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50화 (749/1,615)

750====================

암천향(暗天鄕)

' 눈 앞엔 곧 제곡의 본체가 소환되고, 주변엔 천계의 신선들이 잔뜩. 그리고 달기가 수문장 3명 중 하나이니 남은 수문장은 둘. 그리고 지금 팔부신중들이 다 본체에서 깨어났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일단 홧김에 황궁을 부수긴 했고 그건 해서 나쁠 게 없는 선택이었으나 지금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적아가 구분되지 않고 뒤엉킨 이 상황에서 나는 달기의 몸을 가지고 뭘 해야하는가?

나는 히죽 웃으며 곧장 위로 뛰어오르며 팔부신중 두 놈을 꼬리로 후려쳤다.

[ 으쌰!]

꽈광!

[ 크악. 이 놈...]

긴나라와 야차가 달기의 꼬리에 얻어맞고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본래 보통 공격은 먹히지 않겠지만 달기의 신체가 워낙 막강해서 그들이 가사상태에서 막 깬 상태에서는 도저히 피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기의 꼬리공격은 한방에 거대한 산을 밑둥까지 날릴 정도로 강력했다.

나는 평소에 짜증났던 팔부신중을 한 대 후려패고는 주먹을 휘둘러서 마후라가를 때렸다.

퍼억

[ 카학!]

마후라가는 허공에서 몇 바퀴나 돌면서 빙빙 날아가더니 지평선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팔부신중을 이렇게 쉽게 팰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고 다소 속이 후련했다.

' 헤헷. 짜증나는 자식들.'

다만 방금 주먹을 휘둘러보고 느낀 것은 달기의 몸으로는 뇌신류 무술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몸과 완전히 다르고 혈도도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내면에 거대한 혼돈이 뭉쳐있어서인지 아예 기 자체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우우웅

' 어? 알 것 같아.'

내가 무술을 못 쓰겠다고 실망하고 있을 때 나는 달기의 몸에 흐르는 요력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무공이나 내가기공과는 달리 마치 처음부터 어떻게 이 몸을 움직이는지 아는 듯한 느낌 - 요력이라는 걸 마치 숨쉬듯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나는 내게 이런 감각이 있다는 게 생소했지만 문득 미호의 말이 생각났다.

[ 아하하. 무공이나 술법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요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감각이 뛰어나구나. 하급요괴들은 이런 요령을 쉽게 깨닫지 못하는데.]

[ 사실 요괴가 요력을 쓰는 건 물고기가 물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어려운 건 아니니라. 다만 인간인 네가 이렇게 익숙하게 쓰는 건 좀 이상하긴 하지...]

" ......"

미호.

문득 미호가 그리워졌다. 지금은 서왕모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구출할 방법이 없어서 일부러 전생모험에서 떨어뜨려놓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다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까? 이번 생에 동영이 멸망위기에 놓였는데 미호는 괜찮을까?

잡생각이 순간적으로 흘렀지만 나는 머리를 털고는 외쳤다.

[ 나는 나를 위해 싸운다!]

웅성 -

순간 전장에 당황한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천계 신선들은 난데없이 달기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고 팔부신중들 또한 황당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본체의 현신을 5할 이상 끝내놓은 제곡이 재밌다는 듯 신언(神言)을 읊었다.

[ 후하하하... 이거 참 재밌구나...]

팔부신중 천인이 크게 놀라서 내게 외쳤다.

[ 사도 달기여!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의 신은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이게 무슨 배신이란 말이냐!!]

나는 천인의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 그딴거 없다!]

[ 아니 이런...]

팔부신중들은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책사인 긴나라조차도 뜬금없는 달기의 태도변화를 종잡을 수 없어하는 듯 했다. 천계 신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라, 투선들도 내 근처를 빙빙 돌 뿐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그 때였다.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말]이 울려퍼졌다.

[ ... 필멸자... 강대한 술법으로 내 사도의 몸을 빼앗았는가...]

움찔

나는 뇌를 직접 건드리는 듯한 그 말에 섬찟함을 느꼈다. 사도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으며 말만으로도 이 정도의 압박감을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황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옛 지배자] 뿐이었다. 달기의 본래 주인이 자기 사도에게 생겨난 이상을 깨닫고 말을 걸어온 게 분명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 기왕 이렇게 된거 나를 사도로 삼는 게 어떻습니까? 몸은 달기 맞잖아요.]

