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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창힐이 소멸한 후, 나는 낙양을 빠져나가 망량선사의 마을로 향했다. 망량선사가 직접 가호하는 마을이라서인지, 사방천지가 폐허였음에도 이 마을 일대는 전혀 손상된 곳이 없어보였다. 나는 마을에 들어가기 전 천암비서를 잠시 묻어두고 안으로 진입했다.
" 왔군."
천우진은 따로 환술결계를 치지 않은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스승이 직접 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리라. 천우진의 근처에는 동료들이 모여 있었는데 다행히도 진소청, 당산, 서문혜 등이 모두 무사했다.
문득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닫고 말했다.
" 용중일과 사공린은?"
" 실종됐다. 어딨는지 모르겠더군."
그럼 어쩔 수 없다.
" 음... 제천대성과 공공은?"
" ... 그들은 천계로 갔다."
" 뭐?"
" 창힐과 삼황오제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네 몸에 갇혀있던 달기의 혼이 크게 폭주했지. 우리 셋이 같이 막으려 했으나 너무 격렬해서 힘들었다. 그러던 중 서왕모가 우리에게 술법으로 제안을 해 왔지."
나는 천우진의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자신에게 달기를 돌려달라고 했겠군."
" 어차피 네 몸에 달기의 혼이 남아있어봤자 백해무익할 뿐더러 너와는 연락도 되지 않아서 돌아올 시기를 알 수 없었으니까... 그대로라면 네 몸 자체가 달기의 혼에 맞춰서 고위존재로 변할 판이었다. 그래서 달기의 혼을 임시봉인해서 천계에 가져다주러 간 것이다."
현왕의 인은 상대의 영혼이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이 없다. 원하는 '육체'에 초점을 맞춰서 강탈하는 김에 영혼을 교환하는 것이기에 달기의 혼이 어디있든 별 상관할 바는 아닌 것이다.
" 괜찮을까? 서왕모가 그들을 공격하면..."
내가 걱정하자 천우진이 피식 웃었다.
" 대체 무슨 걱정이냐? 네가 그 염려를 틀어막아놓고."
" 뭐?"
" 태허천존이 서왕모에게 근신을 주문한 이상 그녀는 섣불리 우리 일행을 공격할 수 없을 거다."
" 그렇군..."
이제 제천대성과 공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건가?
그 때, 제갈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백웅. 다 좋은데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나? 너무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우리가 아는 정보가 한정적이다."
" 알았어. 여기 모여봐."
나는 흑요석의 술법으로 모두에게 내가 달기의 몸을 바꾼 후 일어났던 일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한참동안 그 일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 창힐이 큰 굴레를 넘을 수 있었다...? 흥미롭군. 하지만 그렇다면... 역시 나와 망량의 선택이 옳았어."
뭔가 중얼거리던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그렇다면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두 가지다."
" 뭔데?"
" 첫째. 창힐을 배신했다는 초상기인 진, 그 놈이 어떤 식으로 뭘 노리고 배신했는지를 알아내는거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배신을 했을 거고 일부러 창힐이 네 앞에 나타날 필요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을 게 아닌가? 또 진의 심장이 토요이기 때문에 칠요를 모으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놈과 싸워야 해."
" 그건 그렇지. 하지만 창힐은 그 전모를 내게 알려주지 않고 죽었어."
" 뭐... 어쩔 수 없지. 네 심계가 아쉽긴 하지만 창힐이 소멸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니까."
제갈사는 아쉽다는 듯 말하고는 검지에 이어 중지 손가락을 내세웠다.
" 둘째. 제갈유룡을 찾아가는 것이다."
" ......?"
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왜? 지금 그럴 필요까지 있는 거야?"
제갈유룡은 제갈사에 의해 최소 10년치의 봉인이 걸려 있었다. 최소라고 하는 이유는 제갈사가 그에게 박아넣은 단검의 저주가 악독한 것이기에 본래 타락해야 정상이지만 제갈유룡의 역량때문에 봉인에 그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굳이 확인을 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제갈유룡은 누군가에게 구출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아마 지금도 신단수의 폐허 지하에 묻혀 있으리라.
' 아직 놈의 봉인이 풀리려면 몇 년은 있어야 해.'
이미 현재의 전생에서 퇴장한지 꽤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강적인 진시황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 그런데 굳이 그런 놈을 찾아간다니?
제갈사가 말했다.
" 백웅. 이번 전생에서만 초상기인 진이 등장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봐라."
" 음..."
" 이번 전생에서 초상기인에 관련된 변인(變因) 하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나?"
나는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알아채고는 말했다.
" 황궁에 제갈유룡이 없었다...?"
" 그렇지."
