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
암천향(暗天鄕)
창힐의 광소가 흐름과 동시에 갑자기 주변에 도열해 있던 [창힐족]들이 동시에 입을 열어서 무언가를 발성(發聲)했다.
---------.
그 소리는 인간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내부에 고도로 암호화된 특유의 체계가 살아있는 이족의 언어였다. 그러나 나는 정신세계 내에서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 한자(漢字)...?'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흩날리고 엉키는 기천의 혼돈 속에서 말이 흐름을 만들며 그 흐름이 한자를 시각화(視覺化)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간은 저 혼돈의 언어를 시인(視認)할 수도 없겠지만 그 한자들이 뭉쳐서 다시 언령(言靈)으로서의 '힘'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우우우우
그리고 시작되는 공명(共鳴)!
수십만의 창힐족이 내뿜은 언어의 공명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었다. 공명은 가면 갈수록 강해졌고, 종래에는 엄청난 힘을 품은 채 낙양성 전체를 감싸게 되었다.
파직!
파직!
나는 갑자기 낙양 일대를 뒤덮은 희고 둥근 막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전욱이 중얼거렸다.
[ 대결계가 드러났군.]
저게 바로 망량선사가 직접 지키고 있는 최후의 방어막, 대결계!
아무래도 창힐족의 공명에 반응해서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창힐은 자신을 둘러싼 삼황오제를 보며 말했다.
[ 삼황오제 그대들은 그저 망량선사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대결계는 손댈 생각도 하지 못했지. 그러나 마침내 내가 이 위업을 이루노라.]
[ 어쩌라는 거냐? 우리에게 맞아죽고 나선 무슨 소용일까.]
전욱이 비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음신지력이 창(槍)의 형태로 변했고, 그 암흑의 창은 시간을 끊어버린 채 곧장 창힐의 몸뚱이에 날아가서 박혀버렸다.
푸콱!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창힐은 그저 웃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박힌 음신지력의 창을 뽑아내었고, 전욱은 다소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욱이 말했다.
[ 자기 무덤만 파고 있구나. 멍청한 놈!]
우오오오
그 순간 뒤쪽에서 소환되고 있던 만귀전의 귀신들이 소환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 혼돈의 힘을 직접 썼어! 그 때문에 인과율의 혼란이 가속된 건가?'
그 말은 창힐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강대한 신의 힘을 망설임없이 빌려썼다는 말이었고, 그 행위는 동시에 삼황오제가 이 세상에 끼어들 명분만 더 크게 주는 셈이었다. 아무리 봐도 창힐에게 별로 좋을 일이 아니었는데도 창힐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파캉
창힐은 자신의 손에 잡힌 암창을 부러뜨리며 말했다.
[ 요순과 소호는 겁을 먹었나? 내려오질 않는군.]
[ 너 따위를 상대하는데 넷 씩이나 오는 건 과분하다.]
[ 실망인데... 흐흐.]
창힐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갑자기 하늘로 손을 뻗었다.
[ 허공이여 빛을 부를지어다!]
파앗 -
그 순간, 창힐의 행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나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전욱의 감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것은 세상 저편에서 일어난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이 세계로 쏟아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투두두두
광대무량한 우주의 공간을 날아서 거대한 천체덩어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시각으로 확인하고 몸에 소름이 돋았다.
' 유성우(流星雨)!'
그것도 수천 개나 된다!
내가 대운의 중첩으로 불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와 숫자였다. 개중에는 대륙만큼이나 거대한 천체도 존재해서 저런게 충돌하면 즉시 우주적인 재앙이 일어날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게끔 했다. 창힐이 자신의 권능으로 우주에 떠돌던 유성우를 별 근처에 소환해버린 것이었다.
제곡이 불쾌한 듯 말했다.
[ 이 놈... 우리와 권능싸움을 해보겠다는 건가. 제정신이냐?]
[ 겁이 나면 하지 말도록...]
쿠콰콰쾅
충돌이 일어났다!
