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88화 (78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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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현천도인은 내가 흑요석을 내밀자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그건 무엇이오?”

“제 기억을 타인에게 전송하는 보석입니다.”

“…그대는 술사(術師)구려. 허허….”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현천도인이 말했다.

“그런 술수의 도구를 섣불리 받을 순 없소. 그대의 정체를 밝히시오.”

“제 이름은 백웅이라 합니다.”

“어느 무예종파의 인물인지 구체적인 신분을 알고 싶소….”

“뇌신류(雷神流)의 사범자격이 있으며, 종사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내 말에 현천도인이 눈썹을 떨었다.

“뇌신류라면…, 음…, 들어본 것 같군. 뇌신류라 함은 백련교의 분파가 아니오?”

역시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 사대무류의 하나입니다.”

“허허… 백련교가 종종 정사파와 교류하려 하여 그들에게 어떤 무류가 있는지는 전해 들었으나…, 뇌신류는 과거 추방되었다 들었소. 그 말이 맞소이까?”

“맞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게 시간낭비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기억만 다 전해주면 이렇게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현천도인에게 말했다.

“뇌신류라 하지만 저는 사실 뇌신류가 아닌 다른 유파의 무공 또한 습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쉬쉬쉭!!

나는 근처의 연무장에 뛰어들어서 목검을 집어든 후 태극요지유검(太極曜志柳劍)을 기민하게 펼쳤고, 이어서 칠성둔영(七星遁影)의 보법을 그대로 시전했다. 또한 삼보절기의 변화를 사용하며 분영(分影)을 크게 일으켰고, 이내 만들어진 분신들이 차례대로 천둔검법의 초기형태와 무영탈혼검법을 펼쳤고 마지막으로 굴공참이 공간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우웅….

“……!!”

여기까지 펼치는 데는 고작해야 20여 초의 연무(演武)였으나, 현천도인은 눈을 부릅뜬 채 내 모든 움직임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칼끝을 늘어뜨리며 시연을 멈추며 말했다.

“무당파의 칠대절학 같은 것도 말이죠.”

“이, 이, 이럴 수가…. 태극요지유검…, 칠성둔영…, 그, 그건 분명….”

현천도인은 역시 칠대절학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더니 크게 고민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대는…, 장삼봉 사조의 전인이오? 혹은 명룡자 사숙조님의….”

현천도인에게 있어서 명룡자는 아득한 사조 그 자체였다. 그는 현 무당파를 이끄는 중진인 현자배 항렬이었으며 그 위에 청자 항렬이 존재하여 장문인과 대장로 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런 청자 항렬조차도 사숙이라고 공경하는 게 명룡자인 것이다. 나는 새삼 그간 만나왔던 명룡자의 무림서열을 이런 곳에서 확인하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현천도인. 난 그런 게 아닙니다. 무림의 서열로 나를 잴 순 없습니다. 그런 서열 매김으로 나를 이해할 순 없을 겁니다.”

“무…무슨 말이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장삼봉이든, 명룡자든, 소림신승이든, 백련교주든…, 무림의 그 누구라 해도 나를 잴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이건 내 재능이나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무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런 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소.”

“이 보석의 기억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어찌 그토록 수상한 물건을….”

“후우! 제 이름을 걸고 말하겠습니다. 흑요석이 해를 끼치는 거라면 즉시 자진하여 추한 목숨을 끊도록 하지요.”

내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하자 현천도인은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대는 정녕 우리 도관에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니오?”

“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요괴의 난을 일으켜 버려서 고명한 도인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눈빛은 진실되구려. 한 번 믿어보겠소.”

우웅!!

이윽고 현천도인이 흑요석을 받아들였고, 그에게는 24회차에 이르는 내 전생기억이 여과 없이 흘러들어갔다. 현천도인은 방대한 기억의 양에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잠시 후 진동을 멈추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전생자…. 그런 존재가 있을 줄이야. 게다가 그대와 나는 초면이 아니었다니….”

나는 현천도인에게 재차 포권했다.

