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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구천현녀의 말을 듣자마자 거세게 반발했다. 적인 이상 완전한 경어를 쓸 필요는 없다.
"웃기는 소리! 그건 개소리요."
[어째서죠?]
"이 시험 난이도, 제정신이오? 이게 정말 칠요를 통해 인간의 왕을 뽑는 왕선(王選)에 어울리는 시험이란 말이오? 칠요의 정령이 지나치게 강한 건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마지막 일요의 시험에서는 성좌의 용을 없애기 위해 칠요성신 그 자체를 부숴야하게 되어있냔 말이오!"
[…….]
"우리의 방법이 편법이라 한들 그 편법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오! 이건 시작부터 부당한 시험이었소."
내 외침에 옆에 있던 신공표, 제천대성, 제갈부는 모두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여기 있는 자들의 실력을 고려해보면 사실 이렇게까지 까다로운 시험이어서는 안되었다.
애초에 신공표와 제천대성은 웬만한 마왕보다 강한 존재였으며 해방 칠요를 얻을 경우 [지배자]의 경지에 근접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들이었으며 내 동료들 또한 지상무림의 절대자 수위를 넘긴 초고수가 즐비했었다.
제갈사는 전설의 배교교주이자 대마도사였으며 천우진은 신의 제자이자 환신으로써 대라신선을 뛰어 넘는 술수를 지니고 있었다.
이론상 이번 시련에 도전한 자들의 면면은 내가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그들 모두를 잃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낙제점이나 다름없이 통과하다니, 이런 난이도는 말도 안되는 미친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인간의 왕을 뽑는 시험이 이토록 까다로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마치 처음부터 통과하면 안되는 것처럼…!!
내 항변에 구천현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이야기하려 임시로 인격을 분리해서 그대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무슨 말이오?"
[그대들은 이 시험에 본디 존재하는 법칙 중 하나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한쪽 팔을 봉쇄한 채로 진검승부에 나선 것과 다름 없는 일…. 그런데도 여기까지 도달 했으니 저는 그대들에게 일말의 경외를 품고 있습니다.]
"……?"
[제천대성과 신공표, 이 거대한 존재들이 일개 필멸자를 도울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말이지?
[그렇다해도 그 방법이 본디 시련에서 추구하던 것과 동떨어진 것은 사실…. 일요의 수호자이자 모든 시험의 감독자인 저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황제와도 뜻이 통하지 않으니 곤혹스러워하고 있던 참입니다.]
"법칙 중 하나라니…. 그게 뭡니까? 왕의 소환권 외에 한가지 더 있단 말이오?"
[진이 그대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겠군요. 서로 적이었으니.]
구천현녀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인연력(因然力)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연기법(緣起法)이라고돋 하는 것이지요."
"인연력?"
[왕으로 인정 받은 존재는 이 공간에서 신하를 소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하와의 유대를 끌어대어 대이적(大異跡)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통상의 법칙, 상리, 술법, 마도 어떤것으로도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적을.]
"……!!"
[왕권(王權)의 개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흠칫했다.
왜냐하면 짚이는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는다.]
[네놈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이 시험의 마지막 이치가 존재하지….]
진의 마지막 말.
진은 난데 없이 그 생명력과 힘을 증폭시켜서 알 수 없는 초능력을 발동 하면서, 동시에 수십만 대군을 혼돈의 바다 위에 멀쩡히 소환했다. 본디 수십만 대군은 아무리 그래도 본래 인간이었으므로 모든 걸 녹여 버리는 혼돈의 바다에 소환 되는 순간 빠져죽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대군들은 혼돈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했고, 칠요정령과 싸울때와 달리 모든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했고 개개인이 더욱 강력한 신체능력을 보였다. 관성제군의 가호가 없었다면 놈들을 쓰러뜨리는데 상당한 시간과 기력을 소비해야만 했으리라.
'수십만명이 혼돈의 바다에서 멀쩡했던 기적. 그건 초상기인의 초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거였어. 아무리 완성 된 초상기인이라도 그런것까진 무리야.'
설마 진이 마지막에 왕권을 개방한 것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개자식, 역시 끝까지 간만 보면서 우리한테 밑천을 숨긴거였어. 우리가 왕권을 사용할 줄 알게 되면 자기가 극히 불리해지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시련이 실패 할 지경까지 숨기다니 지독한새끼!'
나는 속으로 진에게 이를 갈았다.
개같은 놈이 그 사실만 알려줬어도 쉽게 통과했을텐데! 자기가 왕이 되지 못할거라면 같이 실패하자는 물귀신 같은 속셈이 분명했다. 놈은 분명히 도중에 칠요의 시련 난이도에 좌절했던 것이리라.
그러자 제갈부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구천현녀시여, 그 또한 부당하군요. 이 제갈부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어떤게 부당하다는 말씀이신지.]
