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52화 (75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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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본디 인간이었으나 [옛 지배자]의 위격을 얻어 암천향의 달으로 간 존재였던 창힐은 전생자(轉生者)의 정보를 알게 된 후 생각했다.

이용해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던 이유는 바로 종말 직전에 다가올 계시의 순간, 그 때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온갖 계획을 다 짜놓고 있었지만 그 때 천상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팔부신중을 쉽게 움직일 수 있거나 인간세계에 간섭하기 쉬운건 그만의 장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옛 지배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창힐은 - 여행을 하고 있던 전생자, 백웅을 팔부신중의 위력으로 납치해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백웅의 의지를 확인하고는 곧장 그의 정신을 제압해서 그 모든 정보를 알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창힐이 아무리 읽어내려고 해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백웅의 정신방벽을 뚫고 기억을 다 꺼내는 게 불가능했다. 본능적인 기억의 편린을 긁어내는 정도는 가능했으나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은 무시무시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자신이 필멸자의 정신을 읽어내지 못할줄은 예상치도 못했던 창힐이었기에 그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창힐은 그 방어력이 아마 백웅이 가지고 다니던 천암비서에서 오는 것이라 예측하고 둘을 떼어내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웅은 읽혀지지 않았다. 불가해(不可解)가 구현화된 듯한 일이었다.

혹시 이 자는 [옛 지배자]의 화신인가?

창힐은 그 사실을 의심해서 그에게 연결된 인과율을 조사해보았으나 역시나 그렇지는 않았다. 내외적으로 다양한 신적 존재와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으며 근본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다치게 하거나 해부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정신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힐은 부단하게 '백웅'이 어떤 존재인지 연구하던 중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전생자란 [큰 굴레]를 돌리는 존재이다.

그 동력(動力)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아버지'의 화신이 아닐까 의심해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가진 힘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불가해함에 집착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이용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 [큰 굴레]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흐름의 굴레! 어설프게 끼어든다 해도 그 막강한 환원력을 견딜 수는 없다. 아무리 창힐이 [옛 지배자]의 신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고민을 하던 창힐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버리고 말았다.

[ 그 방법은 나 자신을 녹이는 것이었다.]

" ......"

나는 무의식세계에서 멍하니 창힐이 50여년 동안 했던 일의 기억을 받아들이던 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정신만이 남아있는 무(無)의 지평이었다. 나는 창힐이 아까의 모습을 드러내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걸 계속 들었다.

[ 내가 얼마나 큰 결단을 내렸는지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옛 지배자]의 절대적인 권능과 육체를 모두 버리고, 내 모든 것을 명운(命運)으로 화하여 개념적 존재로 변환시켰다.]

" ... 이해가... 안 돼..."

나는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띄엄띄엄 말을 했다. 극렬한 두통이 머리를 깨버릴 것 같았고 상황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내 의식이 정신세계에서 밀려나버렸고 창힐이 몸을 차지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왜 저 놈은 나를 소멸시키지 않은 거지?

내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창힐이 혼돈의 얼굴을 들어 말했다.

[ 백웅이여. 지배자의 육체를 명운으로 뒤바꾸어 네 운명에 녹이는 시간이 정확히 오십 년이었다. 네가 지난번 전생에서 오십 년 후에 깨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 ......"

[ 나는 네가 큰 굴레를 돌린다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도박을 걸었다... 그리고 내 예측대로 너는 죽음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로 도약했고, 새로운 전생이 시작되었지... 나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널 어둠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빙의가 아니라 개념적인 운명의 형태였으니 이 세상 누구도 나를 쉽게 인식하는게 불가능했다.]

" 모순... 이다..."

[ 어떤 모순이 느껴지지?]

나는 휘청거리다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24번째 전생을 시작하자마자... 내 몸을 뺏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아니... 천암비서를 그냥 지난번에 뺏으면 됐을 것을... 뭐하러 그렇게 귀찮은..."

[ 좋군. 기본적인 머리는 되는 놈이야.]

창힐은 기특하다는 말투로 대꾸하더니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 첫째.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완전히 깃들었음에도 너는 여전히 정신세계에 존재하여 소멸시킬 수가 없구나. 나는 너를 암천향의 달에서 연구하는 동안 무수히 육체 강탈을 행했으나... 알 수 없는 반발력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왔다. 네게는 불가해한 정신방어력 뿐만 아니라 [옛 지배자] 그 자체를 거부하는 능력이 있다. 영구적인 찬탈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었지.]

" 그... 런 건 몰랐는데."

