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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인연을 부르라면 누구를 불러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진소청과 검마였다. 그들의 가공할 무력과 재능이라면 어쩌면 파천의 가호를 받고 응룡을 쓰러뜨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 수 없는 존재의 손에 저당 잡혀서 불러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지금 파천의 가호가 있는 상태라면 될지도…?’
그러나 이 중대한 상황에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일에 가호의 힘을 낭비할 수는 없다. 되면 좋겠지만 안될 경우 너무 손해가 크다. 나는 무인들을 계산에서 빼고 나니 부를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순히 힘의 크기만으로는 제천대성과 신공표를 불러야 하겠지만 파천의 가호는 그런 힘의 단위가 의미가 없는 능력이다.
파천의 가호를 썼을 때 가장 잘 써 줄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화룡진인이 말했다.
[연자, 그대는 파천의 가호를 쓰기에 적당한 자가 아닌 듯 하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파천황적인 발상과 행동력의 소유자가 그 가호의 힘을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어. 그러나 연자는 아직도 ‘가능성’과 ‘확률’에 얽매여서 역량을 제한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
[생각을 비우게. 그리고 자신의 자아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성찰하게.]
생각을 비운다….
나는 화룡진인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파천의 가호의 엄청난 위력에 허둥대고 있을 때와 달리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관조해 보았다. 염(念)이 가라앉자 신(信)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천둔검의 요결이 머릿속에 흘렀다.
‘아….’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바로 직전의 일이었는데!
[우린 낙제점이야. 용의 힘을 절반 이상 약화시켰어야 했는데, 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겠지….]
[…백웅. 만일 우리 모두가 전멸하면 그 녀석을 불러봐라.]
[아니. 지금은 불러봤자다. 할려면, 적어도 변수가 생겨날 때…, 이 시험을 통과할 희망이 보일 때. 그럴 때가 아니라면 그냥 전멸을 택하는 게 좋아.]
방금 전 계도성을 통해서 용의 눈동자로 들어오기 직전, 제갈부가 내게 말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제갈부는 객관적으로 이번 칠요시련의 성적을 평가하면서 내게 만일을 대비한 계책을 전해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책에 따르자면 내가 지금 소환할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설마 제갈부는 그 시점에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일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은 불러낼 수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럴것 같았다. 제갈부는 그 시점에서 이미 최후의 대안이 파천의 가호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으며 파천의 가호에 어울리는 책략까지 미리 읽어냈던 것이리라. 그리고 망량과 제갈사 또한 그런 제갈부의 계산을 읽어냈기에 별 말 하지 않고 인정했던 게 분명하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변수가 생겨난 때.
파천의 가호로 이 시련을 통과할 희망이 생겨난 때가 찾아온 것이다.
“나와라.”
나는 미간을 모으며 집중했다.
“아베노 세이메이!!”
우우웅!!
지금껏 왕선 시련에서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 아베노 세이메이가 천천히 이 공간에 소환되기 시작했다. 나는 파천의 가호를 발동해서 주변에 몰아치는 백광을 거두어버렸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어둠의 홍황 속에서 천천히 빛을 발하며 내려앉았다.
아니, 저건 아베노 세이메이가 아니다.
음양사의 복장을 하고 있으나 미동(美童)이었던 그와는 달리 몸이 완연한 여인의 것이었다. 또한 여우의 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으며 뒷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보지 않아도 저게 누구인지는 미리 짐작할 수 있었고, 여태껏 전생하며 수도 없이 보아온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내심 경악했다.
‘설마 제갈부의 예상이 맞았다니….’
그녀가 내 쪽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녀는 한 줌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동영의 신(神), 미호(美狐)다. 그대는 누구길래 나를 불렀지?]
“…나는 백웅. 여긴 칠요의 왕선 최후의 시련인 일요의 시련이다.
나는 미호에게 말했다.
“세계수의 힘을 품은 기신(機神)이여, 날 도와다오.”
눈앞의 존재는 미호지만 미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베노 세이메이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미호를 신으로 만들었으며 그런 존재를 일컬어 기신(機神)이라고 칭했다. 기신을 만들 수 있는 건 천우진이나 아베노 세이메이같은 최고수준의 술사들 뿐이었으며 그들은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쳐 신선을 뛰어넘은 새로운 신격을 세상에 내놓는 게 가능했다.
세이메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소환한 것만으로는 수해의 왕을 막을 수 없었지. 내 인간으로서의 형질을 버리고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야 전설적인 존재의 권능을 사역하는 게 가능했어.]