" 하지만 그건 이번에만 그런 게 아니야. 지금까지도 황궁을 쓸어버리고 제갈유룡의 행적이 묘연하게 만든 적은 꽤 있었다고. 그 때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혼란스러워서 반문하자 제갈사는 고개를 저었다.
"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지금까지 제갈유룡이 완전히 황궁에 영향력을 잃었을 때는 딱히 초상기인이 그 역량을 발휘한 적이 없지 않았나? 대개 불완전하거나 제갈유룡이 초상기인의 완성 자체와 멀어져 있었던 경우였지."
" 흠... 그랬던 거 같긴 하군."
" 다시 말하자면 제갈유룡과 초상기인의 완성이 절묘하게 붙어있었던 시점은 바로 이전회차였다는 말이다. 초상기인 유신이 등장했던 때였지."
거기까지 이야기한 제갈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 제갈유룡이 황궁에 없었으며 그의 지시를 받는 제갈부까지 없었음에도 초상기인이 결과적으로는 완성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이다."
" 음... 잠깐..."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고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 그러니까, 초상기인이란 건 제갈유룡이 황궁에 있다면 유신이 되고 없다면 진시황이 된다... 그 말인 거냐?"
"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 아니, 정황으로 볼 때 그것 외에는 진시황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어."
" ......!!"
나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황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듣고 있던 진소청이 불쑥 말했다.
" 제갈사. 그 말대로라면 진시황은 '본래 역사'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겠군."
" 맞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제갈사가 손깍지를 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언동을 보면 사전에 초상기인의 강림을 염두에 두고 많은 준비를 한 걸로 보인다. 이건 진시황은 처음부터 끼어들 생각이 만만했으나 그럴 수 없는 원인이 있었다는 것에 가깝겠지."
" 그 원인이 바로 제갈유룡이란 건가?"
" 십중팔구는."
제갈사는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 백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갈부를 꺼내서 좀 물어봐라. 알고있는게 있는지 확인해보고 나서 제갈유룡을 만나는 편이 좋다."
" 알았어."
나는 천우진에게서 목갑을 건네받은 후 열어서 제갈부를 꺼냈다. 그리고 제갈부에게 초상기인, 제갈유룡 등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최대한 물어보았다. 놈은 인형상태라서 위증이나 거짓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심문하기를 약 반 시진, 제갈사가 한숨을 쉬었다.
" 이 놈은 초상기인을 제작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군. 전모를 몰라. 역시 내 형님답게 자식한테도 많은 걸 감췄군."
" 잠깐. 그래서 제갈유룡을 만나서 초상기인에 대해서 물어보면 뭐가 나아지는거지?"
" ... 당연한 거 아니냐."
제갈사가 물을 약간 마시더니 말했다.
" 창힐과 팔부신중이 사라진 지금 우리의 최대 적수는 진시황, 그러나 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 진시황의 정체와 약점에 대해 알만한 건 '변인'을 통제한 존재인 제갈유룡 뿐 아닌가?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야 향후 놈과 싸울때 유리해진단 말이지."
" 음... 그렇군."
" 그리고 고려에 가는 김에 십이율의 현황과 극호의 위치도 파악하는 게 좋겠지."
제갈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 잠깐! 진은 창힐이 강림해있는 동안 [작은 굴레]를 함부로 돌리는 바람에 [옛 지배자]들에게 견제용 저주를 수백 개나 받았어. 놈이 더 이상 굴레를 돌리는 능력을 쓸 수 없다면 굳이 약점을 캐지 않아도 정면승부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제갈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 그건 '본질'을 향한 저주다. 창힐에게만 적용되는 거지. 네 손에 창힐이 소멸해버린 이상 그 저주는 소멸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창힐의 사도임을 거부해버린 진은 그 제약을 받지 않을 확률이 커."
" 크윽, 제기랄!!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 제일 흥미로운 건 대체 무슨 수로 진시황이 삼황오제와 창힐이 휩쓸려 죽어간 그 대전에서 무사히 육체를 지키면서 창힐의 뒤통수까지 쳤냐는 거지만...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제갈유룡과 만나야 한다."
제갈사가 진소청을 바라보았다.
" 진소청. 그 전에 확실히 알고싶은 게 있는데..."
" 무엇이오?"
" 너도 검마처럼 '굴레'에 태허(太虛)를 일깨워서 저항할 수 있겠는가?"
" ......"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만일에 진이 우리를 습격해온다면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 때문에 우리 모두가 손도 쓰지 못하고 몰살당할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항하려면 무인으로써 극고의 경지에 올라 굴레에 저항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만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건 현재 우리 일행 중에서는 신격을 제외하고는 진소청 뿐인 것이다.
진소청이 말했다.
" 검마처럼 잠력을 일으켜서 모든 집중력을 다하면 가능은 할 것이오. 그러나 상시 흐름을 느끼며 적의 공격에 유동적으로 대처할 정도로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오."
