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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이 상황을 어찌 해야할지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구천현녀의 정체가 일요의 수호자이며 정령의 왕이라면 현재 우리가 가진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기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살을 하는게 편할지도 모른다.
… 어떤식으로 참혹하게 죽을지 모른다. 나는 당장이라도 전신의 심맥을 끊어서 편하게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심맥을 끊어도 통증을 줄이는 법을 요령껏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되려 이를 악물었다.
'나는 자살하지 않아! 한순간이라도 더 버티겠어.'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죽진 않는다. 뭐라도 좋으니 하나라도 더 얻어내고 죽겠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동료들의 죽음이 헛되어 버린다.
물론 일요를 넘지 못하고 죽는것 또한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먼저 포기해버릴 순 없는 것이다. 전신이 가시덩굴에 찢겨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버티면서 다음 전생에 필요한 걸 쌓아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으
청천(靑天)이 사라지고 황천(黃天)이 하늘에 나타났다. 태양의 주황빛 때문에 나타나는게 아니었으며 말그대로 하늘이 노란빛을 띄며 알 수 없는 기운을 발했다. 동시에 하늘의 성좌가 이루고 있던 궤적들일 요동치면서 무언가 그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용(龍)….'
그렇다.
저건 용이다.
나후와 계도가 사라진 지평선 양끝에서부터 하늘 전체를 수놓듯이 거대한 용의 형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얼추 윤곽이 잡히더니 점차 용의 뿔과 발톱이 선명하게 눈에 보였고 비늘이 올올히 새겼다.
나는 용의 그림이 모두 완성 되면 큰일이 난다는 걸 직감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더이상 수단방법을 아낄 때가 아니다. 나는 즉시 제갈부를 목갑에서 꺼내었고 그에게 명령했다.
"제갈부. 불사초래(不死招來)의 술법을 쓰고 나와 생명력을 공유해라."
"……."
하지만 제갈부는 행동을 하지 않고 멈칫거렸다. 그리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문제가 뭔지 알아챘다.
'제길! 제갈사가 죽기 전에 이혼대법의 통수권을 내게 줬지만 완전치 못해…. 게다가 인형이라고 해도 일요의 압박감은 그대로 받는거군.'
일요의 권능으로 인한 압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일개 인간은 그 압박감만으로도 죽어버린다. 이대로면 제갈부가 마지막 수단을 쓰지도 못하고 그냥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자멸해버리고 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재빨리 목갑에서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팔괘자수선의를 꺼내서 제갈부에게 입혀주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팔괘자수선의를 착용해라!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제갈부에게 팔괘자수선의를 입히고는 추가로 보패 화호초(花狐貂)와 청운검(靑雲劍)을 주었다. 아까 토요의 시련 때 대다수의 보패를 공물로 바쳤지만 쓸모 있어 보이는 3개는 놔뒀던 것이다.
사실 팽조에게서 뺏은 보패가 십여개가 넘었기에 남겨둔다는 선택이 가능했다. 그리고 보패 3개의 장착주문과 사용법을 들은 제갈부는 입으로 멍하니 웅얼웅얼거리더니 이윽고 장착을 완료했다.
촤악!
제갈부가 보패 3개를 끼자 대번에 엄청나게 힘이 상승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팔괘자수선의와 청운검에 실려 있는 힘을 제대로 쓸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고대의 보패는 사용법이 까다로워서 나도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한번에 쓸 수 있게 되다니 제갈부의 술법재능은 과연 대단했다. 제갈부는 팔괘자수선의의 도움으로 압박감을 서서히 이겨내더니 입을 열었다.
"생명력 공유 시작."
우웅!!
그 순간 제갈부와 내 몸에 존재하던 기가 엄청나게 증폭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라멸진의 비술을 시행했다. 필멸일광(必滅一光)이 뿜어져 나오며 내 역량이 칠요의 시련이 시작 된 이후 최고로 강화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천공을 노려보며 외쳤다.
"제갈부. 마지막 싸움이다."
"……."
"자, 가자!"
나는 천공을 달려 들려고 했다.
마지막 싸움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 뭔가 이상하다.
"……?"
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미 나는 반사신경이나 인간의 운동수준을 초월해서 의념(意念)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에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가는게 가능했다.