“이렇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나, 음신지력이 유출되어 한 아낙의 몸속에 있는 아이가 반인반요가 되는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

“제 사정은 아실 겁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잠시 기다리시오. 생각을 정리하고 싶소.”

나는 현천도인의 말대로 가만히 기다렸다.

현천도인은 오랫동안 숙고하는 듯 하다가 탄식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24번이나 되는 생을 겪으며 정말 엄청난 모험을 했구려. 허나 아직도 남은 길이 구만리라니, 이 무슨 험난한 세상이란 말인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칠요를 다 모으고 일요의 시련까지 통과했는데 죽을 줄이야….

현천도인이 말했다.

“허나 그대가 대업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여 수습하려는 자세는 아주 훌륭하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돕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허허…, 세상에 이런 일이…. 음…, 대단해….”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겪었던 과거의 기억이 너무 규모가 커서 현실감각을 되찾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상당히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현천도인이 잠시 후 정신을 찾으며 말했다.

“도술(道術)을 부릴 도구를 준비할 테니 준비가 끝나면 함께 누상으로 가면 되겠소.”

“기다리겠습니다.”

파앗!!

나는 현천도인이 준비를 끝마치자 바로 누상 마을에 있는 조영춘의 집으로 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막 아침이 되어 있었고 하인들이 빗질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현천도인과 함께 조영춘의 집 앞에 서서 말했다.

“현천도인. 어떻게 일을 해결해야 할까요?”

“일단 본도에게 맡겨두시오. 그대에게도 차분하게 설명하며 일을 진행하리다.”

저벅

현천도인은 조영춘의 집으로 걸어 들어간 후 조영춘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본도는 무당의 현천도인이라 하오….”

“……? 무당파의 도사님이시구려. 헌데 난데없이 우리 집엔 왜….”

조영춘은 현천도인의 인사를 받으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현천도인이 그에게 말했다.

“간밤에 부인의 태내에 사악한 요괴의 기운이 깃드는 걸 느꼈기에 멀리에서 한달음에 오게 되었소.”

“뭐, 뭣이.”

“아이는 산모를 죽이고 태어나서 자라며 주위에 재앙을 일으킬 것이오. 그 재앙을 막으려 왔소.”

“미친!! 이봐, 이놈들을 쫓아내!!”

조영춘은 당장 얼굴이 시뻘개져서 악을 내질렀다. 그러자 사방에 있던 하인들이 달려들었는데 나는 황당해져서 현천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니,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일은 섣불리 대상을 속이는 게 더 안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소. 모든 걸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소이다.]

투두둥

“으아악.”

이윽고 현천도인은 내가 나서지 않았는데도 가볍게 태극권과 내가기공으로 십여 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조영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자 현천도인은 도호를 외우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와 부인, 태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외다. 다행히 빨리 도착했으니 요기만을 쫓아낸다면 아이가 반인반요로 태어나는 일을 막고 정상적인 산월을 맞이할 수 있소이다.”

“으으…, 그런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그대의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대로 아이가 태어나면 죽는 건 아이와 산모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몰살당할 것이오.”

“…….”

“이건 내가 태정관을 열기 전, 무당파의 장로였음을 증명하는 법패요…. 이걸 받으시오.”

현천도인이 법패를 던지자 조영춘은 얼떨결에 받았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내 스스로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소. 그리고 그대는 그 법패를 가지고 가서 무당파에서 모든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저…정말로 내 아내에게 그런 재앙이 닥쳐왔단 말이오?”

“그렇소.”

“어쩔 수 없군….”

이윽고 우리는 조영춘의 안내대로 만삭의 아내에게로 갔다. 현천도인은 그녀에게 모든 상황설명을 한 후 말했다.

“그대들의 협조가 필요하오. 폐쇄된 방에 산모와 우리 둘만 있어야 하며 그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되오. 누군가가 도중에 문을 연다면 요괴가 빠져나가고 말 것이오.”

“알았습니다.”

