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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다짜고짜 토요를 거래하자는 놈의 말에 나는 큰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당황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며 신중하게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 ... 토요는 어딨지? 그리고 넌 창힐과 무슨 관계냐."
진은 아무런 표정변화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 얌체처럼 한번에 원하는 정보를 모두 듣고싶은가 보군. 하지만 별로 알려줄 생각은 없다."
" 그럼 나도 거래할 필요가 없지."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진이 말했다.
" 성급하게 굴지 마. 아직 너와 내가 적이란 게 확정된 건 아니니까."
"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냐?"
" 우선 내 거래조건부터 자세히 들어보라는 소리지."
" ......"
묘하게 침착하다.
지금껏 만나왔던 상대들처럼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있는 건 같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묘한 허세와 찌르기를 심중에 숨기고 있다기 보다는 마치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확신을 마음에 품고 있는 놈 같았다.
" 말해 봐."
" 칠요의 탐색자여, 나는 너에게 토요를 주겠다. 그 대신에 너는 내게 왕의 자격을 넘겨줘야 한다."
" ......?"
왕의 자격?
나는 또 다시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 의문에 휩싸였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 무슨 뜻이지? 왕의 자격이란 게 넘겨줄 수 있는 거였던가?"
" 후후. 아무래도 정말 몰라서 묻는 모양이군. 충분히 양도 가능하다."
진이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 육요를 모은 자는 최후의 시련에 직면한 후 왕의 자격을 얻어 최후의 칠요 해방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그 일에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테니 왕의 자격만 내게 넘기라는 말이다."
" ......!!"
" 괜찮은 거래 아닌가? 넌 창힐과 제곡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목숨의 위협을 겪지 않아도 돼."
수상하다.
너무 내게 달콤한 거래라서 당연히 수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 놈은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나는 그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왕의 자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거래는 할 수 없어."
" 이런...? 칠요의 전원 해방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고?"
그 순간 진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간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까지 보였다. 저건 거짓으로 꾸며낸 표정이 아니라 정말 놀란 듯 했다.
" 이상한 놈이군. 정말... 이상한 놈이야. 넌 대체 칠요를 왜 모은 거냐?"
그의 반문에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질문은 대체 왜 하는 걸까?
나는 이내 놈의 말 속에 들어있는 뜻을 알아채고 말했다.
" 마치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되기 위해서 칠요를 모은다는 듯 말하는군."
" 크크... 넌 아니란 말이냐?"
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 아냐! 왕이고 뭐고 칠요를 모아서 황제 공손헌원을 만날 생각이다."
" ... 만나서 어쩌려고."
" 그는 종말에 관여할 정도로 강대한 신이며 삼황오제의 수좌이다. 그에게 부탁해서 인간의 종말을 피할 생각이다."
"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크하하하... 하하하하... 정말... 미친 놈이구나."
그는 한동안 껄껄 웃더니 문득 황금의 산에서 황금동전을 한움큼 쥐어서 손에 들었다.
" 칠요의 탐색자. 넌 여기까지 온 놈이니 금은보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 세계를 뒤덮는 광대한 문명의 주인이 되는 것도, 절세미녀 100명과 주지육림의 향락을 즐기는 것도, 심심할 때마다 하찮은 놈들을 갖고노는 것도 그다지 재미가 없겠지?"
" ......"
"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세상의 향락에는 한계가 있어. 권력과 재력, 육욕이 제공해주는 쾌락에는 분명한 한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
그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쳐다보았다.
" 그릇이 커지면 커질수록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말을 이었다.
" 그러나 제왕은 제왕의 길을 걷는 법. 구세(求世)의 환상에 빠져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던져넣는 건 왕의 도리가 아니지. 처음부터 네놈은 왕이 될 수 없는 놈이었구나."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 웃기는군. 네놈이 뭔데 왕이 무엇이라고 단정짓지? 그리고 네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별로 왕이 되려는 생각도 없다."
" 다르지. 네가 되고싶은 되고싶지 않든 - 그래, 나와 지금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틀림없이 인간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럼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고싶은지 정도는 생각해보는 게 보통 아닌가?"
진이 싸늘하게 웃었다.
" 묻겠다. 네가 생각하는 왕이란 무엇이냐?"
" 대답할 이유가 없는데."
" 충분히 좋은 대답이라면 토요를 주는 걸 고려해보겠다."
