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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일요를 손에 들자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얻으려고 무려 24번이나 죽었다니….’
아니, 그 이상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100번을 죽고 나서야 칠요의 시련을 극복하고 일요를 성취했다고 해도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그만큼 칠요의 시련은 정상적인 난이도가 아니었으며 그걸 모으는 것조차도 무시무시하게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사실 창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창힐이 지니고 있던 왕의 운.
그게 내 운과 합해져서 내 운명을 여기까지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창힐은 천암비서에 먹혀서 소멸했으나 어쨌든 내가 힘들었던 구간을 넘기게끔 해준 것이다. 물론 놈에게 고마운 감정 따윈 들지 않았으나 이번 삶에 우여곡절이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
응룡의 여의보주가 일요라는 걸 알게 된 건 다행인데, 이제 뭘 해야 하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시련장에서 일요를 손에 든 채 광활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중앙의 시련장 주변에 몰아치고 있던 혼돈의 바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바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원래대로 평지가 나타나는 데에는 약 한 식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때까지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바다가 다 사라졌어. 이제 불러볼까?’
왕의 권능으로 동료들을 부른다!
나는 주위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자 동료들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내가 의지를 모아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주위는 그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당혹해서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시련이 끝났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만 적용되는 왕의 권능도 사라진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일요를 얻은 건 좋은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내팽개쳐 둔다는 말인가.
하지만 응룡도 말했듯이 만신전에 가는 것과 일요를 얻는 건 별개의 일이었기에 나는 생각을 달리 먹기로 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일요의 구슬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문자가 없어.’
창힐이 새겨두었다는 ‘최초의 문자’나 갑골문 같은 게 전혀 새겨지지 않았다. 사실 응룡이 물고 있던 여의보주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육요(六曜)와는 달리 일요만큼은 창힐이 장난질을 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일요는 해방 상태인 걸까?
그리고 어떤 능력이 있는 건가?
나는 일단 이 공간에서 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일요를 들고 외쳤다.
“일요여! 나를 지상으로 내보내 줘.”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일요에는 공간을 이동시켜주는 신통력 같은 건 없는 듯 했다. 나는 일이 이렇게 되자 황망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최후최강의 칠요라고 하는 일요가 뭐 이리 초라하고 밋밋하다는 말인가?
그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공간 전체가 뒤흔들리고 평야에 지진이 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땅에 상흔이 생겨서 절벽이 만들어질 정도의 진동이었기에 나는 급히 중앙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아, 설마?”
나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전 혹시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무의 밑동을 살펴보았다.
기둥에 일정한 간격으로 총 일곱 개의 보석이 박혀 있으며, 그 보석들이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석들은 저마다 색깔이 달랐다.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도 조사했던 것이지만 나는 이제야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나는 혹시하는 생각이 들어서 보석들 중 월요를 상징하는 듯한 백색 보석을 찾았고, 바로 왼쪽에 화요를 상징하는 붉은 보석을 발견했다. 칠요가 순환한다고 본다면 백색 보석의 옆에 있는 게 아마 일요를 상징하는 자리일 것이다.
‘황색(黃色)이 일요인가….’
나는 황색 보석에 일요를 갖다 대 보았다.
위잉 -?
그러자 보석이 영롱한 빛을 내더니 아까와는 달리 휘광을 내뿜으며 지평선 끝까지 빛을 뿜어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전신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휘청거렸다.
“……!!”
망했다!
내 머릿속에는 바로 그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중앙의 나무 밑동에 박혀있는 일곱 개의 보석은 칠요에 대응되는 것. 시련이 끝나고 나면 칠요를 각 보석이 있는 자리에 갖다 대어서 보석을 밝혀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일곱 개의 보석이 모두 지평선을 향해 빛을 뿜어내고 나면 뭔가 사건이 발생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파천의 가호를 받기 위해서 육요를 이미 망량선사에게 공양해버렸다.