우리는 조영춘이 마련한 작은 방에 산모와 함께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수혈을 짚어서 잠에 빠뜨린 후 현천도인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

현천도인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선은 진무대제(眞武大帝)의 힘을 빌리는 태령적송(太領赤松)의 술(術)을 시전하여 그녀 몸에 있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낼 것이오. 만일 그 방법이 안 된다면 백웅 그대가 나서야 할 것이오.”

우우우우우

현천도인은 술법도구를 가득 펼쳐놓고 도가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이 반각을 넘어가자 나는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동안 술법을 시전하는 자들이 주문도 안 외우거나 의지만으로 대술법을 써대는 걸 너무 자주 봐 왔던 것이다. 물론 신공표나 환신 천우진 같은 자들은 역사상 최고를 다투는 술법사들이니 비교를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쿠구구….

주우욱!!

이윽고 태령적송의 술법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는지 임신한 아낙네의 뱃속에서 새파란 기운이 실처럼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또한 그 술법을 유지하고 있는 현천도인은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으며 전신에 핏줄이 빳빳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오오오오…!!!”

그는 모든 진기를 쏟아 붓는 듯 했다. 그리고 줄을 약 두 척 정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내 힘이 풀렸고, 새파란 기운이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억! 허억! 허억…. 쿨럭…!”

현천도인은 탈진한 듯 기침을 토해냈다. 기침에는 선혈이 섞여 있어서 그가 진원진기를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허허…. 너, 너무나 강력하구나…. 이것이…, 신화시대의….”

그는 장탄식을 하다가 내게 말했다.

“이제 백웅 그대가 나설 수밖에 없소. 아니, 처음부터 그대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

“무슨 말입니까?”

현천도인이 우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태령적송의 술법은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퇴마주문이었소. 허나 이게 통하지 않으니, 같은 종류의 힘인 음신지력을 감응시켜서 그대가 빨아내어 체내에 흡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음신지력은 요력을 다루는 것과 같으며, 그대는 미호라는 요괴에게서 요력을 다루는 법을 배웠소…. 또한 내가 술수를 써서 음신지력의 윤곽을 드러냈으니 지금 잘하면 재흡수가 가능할 것이오.”

“음! 해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속의 음신지력을 강하게 돋우면서 아낙의 손을 잡았다.

‘느껴진다.’

확실히 현천도인이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지난번에는 느껴지지 않던 음신지력의 조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조각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음신지력의 총량에 비하면 1할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었고, 조각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 몸에 흡수되었다.

슈욱!!

‘끝난 건가….’

너무 쉽게 끝나버린 느낌이다. 내가 현천도인에게 끝났음을 알리자, 그는 잠시 충격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러더니 현천도인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조영춘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이제 나가면 되오….”

우리는 조영춘과 그 아내에게 일이 모두 해결되었음을 알리고 집을 나섰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부디 이걸 받아주십시오.”

“필요 없소….”

조영춘은 자신이 가진 금괴를 주고 싶어 했으나 우리는 필요 없다고 하고는 근처의 산야로 향했다. 한참을 걷고 있던 현천도인이 말했다.

“백웅이여….”

그가 뭔가 말하고 싶어서 걷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현천도인.”

“사실…, 그대에게 태령적송의 주문을 그냥 가르쳐주고 요령만 알려줬다면 될 일이었소. 허나 나는 억지로 내가 해결해보고자 그대와 동행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오….”

“…….”

“하지만 역시…, 힘이 하나도 미치지 못하는군….”

현천도인은 크게 한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함께 싸워왔던 전우이자 빚을 지기도 한 대상인 현천도인이 괴로워하자 마음이 껄끄러워졌다. 나는 현천도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현천도인이 아니었다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백웅이여…. 태령적송의 술법이 어떤 술법인지 아시오?”

“잘 모릅니다.”

“나는 갓난아이일 때부터 무당파에 맡겨져서 줄곧 무당파의 무공과 법술을 배우며 자라왔소. 술수에도 재능이 있어서 무당파 술도사의 수련도 했기에, 나는 아마 퇴마능력으로는 무당산에서도 세 손가락에 든다고 자부하오.”

“그랬군요.”

“무당파는 천하제일 도문이니…. 무공으로 나를 넘어서는 본산의 고수들이 많으나 두 가지를 다 할 줄 안다는 게 본도의 자랑이었소….”