" ......"
그럼 일단 말해보는 수밖에 없겠군.
' 왕이란 게 뭐지?'
지금껏 거의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왕후장상이나 황제의 자리를 탐내서 이 수라길을 택한 것도 아니었고 권력을 얻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왕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었기에 왕이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황제 - 대명제국의 황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수백 수천만의 백성을 다스리며, 그들에게서 세금과 노동력, 군역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금은보화와 절세미녀도 자유자재로 손에 넣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정치를 아예 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어도 상관없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눈에 거슬린다면 평민이고 귀족이고간에 모조리 목을 칠 수 있다. 오랑캐들과 수십만 대군을 부딪혀 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대공사를 일으켜 지형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만인지상(萬人之上).
그것이 바로 황제이자 왕이라 불리는 자의 권력인 것이다. 굳이 황제까지 가지 않고 황족이자 친왕인 자들만 하더라도 지방에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 성의 성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황제가 아니었는데도 평민의 신상필벌과 삶, 죽음을 원하는대로
희롱할 수 있었다. 성주 휘하에 있는 고급관리들도 일반 민중에게는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비교우위 때문에 황제가 더욱더 엄청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진은 그런 황제의 권력에 근거하여 '왕'을 설명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 사실은 말의 맥락 속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놈 또한 권력 자체에는 권태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나는 힐끔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제천대성과 공공은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도 상당한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도 내 대답이 궁금한 듯 했다. 또한 제갈사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그저 나를 지긋이 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렇군.'
제갈사는 책사로서 알고싶은 것이다.
그는 내게 왕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어떤 왕이 되려하는지를 직접 듣고싶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는 내 주관을 똑바로 말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만왕(萬王)의 왕(王)이 되겠다."
" 만왕의 왕...이라."
진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후후, 표현을 달리했을 뿐 그건 황제와 동의어가 아닌가? 황제 또한 세상에 널려있던 제후이자 왕이던 자들을 통합하여 그들 중의 왕이 된 존재다. 뜻이 다르지 않다."
" 아니, 달라."
나는 말을 이었다.
" 그냥 왕이 되어서는 내 목표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야."
" 무슨 말이지?"
" 인간의 황제는 어둠의 세계에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 세계의 진정한 왕(王)은 바로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다. 삼황오제는 이미 [옛 지배자] 중에서도 왕이라 자칭할
수 있는 존재들이잖나."
" 그렇긴 하지."
"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옛 지배자]가 되면 놈들과 똑같은 놈이 될 뿐이니, 그놈들이 하는 사악한 짓을 본질적으로 막을 순 없다. 인간이 멸망하는 것도 막을 수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 그렇다면, 이 거지같은 세계를 뒤엎을 힘이 필요해. [옛 지배자]를 멸할 수 있는, 그런 왕중의 왕이 되고 말겠어! 언젠가는 그 정도의 힘을 손에 넣고 말겠다."
" ......"
" 만왕의 왕이라는 건 바로 나의 각오다."
내 전생이 언제 끝날지는 확실하지 않다. 천암비서를 버리면 끝날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무한히 전생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절망하지 않고 계속 힘을 쌓아서 계속 도전할 뿐이다.
이 절망적인 세상을 죽여버릴 때까지!
" 재밌군. 대단한 포부야."
진이 내 대답을 듣자 눈을 빛냈다.
" 이 나 조차도... 네 말이 순간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말에 뜻을 담아 주변을 설득하는 능력... 그 또한 군주의 재능이지. 너는 내가 인정할 만한 상대로구나."
" ......"
" 좋아... 그러면 네게는 왕이 되려는 의지가 있다고 보고 거래조건을 바꾸지."
" 어떻게 바꾸겠다는 거냐?"
" 창힐은 자신의 옥좌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세 명을 배치했다. 그 중 두 놈을 쓰러뜨리면 토요를 군말없이 넘겨주마."
" ...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진은 쿡쿡 웃었다.
" 그 수문장 중 한 명이 바로 나니까."
" 뭐...!!"
" 내가 중간에 빠지지 않았다면 너희는 옥좌 앞에서 세 명의 사도를 상대해야 했을 거다."
스으으
그 순간 분위기가 일변해서 모두가 살기를 일으켰다.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들면 당해낼만한 상대는 천지천상을 통틀어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자 진이 말했다.