이판사판이다. 되든 안되든 일단 말이나 해보는 게 낫다.

[ ......]

[ 저도 일 잘 하는데... 진짜로.]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한참 후 [옛 지배자]가 내게 말했다.

[ 위대한 혼돈이... 우리조차 갖고놀려 하는군... 좋아... 이 판에서는 손을 떼지.]

[ 네?]

[ 그 몸은 네 마음대로 하라...]

파앗

그 순간, 나는 압박감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 몸을 둘러싸고 있던 강력한 가호가 몇 개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달기가 타고난 힘은 여전했으나 신이 내려준 특별한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과율의 연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나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 응?'

하지만 이내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황궁의 [옛 지배자]는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 나를 방조하는 대신 내렸던 축복을 거둬간 것이다. 단 사도의 자격은 그대로 놔둔 듯 했다. 물론 그게 나를 사도로 새로 임명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황궁의 [옛 지배자]는 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한 것일까?

왜 손을 뗀 거지?

' 꼭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처럼...'

다만 내가 그런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지금 없다. 어쨌든 전투력이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자신감을 얻고 외쳤다.

[ 하고싶은대로 하겠다!]

[ ......!!]

그 때였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투선 나타태자가 나를 노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공격해 왔다.

" 이런 쓰레기같은 여우요괴가 어디서 잘난체냐!"

쿠구구궁

나타태자가 들고 있던 건곤권(乾坤圈)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떨쳐졌다. 건곤권은 선계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가공할 공격력을 지닌 보패로서, 건곤권에 격중당하면 웬만한 신선은 즉시 소멸할 정도였다. 삽시간에 수백 배나 커진 건곤권이 달기의 본체와 같은 크기로 변해서 내 코앞까지 날아왔다.

투선 나타태자의 전력을 다한 공격!

내 본래 몸이었다면 이런 공격을 상대로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데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내 본신무공만으로는 어림도 없고 용왕 화룡진인의 힘과 가호를 잔뜩 끌어내어서야 살아남을 것이다. 원래라면 이정도 되면 나는 죽음의 위기에 몰려서 헥헥대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 이상한 일이었다.

달기의 몸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내게는 저 건곤권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건곤권의 거대한 권륜이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고, 금세 쳐서 망가뜨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손을 움직였을 때 나는 그 느낌이 어째서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달기의 몸에 흐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혼돈의 힘 - 그 힘은 투선의 역량조차 한참 아래로 깔아보고 있었고, 그 힘의 윤곽이 본능적으로 요력을 다루기 시작한 내게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까강!

나는 그 순간 보패 건곤권에 앞발을 날려서 옆면을 갈겼다. 그러자 건곤권은 허망하게 부숴져 나갔고 보패의 파괴에 따라 영력이 사방으로 가루처럼 휘날리는 게 보였다.

" 아, 아니?!"

나타태자가 건곤권이 파괴되자 망연자실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몸을 날려서 나타태자를 확 물어버렸다.

콰직!

" 크아아아악!!"

나타태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근잘근 씹다가 놈의 목을 물고 좌우로 휭휭 돌렸다. 일단 투선인데다 보패병기니까 이런 놈을 함부로 삼키면 내장을 뚫고 나올수도 있으니 씹어먹을 예정이었다.

' 어우 씨. 딱딱해.'

투선은 투선인 건가? 달기의 턱힘으로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도 나타태자의 몸은 파괴될 기색이 없었고 그저 고통스러워하기만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진짜 금강불괴일 것이다.

' 하긴 뭐 이놈은 봉신전쟁 때 만들어진 보패인간이니...'

마치 딱딱한 게껍질을 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씹고 또 씹다보니 조금씩 깨지는 기분이 들었고, 나는 피맛이 배어나오는 걸 조금 즐기다가 뱉었다.

[ 퉷!]

쿠구궁

나타태자는 몸이 피칠갑이 되어서 혼절한 채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나는 내가 상위투선을 두 수만에 작살낸 게 믿겨지지 않았지만 정말로 방금은 쉬운 싸움이었다. 본래 인간의 동체시력에는 거의 간파가 되지 않을 투선의 공격이 마치 느림보처럼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팔부신중들조차 내 위력에 놀란 듯 주춤거리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건달파가 침음성을 흘렸다.

[ 대단하구나... 달기... 저 강력한 나타태자를.]