번쩍
눈 앞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흰 빛과 함께 세계가 한꺼번에 명멸(明滅)했다. 그것은 수천 개의 유성우가 동시에 이 세상에 떨어져 내리면서 성천에서도 보일만큼의 화염폭풍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동시에 중화대륙은 물론이고 세계의 바닷물이 메말라버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세계가 파멸에 휩싸였다. 대기가 모두 흩어지며 일순간에 극지방이 모조리 녹아버렸다.
쿠구구구구
설마... 이렇게 세상이 멸망하는 건가?
내가 그렇게 찰나동안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전욱이 허무의 공간에 발을 내딛으며 권능을 발했다.
[ 나 전욱이 명하노니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한다.]
쉬리리릭!!
마치 거짓말 같았다. 마치 별이 쪼개어지는 듯한 대재앙은 시간이 빨려들듯이 사라져 버렸고 방금 전의 대치상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창힐이 다시 세계를 부수는 주문을 외웠다.
[ 혼돈이여, 윤전(輪轉)하는 휘광을 불러오노니!!]
번쩍!
이번에는 운석폭우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 세계가 섬광에 휩싸였다. 이 섬광은 너무나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어서 나는 순식간에 내 육체가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또 한 번 세계가 멸망한 듯 했으나 이번에는 제곡이 신경질적으로 권능을 발휘했다.
[ 나 제곡이 명하노니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고하노니, 당분간 세계멸망의 재해를 금(禁)하기를 건의한다! 그리고 창힐의 굴레를 견제하길 원한다.]
위이이잉
또 다시 시간이 되돌아오며 시공이 수복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똑같은 양상은 아니었다.
스스스
허무의 공간속에서 문득 무수히 많은 어둠의 환영이 나타났다. 나는 저 어둠의 환영이 무엇인지 의아해서 전욱에게 물었다.
" 전욱 님. 저것들은...?"
[ 이 별에 거하는 [옛 지배자]들이다.]
" ......!!"
뭐라고?!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어둠의 환영들은 저마다 무언가 괴어(怪語)와 신언(神言)을 발하며 삼황오제 둘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끼리 무언가가 합의된 듯, 세상이 다시 정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슈르륵
상황은 방금 전과 비슷해 보였지만 창힐은 더 이상 세계파멸의 권능을 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힐이 손을 늘어뜨린 채 침묵하고 있자, 전욱이 정말로 신경질이 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 감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자는 건가? 인과율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신격이 세계를 일격에 파멸시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설령 네가 인과율을 갖고 있어도, 동시에 우리 모두가 혼돈의 종사인지라 [작은 굴레]를 움직일 수 있으니 끊이지 않는 파멸과 복원의 반복일 뿐. [옛 지배자]와 삼황오제 모두를 일거에 누를만한 존재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세계를 일격에 부술 수는 없다.]
제곡이 전욱의 말을 받았다.
[ 지금 모두의 동의를 받았다. 창힐, 너의 [굴레]에 관련된 모든 권능을 박탈한다!! 넌 더 이상 [작은 굴레]를 되돌릴 수 없다. 이는 이 별의 모든 지배자의 의지이다.]
쿠궁!!
그 순간 '진'의 몸에 수백 개나 되는 주언(呪言)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건 아마 하나하나가 [옛 지배자]들이 내린 견제의 저주가 분명했다. 이로써 창힐은 더 이상 세계파멸의 힘을 남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창힐이 문득 입을 열었다.
[ 이렇게까지 자극해도 안 내려오는군... 요순은 완전히 인간세상에서 관심을 끊었고, 소호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건가...]
[ 크크, 다 내려오면 대체 어쩌겠다는 거냐? 2대 1로 맞는것보다는 4대1로 맞는게 좋다는 뜻이냐?]
[ 바로 그 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파앗
창힐은 갑자기 등 뒤에 있던 백색의 거인, 제곡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창힐이 빙의한 초상기인이 달려드는 순간, 두 신격 사이에 무수한 인과율과 주문, 권능 따위가 소용돌이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 전욱이 내게 강림해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리라.
퍼억!!
[ 아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창힐의 몸이 그대로 제곡의 머리통을 관통해버리며 제곡이 한 방 먹은 것이다. 창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진의 양팔을 휘둘러서 진공의 칼날을 뿜어내어 제곡의 등에 달려 있던 거대한 한 쌍의 날개를 잘라버렸다.
