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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철컹
철컹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였고, 이윽고 내 눈에는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높이 삼 장 정도의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그 숫자는 무려 수백 개에 이르렀고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만 문 뒤에 아무런 건물이 없었으며 그저 문만 덩그러니 있었기에 다소 용도를 의심하게끔 했다.
' 저 문은...?'
그 순간, 나는 저게 뭔지를 눈치채고는 깜짝 놀랐다.
" 전이문(傳移門)?!"
나는 과거에 수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 너는 과거 태감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에 걸쳐서 세상 방방곳곳으로 원정을 떠났던 사실을 알고 있나? 그때 이미 어둠의 세력은 세계 각지로 통하는 문(門)을 만들어 둔 것이다. 정화의 원정도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보내진 거였지. 대명제국의 군사를 손쉽게 전이(傳移)시켜서 이민족의 땅을 정벌할 목적이었다.]
[ 현자의 돌은 무한의 동력원임과 동시에 그 '문'을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는 힘도 있다. 즉 현자의 돌이 완성된다는 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대명제국이 성립된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 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르면 고대 은나라의 귀족(貴族)들은 전이문(傳移門)이라는 걸 이용할 수 있었던 듯 하오. 역사서를 기록한 자들도 귀족이며, 그들은 머나먼 거리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타 종족의 문화를 배운 듯 하오. 그리고 그들은 뭔가를 예감했기 때문에 고대 야만족의 언어, 즉 룬 문자로 은나라의 역사를 번역해서 남겨둔 모양이오.]
[ 전이문이라는 건 대명제국에서 만든 게 아니라 고대에 만들어둔 것을 쓰는 것 뿐! 바로 그게 중요한 거지!]
제갈부에게서 처음으로 얻었던 전이문의 지식,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망량과 함께 고대도서관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고대의 비밀을 알게 되었었다. 제갈부,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제갈유룡과 어둠의 세력들은 현자의 돌과 초상기인을 완성시키면서 동시에 전이문을 자유자재로 발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는 초상기인에만 집중하다보니 현자의 돌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전 세계에 은나라 귀족들이 만들어놓은 전이문들이며, 그게 동시에 발동해 버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물리적인 이동제약은 크게 사라져버린거나 다름없다!
' 그 말은...'
나는 창힐에게 외쳤다.
" 설마 현자의 돌을 완성한 건가?!"
[ 당연한 소리를... 이번 회차의 창힐은 진작에 완성했지. 연금술사와 제갈유룡이 이미 거의 다 만들어둔 걸 완성시킨거니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전이문도 모두 되살렸으며 초상기인도 완성한 것이다.]
" ......"
[ 감회가 깊구나. 저 전이문도 과거에 내가 만들었거늘.]
창힐은 뭔가 중얼거리다가 별안간 외쳤다.
[ 깨어나거라, 나의 백성들이여...!!]
오오오오오
그 순간, 전이문을 향해서 세계 각지의 인간들이 마구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넋이 나간듯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그저 흰 빛이 눈동자에 떠돌고 있었다. 또한 전이문으로 뛰어든 다른 대륙의 인간들은 곧장 낙양에 공간이동되어 있었다.
쿠구구
마치 인류의 홍수가 낙양 성내에 퍼부어지는 것 같았다. 무수한 세계의 인간들이 피부색과 머리색깔이 다른데도 무작정 전이문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삽시간에 낙양 성내에는 인간들이 가득 찬 것만 같았으며, 난데없는 인간들의 난입에 천계 선인들은 당황한듯 잠시 뒤로 물러섰다.
' 며, 몇 명이지?'
나는 그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혼란스러워졌다. 기백명이라 해도 놀랄진대 수천 수만명을 일찌감치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 숫자가 수십만 명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만할 정도였다. 더욱이 피부색깔 머리색깔에 의복까지 완전히 다른 인간들이 수도 없이 섞여있으니 혼란의 도가니였다.
나는 개중 백인이나 흑인들도 많이 섞여있는 걸 알아채고 말했다.
" 말도 안 돼! 네 한자(漢字)의 지배력은 그걸 알고 있는 자들에게만 통할 텐데 어째서 저 인간들이..."
[ 이번 회차의 '나'가 전이문을 되살리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았을 거라 생각하는가? 진작에 팔부신중과 대명제국의 군대를 움직여서 세계 각지에 문명을 전파했다. 일국(一國)을 점령한 경우도 있었으니 내 문자의 영향력은 세계의 절반 이상을 침식했노라.]
" ......!!"
[ 현 대명제국의 영토... 그건 인류 역사상 가장 넓으리라.]
문명의 전파.