그런데 천공으로 박차고 튀어 나가려는 움직임이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아예 한발짝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갈부의 눈을 보는 순간 흠칫했다.
맑다.
그리고 정념이 확고하게 깃들어 있다.
저런 눈동자는 결코 세뇌당한 자의 것이 아니다.
'설마….'
내가 이혹에 휩싸여 있자 제갈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지몽매하군. 제갈사가 명계에 반죽음 상태로 버티면서 힘이 약해졌을 때 이혼대법은 종종 약해졌다. 나는 간헐적으로 정신을 차렸지만 제갈사가 생존해 있어서 계속 세뇌 당한 척 하고 있었지. 네놈 앞에서도 계속해서 내 상태를 숨겼다."
그렇게 말한 제갈부가 저벅 걸어서 내 근처로 왔다.
"그리고 칠요의 시련에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월요가 제갈사를 즉살 시켰을 때 난 이미 이혼대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어. 제갈사가 되살아나자마자 내게 이혼대법을 다시 걸었지만 아무리 이혼대법이라해도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훗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혼대법은 분명 무섭기 짝이 없는 사도제일의 술수지만 나는 세뇌당한 척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파해법을 연구했다. 이제 더이상 내게 이혼대법은 통하지 않아."
"……!!"
"또한 요령도 조금 터득했지."
그렇게 말한 제갈부가 천천히 자신의 좌수로 횡을 휘둘렀다.
후웅
그러자 내 좌수 또한 그와 똑같이 움직였다. 제갈부는 마음에 안드는 듯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아직 명령이 전달 되는 시간이 있나."
"너, 설마…."
"딱히 배우진 않았다만 이혼대법은 이제 나도 쓸 수 있다."
"……."
순수하게 경악스럽다.
제갈사의 이혼대법에서 스스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혼대법을 쓸 수 있다니?! 지금껏 나는 제갈부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저놈은 역시 중원지보라고 불릴만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인 것이다!
동시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이혼대법에 걸려버렸다면… 난 이제 끝장이야.'
제갈부는 내게 엄청난 원한이 있을게 틀림없다. 지금까지 인형으로 만들어서 부려댔으니 나라고 해도 이혼대법의 술자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나는 이대로 처참하게 고문 당하다 죽을 것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뿐만 아니라 천암비서도 뺏기고 말 것이다.
제갈부는 새하얗게 웃었다.
"이 쓰레기놈. 감히 나를 갖고 놀아?"
그는 청운검을 들어서 내 이마 위에 갖다 대었다. 청운검에 파르스름 한 검기가 흐르자 나는 섬칫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호신강기를 쓰면 청운검으로 베어도 버티겠지만 지금은 이혼대법에 걸린 상태인데다 제갈부 또한 대라멸진의 효과로 강화 되어 있다.
검날이 조금만 파고들어도 나는 몸이 반쪽으로 갈라져서 피를 튀기며 죽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어쩌지? 제갈부를 설득해야하나?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나 하다가 죽을까….'
이성적으로라면 제갈부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같이 일요를 쓰러뜨리자고 말해야 한다. 그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직감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제갈부한테 이제와서 뭘 말해봤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쯤 체념하고는 제갈부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제갈부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사과를 하는 거냐?"
"이 상황에서 뭘 말해봤자 무의미 하겠지. 하지만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면 좀 편하게 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보군."
푸콱
제갈부의 청운검이 서서히 내 어깨를 꾹하고 눌렀다. 그러자 어깨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고 뼈를 쑤시는 고통이 찾아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번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겠지만 나는 정신력으로 꾹 참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지 말해 봐라."
"이혼대법을 걸어서 제멋대로 휘두르고 다닌게."
"후후… 하하하하!!"
제갈부는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한동안 웃어 제끼더니 말했다.
"고작 그런게 미안하다는 건가? 네가 진짜 미안해야할 건 따로 있지 않나?"
"뭐…?"
"네 운명에 휘둘리는 건 이번뿐만이 아니지. 전생자 백웅. 네놈은 이미 나를 몇번이나 죽였다."
"……."
퍼억!