제곡은 어림없다는 듯 다시 몸을 회복시켰지만 그 때는 창힐이 등 뒤에서 무언가를 제곡의 가슴팍으로 날리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제곡의 가슴을 뚫는 순간이었다.
비틀 -
제곡은 그 공격에 당하자마자 크게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삼황오제의 본체가 설마 무릎을 꿇다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으나 이내 제곡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에서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크윽... 네놈... 어떻게 나의 혼돈을 와해시킬 수 있는가.]
[ 초상기인이 내 사도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사실 창힐이 날린 것은 평범한 강철 창이었다. 그러나 토요의 힘이 극도로 일어나서 혼돈을 흩어버리는 성질이 있었기에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삼황오제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토요신살(土曜神殺)의 힘을 사역할 수 있는 현재의 창힐은 삼황오제를 죽이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
' 그래서 진과 손을 잡은 거구나!!'
나는 창힐이 어째서 진을 봐주고 심지어 자신의 사도로 들였는지 잘 몰랐는데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창힐은 처음부터 삼황오제를 제거할 수 있는 자신의 무기로 초상기인 진을 선택한 것이다.
창힐은 직후 주문을 외웠다.
[ 오소서, 나를 가호하는 자여!! 기어오는 혼돈이여! 그 위대한 유물을 내게 내려주소서.]
우웅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는 창힐의 두 손 사이에 무언가 일렁이는 금빛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의 수류(水流)가 감싸고 있어서 혼돈의 존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신성해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물건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에 순간 당혹했다.
' 저... 저건? 저게 왜 나오지?'
황금상자!!
과거 제갈사가 공양의식을 치르고 얻어내었던 강대한 마도의 유물!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닌지 약간 부상을 입은 제곡은 물론이고 전욱조차 그 순간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욱은 상당히 놀랐는지 침음성을 흘렸다.
[ 어찌... 그걸 소환할 수 있지? 이미 상당한 인과율을 소모했을 터, 네게 그 정도 인과율은 남아있지 않을텐데!! 그리고 '그 존재'가 황금상자를 내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 원래라면 그렇겠지... 허나 현자의 돌도 바쳤고, 이 몸뚱이의 주인에게 종속된 일천칠백년 전의 권속들을 바침으로써 가능했다.]
[ ......]
[ 하하, 놀랐나보군. 내가 괜히 수천 년간 그 분에게 보살핌받았겠는가? 그럼 놀란 김에 더 놀라게 해 주지...]
스윽
창힐이 황금상자의 덮개를 열려고 손을 갖다대자 전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미친 놈, 그만둬라!! 설마 그 안에 있는 걸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냐?]
[ 작은 굴레를 조종해서 날 막아봐라. 물론 이 상자를 내가 갖고있는 순간부터 너희가 아무리 굴레를 조종해도 나는 면역이란 걸 알고 있겠지.]
[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걸 원하는가?]
[ 멸망을 원하는 건 너희 아니냐?]
전욱은 굉장히 곤란해했다. 그러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 ... 대체 원하는 게 뭐냐? 말해보라.]
[ 흠...]
[ 그 상자를 개방하는 건 네놈에게도 자살행위일 터. 우선 얘기를 하라.]
나는 내면에서 전욱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내심 놀랐다.
' 전욱이 물러났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
전욱은 본디 타협따윈 하지 않고 상대방을 때려부수는 폭군이었으며 하물며 경멸하는 창힐이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창힐이 황금상자를 소환하는 순간 전욱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만큼 저 황금상자가 가진 힘이 막대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창힐이 문득 허무하다는 듯 말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제갈유룡을 믿고 지원할걸 그랬군... 그랬다면 수십 년의 시간을 아꼈을 터, 그는 정말 인간답지 않게 유능했구나.]
응?
제갈유룡이 왜 나오지?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창힐이 말했다.
[ 내가 원하는 건 칠요의 해방이다. 너희는 모두 물러가서 마지막 때를 기다려라.]
[ 웃기는 소리! 그렇게 할 것 같은가?]
[ 손해는 없을 텐데? 어차피 예정된 종말이 빨라질 뿐 결과적으로는 가면을 벗게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 아무런 보장이 없다.]