달리 말하자면 그건 - 팔부신중이 군대와 함께 움직여서 총포와 칼날으로 타국의 인간들을 공격해서 살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과거 남쪽 대륙에서 백인들의 함대가 원주민들을 극악하게 참살했던 광경이 생각났다. 창힐은 그 수백 배에 이르는 만행을 저질러버린 것이 분명했다.
크아아아아아!!
다음 순간, 전이문에서 뛰쳐나온 낙양 성내의 인간들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빠지지직
그들의 등 뒤에서는 갑자기 강렬한 빛과 함께 날개가 치솟아 올랐고, 그들의 몸은 마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조류의 날개를 지닌 불꽃인간과 같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대번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 서양의 천사(天使)!'
서양에서 믿는 유일신앙에서 일컬어지는 유일신의 사도 - 그것이 바로 천사라는 존재였고 나는 서양에 대해서 공부를 했기에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다만 비슷하다는 정도일 뿐 실제로는 마치 먼 이계에서 온 흉맹한 인간형 이족을 보는 듯, 엄청난 살기와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또한 천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개중에는 형태가 뒤틀어지며 혼돈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기괴한 벌레처럼 변태하는 자도 있었다. 더러는 용처럼 변해버렸고, 더러는 금수와 인간이 합쳐진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최초로 변한 천사가 날아들더니 신선 중 한 명을 자신의 검을 휘둘러서 베어 버렸다.
[ 크악.]
인간들은 아직도 쉴새없이 전이문으로 몰려들면서 계속 변신과 탈태를 했는데, 변신을 마친 자들은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놈들 하나하나의 힘이 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콰과광!!
파괴음이 연신 울려퍼졌다. 그리고 전황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 천계가 밀린다고?!'
변신한 인간들은 잠시 후 천계 신선들이 휘두르는 보패와 술법에 찢겼지만 개중에는 견뎌내거나 도리어 반사 흡수를 해버리는 놈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전투력이 투선을 상대로 버틸 정도인 변신체도 있었다. 일례로 투선 이랑진군에게 천사들이 이십여 마리 달라붙자 이랑진군은 그들을 상대하느라 다른 곳에는 갈 수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 - 놈들 하나하나가 고위이족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무수한 계통이 분화가 되어 있어서 온갖 전술전략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혼돈도 사역할 수 있는 걸로 보였다. 싸우는 걸 보면 지능도 결코 낮아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위력은 무엇인가?
한낱 인간들이 변신 한 번 했다고 천계의 존재들과 싸울 수 있다니!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상황을 보고 있자 창힐이 말했다.
[ 내 백성들의 힘이 어떠한가?]
" ... 미친 놈..."
[ 내가 만든 문자인 한자는 인간의 본질에 침식해 내부의 혼돈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내가 주언(呪言)을 발동하면 인공적인 불로불사와 강대한 혼돈의 힘을 얻게끔 되어 있다.]
" ... [창힐] 계통의 새로운 종족을 창조한다는 것이냐?"
[ 이해력이 좋군. 너희의 문명이 내가 만든 문자로 하여금 이룩되는 이상 너희는 이미 내 백성이었던 것이다.]
" 말도 안 돼. 저런 걸 여러번 쓰는 건 아무리 [옛 지배자]라도 불가능해."
창힐이 낮게 웃었다.
[ 그렇다. 아무리 [옛 지배자]라도 문자의 본질을 각성시키는 건 한 번밖에 발동할 수 없기에... 종말과 계시의 그 날에 인류의 인구가 100억을 넘으면 쓸 작정이었다. 허나 지금이라도 상관없겠지.]
" 저 자들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건가?"
[ 돌아올 필요가 있는지...?]
" 뭐?"
창힐은 당당하게 말했다.
[ 인간은 약해빠진 종족이다. 머금은 혼돈은 미약하기 짝이 없고, 본질부터 노예종족이었기에 신체능력과 정신능력도 나약하다. 우주를 누비는 무수한 이족들에 비하면 벌레나 다름없지... 이제 내 백성들은 인간에서 진화하여 강력한 혼돈으로 재탄생했으니, 모두가 불로불사를 얻어 행복한 천년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리라.]
" ... 지, 진화?"
[ 그렇다! 이는 내가 은나라 탕왕(湯王)일 때부터 세워왔던 계획!]
그가 광소를 터뜨렸다.
[ 인류는 곧 나약한 하위종족의 틀에서 벗어나 위대한 나, 창힐이 이끄는 위대한 문명의 초석이 되리라.]
" ......!!"
[ 상위인류(上位人類)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새끼 미쳤어!
인간을 구한다고 하더니 [고위 이족]으로 진화한 인간을 구한다는 뜻이었단 말인가?!
그게 정말 인간을 구한다고 할 수 있는 거냐?!