쏴아아

나를 두려워해서 천계의 신선들이 크게 뒤로 물러섰고 팔부신중들도 허공에 뜬 채로 경원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낙양의 상공을 내려다보며 모든 것이 내 아래라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기분이 마음속에 차오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들 대부분이 지금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의 기분!

강렬한 오만함과 희열이 내면에 차오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새 현신을 거의 끝마친 삼황오제 제곡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재미있구나. 너는 그 몸의 진짜 주인이 아니지만 그만큼 자유롭게 몸을 쓰고 있군... 어디서 온 놈이냐?]

[ ......]

역시 제곡은 내 존재를 눈치챈 건가?

아무래도 달기 몸에 내가 빙의했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하지만 내가 백웅인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곡은 전신에 수천 개의 날개가 달린 듯한 기묘한 백색 거인의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 허나 더 이상 날뛰지 말라. 그 몸은 아주 중요한 것... 여와께 손상없이 돌려줘야 하니.]

저 놈은 알고 있다.

제곡은 달기가 사실은 여와의 음(陰)이 떨어져나와 폭주한 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긴 같은 삼황오제로서 모르는게 이상하긴 하겠지만, 제곡이 섣불리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된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거 제곡과 한번 싸워봐야 하나?

' 아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

애초에 제곡 본체와 싸우기 위해 수문장이자 사도로서 달기가 소환된 것이다. 여기서 제곡과 한판 붙는다면 결국 달라지는 게 없다.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내게만 손해가 되는 결정이었다.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진소청과 동료들을 발견한 후 그들에게 의지를 쏘아보냈다.

[ 인간들을 최대한 대피시켜주시오.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르오.]

진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전음으로 화답했다.

[ 걱정 마시오. 천계와 합의해서 지금 술선(術仙)들이 낙양 내의 인간들을 절반 이상 바깥으로 옮겼소. 우리도 움직여서 인명피해를 최대한 줄이겠소.]

역시 진소청은 믿음직하다.

나는 황궁을 다시 쳐다보았다. 완전히 황궁이 불타긴 했지만 역시 천문각과 황제의 궁은 멀쩡했다. 저기는 달기의 화염에도 멀쩡할 정도로 강력한 결계가 쳐져있다는 뜻이었다.

' 그럼 어디...'

콰콰쾅!!

[ 부숴져랏!]

나는 발을 내질러서 천문각과 황제의 궁에 발차기를 했다. 그러자 발차기가 결계를 깨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신이 나서 구미호 발차기를 계속 했다.

[ ......]

[ ......]

쿠구구궁!!

마침내 천문각이 완전히 부숴졌다! 결계도 크게 약화된게 느껴졌고 내부에서 순간적으로 강력한 마력이 터져나왔다. 아마 진이 말했던 그 '수문장'이란 놈이 바깥 상황에 반응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됐어! 이걸로 다시 들어가면 좀 더 쉬워질거야.'

잘하면 천우진이나 술법을 잘 쓰는 동료가 토요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장내의 모두는 내가 난데없이 또 황궁을 공격하자 황당한지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좌중을 힐끔 둘러보다가 말했다.

[ 난 더 싸울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구!]

스스슥

그러나 내 주변에 슬그머니 팔부신중과 투선들이 다가왔다. 내 상황은 몰라도 일단 요주의 인물이기에 견제하는 듯 했다.

' 쳇! 날 제압하려는 건가?'

나는 이번 공격은 쉽게 당해낼 수 없을거란 걸 직감했지만 그 순간 반사적으로 아홉개의 꼬리를 다같이 움찔했다.

쿠구궁...

갑자기 황궁에서 커다란 진동이 울리더니 안쪽에서 빛나는 광선이 날아와서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뒤통수가 따끔한 기분이 들어서 뒤를 쳐다봤는데 순간적으로 황궁의 심처에서 무언가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하는 기분이 들었다.

' 뭐, 뭐야?'

엄청난 존재감!

나는 달기 몸에 새겨져 있던 직감으로 '저 놈'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시선은 마치 뱀 그자체였으며, 눈빛에도 뱀의 기운이 담겨 있는 것이다.

' 뱀...? 뱀인가?'

나는 달기의 혼돈을 눈에 모으자 그 놈의 정체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황궁 심처의 옥좌를 둘러싸듯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이 눈에 보였는데, 그 뱀은 명백히 내게 적의를 분출하고 있었다.