"왕권을 개방하여 기적을 발동한다함은, 왕으로 인정 받은 필멸자가 이 공간에서만큼은 인과율(因果律)의 힘을 직접 사역 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한 제도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왕권으로 인(因)을 무효화하여 과(果)만을 드러내게 하는 능력…. 확실히 그 능력이 있었으면 우리는 10배 이상 쉽게 칠요의 시련을 통과 할 수 있었겠지요. 이 공간에서만큼은 왕으로 인정 받은 자가 [옛 지배자]나 다름 없는 권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셈이니."
천천히 말하던 제갈부가 날카롭게 구천현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능력은 필사의 의지만으로 발동하는 건 아닐것입니다. 분명히 고유의 발동과정이 있으며, 그 발동체계를 명확히 왕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또한 무한발동도 불가능할 것이고 나름의 제약이 있었겠죠. 필사의 의지만으로 발동한다면 지금까지 젖 먹던 힘까지 다쓰던 백웅이 그걸 못 깨달을 리가 없습니다."
[그 말 또한 맞습니다.]
"이건 엉터리 시험입니다. 당신 말대로 왕권이 없다면 이 칠요의 시험은 통과하는게 불가능하지만, 정작 그 왕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고 공지해주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구천현녀 당신조차도 왕권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지요."
[…….]
"왜 공지하지 않았습니까?"
그 힐난에 구천현녀가 눈을 감았다.
[황제의 뜻이라고 밖에는….]
"황제의 뜻! 하하, 삼황오제의 우두머리이자 중화를 창조한 위대한 신, 황제께서 인간의 왕을 정하는 시험이 이토록 조잡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헙."
그 순간 나는 헛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일요의 수호자이자 이 별의 정령신인 구천현녀 앞에서 삼황오제 황제를 비판하는 말을 해버리다니? 물론 내 경우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지만 제갈부는 전생 하는 것도 아닌데 막 질러버리는 것이다. 내가 전생한다는 걸 알아도 보통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구천현녀가 한숨을 쉬었다.
[말했듯…, 저는 인과율의 조각을 마주치고 나서야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저 또한 만신전의 소속이지만 제가 연락 할 수 있는 대존재는 오로지 응룡 뿐…. 황제는 만신전에 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이 시험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무책임하군."
[……]
구천현녀는 잠시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나와 응룡은 본디 [옛 지배자]라기보다는 그들의 대척점에 선 존재였습니다. 이 별의 태초부터 정령을 다스리는 존재였으며 외차원의 악한 존재들을 몰아내는게 본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필 이 땅에 무수한 [옛 지배자]가 찾아오며 모든 운명이 뒤틀렸고, 우리는 그들을 감당할 힘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황제가 우리에게 손을 잡고 천계(天界)를 만들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천계를…?"
[우리가 그에게 협력하여 만신전에 귀속 되고 치우를 물리치고 천계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면, 황제는 종말과 계시가 찾아온 후에도 이 땅에 존재하는 정령들을 지켜주겠노라고 우리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정령신인 저는 전신 구천현녀로 인격화하여 천계의 시조가 되었으며 본디 태초의 용이었던 응룡 또한 만신전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랬던 건가….
'그렇다면, 실제로는 여와가 아니라 구천혀녀가 진짜 대지모신(大地母神)이었던 거군….'
내가 침묵한 채 듣고 있자 구천현녀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판단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공정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대에게 세가지 선택지를 드리지요.]
"세가지?"
[그렇습니다.]
"말해 보시오."
구천현녀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첫째. 여기서 그대들에게 왕권을 사역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지금부터 한 식경 후에 저는 권능으로 그대들을 바깥으로 튕겨 낼 것이고, 그대들은 성좌의 용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
[둘째. 마찬가지로 왕권의 사역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험이 불공정했으니, 시간을 되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드리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진이 없는 상태로 월요의 시련부터 처음부터 다시 도전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첫번째 제안도 두번째 제안도 그다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왕권을 사역하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성좌의 용과 싸운다 해서 승산이 없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있다.
우리는 고작해야 용의 한쪽 눈을 애꾸로 만들었을 뿐이고 전체 힘의 1할 4푼 정도 밖에 깎지 못했다. [옛 지배자]나 다름 없는 힘을 갖고 있는 성좌의 용을 상대로는 절대 못이긴다.
그렇다고 해서 두번째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칠요의 시련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데 이제와서 다시 시작하란 말인가?! 나는 되물었다.
"처음부터 다시 도전하면 제 동료인 검마, 진소청, 극호, 천우진 등은 모두 되살아날 수 있소? 그리고 토요에게 공양했던 제 보패도 돌려 받을 수 있는건가?"
[아뇨. 그대의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검마, 진소청, 극호는 절대적 존재에게 영혼을 저당 잡혔으며 천우진 또한 망량선사가 그 영혼을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토요에게 공양 했던 팽조의 보패는 되돌아 올 것입니다.]