[ 둘째. 천암비서가 네 전생(轉生)의 근원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 무슨... 소리야."

[ [작은 굴레]는 누가 조작하든 편집기록이 남으나 [큰 굴레]는 이 세계 모든 존재가 휩쓸리는 거대한 파도. 설령 [큰 굴레]가 움직여도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그 사실을 인식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은 전생자인 네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냥 천암비서를 쓰거나, 아무에게나 천암비서를 줘서 전생능력을 확인할 방법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던 것이다.]

" ......."

맞는 말이다. 사실상 동료들이 내게서 천암비서를 뺏고 배신하려는 모험을 안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천암비서가 첫 1회차에 이미 전생능력을 주었고 이후에는 그저 장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 공연히 이번 생에 나만 열받게 하고 본인은 전생을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내게 있어서 무한한 전생이 이어진다는 최악의 가정이었기에 깊게 생각하진 않았으나 천암비서 자체의 능력을 검증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운건 사실이었다.

[ 그러나... 인간인 너는 생각지 않았겠지만... 이 형태로 네게 편승해 [큰 굴레]를 넘어오는 건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 어떤 장점... 이냐."

[ 후후... 인과율의 축적이다. 본디 대등한 존재가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면 인과율이 둘 다 심판하는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차의 창힐은 소멸하고 나는 도리어 더 강해졌다.]

" ... 축적...? 그게 무슨..."

[ 구세계(舊世界)에서 신세계로 올때 본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종말과 계시를 거치게 되어있으나, 그 심판의 과정을 무시하고 넘어온 것만으로도... 필멸자 수준에서 상상하기 힘든 인과율이 축적된다는 것이지... 또한 나와 같은 신격에게 인과율은 곧 힘...]

창힐이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 흐하하하하... 정신세계에 갇혀있는 지금의 너는 내가 어느 정도의 힘을 사역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과거의 육체를 부활시킬 수도 있다.]

" ......!!"

천암비서의 전생에 편승해서 넘어오는 것만으로도 신격은 힘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건가?!

저렇게까지 창힐이 자신하는 걸 보면 저건 허세같은 게 아니라 진실이었다. 실제로 창힐이 저런걸로 날 속일 이유가 없었다.

큰일났다. 지금 상황은 정말 위험하다.

아니나 다를까 창힐은 방금 전 내가 생각한 위험성을 은근히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 나는 너를 정신적으로 살해할 생각이 없다...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네가 어떤 존재인지 해석할 수 없는 이상, 이 자리에 영겁토록 봉인하는게 최선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 ......"

[ 어떤가... 자신의 전생이 막히고... 무력하게 허무의 공간에서 사라지는 결말이?]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역시 내가 천암비서를 얻은 후 가장 걱정하던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봉인(封印)에 의한 전생능력의 봉쇄!

지금까지 아무리 죽어도 무한전생한다고 가정하면 사실 삼황오제든 뭐든 들이대는 게 가능했음에도 계속 몸을 사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상대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몰라도 붙잡아서 어딘가에 봉인해버리면 큰일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던 형태와는 달랐지만 이번에 창힐이 나를 정신세계에 봉인하는 데 성공해버렸다.

설마 이대로 끝인건가...?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현왕의 인의 효과가 맴돌고 있었기에 냉정침착하게 현재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 그건... 아닐걸!"

[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창힐 네가 지금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 ......]

"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허무의 정신세계에서 체감시간 수천년이나 수만년을 느끼게 해버린 후 찾아와도 되는 거였어... 그리고 정신이 망가진 내 유해나 수습하면 되겠지... 하지만 친절하게 나를 연구한 기억까지 보여주면서... 직접 날 찾아와서 도발하고 있다는 건..."

나는 이를 악물었다.

" 네 녀석은 아직 내게 원하는 게 있어! 뭘 원하는거냐!!"

저 놈은 아무 이유없이 상대를 파멸시키고 조롱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는 예감이 든다. 내게 행한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 ... 호오...]

창힐의 환영은 재밌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날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 정답이다... 여기까지 몰리고도 냉정하게 생각할 역량이 있다니... 역시 전생자.]

" 대체 뭘 하고싶은거지? 이게 기(基)라고 치면 네가 이겼을 텐데."

[ 아니... 아니지... 이긴 게 아니야... 왜냐하면 대국(對局)은 처음부터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 뭐...?"

[ 네 말대로 나는 이 정신세계에서 네게 수만 년의 체감시간을 느끼게 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써먹을 수가 없지. 네가 멀쩡한 정신으로 있어줘야 하니까.]