제갈부는 분노해서는 갑자기 내 뺨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이빨이 두개나 튀어나가서 땅에 털어졌고 내 입에서 핏물일 줄줄 흘렀다. 아팠지만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참자 제갈부가 노갈했다.
"네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나는 또 네놈에게 농락당하겠지. 너는 또 전생해서 나를 죽이거나 인형으로 만들어버릴 게 아니냐. 앞으로 수십번이나 수백번이라도!!"
나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럴 생각이야."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라고 해봤자 무의미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있었으므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가 황궁에 동조해서 비인외도(非人外道)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너를 회유할 자신도, 써먹을 자신도 없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너와 적대할 수밖에 없다."
"왜?"
"……?"
순간 제갈부가 상당한 열등감을 얼굴에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왜 현이와 제갈사에게는 그리도 신뢰를 주면서 내게는 그러지 못한 거냐? 내가 놈들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이 중요한 선택지라는 걸 알아챘다. 잘못 대답하면 극악한 고통을 겪으며 찢겨죽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마음속의 말을 솔직히 털어냈다. 고통 때문에 내 신념을 꺾을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가 아닌걸 알텐데. 네 재능이 그들보다 뛰어날 수도 있지만, 네 품성 때문에 나는 너와 손을 잡을 수 없는 거다. 넌 약자가 희생 당하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이야."
"제갈사는? 놈은 나보다 몇십배는 더하다."
"……."
갑자기 할말이 없어졌다. 내가 눈을 꿈벅거리자 제갈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후… 품성이라! 그건 변명이다. 네놈은 그저 귀찮은 걸 싫어할 뿐이다. 나를 끌어들이려는 노력 자체가 귀찮은 거겠지. 널 편하게 대해주는 자들과 동료놀이나 하고 싶을 뿐."
그는 염증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두겠지만 나는 딱히 이족을 좋아하는게 아니다. 그저 내게 가장 이득 되는 걸 취사선택할 뿐… 네놈은 스스로 만왕의 왕을 자처하려 하면서 속세(俗世)에 영합하는 자조차 휘하에 거둘 도량이 없단 말인가?"
"……"
"당산 같은 대악인, 제갈사 같은 광인을 영입했음에도 나를 무조건 배척하려 하지마라. 그건 변명일 뿐이고, 나는 네놈에게 한번 밉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토록 고통 받을만큼 잘못한 기억이 없다."
"으음…."
맞는 말 같긴 하다.
제갈부는 감정을 삭히지 못하고 울분을 토해냈다.
"…하, 그러고도 왕이라고? 웃기는구나! 네놈이 왕이라면 천하에 다시 없는 우둔한 폭군에 불과하다. 네놈은 신념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선(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명제국 내정관의 정점에 섰던 내가 볼 때 네놈은 스스로의 말과 이상에 취한 몽상가에 불과하다."
"뭐라고!!"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현이도 제갈사도 네놈한테 맞춰주고 있을 뿐이야. 이 자리에 남아 있는 네 동료들이 얼마나 남았지? 너를 왕이라 인정하는 자는 얼마나 남았느냐? 비록 사고로 그 수가 줄었다 해도 더이상 너를 따르는 자는 남지 않았다. 넌 더이상 소환할만한 인간이 남아있지 않아. 이토록 미천하고 비루한 꼴이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뭐지?
"넌 오로지 순수한 천재만을 모으며 속세를 버리고 이상만을 좇았기 때문이다. 이면의 세계만을 신경 쓰고 현실을 배척하여 네놈들 무리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선민사상에 스스로 감화 되었던거다. 오로지 순수한 구원의 의지만으로 사리사욕을 버리고 너를 따르는 전생 동료만을 찾아 다닌 결과가… 바로 이거야."
퍼억!
조롱하던 제갈부는 내 뺨을 한대 더 갈겼다.
"순수하지 못하고 재능 없는 떨거지들은 그 누구도 너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지. 순수하고 위대하며 아둔한 왕이시여!"
"큭…."
"누가 너더러 인간을 구해달라고 했어? 부탁하기나 했냐고! 이대로 일요를 패배 시키고 인간을 구해도 웬 오지랖이냐고 할 거다."
"……."
내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숙이자 비웃듯 말을이었다.
