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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육의성천도에는 초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천둔검법 81예(藝)에 속하는 ‘성향’은 남아있었지만 나머지는 그저 심득(心得)에 지나지 않는 무형(無形)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육의성천도를 일반적인 무림인이 익힐 수 있는 방법도 수련할 수 있는 방법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기에 무공(武功)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비유하자면, 구결만으로는 동네 무사나 문인들이 마음수양을 위해 적어놓은 정신단련서와 다를 바가 없다. 뇌신지혼과 마찬가지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육의성천도의 경우는 구결이 암호문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며 충분히 해석 가능했지만 무술로 적용할 방법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동빈에게 천둔검법을 전승받으면서 그가 육의성천도를 수련했던 구결을 이어받았음에도, 그 누구도 육의성천도를 수련하거나 연구할 엄두를 못 냈던 이유이기도 했다. 차라리 암호덩어리인 뇌신지혼을 해독한다면 거기서 막대한 성과를 얻겠지만 육의성천도는 그럴만한 여지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파천의 가호를 통해 육의성천도를 펼칠 수 있게 된 지금, 육의성천도가 어째서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무술(武術)이 아니라 무법(武法)이기 때문이다.
술(術)로 해석되는 영역을 아예 무시하고 법칙의 세계부터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 따윈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마음만이 힘을 이루는 것!
스으으
첫 휘두름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육의성천도 운결(雲決)을 펼쳐내었는데 아마도 여동빈이 내게 보여두었던 검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와 동시에 내 검에서는 검강지기(劍罡之氣)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껍데기뿐인 철검의 날이 앙상하게 드러났는데, 나는 그 순간 내심 깜짝 놀랐다.
어째서 검강이 소멸된 것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강기가 소멸했는데도 도리어 위진(威振)하는 맹렬함이 치솟으며 검극에 실린 기세가 수십 배 이상 증폭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검강지기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한 검기(劍技)의 극의(極意)였으며 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인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게끔 만들었다.
‘아아!’
검강지기 또한 의념지기의 일종일 뿐이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구나!
위이이잉
명동(鳴動)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기(氣)가 아닌 의(意)의 외침이었으며 쏟아지는 별빛의 고동소리였다. 동시에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대자연의 흐름이 검격에 스며들더니 이윽고 그대로 운해(雲海)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대자연을 담을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육의성천도 운결이 떨쳐져 나가며 지평선까지 검기가 구름바다를 이루는 걸 보며 찬탄과 동시에 절망을 느꼈다. 원리가 어떤 건지는 이해했으나 운결 하나를 펼치기 위해 필요한 어마어마한 검귀(劍鬼)의 감각, 대자연의 본질을 향한 직관력, 그리고 의념지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상상력, 대자연의 흐름을 읽어내는 선경(仙境) 모두가 지금의 내게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검귀이자 팔선의 수좌로써 무림지존을 거치고 선계최강을 넘으려 하는 여동빈만의 절학이었다. 이제 갓 절대지경을 넘보고 있는 내 무예수준은 일천년 무림역사 최강의 검귀인 여동빈이 만들어낸 필생의 깨달음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 소화할 수 있냐와는 별개로 내 몸은 충실하게 육의성천도를 재현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아주 살짝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검기가 온 천하를 휩쓸기 시작했고 운결이 응룡의 심장 근처에 있던 성좌를 하나 부숴버렸다.
꽈르릉!!
육의성천도(六意星天圖)
해결(海決)
동시에 응룡이 안광을 뿜어내며 나를 없애려 들자 저절로 검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며 검기의 바다를 일으켰다. 혼돈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검기의 파도가 파랑(波浪)과 함께 그의 압박을 흘려내 버렸고, 나는 금세 다시 공격태세를 잡을 수가 있었다.
‘굉장하다.’
본디 내가 아는 여동빈이 쓰는 육의성천도만이라면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지금 내 손으로 펼쳐지는 건 그런 가정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말 그대로 이 자리에는 ‘가능성’이 소환되어 있었다.
‘응룡을 상대로 싸워볼만한 역량을 지닌 여동빈이 육의성천도를 펼쳤을 경우!!’
얼마나 여동빈이 선검술을 성장시킨 이후의 미래일지는 모르겠지만, 파천의 가호는 단번에 그 가능성을 이 자리에 소환해버린 것이다.
쿠구구구
나도 모르게 육의성천도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 마음의 변동은 단순히 인간이 ‘마음’이라고 인식하는 영역을 넘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있어서 감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불가의 식(識)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하고 넓은 심득(心得)이 요동치고 있었으며 이윽고 내 정신세계에 여섯 개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스스스스!
하늘(天)이 땅(地)으로 향하는 비(雨)의 흐름.
비는 땅에 흐르고, 바다가 되고, 혹은 구름이 된다.
바람이 온 세계를 감싸 안는 동안에 세계는 계속해서 흐른다.
그 와중에 나는 상(像) 하나하나에 내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울과는 달리, 저기 비치는 내 자신은 욕망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투영하고 있었다. 인간의 욕망보다 기저에 있는 ‘무언가’가 상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저것은 무엇인가?
내가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현실세계의 시간은 흐르며, 나는 마치 검선 여동빈이 된 것처럼 육의성천도를 쉼 없이 펼쳐내고 있었다.
푸콱!