전욱은 이를 으득 갈더니 말했다.
[ 황제는 우리에게 계속 가면을 씌우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칠요를 해방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해방해서 그 분을 알현해야겠다. 그 분의 진의(眞意)를 알아야겠다.]
[ 과욕(過慾)이구나. 그러면 나로서는 더 이상 협상할 여지가 없으니 이대로 상자를 개방하겠다.]
[ ... 이 놈... 이제 물러설 순 없다.]
전욱과 제곡은 각오를 굳힌 듯 다시 강하게 싸울 의지를 보였다.
[ 그럼... 파멸이다.]
그 순간, 창힐은 천천히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찬연한 빛이 터져나왔다.
====================================================================================================
여긴 어디지?
희미한 기억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 ... 아버님, 정말로 우리 부족 모두를 인신공양 하시려 합니까?]
치직거리는 기억이 점차 밝아지면서 어떤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의 주인이 팔부신중 야차라는 걸 깨닫고 흠칫했다. 그녀는 고대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린 자가 대답했다.
[ 해야한다. 어차피 이 세상은 멸망이 예정되어 있고, 삼황오제는 종말까지 인간의 문명을 갖고놀 뿐이겠지...]
[ 아버님. 인신공양하려는 자들은 모두 우리와 피를 나눈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형제이며 친척이며 존속입니다.]
[ 네 어미까지 희생된다는 게 싫으냐?]
[ ......]
[ 너는 똑똑하고 재능이 있으니 앞으로 영겁토록 나를 따라오거라. 그녀와는 이미 모두 이야기를 했고 그녀도 납득했으니 한이 없을 것이다.]
야차는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 다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 위대한 거인족들께 돌봐줄 것을 부탁드린다면.]
[ 그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을 뿐 결국 이족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이족만큼 강해질 수밖엔 없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의 신이 필요하다.]
단호하게 대꾸한 '아버지'가 말했다.
[ 황제 공손헌원께서 내게 약속하셨다. 이번 인신공양을 치른다면 나를 그분의 사도로 삼아주시고 나아가서는 신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일러주시겠다고... 나, 창힐에게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다.]
말하는 놈이 창힐이었단 말인가?
나는 이게 창힐의 기억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창힐이 눈을 번득이며 말하는 게 들렸다.
[ 하(夏)의 제사장으로써 나는 인류 최초의 기회를 잡았다... 마도(魔道)를 공부한지도 수십 년, 이 기회는 놓칠 수 없다.]
[ 아버님. 앞으로 무간의 세월동안 업이 깊고 깊게 흐를 것입니다.]
[ ... 그래, 네 말대로 나는 강대한 악(惡)이 될 것이다.]
창힐이 허공을 쳐다보았다.
[ 내 악행은 신들이 보기에는 가소로울 것이다. 그저 악한 벌레에 지나지 않겠지.]
[ 아버님...]
[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냐? 나는 벌레의 왕이라도 좋다.]
주르륵
창힐의 눈가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동시에 인간 창힐이 느끼고 있는 끔찍한 정신적 고통과 혼란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피맺힌 절규를 흘려내었다.
[ 나는 앞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노라. 그리고 언젠가, 벌레의 왕으로 천상을 짓밟는 천마(天魔)가 되리라!!]
파아앗
기억이 갑자기 터져버리고, 나는 몇 번이나 요동치는 공간 속에서 내 정신이 이리저리 튕겨다니는 걸 알아챘다.
' 크으윽, 어지러워...'
정신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요동치는거지?
무엇보다도 바깥 상황이 어찌되었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방금 전 창힐의 기억이 내 앞에 혼재되어서 나타난 걸 보면 창힐 본인도 상당히 큰 타격을 입은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는 쿨럭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헉, 커헉, 허억..."
여긴 어디지?
나는 내 몸을 급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달기의 몸이 아니라 내 원래 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주변은 폐허였으며 주변에 내 동료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천대성, 공공, 천우진 등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 뭐야? 내가 현왕의 인을 해제하지도 않았는데 원래 몸으로 돌아온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달기의 영혼은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내게 강림해 있던 전욱은?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문득 내가 만일을 대비해서 천우진에게 칠요 중 오요를 담은 목갑을 넘겨줬던 걸 기억해냈다.