"사리사욕으로 널 따르면 어떤가? 넌 그런 추종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걸 받아들이지도 못했으니 그저 그릇이 좁아을 뿐이지. 백련교주나 십이율주, 내 아버지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한결 같이 순수한 자들이라서 그들을 맹종했던 것 같으냐? 대부분은 그저 떡고물과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추종 했으나, 삼대세력의 권주들은 그 미욱한 자들을 잘만 다스렸다. 그 속세와 사리사욕 또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건가?"
"……!!"
"네놈이 이광과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다. 이광은 인성으로 훌륭하다 할 수 없지만 내가 볼때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저 네가 이광과 대화하기에는 너무 어린 거겠지. 속세의 권모술수와 인간의 찌든 부분을 인정할 수 없는 너 같은 애새끼와는."
제갈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스스로, 인간의 왕이라 칭할 거라면 나 같은 속물도 설득해서 잘 다스려보란 말이다. 그럼 나도 내게 대명제국을 손쉽게 쥘 수 있게 도와주겠다. 나는 받은 만큼은 꼭 해내니까."
이상하다.
분명히 제갈부에게 얻어 맞고 있고 당장 죽을 위기인데도, 되려 나는 정신이 깨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제갈부의 공격이 아프지만 살의가 없으며 - 또한 제갈부의 진심으로 하는 말이 내 폐부에 박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잠시 후 제갈부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놈이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 진짜 이유. 그리고 놈이 은밀하게 내건 거래에 대해서도 알아차렸다.
'그렇군….'
제갈부의 말이 다 옳은 건 아니다. 놈이 좋을대로 지껄인 것도 있고 내가 무작정 비판 받을 처지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제갈부의 말에서 뭔가를 느꼈기에 여기서 언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차분한 눈으로 제갈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거래하자. 내가 일요를 쓰러뜨리게 도와줘. 그럼 나도 지금까지의 원한을 잊고 앞으로 너를 영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좋아. 잘 이해했군, 인간의 왕."
조롱하듯 말한 제갈부였지만 그 말투에 악의는 별로 없었다.
놈은 역시 현재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파악하고, 내게 이혼대법으로 부려졌던 원한을 일체 잊어버리고 앞으로 내 동료가 될 수 있도록 거래를 내세운 것이다. 일요의 시련을 미끼로 지금까지의 원한을 청산하며 전생여정에 참여하는 거래!
지독히 계산적이고 감정 없어 보이는 거래였지만 나는 이런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갈부 말대로 내가 그를 수용할 수 있는지 내 그릇을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스으으으
잠시 후 제갈부가 짤막한 주문을 외우자 내가 받았던 상처가 한순간에 회복되었다. 제갈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바로 공략에 들어가지."
"잠깐. 대라멸진의 지속시간이 이제…."
"훗."
콰아아아!!
제갈부가 갑자기 팔괘의 진을 허공에 소환하며 주술을 시전하자 필멸일광이 더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내가 놀라자 제갈부가 말했다.
"인형일 때는 주술의 유지에 급급해서 그 이상을 할 수 없지만 대라멸진은 술사의 술력 또한 강화해주지. 나 정도 되는 술사가 요령만 있으며 대라멸진의 지속시간을 연장 시키는건 간단하다. 반시진 쯤은 여유고."
"그, 그런가."
그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지금 노려야 할 목표는 칠요의 행성이다."
"행성을 부순다고?"
"황천의 성좌로 그려지고 있는 저 거대한 용은 서서히 태양 주위에 있는 칠요의 궤도를 중심으로 선명해지고 있다. 이미 월요(月曜)에 불빛이 들어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칠요가 모두 밝혀질 것이다."
나는 제갈부의 말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빨리 부숴야겠군."
제갈부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칠요의 행성이 아니다."
"뭐?"
"저 눈동자를 봐라. 텅 비어있지 않은가?"
그 말대로였다. 거룡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고사(古事)를 알고 있는 나는 저 두 눈동자에 빛이 채워질 때야말로 악몽이 시작되리라는 걸 예감하고는 외쳤다.
"화룡점정(畵龍點睛)!!"
"그렇다. 용의 눈동자는 가장 마지막에 그리는 법이지. 구천현녀 또한 일요의 정령이고 그동한 천계 제일의 신선으로서 지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테지. 그리고 나후와 계도가 주축이 되어 용을 그리는게 끝나면…."
