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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790화 (789/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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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지금껏 무수히 여동빈의 강신을 받아들여 싸웠고, 심지어 그의 천둔검법도 전수받았으며, 직전제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의 검술을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에 아무리 여동빈이 상대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일 초식만큼은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쨍강!

하지만 - 일 초의 나눔이 지나는 순간, 나는 내가 쓰던 강철장검이 일격에 부러져 나가고 동시에 여동빈의 검날이 내 목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시전한 최강의 검뢰(劍雷)는 가볍게 간파 당했고 여동빈의 육의성천도 풍결(風決)이 마치 바람처럼 부드럽게 타고 들어와 내 급소를 노린 것이다.

피잇

조그마한 실선 같은 상처가 목을 길게 그었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것이었는데 나는 뒤로 피하면서 생각했다.

절반은 실력, 절반은 여동빈이 봐준 것이다.

일단 실력이 없었다면 아예 피할 가능성조차 없었을 것이지만 -

‘베려면 벨 수 있었어….’

그러나 여동빈은 그 아슬아슬한 간합에서 얼마든지 공격범위를 확장시켜서 시원스럽게 내 머리통을 잘라내는 게 가능했다. 통상적인 무예이론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여동빈의 육의성천도가 지닌 검권(劍圈)은 충분히 그 영역에 이를 수 있는 신기(神技)였다. 나는 그 사실을 찰나지간에 깨달았기에 금세 나와 여동빈의 실력차이를 절감했다.

종이 한 장이 쌓여있다.

도대체 몇 장이 쌓여있는 걸까.

최소한 수십 장의 종이가 쌓여있는데, 그 간격이 실제로는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아직까지도 이 정도의 격차가 나다니.

내가 내공으로 상처를 지혈하며 여동빈을 노려보고 있자 여동빈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기에 나는 되려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여동빈이 말했다.

[무신과 무한의 회오리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었는가.]

아무래도 저 질문을 하기 위해서 일단 첫 초식에서 나를 살려둔 모양이었다. 나는 여동빈에게 말했다.

“그걸 말해드리는 대신 99초까지 봐 주십시오!!”

[…….]

여동빈이 잠시 냉막한 표정을 짓다가 대꾸했다.

[약속하겠다.]

엉?!

여동빈의 마음이 흐트러지게라도 해 보려고 억지로 내놓은 제안인데 설마 수락할 줄이야?!

‘마지막 100초 째에 날 1초식으로 쓰러뜨리지 못하면 통과인데 진짜로?!’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공방을 나눠보려고 하다보니 일격에 죽을 뻔 한 것 뿐이다. 내가 100초 째에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버틸 수만 있다면 내가 무신을 만나려는 행보는 바로 성공할 것이다! 내가 방어에만 전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여동빈의 성격상 자기가 한번 입 밖에 꺼낸 제안은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므로 결코 농락도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자신감이 되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동빈에게 말했다.

“망량선사께 무신의 존재를 전해들었고, 그걸 바탕으로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만당시절 팔부신중 야차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아직은 여동빈에게 흑요석을 주고 다 털어놓을 때가 아니다. 여동빈이 보고 듣는 것을 천계에서 바로 알게 된다면 혹시나 이번 시련을 통과했을 경우 괜히 일이 꼬일 수가 있다. 내가 적당히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야기했으나 여동빈은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팔부신중 야차….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천년 전의 비사를 거진 다 알고 있습니다. 야차가 측천무후와 거래하여 그녀를 암천향의 신으로 승천시키고, 그 대신 당제국 수백여 년의 인과율을 받아서 종말의 거룡을 일찍 강림시켰다는 사실. 그리고 그 거룡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당신과 함께 팔선, 사해용왕, 백련교인들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도요.”

[…….]

여동빈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건 그저 무덤덤하게 날 베어죽이려던 시험관의 태도에서 벗어나 내 이야기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좋아. 이쯤에서 말에 양념을 쳐 볼까….’

나는 말을 이었다.

“그 당시의 백련교인들은 사대신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룡과의 대전에 참전했던 사실이 신녀(神女)에 의해 백련교에 기록으로 남아있었으며, 여동빈 당신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엄청난 괴력으로 거룡을 일격에 쓰러뜨렸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었죠.”

이건 물론 거짓말이다. 그런 자료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찾아본 적도 없다. 백련교 신녀가 기록으로 남겼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런 걸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여동빈은 내 말의 허실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여동빈 입장에서 내가 말한 것들은 대부분 진실일 뿐만 아니라 진실이기에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까지 모두 의심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여동빈은 사대신기의 도움을 받았던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여동빈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되었고, 그가 천천히 대꾸했다.