즉…, 일요는 얻었으나 나머지 6개의 보석을 밝힐 방법은 이제 없다.
육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 시련을 다 통과해놓고 마지막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으아아아!!”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어!
시련이 끝났어도 나머지 칠요를 다 갖고 있어야 하는 거였단 말인가?!
물론 일곱개의 보석을 모두 밝히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요를 갖고 이 가상세계에서 멀뚱하니 서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을 것이다. 아니, 의미없이 보석이 박혀있을 리가 없으니까 틀림없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와 달리 힘의 부족이 아니라 열쇠의 부족 때문에 길이 막혀버렸다고 생각하니 미칠것만 같았다.
제기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책사들을 부를 수 있다면 당장 불러서 논의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적도 없는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는 일단 열심히 나무 위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타다닷
나는 나무의 정상까지 올라오자 이 공간 전체가 지진과 균열로 붕괴하고 있는 걸 아주 잘 목격할 수가 있었다. 혼돈의 바다는 사라졌지만 이 땅이 무너진 밑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므로, 내가 한번 굴러 떨어질 경우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으리라. 이 나무 근처는 잘 붕괴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시간문제였으므로 나는 필사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윽…, 굳이 떠오르는 방법이라면 일요를 신격에게 바쳐서 그 대가로 여기를 빠져나가는 방법이 제일 안정적이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있는 걸까?
이런 천신만고를 겪고 나서 일요를 얻었는데 그 진짜 능력과 정체도 모른 채 냅다 줘 버리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런 방법은 선택할 수 없으며 선택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런 난장판이 벌어진 이후의 세계를 보는 것 또한 내 경험치에 도움이 되겠지만 어차피 절망의 연속일 뿐이리라.
공간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나는 고민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과 체력이 있어도 세계 자체가 붕괴하면 살아날 수 없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일요를 쓰는 것 외에는 살 방법이 없는 듯 했다.
나는 일요를 하늘으로 향하며 외쳤다.
“황제시여!! 일요를 바치나니 세상을 구해주십시오!!”
본래 계획이면 만신전에 어떻게든 가서 일요를 바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다소 억지로라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우우웅!!
그러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희미한 환영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난 자는 고대의 제관(帝冠)을 쓰고 있는 자였는데, 나는 눈앞의 존재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여, 염제(炎帝) 신농(神農)!!”
틀림없이 염제 신농이다!?
그가 부활하자마자 세계를 불태우면서 온갖 사악한 존재들을 때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그가 대뜸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기에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농은 나타나자마자 말했다.
[세계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운을 띄운 신농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와는 절반의 힘을 여우신에게 빼앗기고 자신의 공간에 틀어박혔으니 최소한 수천 년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리라. 이제 우리는 세계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우리’라고 칭하는 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종말이 유예된 세계를 어둠속에서 수호하던 삼황오제!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패권(覇權)이 무너졌다는 걸 의미했다. 그도 그럴것이 전욱, 제곡에 이어 삼황 여와까지 봉인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
신농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화염으로 만들어진 손을 들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황제에게 일요를 줄 필요 없다. 그건 내게 다오.]
“위대하신 염제 신농이시여! 저는 오백 년 후 찾아올 종말과 계시에 인류가 멸망하는 게 두려워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께 일요를 드린다면 그 종말을 없애거나 유예해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신농에게 물었다. 신농은 삼황이니 엄청난 권능을 가지고 있을테고 어쩌면 황제를 안 찾아가도 신농이 내 염원을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농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본제(本帝)는 종말과 계시를 멈출 수도 없고 유예할 수도 없다. 삼황오제가 모두 건재한 때라면 가능했겠지만. 게다가 복희가 없다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다.]
“……!!”
[그러나 네가 일요를 내게 준다면 ‘도피(逃避)’는 가능하다고 말해두겠다.]
“도피…라는 말씀은?”
