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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25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외양간에 드러누워서 멍하니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뭐지…?’
너무나 허탈하다.
칠요를 다 모은 것도 생전 처음이었고 모으자마자 칠요의 시련에 도전해서 최후인 일요의 시련까지 다 뚫은 것도 엄청난 쾌거이다. 이제야 황제와 만나서 뭔가 내 행로에 큰 진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육요를 바쳐버리는 바람에 의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어서 실패해 버리다니!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또 한 번 칠요에 도전해서 그 정도 성과를 이룰 수 있느냐이다. 육요를 지상에서 다 모으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난이도와 행운이 뒤따랐기에, 이번 생에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게다가 파천의 가호가 없다면 일요의 최종수호자인 구천현녀와 응룡의 힘을 이겨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칠요를 다 모으는 건 포기해야만 하는가?
나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암담한 마음에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음머 -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있자 외양간에 살던 소, 황금이가 내 근처로 와서 머리를 쓰윽 문질렀다.
“…그래. 고맙다.”
나는 황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문득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첫 생부터 내 편이었던 녀석은 이놈밖에 없구나.’
황금이도 언젠가는 편하게 살게 해줘야 할 텐데….
그러나 현재 상태로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윤회가 끊긴 채 그저 지배자의 뱃속으로 들어갈 뿐이니, 현생에 내가 누구를 돌본다 한들 크게 의미가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신을 없애서 결판을 내는 방법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윤회(輪回)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에게는 왜 저승이 필요한가?
인간은 왜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거지?
정말 엉뚱한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직접 명계, 죽음, 세계의 생멸(生滅), 신의 권능을 보아왔던 내게 있어서는 현실적인 의문으로 다가왔다. 물론 윤회체계가 있어야 지금처럼 살아있는 존재가 죽은 후 [옛 지배자]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사태를 피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어째서 생(生)을 반복해야 하냐는 의문이 든 것이다.
누군가는 천암비서를 이용해서 무한히 생을 거듭하는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인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야 할 과업이 너무 엄청나게 어려워서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뿐, 무한한 삶이란 건 저주에 가깝다고 확신하고 있다. 설령 내가 인간 세상에 더없는 지복을 수천 년이나 누리게 되다 하더라도 내 견해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냥 한 번 살다가 죽는 게 제일 좋다.
난 단지 해야 할 일이 있을 뿐….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이 반복된다 생각하면 염증이 난다. 천암비서로 특권을 얻은 나조차도 이럴진대 보통 인간일 경우 전생의 기억이 이어지면 처음에는 좋아라 하다가 나중에 가면 혹독한 저주에 비명을 지르리라.
그런데도 고대에 천상천하의 대존재들이 ‘윤회’라는 체계를 굳이 제작했던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한 번 죽고 다 끝내주면 안 되나?
‘한 번 물어나 볼까.’
나는 윤회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뜬금없이 변덕이 생겼다. 그래서 이 소을촌(小乙村)에서 단번에 벗어나곤 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나는 대뜸 촌장의 집을 향해 찾아갔다.
타다닷
멸혼보를 쓰자 촌장집까지는 거의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야밤중이었기 때문에 촌장의 큰 집안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가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나는 여기에 온 지도 오랜만이었으므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촌장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드르륵
“…….”
촌장은 서씨(徐氏) 아낙네와 알몸으로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서씨는 촌장의 첩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처가 투기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촌장의 권력이 세서 어찌어찌 다 같이 납득하며 사는 처지였다. 물론 나는 그런 건 별로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서씨의 수혈을 눌러서 더 깊이 잠들게 하고는 촌장의 뺨을 살살 치면서 깨웠다.
“일어나.”
“어…어엇? 소똥이?”
촌장은 일어나자 크게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내가 비명을 못 지르게 큰 소리를 못내는 혈을 눌렀기에 억누른 목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또한 몸도 잘 움직일 수 없자 큰일 났다는 걸 깨달은 듯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무슨 짓이냐. 네 녀석이 설마 나를….”