[그랬군…. 하지만 무한의 회오리까지 그녀가 기록했다는 말인가?]

“신녀에게는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무신의 존재와 거기에 도달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백련교의 기록을 찾아보니 나왔습니다.”

지금 하는 말은 전부 지어내는 말이다. 나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머릿속에서 만든 이야기를 주워섬기고 있는 중이라서 내심 조마조마했다.

여동빈은 잠시 후 말했다.

[신녀와 백련교에는 빚을 졌다.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나 혼자서 거룡을 토벌하진 못했을 것이다. 허나 내 앞가림을 하기에도 바쁘기에 세상일에 간섭할 수 없음이 안타깝구나.]

“이걸로 답이 되었습니까?”

[궁금한 건 모두 해결되었다. 연자여, 그대는 최선을 다해 덤벼라.]

“알겠습니다! 먼저 썼던 검은 부러졌으니….”

나는 목갑에서 수요를 꺼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수요를 쓰겠습니다.”

평범한 검이 아니라 칠요를 쓴다면 여동빈에게 우위를 점할 지도 모른다!

[칠요인가? 그대 연자는 참 특이한 자로군.]

“쓰면 안 되는 겁니까?”

[상관없다.]

“그럼!”

파바밧!!

나는 즉시 멸혼보를 써서 엄청난 속도로 뛰어듬과 동시에 뇌명을 극도로 일으키면서 내 전체적인 신체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거침없이 검뢰를 일으키면서 마치 검기의 파도가 몰아치듯이 여동빈을 공격했다.

‘이 정도라면…!!’

하지만 내가 펼쳐낸 화려하고 빠른 공격이 마치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듯, 여동빈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유려하게 검선(劍線)을 횡(橫)으로 그었다. 아주 느린 속도처럼 보였으나 움직임이 면면부절(綿綿不絕) 끊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내 검초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찰나의 순간에 여동빈의 한 마디가 들리는 듯 했다.

[잡스럽군.]

터엉

내 공격을 가볍게 흘려낸 여동빈의 검은 즉시 육의성천도를 펼쳐냈다.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운결(雲決)

구름바다 같은 무수한 검기가 덮쳐오며 내 전신을 찔러오는 기세는 마치 대자연 그 자체를 앞둔 듯 했으나 나는 그 순간 예전의 기억을 살려서 마찬가지로 육의성천도를 펼치려고 해 봤다.

‘나도 할 수 있어…!!’

직접 미래의 여동빈이 빙의해서 싸우는 걸 경험으로 느꼈지 않은가?! 그 때의 감각 덕분에 육의성천도를 운용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의념을 끌어내어서 육의성천도의 육합을 허공에 구현화했고, 이윽고 운결을 힘겹게 골라내서 여동빈의 공격에 맞부딪혔다.

꾸궁!

“……?!”

내 검 또한 방대한 구름덩어리처럼 펼쳐졌으나 이게 어찌된 일인지 구름이 구름에 뒤엉키다가 난데없이 먹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칼 한 자루와 맨몸으로 검기의 구름 속에 에워싸인 형상이 되었고, 이대로라면 핏덩어리처럼 난자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재빨리 멸혼보로 도주했다.

그러나 멸혼보로 뒤로 빠져나왔을 때는 여동빈이 이기어검을 날려서 내 왼팔죽지를 베어버리고 있었다. 너무 빠르고 마치 내 움직임을 모두 예상한 듯한 공격이었기에 나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몸을 뒤틀며 최대의 호신강기를 끌어내어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촤악

“컥….”

호신강기로도 당연히 여동빈의 이기어검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나는 왼팔죽지에서 핏줄기가 터져나오며 따끔함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 고통보다도 더 막대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려움.

‘방금도…, 하려면 충분히 일격에 내 왼팔과 함께 심장을 도려낼 수 있었다.’

마치 고양이가 생쥐를 갖고 노는 듯 했다. 아까 첫 초식 때는 너무 압도적이라서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초수를 또 부딪혀보니 적나라하게 실력차이가 느껴졌다.

이게 대체 뭐지?!

아무리 여동빈이 고수라지만 나도 절대지경에 한 발 걸쳤는데 어른이 애를 갖고 노는 이상의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난 환생자 용중일을 상대로 어떻게든 이겼건만!

나는 여동빈에게 외쳤다.

“여동빈!! 내 육의성천도가 흉내일 뿐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뻔한 질문을 하는군.]