[…내 몸의 절반은 그녀의 소유. 그 당시에 그녀가 먹어치운 셈이지. 소환사인 내 몸을 먹어치우고 있기에 아마테라스는 인과율 걱정 없이 계속 강림해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불로불사지만 필멸. 언젠가는 그녀가 날 모두 먹어 치울 거다.]
[고맙다, 백웅이여. 세계수의 씨앗을 내게 넘겨준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니. 그대는 동영의 은인이다.]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을 준 보은(報恩)을 기필코 갚겠노라.]
[세이메이. 제갈사는 세계수가 생장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어. 아무리 해신이 지금 침묵하고 있어도 단기간에는 불가능할텐데 어떻게 세계수를 키울 셈이지? 최소한 천 년 단위라고 알고 있다.]
[그건 내가 해결하겠다]
세이메이는 멸망해가는 동영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수의 씨앗인 용화수의 씨앗을 가져갔다. 그 때 나는 세이메이가 세계수로 대체 뭘 할지 궁금했고 그의 계책이 짐작도 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방금 전 제갈부는 그 해답을 내게 이야기해줬었다.
[세이메이가 용화수의 씨앗을 가져간 건 기억나지? 그는 세계수의 생장에 필요한 엄청난 시간과 조건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얘기했었다.]
[음, 기억나.]
[내 추측으로는 그는 기신(機神), 즉 인조신(人造神)을 만들려 하는 게 분명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세이메이가 최고수준의 술사라 해도 세계의 멸망이 임박한 지금같은 시점에 해신을 견제할 정도로 세계수를 빠르게 성장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만한 시간도 자원도 없지. 그렇다면 나같으면 발상을 역전시키겠지. 세계수의 씨앗을 먹이로 줘서 해신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기들만의 신성(神聖)을 탄생시키는 거다.]
[……!!]
[세이메이는 아마 너에게서 씨앗을 가져간 후 스스로와 츠치미카도 일족을 제물로 바쳐서 기신을 탄생시키는 의식을 치렀을 거다. 그리고 세계수와 자기 내면의 고대신 아마테라스의 힘을 듬뿍 먹은 강력한 신성이 탄생해서 동영의 인류를 지켜줄거라 기대했겠지.]
[…….]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반문했었다.
[그렇다면 세계수의 혼돈과 고대신 아마테라스의 신력, 세이메이의 지식을 모두 받아들일 만큼 강력한 소체(小體)가 필요하잖아? 그런 존재가 있을까.]
이어진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있지. 너도 잘 아는 미호다. 그녀는 원래 황후로 동영에 살고 있었잖아? 네가 간섭하지 않아서 동영에서 굳이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뭐, 뭐라고?!]
[세이메이가 무슨 수로 그녀를 끌어들일지는 알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서 미호 이외의 대안은 세이메이에게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삼황 여와의 음신(陰神)인 대마왕 달기의 마지막 꼬리이자 한계를 알 수 없는 가능성을 품은 대요괴. 고작해야 음신지력 조금 받은 것만으로 마왕 벽지상을 찢어버렸던 미호가 그 정도의 힘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옛 지배자]에 대항할만한 기신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
[빌어먹을…!! 가만 놔둘 줄 알고!]
[이미 늦었어. 이미 동영의 기신인 미호는 탄생했을 거다. 세이메이가 그렇게 굼뜬 놈도 아니고.]
[세이메이 개자식!!]
나는 분통을 터뜨렸었지만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세이메이가 동영의 인류를 구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모든 걸 무시하고 행동에 나설 인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박이든 설득이든 납치든 간에 세이메이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미호를 기신으로 만들어버렸으리라.
제갈부가 말을 이었었다.
[뭐, 세이메이는 자기 민족이 가장 소중하니까 본의 아니게 네게 뒤통수를 친 셈이었겠지만 놈은 처음부터 미호가 네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란 걸 몰랐다. 넌 미호를 배려한답시고 이번 생에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잖아? 의도한 건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개 같은!! 어쨌든 그 자식은 가만 안 둬!]
[화 좀 가라앉히고 들어라. 냉정하게 보자면 이건 이용해먹을 수 있으니까.]
[뭐?]
[세이메이는 어쨌든 네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네가 인간의 왕이라 해도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고, 아마 틀림없이 네가 왕의 권능으로 소환하면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건 세이메이가 아니라 신이 된 미호겠지.]
[……!!]
[왜냐하면 영혼을 융합시켰을 테니까. 정확히는 주체가 되는 미호에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아마테라스의 힘이나 자기 지식을 모조리 흡수시켰을 거다.]
제갈부는 내가 놀라든 말든 차분하게 계책을 이어나갔다.
