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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기이한 장소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상세계는 물론 내가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건축양식으로 이뤄진 장소였으며 바닥은 반투명한 보석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고 커다란 기둥에는 외계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꿀렁….
그리고 건물 밖에는 물이 한 차례 유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꺼먼 어둠 너머가 아마도 물, 혹은 바다일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방에는 심상치 않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 정적 속에 살기나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할 뿐이다.
나는 도리어 그 정적이 기분 나쁜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떤 장소인 것인가?
‘제길. 소리나 쳐 볼까?’
나는 신농과 협상하던 중에 난데없이 납치당한 셈이었기에 불안해졌다.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서 나를 빼내서 공간이동 시킬 정도의 존재였으므로 심상치 않은 자인 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얘기할 거면 빨리 얘기하고 끝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육감(六感)이 발동해서 그게 안 될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왜인지 여기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위험할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주위를 잘 살피면서 감각을 돋우며 최대한 조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
내가 잠행술(潛行術)을 이용해서 약 오십여 장을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일직선을 쭉 뻗어있는 이 건물복도의 맞은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리 로 오 라….]
부름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누구의 손아귀에 있는지를 끔찍할 정도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신언이라고 해도 서로 울리는 성향의 차이가 있었기에 개개인을 구분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부름은 내가 익히 겪어본 적이 있었던 부름이다.
‘아…안 돼! 설마!!’
나는 기가 막혀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에 존재하는 끔찍하고 사악한 외계(外界)의 건축물과 부조, 그리고 기둥 주변에 돋아나있는 촉수처럼 생긴 조그마한 식물. 자세히 보면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기둥 사이를 막고 있는 물의 벽 쪽으로 다가가서 검강으로 쪼개 보았다. 그러자 시꺼먼 어둠의 벽이 일순간 잘리면서 그 너머로 가득 차 있는 바다, 그리고 바다 너머에 또 다른 기이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비교적 고지대이며 한눈에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임을 알 수 있었다.
“…….”
틀림없다….
나는 필멸자에게 가장 악몽 같은 공간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곳은 해저(海低)의 도시. 그리고 마신(魔神)들이 웅거하며 별이 제자리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전설의 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나는 비등을 통해서 수도 없이 이곳의 풍경을 흐릿하게나마 보아왔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츄아악!!
형용하기 힘든 사악한 무언가가 마치 장어처럼 몸을 크게 펴면서 부상하는 게 바다 너머로 보였다.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저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또한 [옛 지배자] 수준이었으므로, 나는 몸을 움찔거리며 떨었다.
옛 지배자가 마치 동네주민처럼 돌아다니는 이 장소.
이 회랑의 끝에서 기다리는 군주의 정체는 익히 짐작 가능하다.
흉신(凶神)이라면 염제 신농의 손에서 나를 빼낼 만 한 것이다.
“자살해야겠군….”
나는 단번에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모험을 하며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내가 스스로 자살을 택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는커녕 완전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우드득!
하지만 내가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서 목에 꽂아 넣으려 하자 손이 갑자기 멈췄다. 내가 검극을 칼에 향한 채 뻣뻣하게 굳어있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리 로 오 라…]
죽음을 허용할 수 없다는 권능이다.
‘이익.’
나는 이번에는 심맥을 모조리 끊어보려고 했으나 역시 통하지 않았다. 어찌된 게 그의 마력은 내가 자살하려는 걸 모조리 막을 수 있는 걸로 보였다. 하긴 흉신이라면 그게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나는 더할 수 없는 암담한 절망에 직면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일요를 얻는 것까지 성공했는데 이제 와서 흉신과 독대하게 되었단 말인가?
‘크윽…, 제기랄…!!’
방법이 있다면 있다. 최후의 방법까지 쓰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끔찍한 파멸과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에 섣불리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분노와 절망 때문에 꿈틀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말이 들려왔다.
[…전 생 자 여…. 인 간 처 럼 굴 지 마 라….]
휘리릭!!!
“으아악!!”
나는 갑자기 회랑 저편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촉수에 휘감겨서 끌려가고 말았다. 그 촉수는 차원을 마구 통과하는 듯 주변 광경이 무채색과 무지개 색을 오가면서 차원의 벽을 뚫는 광경이 마구 보였다. 역시 이 회랑은 평범해 보였으나 무수한 차원의 방벽으로 연속 차단되어 있는 기이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투둥
나는 사방천지가 촉수로 가득 뒤덮인 끔찍한 신전(神殿)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바닥이 부드러워서 전혀 아프지 않았으나 그 바닥에 꿀렁거리는 점막과 그 밑의 액체가 녹색 흐름으로 떠도는 걸 보자 비위가 상할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이(妖異)하게 흩날리는 무수한 포자와 촉수들을 보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신전의 어둠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 과 율 이 넘 쳐 흘 러 예 상 치 못 한 지 경….]
내가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 흉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객 인 의 방 황… 이 대 로 는 너 무 시 간 이 오 래 걸 린 다…. 어 쩔 수 없 었 다….]
객인?
방황?
시간?
나는 흉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이 놈은… 삼황오제와 뭔가 달라.’
힘이나 권능으로 치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흉신은 예전부터 삼황오제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삼황오제의 목적이 세계의 존속과 유지라고 한다면 흉신의 목적은 그것과 아예 다른 영역으로 보였다. 세계의 멸망조차도 흉신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옛 지배자]들과도 행동양식이 아예 달랐다.
그렇다.
흉신은 삼황오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내가 그 사실을 직감하고 있을 때 흉신이 말했다.
