 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
“뭐?”
“삼황오제 전욱은 긴나라를 고문할 때 죽음을 금지시켰고 저승행도 금지시켰어. 기억 안 나냐?”
“…….”
“그런 경우가 되면 천령개를 내리치든 약을 먹든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건 그렇다.
전욱의 고문이 워낙 끔찍한 거라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전욱은 일부러 긴나라의 죽음을 금지시킨 채 수백 번 죽어도 모자랄 정도의 극형을 계속해서 가했던 것이다. 그 가학적인 초능력을 생각하면 지금 제갈사의 걱정은 지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제갈사가 말했다.
“지금까지, 25회차까지의 책사들은 워낙 칠요로 모을 정보가 많은데다가 웬만한 상대 앞에서는 네가 말한 ‘인간의 방법’으로 자살해도 무방하다 생각했기에 이런 걸 따로 연구하지 않았던 것 같군. 하지만 네가 정말로 들이박으면서 절대지경에 도전하는 거라면 이젠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음…, 그래서 21가지 방법은 뭐 어떤 게 있는데?”
“뭐 기본적으로는 내가 준 저주의 약병. 아까는 안 통할수도 있다고 겁을 줬지만 사실 마왕의 저주니까 웬만해서는 즉사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점액속성의 촉수마물을 네 대뇌에 소환시켜서 뇌를 먹어치우게 하는 술식(術式)이 있고, 또 하나는 지금까지 네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를 모두 소환시켜서 실혈사(失血死)를 노리는 술식이 있다. 이 3가지 방법은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고 자신해.”
“…….”
아니…, 전부 끔찍하게 죽는 방법 같은데….
달그락
제갈사는 갖고온 짐에서 다섯 개의 약병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리고 천하오대의원 몇 놈을 찾아다니면서 방법을 몇 개 더 구상했다.”
“그건 뭔데?”
“이 5개의 약병은 싸우기 직전에 취향껏 먹으면 된다.”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기분이 좋아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며 통각이 사라지는 종류의 약이다. 조금씩 효과는 다르지만 대동소이하지.”
“…….”
“부작용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먹고 나면 머지않아 죽는다.”
이것도 그다지 느낌이 좋진 않다….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네 의술스승인 고려의 화서명을 찾아가서 역대주천(逆大周天)의 심공(心功)을 완성시켰으니 이 양피지를 받아라.”
나는 양피지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확실히 전신의 요혈과 대주천 행로를 면밀히 분석해서, 완벽하게 거스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건 공력을 쌓거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파괴당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심공이었다. 만일 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다면 반드시 익히게 할 것 같은 미친 심공을 멍하니 쳐다보자 제갈사가 싱긋 웃었다.
“평소에 그 행로를 외우고 있다가 심맥을 터뜨릴 때 그 순서로 터뜨리면 더 쉽고 빠르고 회생불능으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자, 자꾸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좀 이상한데!”
“아직 멀었어. 지금부터라고. 나는 물리적 방법 뿐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주술과 술법, 마도를 총체적으로 연구해서 자살법을 만들었다!”
제갈사의 눈빛이 광기에 물들었다.
“이제부터는 네가 삼황오제 앞에서도 훌륭하게 즉사할 수 있도록 연구해온 결과를 설명해 주마!”
“…….”
그리고 나는 제갈사의 21가지 자살방법을 만 하루 동안 열심히 들었다. 제갈사의 설명이 매우 이해하기 쉬웠고 자살방법도 뛰어났지만, 나는 석연치 않은 기분과 씁쓸함이 계속 마음속에 감돌았다.
세상에 신종 자살법을 나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 설마 미쳐가고 있는 건가?
얼추 설명을 마친 제갈사가 구운 양다리를 뜯으며 말했다.
“이상, 설명해 준 21가지 자살법을 잘 기억해 둬. 신적인 권능(權能)을 사역하는 놈을 상대로도 어떻게든 자살할 수 있게 여러 가지 사술과 자살법을 마련해 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돼. 근본적인 해결책이 뭐지?”
“내가 강해지는 것!”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제갈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 개소리야. 반복 작업으로 음신지력을 빨리 소화해서 술법과 권능에 대한 저항력을 올리란 말이야.”
“…….”
“멍청아. 강해지는 걸로 다 해결되는 걸 누가 몰라? 자살법이란 건 우리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전제하에 연구하는 거고, 이 빌어먹을 절망의 우주에는 천외천의 존재가 널려있거늘.”
양고기를 질겅질겅 뜯던 제갈사가 고기조각을 퉷 하고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절망을 상대로 마지막 발악만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때로는 충분히 상대를 감당할 수 있음에도 자살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앞으로 너는 그런 경우를 더 많이 겪게 될 거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경우가 어딨어?”