천결(天決)이 발동하면서 세계를 찢어버리는 듯한 여동빈의 거검(巨劍)이 거룡의 한쪽 눈을 찔렀고, 거룡은 피해를 입음과 동시에 시공을 조작해서 나를 무저갱으로 날려버렸다. 나는 한도 끝도 없는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여섯 개의 상이 서로 자리를 옮기는 게 느껴졌다.
위이이잉
또 다시 명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윤회(輪回)!
육의성천도 육결은 결코 단 하나만의 요결이 아니다. 여섯 개의 상이 서로 원형 내부에서 자리를 옮기며 그때그때 가장 필요한 힘을 내보일 뿐, 실제로는 혼합요결이나 압축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지결(地決)과 풍결(風決)이 서로 교태조화(交兌造化)을 이루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형태의 실선과 도형이 그려지는 듯하더니 연기화신(煉氣化神)처럼 뜻과 혼백이 일체가 되어 나 스스로가 광선(光線)으로 변해서 천공으로 뛰쳐나갔다.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니….’
콰아앙!!
시공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나는 나 스스로 검광(劍光)이 되어 혼연일체로 응룡에게 뛰어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응룡은 언령을 외워 나를 멈춰 세웠는데, 그와 동시에 육의성천도는 또 다시 합결(合決)을 일으키며 나를 연기처럼 바꿔서 응룡의 주문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무의무념(無意無念)
‘……?!’
나는 순간 여동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흠칫했다. 아까부터 파천의 가호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영역으로 육의성천도를 끌어내서 싸우고 있었기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설마 그럴 수가?
나는 내 생각을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격렬하게 육의성천도와 함께 억조무량(億兆無量)한 별빛의 우주로 향해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번쩍 -?
내가 검을 휘두르자 무수한 검광이 실선을 그리며 하늘에서 빗방울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무려 수억 개나 되었는데, 검광만으로도 유성우가 빗발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과거의 존재여. 그대는 문을 여는 존재가 아니군….]
여동빈의 모습이 내게 비춰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에 여동빈이 말했다.
[하지만… 힘을 빌려주겠노라!]
육의성천도가 하나의 원(圓)으로 결집된다.
그 원을 향해 찔러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여동빈의 의지였다.
심의육합
무형검(無形劍)
투콱!!
다음 순간, 나는 응룡의 등 뒤로 가 있었다. 모든 것이 흑백으로 정지되어 멈춘 듯한 찰나에 비스듬하게 응룡의 목이 천천히 갈라지는 게 느껴졌고, 내가 그를 베는 데 성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격이라면 어쩌면 저런 중상을 입어도 회복할지도 모르지만, 왜인지 그러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룡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필멸자여…. 헛된 구원의 희망을 품고 결국 황제의 뜻에 따르는가…. 결과가 정해진 파멸이든, 이기적인 뜻에 휘둘리는 파멸이든 그 끝은 다르지 않거늘….]
응룡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느껴지던 것처럼 적대적이거나 성나있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뭔가 체념한 듯, 현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나 또한 더 이상 응룡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의지로 화답했다.
[저는 뭐가 되었든 간에 일단 해 볼 뿐입니다. 결과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면 발버둥 칠뿐입니다.]
[그 강력한 열생(熱生)의 언(言)…. 그대가 전생자일 터인데도 아직까지 그 정도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인가? 그대에게 삶은 유희가 아니란 소리인가?]
[알고 계셨군요.]
[구천현녀 또한 그대와 동행하며 눈치 챘지. 그녀와 나는 현재 일심동체이니 모를 수가 없다.]
잠시 침묵하던 응룡이 말을 이었다.
[황제를 믿지 말라. 치우가 그보다 강대했으나, 황제는 결국 지략과 계책으로 그를 패배시켰다…. 그의 계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황제의 뜻이 결코 좋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렇기에 그대들 인간이 이 별에 살아갈 억겁의 자손을 위해서라도 일순의 멸망을 감내해줬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건만.]
응룡이 일요의 시련에서 필사적으로 싸운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리라.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이 있습니까? 인간에게는 현재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억만 종족을 위해서 인류가 멸망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후후…. 그게 필멸자와 불멸자의 차이겠지. 허나 그대는 따지고 보면 우리 불멸자에 더욱 가까운 존재인 것을….]
[…….]
[그대의 마지막 일격, 내 의지를 넘어섰다…. 그대는 일요의 시련을 통과했으니, 지금부터 그대에게 일요를 하사하겠노라.]
파아아앗 -?
그와 동시에 응룡의 입에 물려 있던 여의보주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망량선사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리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천의 가호를 종료한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마지막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면 아마 가호가 끝나자마자 응룡의 안광에 한방에 소멸되고 말았으리라. 내가 내심 오싹해하고 있을 때, 인간형으로 되돌아온 미호가 내게 말했다.
“여기까지구나.”
“…….”
스스스스
미호가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다. 파천의 가호가 사라졌으니 이 시공간에서 사라져서 원래의 시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리라. 애초에 파천의 가호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적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는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다시 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저 미호가 소멸되고 나면 동영의 기신 미호만이 지상세계에 원래처럼 남게 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슬퍼서 입술을 짓씹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파천의 가호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데 정말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륵 흘렸고, 미호는 그런 나를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다.
“백웅. 또 보자.”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미호는 마지막에 날 다독여주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우우웅
내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응룡의 몸뚱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가 물고 있던 여의보주가 어느 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구슬….’
이것이 일요(日曜)인가.
그저 칠색광채를 내는 구슬처럼 보일 뿐이었으나, 바로 이것이 최강이자 최후의 칠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