" 진정해라. 창힐이 왜 수문장을 세웠는지는 궁금하지 않나?"
" ... 네가 처음부터 창힐과 네놈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지. 의심이란 의심은 다 들게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개소리냐!"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진이 손깍지를 끼며 대꾸했다.
" 솔직히 말하지. 창힐은 내 존재를 몰라. 정확히는 초상기인 내부에 나라고 하는 인격이 존재하는 걸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지..."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하지만 그래도 신은 신인지 창힐은 자신의 부하인 팔부신중조차 의심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문장을 만들어냈다. 아마 내 기척을 느낀 거라고 생각한다."
" 왜 그럴 필요가 있나? 창힐은 엄청난 권능을 갖고 있는데."
" 창힐은 지금 거대한 의식을 치르고 있어서 현재 싸울 수 없다. 삼황오제 제곡이 천계에 호응해서 같이 낙양에 쳐들어온 이유는 그런 창힐의 약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의식이라고?
내가 진을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아무리 창힐이 삼황오제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어도 결코 자기만의 힘으로는 삼황오제의 파상공격에서 버틸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이 낙양을 수호하는 대결계를 더욱 빨리 깰 수 있게끔 문자(文字)의 힘을 이용해서 낙양의 인간들을 각성(覺性)시키고 있다."
" 각성...?"
"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거다. 그 방법을 쓰면 창힐은 확실히 삼황오제에 대항할 비책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대결계까지 머지않아 깰 수 있다."
" 낙양의 인간들이 각성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냐?"
" 바깥에 있는 천계의 병력들이 몰살당할 것이다."
" ......"
이 놈이 미쳤나?
바깥에서 낙양을 공성하고 있는 천계의 전력들은 지선 뿐만 아니라 천계의 대라신선과 투선까지 떼거지로 몰려와 있었다. 일개 지선조차도 인간병력 5천여명을 감당해낼 정도로 강력했으니 사실 인간의 문명수준으로는 막을 수 없는 미증유의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창힐측의 팔부신중조차 본체를 펼쳐서 그저 결계로 막는게 한계인 상황에서 인간들이 각성해서 천계를 몰살시킨다니?
하도 어이가 없는 말에 내가 황당해하자 진이 말했다.
" 믿든말든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다. 제곡 본체의 위력에 따라서 상황이 다르겠지만 전황은 창힐에게 유리해."
" 그래서?"
" 가로막는 존재들을 모두 없애고 창힐을 암살해라. 그러면 토요를 넘겨주지."
" ... 흠."
장황해 보였지만 하는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이대로 창힐의 옥좌에 도전해서 그 앞을 막고 있는 2명의 사도급 존재를 해치우고 창힐을 죽이면 된다. 딱히 동선이 낭비되는 것도 아니고 원래 해야할 일을 하는 거였으니 깔끔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왕의 자격을 요구했던 놈이 말을 바꿔서 창힐을 쓰러뜨리라고 하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틀림없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저 놈은 끝까지 토요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진이 천천히 가루로 변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 좀 있다 다시 만나자..."
스르르
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놈 또한 특수한 능력을 쓸 수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저건 지금까지 초상기인의 초상능력 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 백웅. 이건 함정이다. 저 놈 말대로 하면 아마 죽을 거다."
" ... 그렇겠지."
" 목적을 헷갈리면 안 된다. 우리는 토요를 얻어야 하지 창힐을 죽이는게 원래 목적이 아니다."
" 그럼 저 놈이 제일 싫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겠군."
나는 제갈사와 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 나가자!"
파앗
우리는 그대로 천우진의 술법으로 황궁에서 빠져나와 버렸다. 제천대성이 황당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 어이어이. 아무리 함정이라지만 정말 이 기회를 포기하는 거냐? 진이란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창힐의 목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 창힐의 목은 삼황오제도 딸 수 있으니 우리가 굳이 먼저 딸 필요는 없습니다. 피는 다른 놈들이 흘리는 게 좋아요."
나는 냉정하게 대꾸한 후 말했다.
" 천계 군세가 낙양의 방어를 뚫을 때까지 일단 지켜보겠습니다."
수상쩍인 음모에 일부러 휘둘려줄 필요는 없다.
지금은 일단 지켜본다.
그리고 천계와 팔부신중의 격전이 시작되었을 때 더욱 큰 틈이 날테니, 그 때 다시 상황을 보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편이 불리해지면 진이라는 놈도 알아서 몸이 달아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처의 산으로 나와서 낙양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쿠구구궁...