창힐이 문득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전생자여... 이름을 걸고 약속해라. 내게 천암비서와 칠요, 그리고 모든 전생능력을 양도하겠다고.]

" 큭...!!"

[ 그러면 이 생에서의 부귀영화는 물론 안락한 최후를 약속하지...]

노리는 건 그거였나!

나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 이제 와서 그런 협박성 거래를 시도하다니 당신도 머리가 나쁘군! 지난번 생에 납치했을 때 했으면..."

[ 했다.]

" 뭣?!"

[ 그 땐 네게 상당한 고통을 주며 더 겁박했었지... 그러나 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력때문에 굴복해서 승낙하는 순간... 나는 큰 피해를 입었었다. 너 또한 기억을 잃었나보군. 능력은 양도되지도 않고...]

" ......"

[ 아마 천암비서의 보호능력이겠지... 그 한 번 이후로는 더 시도하지 못했다.]

이, 이 자식 벌써 내게 고문과 협박을 다 해 봤었단 말인가?

내 기억에 없었을 뿐이란 말인가?

[ 그래서 그 때 마음을 먹었었다. 네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설득해서 자신의 의지로 양도계약을 맺게 하겠다고. 이름의 계약에 따른 정당한 양도까지 그 천암비서가 방해할 수는 없으리라.]

" 미... 미친 놈."

내가 질린 표정을 짓자 창힐이 말을 이었다.

[ 말해두지만 아주 후한 조건을 쳐주는 것이다... 네가 이름을 걸고 내게 모든 걸 양도하겠다고 맹세하면... 나 창힐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 너를 세계의 황제로 만들고 나 이외의 모든 것을 지배할 권리를 주지... 그래... 팔부신중도 네 부하로 다룰 수 있게 해 주마. 다만 인간의 왕 자리는 내 것이다.]

" 으..."

[ 네 동료들이 걱정되는가? 당연히 네 동료들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승천하여 천상의 존재가 되고 나면 그들 또한 내 권속이 될 터인데 굳이 죽일 이유는 없겠지... 네 부하들도 평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

[ 전생자여... 감당할 수 없는 전생능력으로 고통받는 것도 질리지 않는가? 내 말만 들으면 모든 게 행복해진다. 또한 네가 생각하던대로 내가 주도하여 인간종족을 구원해 주마. 나는 은나라 시절부터 인류를 구하려 계획하고 있었으니 네 의지를 맡기기에 딱 좋을 것이다.]

창힐의 유혹은 매우 달콤했다.

창힐의 목표는 원래부터 인간을 구하는 거였으니 그냥 그에게 다 맡기면 된다.

또한 동료들의 안전도 보장하며 심지어 나를 대륙황제로 만들어서 모든 부귀영화를 약속한다. 팔부신중도 내 부하처럼 부리면서 수백 년간 제멋대로 즐길 수 있으리라.

보통이라면 이 정도 조건에서 다들 납득하여 창힐의 말에 따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창힐의 말에 단호하게 외쳤다.

" 아니, 안돼! 넌 아직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 무엇인가?]

" 인간을 구하겠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야? 종말과 계시의 날에 해저도시가 부상하고 [옛 지배자]가 모두 깨어나며 세계가 한꺼번에 망해버릴텐데 무슨 수로 구하겠다는 거냐고!!"

[ ... 후후후. 그 얘기를 하는 건가.]

창힐은 비웃듯 웃더니 말했다.

[ 마침 잘 됐군. 조금 때가 이르긴 하지만 본디 내가 계획하고 있던 것을 보여주겠다...]

우웅!

그 순간 내 앞에 삼 장은 될 법한 거대한 화면이 나타났다. 그 화면이 비치는 것은 현재 혼돈으로 가득차서 난전이 이어지고 있는 낙양성내였다. 여기저기에서 투선과 팔부신중, 삼황오제 제곡 등이 미친듯이 싸우고 있었다.

상황은 팔부신중 측에 극히 불리했다. 원래 아군으로 싸워줘야 할 달기가 빠져버린데다가 수문장 칠흑의 뱀도 제압당했으니 더 이상의 지원군이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삼황오제 제곡의 본체 뿐만 아니라 천계의 강자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팔부신중들은 본체의 힘을 뿜어내면서도 크게 부상을 입은 기색이 역력했다.

" 헹, 꼴 좋다. 처음부터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 백웅이여... 너는 내가 왜 태초에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창힐을 쳐다보자 창힐이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 새 화면은 낙양성내를 벗어나서 전 세계, 대륙과 대양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시점이 되어 있었다.

[ 바로 이렇게 하기 위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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