[그 대… 영 생 을 누 리 며… 죽 음 과 저 승 의 열 쇠 를 지 닌 자 여…. 그 대 를 위 한 복 음 이 울 려 퍼 질 때 를 찾 아 … 일 곱 별 을 모 았 는 가….]
“…….”
[천 상 의 깨 달 음…. 복 음 이 깨 어 나 는 그 때 는… 그 걸 로 는 알 수 없 으 리 라….]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어느 새 흉신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의문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흉신은 필멸자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며 모든 이들이 미지로 생각하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지금의 흉신은 내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다는 인상이 강한 것이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둠 너머,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흉신에게 외쳤다.
“내가 천상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천상의 깨달음이나 복음이니 하는 건 비유나 은유가 분명하다. 뭔가 의미가 있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말의 뜻을 알고 싶었다.
그러자 흉신이 서서히 말을 이었다.
[그 대 는… 처 음 이 아 니 다 …. 이 기 회 를 틈 타… 석 판 의 비 밀 을 말 해 주 겠 다….]
“뭐?!”
[그 대 는 거 짓 된 증 거…. 모 든 것 의 시 작 이 되 종 말 인 존 재 여…. 결 국 그 대 는 천 상 의 ….]
우우우우우!!
그 순간이었다. 흉신이 뭔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 갑자기 내 품 속에 있던 일요(日曜)가 거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황색 빛을 내뿜으며 공간을 크게 잠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 흉신은 껄껄 웃는 듯 했다.
[황 제 공 손 헌 원…. 여 기 까 지 인 과 율 을 읽 었 는 가…. 집 착 가 득 한 자…. 누 설 을 피 하 기 위 해… 세 계 를 멸 망 시 키 려 는 그 의 지….]
그러더니 빛이 더더욱 강해져서 이내 공간을 완전히 집어삼킬 지경이 되자 흉신이 말했다.
[좋 다…. 유 희 의 종 말 까 지 기 다 려 주 지….]
파앗!!
나는 일요와 함께 바다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흉신이 있던 수저의 도시에서 탈출해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듯 했다. 나는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일요가 내 몸 주변에 광막을 만들어서 보호해주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일요…. 과연.’
설마 흉신의 면전에서 나를 탈출시켜줄 수 있다니?
나는 일요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흉신의 힘은 삼황오제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지도 몰랐는데 그 앞에서 대놓고 나를 탈출시켜주는 힘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다른 해방칠요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안 움직이네….”
문제는 이 광구가 내 의지대로는 안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나는 수면 위에 둥둥 떠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광구가 움직일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윽고 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걸 느꼈다.
쿠구구구
별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 했다.
“하늘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이 마치 회전을 하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저게 무슨 일인지 몰라서 의아했지만, 이윽고 태양이 먼 하늘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
너, 너무 큰 거 아닌가?
나는 태양의 크기가 평소에 보던 것보다 세 배는 커져있다는 걸 알아채고 눈을 크게 홉떴다. 동시에 바닷물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고 수면이 단번에 일 장은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태양이 세 배나 커졌다는 건 그만큼 태양이 이 별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도 태양은 계속 커져서 어느 새 평소의 다섯 배나 커져 있었다.
“더워…!!”
갑자기 어마어마한 더위가 내 근처에 덮쳐왔다. 일요의 광구가 더위를 막아주는 건 아닌지 나는 푹푹 찌는 기분과 함께 열사사막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태양의 크기가 의미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태…태양이 가까워지는 게 아니야. 이건….’
태양이 커지는 거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태양이 이 별로 가까이 다가온다면 지금보다 더 급격한 변동이 일어났을 텐데 태양 그 자체가 팽창하고 있는 중이기에 비교적 적은 변화가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이게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게 전례 없는 이상기후라는 사실이었다.
쩌저적
하늘이 황색으로 일렁인다. 나는 태양의 크기가 계속 커지면서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일요가 번쩍거리면서 빛을 더해가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기상이변의 근본원인이 일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일요가 태양을 부르는 것인가.
동시에 나는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재난이 일어나는 이유가, 시험의 막바지에 나무에 박힌 보석에 칠요를 대응시키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했어야 칠요의 힘이 안정되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을 텐데, 그게 되지 않으니 일요의 힘만 폭주하는 지경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이런 건 재빨리 신에게 넘겨야 해! 나는 목소리를 높여 신농을 불렀다.
“신농이여!! 일요를 바칩니다 빨리 가져가십시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설마 벌써 이 별을 떠나버린 걸까?!
위이이잉
위이이잉
[&&*%^%]
[#&^@@#*@….]
그런 내 생각은 틀린 게 아닌지 여기저기에 [옛 지배자]로 보이는 거대한 존재들이 허공으로 떠올라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지배자들은 마치 투덜거림처럼 들리는 외계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딱 봐도 일요로 인한 이변 때문에 불에 덴 것처럼 피하는 형상이었다. 나는 재빨리 흉신에게 외쳤다.
“휴, 흉신이여 일요를 바칩니다!!”
…….
흉신도 안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던 신들이 모조리 침묵하자 크게 당황하면서 삼황오제를 모조리 한 번씩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내 부름에 응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제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처럼!
‘뭐야?! 일요를 그렇게 갈구하더니 왜….’
쿠구구구!!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도 태양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어느 새 하늘의 3할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진 태양 때문에 나는 피부가 완전히 구워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진짜 세계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듯 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크아아악!!”
이대로는 산 채로 불타죽는다!!
나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제기랄….”
퍼억!!
전신의 심맥이 터지더니 내 몸이 피로 물들었다.
[…다시 시작하라. 천상에 도달할 때까지….]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태양 한가운데에 서 있던 존재의 목소리를 들은 듯 했다.
설마 저 놈이….
그것이 내 24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