" 실망이군. 인간계 최강의 고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다니."
"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오. 본디 인간으로서 시공을 조작하는 거력(巨力)에 버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그걸 해낸 검마는 무림사(武林史)에 길이 남을 초인(超人)이오. 검마 이전에 무림에는 그런 개념이나 전설조차 존재하지 않았소. 절대지경에 올라서야 시도해볼 수 있는 천상의 신기(神技)인 거요."
단호하게 대꾸한 진소청이 슬며시 나를 쳐다보았다.
" 허나, 그 검마의 기억을 백웅이 계승한 이상 이제부터는 다르겠지. 점점 우리 동료들의 수준이 높아질 게 분명하오."
" 뭐 그렇겠지. 당장이 아쉬울 뿐이지만. 어쨌든 인간끼리 있으면 진의 시간정지에 걸려서 한방에 몰살이란 소리 아냐?"
" ......"
입맛을 다신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 백웅. 제천대성과 공공에게 최대한 호위받아야 한다. 그리고 진의 이목을 피해서 제갈유룡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걸 최우선과제로 하지."
" 알았어."
우리는 제갈사의 말대로 제천대성과 공공을 기다려, 다시 제갈유룡이 있는 신단수 폐허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사흘 동안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자 제천대성이 돌아왔다.
" 여어. 살아있었구만."
" 제천대성."
나는 제천대성에게 그간 내가 겪은 일을 이야기해 줬다. 동시에 흑요석도 공유하려 했으나 제갈사가 슬며시 나를 제지했다. 그가 생각할 때는 아직 제천대성과 공유할 시점이 아니라고 보는 듯 했다.
제천대성은 창힐이 소멸한 전모를 듣더니 깊게 생각하며 말했다.
" 사실 천계에서 달기의 혼을 건네주며 서왕모와 얘기를 좀 하고 왔다."
" 네? 그러고보니 공공님이 보이지 않는군요."
" 그것과도 연관이 있는 얘기지."
제천대성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 서왕모는 자신이 여와라는 걸 인정하더군. 그리고 자신이 달기의 혼을 건네받는다 해도 더 이상 지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태허천존이 그녀에게 강하게 압박을 가한 것 같아."
" 그랬군요."
" 너희 무림의 표현으로 하자면 앞으로 천계는 봉문(封門)을 하겠지. 어차피 창힐이 사라진 이상 한동안 세계는 조용할 거다. 전쟁에서 신선들도 많이 죽었고. 다만..."
" 다만?"
" 그녀는 너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
서왕모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이유가 너무 많아서 그 중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어떤 이유든간에 나는 서왕모를 만나고싶지 않았기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고, 제천대성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만일 네가 만나려 하지 않을 경우의 전언(傳言)도 가져왔다."
" 전언이요?"
" 만일 네가 칠요의 시련에 도전한다면 다시 보게 될 터인데, 그 때 부디 대국적인 선택을 하라고 하더군. 옳은 선택을 하게 될 경우 그녀가 너와 네 가신들을 평생 가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제천대성의 말에 냉소했다.
" 웃기는 소리군요."
"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만큼 서왕모 입장에서는 칠요가 해방되는 게 달갑지 않다는 소리겠지."
" 아직 공공님이 오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 놈은 염제 신농을 해방하러 갔다."
" ... 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뜻밖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제천대성에게 모였다. 제천대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 사실상 이제부터 공공은 우리와 동료가 아니야. 왜냐하면 부활하게 될 염제의 권속이자 거인족의 장로로 되돌아갈 테니까."
" 무... 무슨 소리입니까? 염제 신농의 봉인은 그림자 세계에 있고 여와의 봉인때문에 그 혼자서는 절대 해제할 수 없는데."
" 그 여와가 염제의 봉인을 해제해주기로 했다는 소리야. 서왕모가 직접 공공에게 제안했지."
" 헉!"
뭐라고!!
여와는 염제 신농을 극도로 싫어하여 일부러 자기 힘을 불어넣어 봉인할 정도 아니었던가?
뜻밖의 상황에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사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 아무래도... 정말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모양이군."
" 제갈사! 뭔가 짐작가는 게 있어?"
" 뻔하지. 여와가 염제 신농을 풀어주기로 했다는 소리는..."
이윽고 제갈사의 입에서 믿기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 창힐과의 싸움에서 전욱과 제곡이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삼황오제 중에서 실질적으로 3인밖에 활동하지 않는 셈이니, 조만간 칠요가 모두 해방될 때 [옛 지배자]들의 연합에 비해서 크게 힘이 딸릴게 분명해. 그래서 좋든 싫든 봉인된 삼황 염제를 깨워서 그에 대비하고자 하는거겠지."
" ......!!"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 조만간 거신족이 부활할 것이다. 그 때 진정한 신들의 전쟁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