"빌어먹을…!! 대체 누가 무인들의 영혼을 저당잡았소? 알고 있소?"
[저도 모릅니다. 단지 그 권능이 만신전의 주인에 못지 않은 어마어마한 자라는 것밖에는…. 제가 불러들이려 해도 그쪽에서 거부하는군요.]
무의미하다!
그 네명이 없으면 어쨌든 간에 칠요의 시련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무인들의 힘을 합쳐서 목요를 소멸 시켰던 건 어떻게 했는지 이치도 알 수 없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태허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극고의 경지에 달한 무인뿐인데 그들만한 존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현재 지상에 그들 수준의 무림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존재는 나를 왕으로 인정할만한 인연이 맺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놀러 참고는 다시 물었다.
"마지막 세번째 제안은 무엇이오?"
[황제께서 우리와 접촉해서 해결 방안을 알려줄 때까지 계속 이 자리에서 대기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계속 고민하고 있어도 상관 없습니다.]
"뭐…라고?"
[제안이라기보다는 유예겠군요. 그대들이 첫째와 둘째를 선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유예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이런 상황이 다 있단 말인가?!
나는 삼택(三擇) 중 어떤 것도 생지옥으로 향하는 길이었기에 고민에 빠졌다. 고르지 못한다면 계속 눈동자에 머무는 유예를 선택할 수 있다는게 불행 중 다행이긴 했지만, 그건 결코 해결 방법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지상은 반쯤 멸망한거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창힐이 난장판을 만들면서 인간을 수호하는 세력은 궤멸해버렸고 그나마 창힐과 창힐족도 완전히 멸망해버렸다.
무주공산이 된 중원대륙에는 머지않아 이족들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았고 천계 또한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의 발호를 제대로 막지 못하리라. 창힐이 삼황오제와 전쟁하면서 인과율이 엉망이 되었고 오제 측 세력도 큰 피해를 입었기에 삼황오제가 지켜주기도 힘들었다.
이미 고려와 동영은 해신의 발호 때문에 멸망 직전에 이르렀으니 중원 또한 몇년 이내에 똑같은 신세가 되리라. 해신이 누군가에게 얻어 맞아서 다쳤고 신농에게도 당해서 초죽음이 되었으니 당장은 큰 일이 없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애초에 우리가 칠요의 시련에 도전한 것은 그 모든 멸망의 예정을 감수하고서라도 황제를 만나서 인간의 생존권과 독립권을 보장 받을 때의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지켜야 할 세상이 그 전에 멸망해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황제는 이대로 종말과 계시가 끝나는 수백년 이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확률이 컸다.
그때였다. 제갈부가 말했다.
"셋 중 어떤것도 옳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 4의 제안을 하고 싶군요."
[어떤 제안이지요?]
제갈부가 입을 열었다.
"왕권의 사역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칠요를 제물로 바쳐서 다른 신적 존재의 가호를 받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건 첫 제안과 별로 다르지 않군요. 이 공간에서 누구의 힘을 빌리겠다는 말이지요?]
"그건 그쪽이 알바가 아닙니다. 이 제안을 허락 해주신다면 성좌의 용과 싸우는 것을 감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본디 이 공간에는 그 어떤 [옛 지배자]나 삼황오제도 간섭할 수 없으나, 그대들의 요청이 있으니 그 제약을 풀도록 하지요.]
나는 제갈부에게 외쳤다.
"제갈부! 지금 상황에서 성좌의 용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야!"
"누가 모르나? 삼황오제의 본체와 싸우는 것과 다름 없겠지. 왜냐하면 성좌의 용은 아마 응룡(鷹龍)일테니까."
"…어?"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을 벌렸다.
제갈부는 마치 비웃는 듯한 눈으로 구천현녀를 노려보며 말을이었다.
"구천현녀의 본체가 태양과 칠요성신이 되어서 내면의 동력을 감싸 안고, 우주적 존재인 응룡의 본체를 성좌의 용으로써 소환한다…. 만신전의 양대 기둥이 힘을 합쳐서 싸우는게 바로 일요의 시련인 거겠지. 이 조합은 고대에 전설의 거신 치우조차 위기에 빠뜨렸을 정도로 강력했을테니 정상적으로는 못 이기는 싸움일 수밖에. 틀립니까?"
[맞습니다.]
"……."
설마… 구천현녀와 합체한 응룡과 싸우는 거였다니!
게다가 두명의 정령신이 내외상조 하며 힘을 합친다는 건 이 별의 수십억 역사와 싸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제갈부가 갑자기 날 쳐다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웅. 그래도 한번 날 믿어봐라."
"하지만…."
정말 승산이 없다.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이길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중원지보(中原之寶) 생애 마지막 책략이다."
제갈부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제갈세가(諸葛世家) 최고의 천재가 누군지 증명해보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