“없기는? 동료의 희생! 효율적인 전개! 제물이나 동료만 눈 딱 감고 갈아버리면 쉽게 전진할 수 있는 국면에서 얼마나 많이 찡얼거렸는지.”
“…….”
“지금까지도 숱하게 겪었고 앞으로도 계속 겪게 될 일들이지. 너는 동료를 희생시키고 앞으로 나갈 건지 그대로 멈춰 설 건지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받게 될게 뻔하다. 그런 상황은 수도 없이 많아.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운 좋게 양립이 가능했지만, 계속해서 운이 좋을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반 년 동안 자살법을 열심히 연구한 또 하나의 이유기도 하지. 앞으로는 주변사람 속 터지게 개지랄하면서 정신이 갈려나가는 일을 줄이고 차라리 빨리 죽어버려라. 그게 장기적으로는 훨씬 정신력 관리에 좋을 거고 소모도도 적을 것이다. 사실 이건 마음의 자세에 가깝긴 하지만 언제 어느 때든 자살을 쉽게 할 수 있다면 선택하기도 편하겠지.”
“…고, 고맙다.”
“뭐, 거대한 과업이 줄어든 덕이라고 할까? 칠요를 다 모으는 업적을 한 번 해치워버렸으니 주군인 네게 제안하기도 쉬워졌군.”
제갈사 나름의 배려인 건가? 다만 배려라고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냉정한 대처였다. 그리고 나는 제갈사가 어떤 심정으로 내 자살법을 연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제갈사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주군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제갈사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나를 선택했고, 자신의 선택을 최선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사 제갈사의 결의!
제멋대로에 미치광이인 제갈사지만 나 또한 제갈사의 미래를 책임져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최선을 다하자.’
내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제갈사. 바깥 상황은 어떻소? 우리가 폐관에 들어간 지 근 일 년 정도가 지났는데 세상에는 별다른 일이 없소?”
“그것도 겸사겸사 보고하러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거다.”
제갈사는 마지막 양다리를 뜯어서 식탁에 내려놓은 후 말했다.
“검마는 반천맹을 효율적으로 구성했고 마도팔문 중 삼문(三門)을 자기에게 복종시켰다. 그리고 백련교에는 표면상 굴복하면서도 화신류와 연수할 준비를 하는 중이지. 물론 화신류와 연수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돈 때문이고.”
“한씨세가의 어마어마한 재력을 지원받아서 반천맹을 꾸려나갈 생각이구려.”
“당연하지. 그건 원래부터 전생의 망량이 반천맹주로서 시도해왔던 전략이야. 딱히 더하고 뺄 것도 없이 훌륭한 외교전략이라서 이번 생에서도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백웅 네가 잠시 도와줄 게 있어서 오기도 했다.”
“어떤 일이지?”
“이제 슬슬 신승을 회유해서 소림사에 있는 그 기묘한 시설을 손에 넣어야겠다. 지금까지 눈치를 봤는데 이젠 손에 넣어야겠어.”
“아….”
“아군 무인들의 내공을 빠르게 향상시켜야 하고, 검마 휘하에도 연종휘를 비롯해서 쓸 만한 인재들이 꽤 들어왔다. 반천맹의 힘을 강화시키려면 그 유적이 꼭 필요해.”
거기를 말하는 거군.
망량선사가 말했던 소림사의 유적!
축기가 굉장히 빠르게 되는데다가 다른 사술이나 마법을 전혀 쓸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24회차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지금껏 그 곳을 섣불리 얻으려 하지 않은 이유는 신승을 움직일 경우 인과율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신승을 회유해도 큰 문제없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제갈사를 따라서 움직여서 비밀리에 신승을 만났고, 그에게 흑요석을 전달했다. 기억을 전달받은 신승은 잠시 충격 받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으음…, 믿기 힘든 일…. 허나 망량선사와 유적에 관한 기억이 너무나 정확하니 빈승은 믿기로 하겠소.”
“24회차에 괜한 고통을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 회차에서 신승은 괜히 여러 번 소환되어 여러 번의 죽음을 겪고 말았고, 풍신류에게 고문까지 당했다. 직접적으로 전생에 따라가지도 않는데도 큰 고초를 겪었기에 나는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소…. 허나 한 가지 궁금한 건 있구려.”
“무엇입니까?”
“혹여 이번 생에는 흑패로 누구를 되살릴지 정했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무공이나 수련하는데 집중하기로 해서 그 얘기는 깊게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 빈승이 하나 제안해도 되겠소?”
나는 힐끔 제갈사를 바라보았는데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동의의 눈빛을 보내자 신승 명호대사가 불호를 외우더니 말했다.
“백웅이여. 시조 달마대사…, 혹은 천 년 전의 백련교 신녀(神女)를 되살리시오. 그들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대가 궁금해 하는 게 많이 해결될지도 모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