나는 현천도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현천도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얼굴은 굳기 시작했다.

“태령적송의 술법은 진무대제의 힘을 강령하여 퇴마를 하는 술수인데 무당파에서 가장 강력한 퇴마주문 중 하나요. 그리고 본도는 그 주문을 수십 년이나 수련했소. 그러나…, 15년 치의 음신지력 중에서도 찌꺼기나 다름없는 미약한 힘에 상대도 되지 않고 패배해버린 것이오. 본도는 살면서 수십 번의 퇴마행을 했으나 이런 일은 처음이오. 모든 요괴가 태령적송의 주문을 맞으면 바로 소멸되거나 도망치기 바빴단 말이오.”

“……!!”

“그것이 바로 신의 힘…. 삼황오제의 잔재일 뿐일진대 인간계의 어떤 퇴마사도 상대가 되지 않는 엄청난 잠재력을 의미하오. 본도가 이토록 밀린다면 세간의 퇴마사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었소. 이대로 놔뒀다면 사상 최강의 반인반요가 태어났을 것이오. 그대의 동료라는 환신 천우진이 오지 않는 이상은….”

아까 그 광경은 그런 뜻이었단 말인가?

‘현천도인이 조영춘에게 했던 말도 협박이 아니라 전부 사실이었어….’

제갈사가 가볍게 넘기라고 한 일이었으나 역시 엄청난 대사건이었던 게 분명하다. 내가 내심 아찔해하고 있자 현천도인이 말을 이었다.

“허나 백웅 그대는 신력으로 신력을 흡수하는데 성공했소. 이는 그대가 가진 잠재력이 이미 인간세계의 그것을 초월했다는 뜻….”

현천도인이 한숨을 쉬었다.

“평생 정의를 추구해왔으나, 그대의 동료가 되기엔 너무 늦어버렸구려…. 허허….”

“…….”

나는 현천도인의 안타까움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나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격차가 너무 커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좌절해버린 것이다. 무공은 물론이고 술법의 영역에서라도 나를 돕고 싶어 했지만 그마저도 음신지력 하나로 다 해결이 되는 상황이었다.

현천도인이 말했다.

“또한, 지금 그대의 기억을 되새기고 나니 너무나 살아갈 의욕이 없소….”

“네?”

“이 무력감을 걷잡을 수가 없구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현천도인의 눈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그의 눈빛 내부가 공허하며 힘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단번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게 분명했기에, 나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단 말인가?

비틀

나는 현천도인이 쓰러지려 하는 걸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다행히 심맥을 끊어 자진하지는 않은 듯 했으나 지금의 그는 밀짚인형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제 기억이 어때서 말입니까? 그게 삶의 의욕을 잃을만한 이유가 된단 말입니까?”

“…허허.”

그는 근처의 버드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그대 주변에는…, 천재와 영걸이 대다수였으며 의지력이 강한 동료가 많았지…. 그래서 그대의 기억이 이미 종말(終末)을 증명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던가….”

“무슨 말이죠?”

현천도인의 백색 수염이 떨렸다.

“백웅 그대는 전생자로서 천상천하에 숨겨져 있던 금단의 비밀을 헤집어 꺼냈소…. 그 의미는…, 우주적 절망(絶望).”

이어진 현천도인의 말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 세상의 윤회는 박살났으며, 죽은 자는 신의 뱃속으로 들어가며, 본디 대지모신이었던 구천현녀께서는 황제의 수하로 전락했으며, 거짓 창조신 여와가 서왕모를 내세워 천계를 지배하며, 인간은 괴물들의 장난감에 불과하며, 온 우주의 사악한 신들이 몰려와서 파멸을 예고했으며, 수백 년 후에는 모든 것이 절망하는 종말과 계시가 기다리고 있음이라….”

“…….”

“허허…, 미치지 않은 내 자신이 원망스럽소. 어설프게 수양을 했기에 더 괴롭다니….”

나는 이어진 현천도인의 슬픈 웃음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구원이 존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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