" 천우진!! 어딨냐!!"
나는 사자후를 터뜨리며 외쳤다. 하지만 이 광활한 폐허에서 천우진의 반응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 ......"
저벅
저벅
정말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창힐이 황금상자를 여는 순간 빛이 터져나갔고 삼황오제와 박터지게 싸웠다는 것까지는 짐작이 가는데 도대체 상황이 어찌된 거지?
" 헉!"
하지만 나는 이내 내 앞을 가로막은 존재 때문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가만히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을 걸어왔다.
[ 깨어났구나.]
" 망량선사?!"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고양이가 왜 여기 있어?!
" 그, 그럼 여긴 꿈인가?"
[ 아니. 현실이다. 낙양성이다.]
" ... 보통 꿈에만 나타나지 않았냐?"
내 질문에 망량선사가 대꾸헀다.
[ 긴급상황이라서.]
" 긴급상황?"
[ '기어오는 혼돈'이 하사한 유물 때문에 내가 치고 있던 대결계가 해제될 뻔 했다. 다행히 직전에 현실과 꿈을 뒤섞어서 막아버렸지.]
" ......"
[ 정확히는 이 곳은 현실과 꿈의 경계로 바뀌었다.]
스스스스스
갑자기 폐허가 되어있던 낙양성의 주변 풍경이 원래의 번화한 거리로 바뀌었다. 단 인간이 하나도 없을 뿐이었다. 살풍경하던 주변을 현실조작으로 바꿔버린 망량선사가 재차 내게 말했다.
[ 창힐이 내게 중재를 요청했다. 받아들이겠느냐?]
"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 방금 전, 대결계가 부숴질 뻔 하면서 창힐의 종족은 물론이고 삼황오제의 육신과 그 권속들까지 모두 소멸되어버리고 말았다. 황금상자가 개방되었기 때문이었지. 동시에 큰 타격을 입은 삼황오제는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갔으나 창힐은 살아남았다.]
" ......"
[ 그러나, 놈의 사도가 놈을 배신해버린 모양이더군. 그래서 너와 이야기를 하고싶다고 내게 요청해 왔다.]
" 그런 새끼 말을 뭐하러 들어줘? 안 해!!"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 얘기를 하는 편이 좋을걸. 왜냐하면 지금 놈은 네 머릿속에 있으니까.]
" ... 뭐?"
순간, 나는 방금 전 보았던 창힐의 기억이 떠올랐다.
동시에 오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서, 설마 창힐 새끼... 또다시 개념화해서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거냐?"
[ 그렇다. 아마 이번 생이 잘 안 풀리면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큰 굴레를 넘으려는 거겠지.]
" 제기라아아아알!!"
나는 울부짖었다.
' 안 돼! 또 한번 전생하면 그때는 정말로 창힐을 막을 방법이 없어!'
신격은 큰 굴레를 넘으면 더 강해진다. 그 말은 다음번의 창힐은 삼황오제조차 감당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념화해버린 놈을 어떻게 붙잡는단 말인가? 내가 어이없고 황당해서 몸을 떨고 있자 망량선사가 손을 들었다.
우웅
그러자 그 자리에는 창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창힐을 노려보자 창힐이 말했다.
[ 전생자여. 이대로 천암비서를 써서 다음 회차를 노릴 생각인가?]
" 니가 알 바 아니지 개새끼야!!"
[ 상관있다... 왜냐하면 칠요를 이만큼이나 모으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깝지도 않은가?]
"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 잘 생각해보아라... 이번에 나는 전욱과 제곡의 세력을 대거 격퇴함으로서 삼황오제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지금이라면 칠요를 해방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너 혼자 힘으로 최후의 시련에 도전하면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 그래서?"
[ 나와 힘을 합치자... 칠요의 시련을 돌파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칠요의 기회를 노리는 진시황에게서도 널 지켜주겠다.]
"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비직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놈에게 물었다.
" 그렇게나 벌레의 왕이 되어 천마가 되고싶은 건가?"
[ 내 기억을 봤나보군... 그렇다.]
" 그건 인간을 구한 게 아냐. 너 혼자만 구했다고 착각하는 거지."