동시에 나는 측천무후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 그들은 이족의 삶에 적응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자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열등하고 추하기 짝이 없기에, 이족으로 진화한 자신을 열등한 인간에게 맞출 수 없다는 논리였지. 여는 초기에는 그 자들을 숙청했으나 나중에는 포기하고 떠나게 해 주었다.]
[ 후우,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는 당연히 모습이 달라져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여 영생을 누리는 게 최선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 왕국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측천무후는 팔부신중의 도움을 받아서 당나라 시대의 인간들과 그 영혼을 암천향으로 승천시켜서 자신만의 천년왕국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정작 측천무후의 뜻과는 달리 이족으로 변한 인간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지 않았으며 인간의 삶을 거부했으며, 인간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조차 불확실한 지경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측천무후와의 대화는 지금 창힐이 얼마나 지독한 광기와 오만에 빠져있는지를 즉시 깨닫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때의 내 대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께서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일 것입니다.]
그렇다.
내가 생각할 때 '인간'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육체와 정신의 구분 따위가 아니다.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고싶어한다면, 그는 즉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창힐이 세운다는 '상위인류'의 왕국은 결코 인류의 후손이 될 수 없다. 스스로 강대한 신적 능력을 갖고 변태한 인간들, 하물며 창힐의 손에 세뇌된 존재들이 어찌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결국 우주에 널려있는 무수한 고위이족 중 하나가 되어 무한히 혼돈에 타락해갈 뿐이리라!
동시에 나는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 만일... 오백여 년 후 종말의 세기...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 종말과 계시를 앞두고 창힐이 100억 인류에게 이 능력을 발동한다면...?'
지금은 그저 천계가 뒤집어엎히는 수준이지만 그 때가 되면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 - 내 모험은 처음부터 끝을 볼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내 행복을 찾아가며 타협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후손들이 잘 막아낼 것이라고 기대하며 무작정 미래에 짐을 지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오백 년 후의 인류가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압도적인 절망을 눈 앞의 창힐이 은나라 시대때부터 계획해두었던 것이다.
나는 창힐에게 말했다.
" ... 하지만, 그 강력하신 백성들이 자기 편도 공격하고 있는데?"
쿠콰콰쾅
내 말대로였다. 창힐의 '백성'들은 강력한 혼돈의 힘을 사역하면서 천계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팔부신중의 본체까지 공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겁도 없이 삼황오제 제곡의 본체에도 덤벼들다가 파리처럼 죽고 있었다. 아직까지 팔부신중들은 죽은 자는 없어보였지만 사방에서 무한히 날아드는 괴물들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듯 했다.
긴나라가 비통한 소리를 질렀다.
[ 주군!! 이제 됐습니다! 저희를 불러들여 주십시오!]
[ 조금만 기다려라, 긴나라!! 주군께서 아직 의식을 치르고 있으실 것이다.]
[ 버티자!!]
팔부신중들은 이 대재앙에서 달아나고 싶어했으나 창힐이 낙양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 때문에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버티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팔부신중들을 보자 기가 막혀서 창힐에게 비웃듯 말했다.
" 하, 이제는 팔부신중을 다 불러들여서 부하들을 다독여줄 생각이냐? 곧 저 놈들과 얼굴을 맞대겠군."
[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창힐은 그저 화면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딱히 놈이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 낌새를 눈치채고 설마하며 말했다.
" 네놈, 설마..."
[ 문자의 주언은 내가 역사상 딱 한 번밖에 발동할 수 없는 중대한 대주술이다. 나는 이 판에 모든 걸 걸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팔부신중은 필요없다.]
" 무슨 소리냐?!"
이어진 창힐의 말에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자아, 전생자여. 이제야 대국(對局)이라고 할만한 게 시작되겠구나...]
창힐은 웃고 있었다.
[ 크아아아... 나는 먼저 간다, 형제들이여!]
퍼엉!
[ 마후라가!!]
긴나라가 비통하게 소리를 질렀다. 마후라가의 본체가 힘겹게 싸우다가 결국 개떼처럼 몰려든 창힐의 '백성'들에게 뜯어먹히던 중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폭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후라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머지 않아 건달파도 사망했고, 나머지들도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퍼버벙
이윽고 천인의 영체가 파괴되어 빛의 덩어리로 화하기 시작했다. 천인은 뭔가 눈치챈 듯 배신감에 가득찬 고성을 내질렀다.
[ 주군... 어찌... 그럴수가... 우리를... 흡수...]
슈슈슈슉
그리고 나는 창힐의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창힐의 몸에 새하얀 빛이 스며들면서 점점 놈의 기운이 커져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 하하하... 인과율이 쌓인다...]
나는 창힐이 그저 새하얗게 웃으며 눈 앞에서 부하들이 학살당하는 걸 지켜보며 알 수 있었다.
팔부신중은 그저 창힐의 제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