휘리릭

여동빈은 이기어검을 회수하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대는 의념의 천주(天柱)를 세우지 못했으나 그 외의 모든 무공요소를 숙련되게 연마하여, 절대지경에 한 발을 걸쳤다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천하를 의지의 기둥으로 조정할 수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무공도 속알머리가 없어지는 것.]

“……!!”

[방금 전 육의성천도를 설령 그대보다 실력이 아래인 자에게 펼쳤다 하더라도 충분히 파해당했을 것이다. 의념을 다루는 데는 익숙해진 것 같으나 그것만으로는 육의성천의 진수를 구현할 수 없다.]

여동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연자 그대의 신법은 틀림없는 절세신법이지만 진의(眞意)를 깨닫지 못하여 완전히 무공과 융화시키지 못했군.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하체의 균형을 통일시키지도 못하면서 어찌 절세무공을 펼치겠다는 건지.]

멸혼보를 말하는 건가?

확실히 멸혼보는 천하제일의 신법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여태껏 전생하면서 멸혼보보다 빠르고 효율 좋은 신법은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인외의 존재들이 멸혼보를 뛰어넘는 속도를 내긴 했지만 적어도 무공신법 중에서는 멸혼보가 최고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멸혼보가 너무 따로 놀아서 내 무공과 잘 섞이지 않는 느낌은 나 또한 평상시부터 느끼고 있었다.

여동빈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이쯤이면 스스로 깨달았을 터. 그대에겐 ‘문’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 ‘문’을 연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도전할 자격조차도 이토록 어렵게 하는 것인지요? 문을 열어서 세상을 구할 수나 있는 겁니까?”

[소귀에 경읽기구나.]

타닷!

나는 여동빈과 시선을 나눈 후 재차 서로 검을 휘두르며 미친듯이 겨루었다. 그러나 말이 겨룬다는 것 뿐이지 실제로는 여동빈이 매 초수마다 내 약점을 짚듯이 찔러들어왔고, 나는 그 약점을 모면하는 것에 급급한 양상이 수도 없이 계속되었다. 분명히 천하무림인 중에서 내 검초의 약점을 찌를 수 있는 자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터인데 검선의 월공투계는 그런 차원을 아예 넘어서 있었다.

오십초 째.

“허윽.”

나는 여동빈의 발차기를 명치에 얻어맞고는 뒤로 고꾸라졌다. 호신강기로 막았는데도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여동빈에게는 검과 체술이 따로 있는 게 아닌지라 체술에도 육의성천도의 위력을 담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여동빈은 빨리 일어나라는 듯 느긋하게 기다렸다.

팔십 초 째.

쿠궁

나는 칼을 반쯤 움직이기도 전에 여동빈이 내 손목을 제압해 버리고는 뒤이어 목을 잡아서 바닥에 내려찍는 걸 경험했다. 이런 건 일류고수와 삼류 모리배끼리 싸울 때나 나오는 제압법인데 설마 내가 이걸 당할 줄은 몰랐기에 정신적 충격이 컸다.

대체 저 ‘눈’은 무엇인가?

직접 내가 월공투계를 쓸 때는 알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위력이 즉시 체감되었다. 나도 아까부터 제천대성의 화안금정 가호를 써서 나름대로 대응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의 움직임을 더 명확하게 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동빈은 무(武)의 흐름 그 자체를 예지하는 느낌이었기에 차원이 달랐다.

나는 이제서야 과거 여동빈과 백련교주가 겨루었을 때의 전투가 지금의 나로서도 범접불가한 위대한 무인들의 결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지금 내가 절대지경에 한 발 들이민 정도로는 너무나 모자라는 것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숨을 허덕이며 중얼거렸다.

“…검선. 99초 째입니다.”

[그렇군.]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

검선이 99초 동안 봐주겠다고 한 건 결코 자만도 오만도 아니었다. 어떤 수순을 밟든 간에 그는 99초 동안 나를 충분히 작살내다가 마지막 일초로 끝장낼 수 있다는 걸 그 시점에 읽어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실력차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오기를 끌어내어서 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마지막 일 초를 견딜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적수에게 굳이 그걸 설명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고도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좋다. 말해보라.]

“먼저, 저는 흉신의 주문을 써서 [옛 지배자]의 힘을 불러내어 당신을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여동빈이 냉막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는가.]

“네. 허나 그게 문을 열 자격으로 취급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안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강력한 마도사가 무신의 길을 어지럽히게 되므로 마도나 주문은 허용할 수 없다.]

역시 그런건가.