[ 너와 이상을 다툴 생각은 없다... 나는 수천년 전에 오롯한 결론을 내렸다.]
" 그러셔?"
나는 심사가 배배 꼬이고 뒤틀렸다. 대체 이 놈때문에 얼마나 일이 꼬였는지 알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놈과 동맹을 맺는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리면 저 놈은 다시 개념화해서 내 전생에 섞여올 것이고, 다음번에는 결코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또다시 외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정말 짜증이 났다.
' 하 제기랄...'
지금은 도와줄 동료들도 하나도 없다. 나는 문득 망량선사를 보고 물었다.
" 내 동료들은 다 어디갔어?"
[ 내 마을으로 피신시켰다.]
" 그거 다행이네. 그럼 잠깐만 창힐을 놔두고 비켜줄래?"
[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 창힐과 진솔한 얘기를 하려고."
[ 좋다.]
슈욱
검은 고양이가 사라졌다. 나는 눈 앞에 있는 창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 이 개새끼야. 그렇게나 전생능력과 칠요가 갖고 싶냐?"
[ 그렇다... 그리고 그건 이제 네가 굳이 주지 않아도 얻을 수 있지... 네가 이번 생에서 뭘 하든 내 손바닥 안이다... 하하하하.]
" ......"
[ 자살하고싶으면 마음대로 하거라... 재밌게 지켜봐 주마.]
창힐이 광소를 터뜨리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제기랄. 좋아. 줄게. 준다고."
[ 진심으로 하는 말이겠지...]
" 그 대신에, 이 천암비서가 대체 뭐하는 건지 좀 해석이나 해 줄 수 있겠냐? 그동안 정말 궁금했다고."
나는 반쯤 포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하는 마음에 마지막 궁금증이나 해결할 셈으로 품속에 있던 천암비서를 꺼냈다. 다른 보물은 다 목갑에 넣어서 천우진에게 줬으나 이것만은 내 육체에 남겨뒀던 것이다.
내가 휙하고 천암비서를 꺼내서 창힐에게 던지자, 창힐이 천암비서를 건네받았다.
[ 흠... 50년간 보았으나 어떤 괴어인지 알 수 없었다... 수만 개의 종족언어를 대입했으나 어디 것인지 알 수 없었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그 순간, 창힐이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 응? 읽힌다...]
엥?
무슨 뜻이야?
그렇다면 50년간 나한테서 천암비서를 뺏어서 읽었는데도 모르던걸 이제야 읽을 수 있게 된 말인가? 내가 의아해서 창힐을 쳐다보고 있자, 창힐은 잠시 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우오... 오오오오... 오오오오오........!!]
스르르르르
스르르르르르르
천암비서에서 미세한 어둠이 스며나와서 창힐을 둘러싸기 시작했으나 정작 창힐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 아니... 그럴 수가... 아니 그렇다해도... 대체 나는... 그렇다면 이건... 전생자라는건 설마...!!]
큰 혼란에 휩싸여있는 창힐의 반응은 예전 피리부는 주술사와는 달랐다. 보자마자 절망에 휩싸여서 학을 떼고 물러난 주술사와는 달리 창힐은 경악하면서도 끝까지 다 읽으려는 기색이었다.
' 뭐야? 주술사 쪽이 도리어 천암비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단 소리야?'
나는 어마어마한 호기심이 생겨서 창힐에게 말했다.
" 창힐!! 어떤 내용이냐? 나도 좀 말해줘."
[ ... 이건... 거대한... 함... 정... 이다. 말도 안 되는... 설마 이렇게 내가 낚일줄은...]
창힐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 ... 56억 7천만년의...]
슈르르륵!!
그 순간이었다. 천암비서에서 갑자기 거대한 어둠이 흘러나오더니 창힐의 몸을 꿀꺽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창힐은 헛숨을 들이키며 비명소리를 냈다.
[ 흐억?! 자, 잠깐만...]
우적!
우적!
천암비서는 마치 무언가를 씹는 듯한 소리를 내며 잠시 동안 땅에서 들썩거렸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서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옛 지배자]의 반열에 오른 존재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적.
"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암비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암비서에 대해 섣불리 알아보려 하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