한참을 기다리자 대력역사(大力力士)라고 불리는 천계의 신장(神將)이 거대한 덩치로 망치를 휘둘러서 낙양의 문을 부수는 광경이 펼쳐졌다. 결계는 이미 크게 부숴진 듯 단순한 물리공격도 이제 버틸 힘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천계의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들어가서 허깨비처럼 술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에게도 가차없이 술법으로 공격을 하며 보이는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고절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차림새를 한 신선이 화염과 질풍을 동시에 날려서 일가족을 몰살하는 광경도 보였다.
후와아악
끄아아악!!
낙양에서는 머지 않아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광대한 살육이 펼쳐졌다. 영험한 기운을 품은 천계의 신선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간을 학살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 뭣?! 어째서 저 자식들이 민간인을..."
아무리 그래도 신선인데?!
문득 내 머릿속에 예전에 미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서왕모께선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어. 뿐만 아니라 내가 봤던 천계의 최고위층은 대부분 인간을 마지못해 살려두는 느낌이었고.]
[ 딱히 하고싶진 않으나 일이니까 한다... 라고 해야할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대라신선들은 그 위치에 임명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과업이나 숙명이 지워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순수하게 인간을 좋아해서 지켜준다는 신선은 굉장히 드물다.]
[ 동식물 출신으로 선좌에 오른 자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에 대한 증오감을 품고 있으며, 인간출신 또한 희로애락애오욕을 줄이고 객관적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회색 시선을 띄게 된다. 요괴들이 괜히 인간을 해치는게 아니지.]
미호의 말대로였다. 신선이란 아무리 인간출신이라 해도 이미 등선한 순간부터 인간과 다른 종족이나 다름없고 기계적으로 명령을 듣기만 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신선이란 존재가 선과 의로움을 품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 제길...!!'
지금까지 화룡진인, 여동빈 등 인간에게 호의적인 대라신선을 많이 만났기 때문일까? 내가 그 점을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다.
제갈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에서 대꾸했다.
" 당연히 학살하지. 창힐의 본거지에 살고 있는 인간이 어떤 마도실험과 기생술법을 겪었는지 알고 살려두겠나? 가만히 놔두면 갑자기 아까 봤던 괴생명체로 변해서 신선들을 습격할 가능성이 충분해. 내가 천계군을 이끌고 있어도 같은 지시를 내릴거다."
제갈사는 힐끔 천공에 구름을 타고 떠 다니는 존재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 지휘관은 투선 나타태자로군. 저 놈은 원래부터 인간미 없는 보패병기니까 더 쉽게 학살하겠구나."
" 안 돼!! 저런 건 놔둘 수 없어."
" 그래서 지금 천계를 가로막게? 누구 좋으라고. 창힐도 제곡도 어쩌지 못하고 우리만 손해를 보는 길이야."
" ......"
제갈사는 염세적인 말투로 말했다.
" 창힐이 낙양을 점거한 순간부터 피를 보지 않고 끝낼 방법은 없었던 거다. 저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니까 납득해."
" 납득하라고..."
" 이미 낙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전화(戰火)를 낙양에서 멈추지 않으면 전 대륙은 물론이고 세계가 멸망하겠지. 큰 그림을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해라."
나는 고민했다.
현왕의 인의 효과로 똑똑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갈사의 말이 얼마나 정확하고 옳은 판단인지를 예전보다 크게 실감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끼어들어서 학살을 막아봤자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도리어 상황만 계속 심각해질 것이다. 지금은 혼전이 일어나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양측 진영이 혼란스러워지면 황궁에 재침투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빌미로, 이 아수라장을 방관하는 게 옳은 것일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외쳤다.
" 그래도... 막을 수 있으면 일단 막겠어. 천계 놈들에게 학살을 자제하라고 말하겠다!"
" 진심이냐?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지 아냐? 기껏 우리 존재가 숨겨져 있어서 움직이기 편한데 그 이득을 모조리 날리겠다고?"
" 윽... 그래도 막을..."
내가 멈칫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용중일이 허탈한 듯 말했다.
" ... 백웅. 당신은 위선자인지 구원자인지 종잡을 수가 없군. 세계를 목표로 하면서 개인적인 잔정을 떨치지 못하고 자기모순에 휩싸여 있다니... 당신같은 자가 어떻게 칠요를 그만큼이나 모은 거지?"