나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럼 수요에 제 음신지력을 불어넣어 그 정령의 힘을 빌려 당신을 없앨 수도 있습니다. 혹은 칠요를 해방시킨 후에 해방칠요들의 힘을 빌려서 제 잠재력 자체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시도해본 적 없는 방법이다. 다만 전욱의 음신지력이 강력한 기물에 깃든 정령이나 정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소환가능하다는 특성이 있기에 가능하긴 하다. 그리고 칠요의 시련에서 보았던 강력함을 생각한다면 수요의 정령이 각성할 경우 매우 강력할 것이다.

[물론 안 된다. 음신지력이라 함은 아마 신의 힘. 결국 그 방법은 신에게 차력(借力)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결국 술수의 일종이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정령을 일깨우는 방법 뿐만이 아니라 해방칠요를 여러개 들고 와서 그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절대 안될 것이다. 여동빈이 원하는 것은 그 모든 걸 버려두고 오로지 본신의 무(武)로 자신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럼 마지막 방법….”

나는 화안금정을 극도로 일으키며 품속에 있던 침을 뽑아서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대라멸진(大羅滅盡)의 수법으로 생사팔문을 열어 모든 능력을 다해 당신을 쓰러뜨릴 겁니다. 물론 이걸 쓰고 나면 죽겠지만요.”

[…….]

“이건 무(武)로 취급해줄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여동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덤벼라.]

덤벼라 -

나는 그 말이 아주 간결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쌓아왔던 침술과 의술이라고 하는 분야가 인정받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가자.’

나는 화씨일문 최악의 수법, 대라멸진을 펼쳐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여동빈에게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 분명하다. 그리고 문이 서서히 일깨워지면서 내 신체능력이 점차 차원이 다른 경지에 이르기 시작했고, 전신의 내공이 어마어마하게 증폭되며 천지와 감응하며 사방 수십 리에 용권풍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구구구구구!!

역시 대라멸진을 인간세상에서 개방하면 주변 자연지형을 바꿔버리는 위력이 나오는 건가. 중원 근처에서 하면 피해가 막대할 것 같았기에 일부러 변황 오지에 와서 싸우게 된 이유가 바로 이걸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태풍의 눈에 둥둥 떠 있는 나를 보는 여동빈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는데, 아마 거룡같은 초마물에 비하면 지금의 내 힘도 눈에 차지 않기 때문이리라.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한 일참(一斬)을 여동빈에게 날렸다. 머릿속에서는 예전에 해신을 베었던 혼연의 일참을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도 그 때의 완벽한 무예는 다시 펼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갈고닦은 모든 기본기를 가장 집중시켜서 펼친 예극(銳戟)으로 검선 여동빈을 물리치기를 기원할 뿐이다!

키잉

아니나 다를까, 여동빈은 지금까지의 99초처럼 내 일격을 흘리거나 막거나 반격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검선 여동빈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이기 때문인 듯 했다. 지금의 내 공격 하나하나는 우주홍황에서 지상으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는 충격력을 상회할지도 몰랐다.

월공투계(越空透界)

여동빈은 먼저 월공투계로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듯 했다. 저건 아무리 빠른 속도와 힘으로 공격하더라도 맞받아치는 게 가능한 또 다른 절대지경의 무학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월공투계라 하더라도 지금의 내 공격을 고스란히 반격까지는 할 수 없다는 걸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동빈이 예전에 백련교주를 일 합만에 살해했어야 정상이다. 월공투계는 힘의 격차까지 메워주지는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동빈은 반격의 순간에 무엇을 할지 아직 정하지 않은 듯 했다. 어설프게 반격하거나 흘리면 몸뚱이가 통째로 뭉개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백련교주와의 결전에서 여동빈이 늘 아슬아슬하게 싸웠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칼날 끝같이 예리한 통찰력이 필요했다.

‘무형검이겠지!’

육의성천도 심의육합 무형검!

그것은 여동빈이 최강의 적수를 상대로 늘 선보이던 최강의 검기였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형검이자 무예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어떤 극지이기도 했다. 나는 내심 무형검에 당해서 죽는다면 그 또한 영광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여동빈이 다음 순간 펼쳐낸 것은 무형검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반개하고 삼재검법의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마치 죽은 듯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동빈의 머리 뒤편에서 후광(後光)이 일어나는 게 내 눈동자에 서서히 비쳤다.

저건…?