“죽이진 않으니까 옷 입고 따라와라. 물어볼 게 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근처에 있던 강철 장식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공을 불어넣어서 엿가락처럼 마음대로 꼬다가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으로 불태워버렸다.
“좋은 말로 하지. 소란 안 피우는 게 좋을 거다.”
“헉….”
내가 무공의 고수라는 걸 알아챈 듯 촌장은 입을 다물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촌장과 함께 방에서 빠져나와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경공으로 근처의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촌장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몸을 덜덜 떨면서 내게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소똥아 내가 잘못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다오!”
“…그럴 필요 없어. 난 지금 당신한테 원한 같은 건 없다.”
이미 한 번 죽였으니까.
내 목소리가 한없이 건조하자 촌장은 뭔가 이상한 걸 알아챈 듯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특유의 눈치로 내가 원한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자 도리어 더 의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촌장. 당신은 내 부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무, 물론. 네 부모에 대해 물어보려고 온 거냐?”
“당신은 예전부터 내 부모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가 뭐지?”
“…….”
촌장은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네게 말해봤자 좋을 일도 없고 내게 중요한 일도 아니라서….”
“뭐 그렇겠군. 그럼 내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나?”
이 이야기는 예전 2번째 삶에서 촌장을 직접 다그치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촌장은 자기 입으로 내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날 거두어줬다고 했었다.
“그랬…다.”
“왜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 당신 말로는 내 부모는 평범한 농민이었어.”
촌장은 연속된 추궁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청년시절에 네 아버지가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한 나를 건져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얘기군. 지어낸 건 아니겠지?”
“아, 아니다! 나와 네 아버지는 또래였는데 다 같이 모여서 술 마시다가 내가 발을 헛디뎌서 빠졌는데 네 아버지가 날 구해줬다.”
“그건 은혜일뿐이잖아.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 일이 아닐 텐데?”
“어…, 그건….”
촌장은 내 눈을 피하려 하다가 문득 뭔가를 알아챈 듯 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넌 누구냐?”
“무슨 말이지.”
“넌 내가 아는 소똥이가 아니야…. 그 눈빛…, 다…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
촌장의 갑작스러운 태세변환은 조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소똥이가 자기한테 원한을 품고 죽이려 한다는 공포심이었지만, 지금의 촌장은 완전히 미지의 괴물을 앞둔 듯한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삶의 경륜 덕분에 그냥 내 눈빛과 말투만으로도 큰 이질감을 느낀 것인가?
나는 촌장에게 말했다.
“맞아. 난 소똥이가 아니라 백웅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당신은 내게는 벌레같아서 사실 상대할 마음도 들지 않아. 원한조차 느껴지지 않는군.”
“……!!”
“본론으로 돌아가지. 왜 미안했던 거지?”
“…그가 내 목숨을 구해줬지만 나중에 그가 가난할 때 돈을 안 빌려줬기 때문이다…”
“뭐?”
“그, 그냥 그게 다다. 그 이후에 마을에 역병이 돌았던 건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그냥 돈을 안 빌려준 게 미안해서 그랬다….”
어린 내 기억에도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내 아버지가 촌장한테 돈을 꾸러 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거절당했던 것이다.
“왜 안 빌려줬는데?”
“아까워서…. 가난한 놈인지라 돈 빌려준 걸 못 받을 것 같았다.”
“하아….”
나는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겨우 그런 거였단 말인가?
‘…나한테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없구만. 난 그냥 소을촌의 소똥이였어.’
나는 이제 와서 새삼 그 사실을 확인하자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하도 나를 만나는 신격들이나 초월자들이 나를 엄청난 존재 취급하고 있길래, 나는 사실 내 아버지나 내 머나먼 조상이 굉장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내 혈맥의 힘으로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내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이었고, 기껏해야 마을촌장은 구명지은을 입었는데 돈을 안 빌려줬던 것에 미안함을 느낀 것뿐이었다니! 하긴 저것만 해도 나쁜 놈이긴 했으나 평범한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관계이자 원한에 불과했다. 내 아버지든 어머니든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리라.