"쌍성(雙星)이 용의 눈동자가 되는가."
제갈부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자, 가라. 용의 완성 되면 삼황오제가 직접 와도 못 이길 거다."
"알았다!"
파앗!!
나는 대라멸진을 써서 공간을 압축 시키듯 화룡신검을 들어 막 불이 밝혀지려 하는 수요의 행성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수요의 성좌로 뛰어드는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
광활한 우주공간!
밑에서 볼때는 그저 조그마한 모형에 불과했으나 뛰어올라 공격 하는 순간 마치 거대한 세계의 어둠에 직접 뛰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수요의 행성 또한 실제 크기나 다름 없어 보였고 나는 극히 왜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과연 저렇게 거대한 것에 공격을 해봤자 통하기는 하는 걸까?
내가 자신감을 잃고 있을 때 제갈부가 정신으로 말을 걸었다.
[그냥 덤벼라! 지금의 대라멸진은 역대최강의 출력이다. 못 부술 건 없다.]
[하지만 저건 행성이라고! 지금 나한테 별을 부수라는 거냐?]
[내가 알 바 아니니까 해봐! 떠받들어주면 한도 끝도 없이 잘난척하면서 이럴 때만 비천한 티를 내는 건가?]
[크윽!!]
나는 다른 책사들과는 달리 진심을 비꼬는 듯한 제갈부의 말에 신경이 긁히는 걸 느꼈다. 뭣보다 놈과는 아직 완전히 아군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맞는말이었으므로 나는 닥치고 일단 전력을 다해서 수요를 향해 뛰어들었다.
푸른 행성에 근접해서 내가 화룡신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위잉
화룡신검이 내 모든 내공을 모으자 엄청난 기세로 강기가 요동쳤다. 그리고 우주공간에 무려 수백장 크기의 검강이 생겨났는데, 그 검강은 계속해서 커지더니 마치 대륙을 도려낼 것 같은 크기로 정련되었다.
'굉장하다!'
이게 최상급 술사에게 제대로 도움 받을 때 대라멸진이 낼 수 있는 위력인건가? 내가 만들고도 믿을 수 없는 기세였고 화룡진인의 힘이 대라멸진을 받아서 어마어마하게 증폭 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정도면 최소 수백리를 일격에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아아아압!!"
꽈과과광
뇌신(雷神)의 일섬(一殲)!
동시에 지표에 거대한 상흔이 생기면서 시꺼면 자국에 우주공간에서 보였다.
쿠콰콰콰콰!!
참강어도(斬?御刀)의 어검수법으로 길게 파괴흔을 늘리지 파괴의 범위는 무려 수천리나 되었다. 파괴의 궤적에 있던 화산들이 터지면서 분화하여 시뻘건 점이 나타나는 것도 보였다.
이미 대륙이 통째로 갈라져버린 듯 했으나, 나는 이걸로는 안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행성을 부수지 않으면 칠요를 파괴한 걸로 치지 않는 것이리라. 지금의 내 공격은 유리알에 금이 가게 한 수준에 불과했다.
'젠장. 그렇다면 한 번 더….'
그때 화룡진인이 내 내면에서 말을 걸었다.
[백웅이여! 한계다!]
[네?]
[보아라.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말대로였다. 수요의 행성은 잠시 후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강기를 날려보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아예 먹히지 않았다. 벌써 세개째의 칠요가 밝혀진 것이다.
'큭, 그러면….'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제갈부가 말했다.
"그럼 이젠 금요(金曜)밖에 없다. 남은 시간동안에 동료들과 모든 힘을 모아서 그것만 일점공략해라."
"어째서?"
"목요와 토요는 너무 커. 수요도 버거워 했던 네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금요를 부수는 것뿐이다."
"음… 설마."
내가 뭔가 눈치 챈 얼굴로 이야기하자 제갈부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저건 모형이 아니다. 저걸 부순다는 건 현상세계에도 영향이 가는 거다…."
일요의 시련에서 천룡을 구성하는 칠요의 행성을 부순다는 것 - 그것은 바로 실제로 존재하는 행성을 부순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