마치 뇌 속의 신경이 도저히 다 잡아내지 못하는 듯한 무한(無恨)의 변화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여동빈의 삼재검법 자세가 더욱 단순해지더니 태을(太乙)의 자세로 변화했고, 거기에서 사상과 오행이 파생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동빈의 검 그 자체가 대자연을 품으며 부드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 흩어지고(墨雲散盡)

시구(詩句)가 귓가에 스치는 듯하더니, 여동빈은 어느 새 부드럽게 원(圓)을 그리며 내 검과 정확하게 검극을 맞추었다. 설마 이렇게 빠르고 강력한 공격에 검극을 맞추는 게 가능할지는 몰랐기에 내가 당황하자 여동빈이 이윽고 검초를 종결했다.

둥근 달만 중천에 외롭게 떠있다(月輪孤)

투둥!!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진흙탕 냄새가 코에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여동빈은 천천히 자신의 등 뒤에 검을 수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찰나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멍하니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으나, 여동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자여. 내가 그대의 공격에 최대절초로 화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

[그러나 힘에 힘으로 계속 부딪히면 결국 약한 쪽이 꺾이게 된다. 설령 무형검으로 그대의 절초를 반격하여 큰 상처를 입혔어도 팔문을 연 자는 한층 더 광폭해졌겠지. 그대가 강능단유(强能斷柔)를 원했으니 나는 그를 피하고 유능제강(柔能制强)을 꾀했을 뿐.]

“그…그랬군…요….”

쿨럭!!

나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선혈을 토했다. 나는 지금 여동빈의 공격에 딱히 큰 검상을 입은 게 아니었으나, 그에게 쏟아 부었던 내력이 고스란히 반사되어왔기에 엄청난 내상을 입고 말았다.

동시에 나는 여동빈이 방금 전에 펼쳤던 절초가 어떤 것인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여동빈의 검은 무한히 순환하는 형태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재조립할 수 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내 힘의 모든 것을 읽어내어 그 파동에 맞춰 모든 힘을 무(無)로 되돌린 것이다!

힘이 진공상태가 되어버리자 나는 팔문의 막강한 힘을 그대로 몸에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

이제 곧 죽을 지경인데도 분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존경스러웠다.

여동빈의 모든 기술이 절대지경에 근접한 나조차도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신기(神技)였기 때문이다. 수준이 예전보다 올라간 건 분명한데도 더욱 차이가 크게 느껴지니, 무예의 세계는 신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팔문을 열어서 힘으로 밀어붙여봤자 안 되는 거야….’

이번에는 여동빈이 마지막 일 초 째에만 힘을 쓴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처음부터 저렇게 싸울 수 있었으리라. 백련교주는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힘을 무한정 방출했으나 그는 나와 달리 자신의 힘을 되돌려 받아도 중화시킬 수 있었으며 절대지경의 경지도 여동빈보다 크게 낮지 않았기에 상황이 달랐다. 내가 설령 처음부터 대라멸진을 썼어도 여동빈을 쓰러뜨리는 건 무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경지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육의성천도, 월공투계, 천둔검법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신기(神技)에 손에 닿일 때까지 내 기술 그 자체를 연마해야만 한다.

“하핫….”

나는 뭔가 시원해져서 웃음을 흘렸다.

그 동안 칠요를 모으느니, 신과 협상하느니, 마도와 싸우느니 하는 온갖 굴레에 속박되어있던 것 때문에 제대로 무예를 마주볼 기회가 없었는데 뭔가 속이 시원해졌다. 진즉에 이랬어야 할 텐데 그동안 너무 세상의 변화에 끌려갔던 모양이다.

[그대는 이제 많은 걸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오….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갖고 있던 제약이 해금되었으니 그게 다행이오.]

얼마 전에 현천도인이 했던 말이 고스란히 생각났다.

그건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칠요나 술법, 세계의 비밀을 죽어라 캐고 다니던 상황에서 벗어나서 내 자신의 힘을 단련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 - 그것이 바로 24회차에서 얻게 된 굴레의 파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뭔가 내려놓은 표정을 짓고 있자 여동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패했는데 분하지 않은가?]

“질 만 해서 졌으니까요.”

[그게 언제나 진실이지.]

“마무리를 해 주시렵니까?”

[아니. 그대는 뭔가 생각하고 싶은 게 있는 듯하군.]

스스스

여동빈은 등을 돌리며 서서히 사라졌다.

[재미있는 싸움이었다….]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쓸쓸한 죽음이 시작된다.

“흐…흐흐.”

아프다.

나는 내부에서 격렬한 고통을 느끼면서 대라멸진의 최후가 다가옴을 느꼈다. 예전에도 몇 번 느꼈던 감각이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빗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와중에도 눈을 똑바로 뜨며 히죽 웃었다.

웃으면서 죽자.

희망을 얻었으니까.

그것이 나의 25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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