나는 촌장에게 말했다.
“촌장. 그런건 됐고 당신은 만일에 이 세상에 환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어…, 가능하면 차, 착하게 살 것이다.”
“왜?”
“이번 생에 착하게 살아야 다음 생에 복을 받으니까….”
“그럼 당신이 이번 생에 예쁜아낙을 권력으로 협박해서 첩으로 들이고 가난한 농민들한테 으스대고 종종 나쁜짓도 하는 이유는 환생이 없다고 생각해서란 말인가?”
“뭐…, 그야….”
촌장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한번 살다 죽는 건데 뭐 하러 힘들게 착하게 살겠나…. 편하고 즐겁게 살면 장땡이지….”
“…….”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촌장이 딱히 구제불능의 악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망량을 만나기 전의 나 또한 촌장과 별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무림고수가 되어서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망에 천년설삼을 찾아갔고 좌충우돌하며 내가 꼴리는 대로 살았다. 단지 재능이 없다보니 계속 뭔가 막혔고, 그러다보니 패배자와 약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어 세상을 구하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아니, 촌장 뿐만 아니라 이 중원대륙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이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한번 사는 인생 재밌고 즐겁게 살고싶다는 게 중원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현세지상주의였다.
나는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촌장. 오늘 했던 얘기는 발설하지 않고 그냥 머릿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천천히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동시에 이혼대법을 발동하며 그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떠올리기도 힘들겠지만.”
나는 이혼대법을 써서 그의 기억을 혼미하게 만들고는 원래 자리에 갖다놓고는 소을촌을 떠났다. 그리고 머릿속에 제갈사의 마지막 이야기를 떠올렸다.
[백웅. 알겠냐? 네가 특이점을 끌어들이는 선택을 해버린 이상 다음 생에 해야할 일은 고정되어 버렸어.]
지난번 생에서 응룡에게 도전하기 직전, 왕권으로 소환된 제갈사가 상당히 화를 내며 말했었던 게 기억난다. 그는 내게 최후의 헌책을 했었다.
[다음 생이 시작되면 챙길 것만 빠르게 챙기고 바로 나한테 찾아와라. 망량말고 나한테!]
[왜?]
[예전 네 기억에 따르면 특이점은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음 생에 너는 다른 걸 할 여유가 없어. 넌 25번째 삶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도전할 준비를 해야한단 말이다.]
[…음, 그렇군! 근데 망량한테 들렀다 가도 별로 상관은 없는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반론하자 제갈사가 말했었다.
[아니. 죽는 건 너랑 나로 충분하지.]
[…뭐?]
제갈사는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었다.
[그런 게 있어. 시간이 없어서 설명할 수가 없군. 아무튼 닥치고 나한테 제일 먼저 와라. 이 말을 결코 어기면 안 돼.]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재빨리 축지법과 경공을 섞어 쓰며 천암비서를 챙기고, 그 다음으로는 비등을 얻어냈다. 그리고 비등을 얻어내자마자 제갈사가 있는 장령곡으로 향했다.
파앗!
나는 장령곡에 도착하자마자 제갈사를 볼 수 있었다. 제갈사는 뭔가 마도의식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는 그에게 외쳤다.
“제갈사! 나는 전생자다. 내 기억을 받아라!”
제갈사는 흐음, 하고 자기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미친 놈이군…. 나가서 죽어주면 안되겠냐?”
“…….”
할 말이 없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의 호기심을 돋우면서 제갈사를 설득해서 그가 흑요석을 받게끔 만들었다. 제갈사는 흑요석으로 기억을 받게 되자 뭔가 기억을 크게 정리하는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하…. 역시 나로군.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건가.”
“어떤 방법인데? 혹시 추측해낸 거냐.”
“아마 전생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계책은 이거 였을거다.”
제갈사는 광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숨도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고 아오키가하라 수해를 박살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