방금의 광선은 경고였다.

더 이상 함부로 까불면 공격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 흠... 제곡을 건드리는 건 여기서 패착이야. 그렇다고 뱀과 팔부신중 놈들을 모두 해치우기엔 힘이 부족하고...'

나는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제곡을 보며 말했다.

[ 제곡이여. 만일 가면을 벗을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제곡이 나를 공격하는 상황이 제일 골치아프다. 그리고 저 놈이 이 자리에서 단일개체에서 가장 강하다면 일단 협상부터 하는 게 좋다. [ ......!!]

그 순간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삼황오제 제곡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한층 그 위력을 더해, 지금까지 내 요력이 뒤덮고 있던 낙양을 더욱 크게 뒤엎었다.

고오오오

신선들조차 그 마력에 질식해서 고꾸라질 정도였고 흉맹한 마력때문에 차원이 여기저기서 뒤틀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성천에서 달 주변에 왜곡이 생겨나며 유성의 궤도가 제멋대로 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러다가는 민간인이 다 죽겠다는 생각에 급히 달기의 혼돈을 끌어올려 그 파장이 멀리 퍼지지 않게끔 했다.

제곡이 흰색 몸에 어울리지 않는 시꺼먼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 지금부터는 잘 생각해서 이야기하라... 그 방법이 뭐지?]

나는 인간으로써 삼황오제와 대면했을 때보다 훨씬 편한 기분이 들었다. 달기가 품고 있는 혼돈때문에 삼황오제의 마력을 상쇄하는 게 굉장히 쉬웠고, 지금은 마치 동네아저씨가 눈 앞에서 껄렁거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런 압력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 아시다시피 황제의 만신전에 가는 것입니다.]

제곡은 그 순간 내가 누군지 눈치챈 것 같았다.

[ ... 그렇군. 칠요를 다 모아간다는 게 바로 네놈이었어.]

[ 그래서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 무엇이냐?]

나는 히죽 웃으며 제안했다.

[ 절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토요를 얻는것도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제가 만신전에 오른 후 삼황오제 분들을 대신해서 황제께 가면을 벗게 해주십사 건의를 드리겠습니다.]

[ ......]

[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 아닙니까?]

제곡은 크게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러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 육요를 해방하여 칠요에 이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 알만큼은 알지 않겠습니까?]

[ 좋다... 방금 전 교신하기를, 오제(五帝)가 모두 너의 의견에 동의했다. 네가 우리의 목적을 안다면 더 이상 숨길 필요는 없겠지. 토요가 네 소유라는 걸 인정하겠노라.]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제곡을 노려보았다.

[ 뺏으려 들기 없지요? 말바꾸기 없지요?]

내가 확인하듯 되묻자 제곡이 약간 당황한 듯 했다.

[ 뭣?! 네놈은 감히 삼황오제를 뭐라고... 아니 됐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 잠시 후가 기대되는군...]

됐다!

제곡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팔부신중 긴나라가 앞으로 날아와서 말했다.

[ 우둔하군! 네놈은 누구 좋으라고 삼황오제와 거래하는가!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면 인류는 영원히 고통받을터.]

나는 긴나라의 말에 싸늘하게 대꾸했다.

[ 그렇다고 네놈들 주군을 믿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럼 잘 해봐!]

제곡의 본체와 신나게 싸워봐라!

파앗

나는 그 순간 크게 형태를 변화시켜서 순간이동했다. 신공표가 달기에게 가르쳐 줬던 금오도의 법술을 나 또한 전해들었고, 그 덕분에 달기가 자신의 피에 새겨놓은 혈인능력을 고스란히 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도착한 곳은 바로 황궁 내부였다. 다소 예정과는 달리 삼황오제와 거래하게 되었지만 사실 이름을 걸고 거래한 것도 아니었으니 만신전에 가서 가면을 벗게 건의할 필요는 없다. 삼황오제 입장에서는 칠요를 모으는 내가 자기들 뜻대로 움직여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달기가 인간으로 변신한 모습은 역시 경국지색이었다. 다만 미호와는 달리 더욱 사나우면서도 요염하고 위험해보이는 절세미녀라고 해야할까? 나는 저장된 법술대로 변신하자 고대 은나라의 의복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아까 왔던 곳에 다시 도착하자 진이 펼쳐두었던 팔괘도법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래도 진이 바깥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일단 회수한 걸로 보였다. 나는 진의 꿍꿍이속이 궁금했지만 일단은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갔다.