신농이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인류를 나의 권속으로 거두어 거인족과 함께 새로운 성계(星界)로 떠날 것이다. 본디 우리는 차원을 넘나드는 힘이 있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며, 본제가 네게 표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이다.]
“성계…!!”
[이주한 후에는 인간을 학대하지 않고 돌보겠다고 약속하지.]
“…….”
그런 선택지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주춤거렸다. 지금까지 예정된 종말을 없애버리거나 유예하는 선택지밖에 생각지 못했는데, 설마 인류 그 자체의 터전을 옮겨버리는 선택지라니!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이 제안이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지상의 모든 환란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옛 지배자]를 다 때려잡는 건 삼황오제도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옛 지배자]들이 종말과 계시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는 이 행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염제는 인간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야….’
그가 새로운 인간의 종주가 되어서 돌봐준다면 어쩌면 그거야말로 최선의 결과가 아닐까?
나는 염제 신농의 제안에 크게 혹했다.
치지직!
[…&@#&%^]
[*%&%*%….]
바로 그 때 옆에서 기괴한 괴물이나 촉수의 환영이 소환되어서 내게 뭔가 말을 걸려고 했으나 염제 신농이 손을 휘젓자 그 환영들은 모두 사라졌다.
“방금 그건 무엇입니까?”
[현재 저 별에 사는 다른 지배자들도 네게 일요를 달라고 하고싶은 거지. 네게 교섭하러 너도 나도 이 공간에 염원을 잇고 있다. 일요를 손에 넣으면 자신의 힘을 크게 증폭시킬 수 있고 거대한 인과율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음….”
[허나 칠요의 협약이 있는 이상 우리 삼황오제가 무조건 우선권이 있지.]
하긴 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차원에서 온 촉수괴물이나 악마 같은 [옛 지배자]와 교섭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신농 측과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내 마음이 점점 신농 쪽으로 기울었지만 나는 섣불리 신농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었다.
“신농이시여! 그럼 이것만 좀 대답해 주십시오.”
[질문을 허한다.]
“이 일요의 진짜 능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쓰는 겁니까? 그리고 만신전으로 가는 방법을 혹시 아시는지요?”
신농이 대답했다.
[모른다! 다른 칠요는 몰라도 일요만큼은 황제가 최대의 비밀로 삼았기에 아는 바가 없다. 또한 만신전으로 가는 방법을 알았다면 내가 먼저 가서 놈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
[선택하라.]
선택이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기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닌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요를 드린다면 또다시 치우를 부활시키고 황제와 전쟁을 하실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다.]
“예?”
[전쟁이 끝날 때 깨달았다. 이건 이미 개인적인 복수의 장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음모이며 나는 황제의 계책에 휘말렸을 뿐이다. 복수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본제는 이제 지쳤기에 이 별을 떠나고 싶노라.]
“황제의 계책이라면…?”
[일요를 주지도 않으면서 너무 많은 걸 알고싶어하는군. 그렇게 여유부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쿠구구구!!
신농의 말대로였다. 이 공간의 파괴는 대화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땅 곳곳이 무저갱이 되었으며 지금 이 나무가 버티고 있는 것은 일요의 보석 덕분으로 보였다. 아마 칠요의 보석을 제한시간 내에 공명시키지 않으면 이 공간이 붕괴하는 식이리라.
‘도피…, 그것도 괜찮을까?’
나는 내심 신농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황제를 기다리느니 신농의 말대로 인류 전체를 도피시키는 결말을 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신농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께 일요를 드리겠….”
우우웅
“어억….”
내가 이명(耳鳴)과 함께 비틀거린 것은 그 때였다.
신농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여기까지 와서 빼돌리려는 거냐…!!]
이윽고 신농의 모습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앞이 팽팽 돌고 어지럽다.
모든 것이 녹아 흐르는 시야가 수십 번이나 반복되며 시야가 혼미할 때 나는 어딘가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