[이제 곧 칠요의 시련 최후의 고비가 찾아올 거다. 그 때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 기신이다. 이때다 싶을 때 놈을 소환하면 반드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회상을 끝냈다.
“…….”
그렇다.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은빛의 여우 음양사는 바로 미호였다. 예전의 미호와 달리 차분하고 감정 없는 눈빛이었으며 동시에 세계수와 고대신의 힘을 그대로 전승받은 ‘만들어진 신’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본래 일면식도 없는 나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올 이유가 없었겠지만 아베노 세이메이와 융합했기 때문에 그의 의지로 이 자리에 소환된 셈이다.
동영의 신, 미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 것 같군. 아베노 세이메이가 당신에게 빚을 졌던 거였어.]
“빚을 갚아줄 텐가?”
[터무니없다. 저런 거대한 존재와 싸우라니 제정신인가?]
미호는 성좌의 용을 보고 짜증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성좌의 용이 최고의 힘을 발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공포와 위압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 걸로 보였다. 그걸로 보아 현재 그녀의 힘 또한 어지간한 필멸자를 초월한 건 분명하리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 그대에게 망량선사의 파천의 가호를 전해 주겠다.”
[흠….]
“그래도 안 되면 돌려보내줄게. 어차피 그렇게 되면 못 이길 테니까.”
[파천의 가호라. 좋다, 해볼까.]
스스스
기신 미호는 자신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엄청난 후광과 함께 태양의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으며, 그 태양의 힘은 이윽고 그녀가 품고 있던 태음(太陰)과 결합해서 강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아홉 개의 꼬리가 금빛을 내며 허공에 떠올랐다. 미호의 눈빛 또한 황금안(黃金眼)으로 변하며 완전히 황금빛 여우로 변신해 있었다. 달기보다 크기는 훨씬 작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결코 그에 못지않았다.
‘동영 창세신 아마테라스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것인가?’
금성에 갇힌 다른 아마츠카미들과 달리 인간을 위해 활동했다는 강력한 신왕(神王), 아마테라스. 아마도 현재의 미호는 세계수의 씨앗을 먹고 그녀의 힘을 완전히 각성해서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 듯 했다. 또한 그녀가 스스로 휘두를 수 있는 혼돈의 권세 또한 달기에 못지않을 만큼 강력해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음양(陰陽)을 동시에 다루며 태극(太極) 한가운데에서 일렁이던 미호가 한 마디의 언령을 외쳤다.
[나는 저승신일지어니 기천의 목숨을 죽여 한을 풀리라!]
꽈릉!!
그 언령과 함께 음양의 힘이 동시에 뻗어나가서 칠요 중 화요를 단번에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 위력이 영진포일술에 못지않았기에 나는 현재의 미호가 지닌 힘이 진정으로 신위에 어울리는 수준이라는 걸 즉시 체감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내심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까지 강해지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세계수, 고대신 아마테라스, 여와라고 하는 절대적인 신위의 상징이 3개씩이나 서로 선순환하며 한 자리에 결집된 게 현재의 기신 미호인 것이다. 미호가 처음부터 신화적 존재였으며 인간과 격을 달리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미호가 칠요성신 중 하나를 일격에 부숴버리자 응룡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훌륭하구나…, 새로운 신이여…. 그대는 머지않아 [지배자]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겠군….]
그러나 동시에 응룡은 약간 조롱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그대의 근본부터 극복해야 하겠군…. 안타깝다.]
[뭐?]
미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파지직!!
[아악!!]
미호는 갑자기 전신에 큰 압박을 받으며 몸을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응룡에게 공격을 받은 건지 깜짝 놀랐지만 이내 화룡진인의 설명으로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삼황 여와(女?)가 비집고 들어가서 강탈하려 한다!]
“……!!”
[이대로라면 그녀의 몸을 빌어 여와가 강림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와에게서 떨어져 나온 음신이 바로 달기였으며, 그 달기의 꼬리가 미호이니 여와가 그녀에게 간섭할 수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어찌된 일인지 알아채고는 이를 악물었다.
‘제길! 삼황오제 입장에서는 황제한테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칠요의 시련이 너무 중대하니까 여와 본인이 나서서 깽판을 치려는 건가?! 구천현녀가 방해금지의 제약을 풀어버린 틈을 타서!’
물론 여와가 소환된 후에는 응룡과 싸워줄 테니 내게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여와가 소환되어 저 몸뚱이를 지배한 후에는 ‘미호’라는 인격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비록 이번 생에서는 일면식도 없었다지만 미호가 그렇게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왕권의 기적과 파천의 가호를 동시에 발동했다.
“미호!!”
이어진 말에 미호가 눈을 크게 떴다.
“여와를 먹어 치워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