지금은 동료들과 재합류할 때가 아니다. 기왕 강력한 달기의 힘을 손에 넣은 김에 이걸 이용해서 나혼자서 최대한 헤쳐나가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이 술법은 재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원래 몸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자, 수문장이란 놈이 어디 있을까.

나는 아까 '뱀'을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뱀의 기척을 느꼈던 장소로 향했고, 거기에는 창힐의 옥좌가 존재했다.

' 진은 없군.'

스아아아 -

거대한 칠흑의 뱀이 또아리를 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뱀은 눈을 번득이더니 말했다.

[ 감히... 왕을 시해하려는 자... 배신자...]

" 딱히 왕을 시해하려는 건 아닌데. 토요를 주면 얌전히 물러가 주지."

[ 토요... 그건... 인형이 가지고 있지... 왜 여기로 왔는가...]

인형?

그 순간이었다.

콰칭!!

순간 시간이 완전히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간의 굴레 속에서 내 몸이 의지와 달리 계속 멈춰 있으며, 굳어버린 시공간 사이로 문득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은 한쪽 손에 휘몰아치는 혼돈의 덩어리를 끌어내더니 곧장 뱀에게로 던졌다.

푸콱

뱀의 머리통은 그 혼돈의 구체에 맞자마자 터져버리고 말았으나 놈은 피할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 같았다.

' 초상기인 진이 시간을 멈춘 건가?'

웬만한 시간정지 능력에 달기의 혼돈이라면 저항할 수 있을 텐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뱀이 터진 머리에도 불구하고 몸을 쭉 뻗으며 뭔가 파장을 토해냈다.

우우우우

그러자 갑자기 시공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뱀이 지니고 있는 혼돈의 힘 때문에 [작은 굴레]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굴레를 조작할 수 있는 걸 보면 뱀 또한 최소한 마왕급 이상의 존재인 게 분명했다.

" 발동."

하지만 뱀이 시간을 되돌려서 자신의 몸뚱이를 수복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진이 한 손을 내밀어서 뱀에게 일 장을 쳐 올렸고, 그 순간 뱀은 몸을 고속으로 회복하다 말고 멈춰버렸다.

슈우욱...

[작은 굴레]가 돌아가다 말고 멈춰 버렸다. 나는 시간 속에 갇혀버린 칠흑의 뱀을 보자, 그제서야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달기의 요력을 끌어올리며 진을 노려보았다.

" 네 놈... 대체 뭐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작은 굴레]를 되돌릴 정도의 신화적 존재에게 간섭해서 회복을 방해하고 제압해 버리다니?! [작은 굴레]를 멈춰버리다니!! 아무리 기습을 했다지만 지금껏 백발의 초상기인에게 저 정도의 능력은 결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자리에 동료들을 데려오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의 시공간 조작능력 정도라면 다들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해버렸으리라.

내가 진을 노려보자 그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 창힐은 바로 이 앞이다. 따라와라."

" 닥쳐! 네놈 정체부터 밝혀라."

" 진이라고 말했을 텐데?"

" 거짓말하지 마라. 토요부터 내놔!!"

나는 직감했다. 이 장소에서 수문장을 제압했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눈 앞의 저 놈을 제대로 해치우거나 제압하지 않으면 나는 백발백중 함정에 걸려들어 죽을 것이다. 피할수 없는 결전의 순간이 지금 다가온 것이다. 저 놈이 숨기고 있는 토요를 일단 뺏는 게 중요하지 창힐을 만날 필요는 없다!

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흐음... 일을 귀찮게 만드는군. 하긴 난데없이 사도의 몸을 뺏을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넌 정말 예측불허야."

" ......"

진이 말했다.

" 정 그렇다면 토요가 어딨는지 가르쳐 주지."

스윽

진의 손이 서서히 자신의 오른쪽 가슴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마치 물에 손을 넣듯 자연스럽게 손을 집어넣더니, 천천히 뭔가를 가슴 안쪽에서 꺼냈다.

두근.

두근.

심장이 펄떡이며 뛰는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펄떡거리는 저 장기에는 익숙한 두루마리가 마치 점액에 엉킨 듯 융화되어 있었다. 나는 저 두루마리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 ......!!"

" 여기 있어."

진은 장난스럽게 껄껄댔다.

" 내 심장이 바로 토요라고,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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