내가 용중일의 비난에 입을 다물자 문득 진소청이 한걸음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 그런 백웅이기 때문에 칠요를 이 정도로 모은 것이오. 그 입 닥치시오!"
" 진소청."
진소청은 용중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 백웅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노예시장을 운영하고 비인도적인 마도실험을 주도해서 자기 무류의 고수에게 이족을 기생시키고 자기만족을 위해 백련교를 희생시킨 당신 따위가 백웅에게 아가리를 놀리는 건 봐줄 수 없소."
" ......"
" 불만있으면 덤벼 보시오."
" 크...!!"
용중일은 약간 화가 난듯 표정이 뒤틀렸으나 이내 진소청과 기세싸움을 하자 크게 짓눌리는 모습이었다. 진소청의 진경이 명백히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가 주춤대며 뒤로 물러서자 진소청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백웅. 당신이 위선자라도 좋소. 나는 당신이 인의(仁義)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오. 그러니 남들이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그 영역, 내가 당신의 동료로써 떠맡겠소."
" 진소청."
" 내가 천계를 막겠소."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청이 엄청난 기세로 멸혼보를 써서 낙양 성내로 달려들어갔다. 나는 곧장 진소청을 따라가려 했으나 그 순간 제갈사가 나를 손짓해서 막고는 좌중에 명령을 내렸다.
" 당산, 서문혜. 진소청을 따라가서 돕도록."
" 알겠습니다."
" 그리고 사공린. 너는 외곽에서부터 백성을 인솔해서 생존자를 대피시켜라."
그러자 용중일이 버럭 소리를 내었다.
" 잠깐! 누구 맘대로 남의 제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거지?"
" 어차피 황궁 내의 싸움은 최소한 사도급 존재와 싸우게 될 터. 네 약한 제자를 그 전장에서 피하게 하는 김에 일처리도 맡기잖아."
" 천계와 대치하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요."
제갈사가 차갑게 웃었다.
" 크크...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된다고. 칠요를 다 모은 후에 네놈이 어떻게 될지는 보장 못하지만."
" 큭."
" 네놈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동료가 아니야. 이 자리에서 죽여버려도 할 말 없겠지?"
그러자 사공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그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윽고 아군의 인간동료 대부분이 낙양쪽으로 떠났다. 용중일 또한 제자가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기는 싫은지, 혹은 황궁 내의 싸움에 참전하기 싫은지 사공린을 따라서 가 버렸다. 제갈사는 지시를 내린 후 내게 말했다.
" 진소청이 막는다면 천계도 잠시 멈출 거다. 저 녀석은 현재 인간계 최강의 고수니까. 게다가 애초에 태허천존이 주도해서 천계가 공습을 시작했으니, 놈들은 우리 일행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료들을 섣불리 죽이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 ......"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네놈이 늘 갖고 있는 그 모순을 진소청이 자처해서 떠맡아준 거잖나? 이런 것도 신하의 일인 거지."
알고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순간, 내가 타락할까봐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순간에 진소청이 대신해서 내 짐을 맡아준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진소청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마냥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잠시 후, 화안금정으로 원거리를 보는 능력을 발동시키자 진소청이 신선들을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진소청의 앞에 투선들이 나타나서 뭔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당분간 대치상태가 유지될 듯 했다.
그렇게 약 한 식경 동안 별다른 일이 없이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쿠구궁!!
그리고 난데없이 하늘에 있던 금성 마신들의 소환진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와 동시에 내 옆에 있던 제천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 제기랄... 창힐이 완전히 닫아버렸어. 대단한 놈이군."
삼황오제가 억지로 벌리려고 하는 소환진을 자력으로 닫은 셈!
창힐의 저력은 생각보다 대단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재차 시꺼먼 먹구름으로 물들더니 비가 미친듯이 천지에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
새하얀 제곡의 팔이 빗줄기와 함께 부드럽게 땅으로 내려오더니 점차 그의 어깨죽지가 드러났다. 곧이어 거대한 발이 천공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제천대성과 천우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 현신이 시작되었다."
" 제곡이 내려온다!
나는 이제 곧 삼황오제 제곡의 본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알아챘다. 제곡의 본체가 완전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바로 그 때가 기회일 것이다!
' 준비하시고...'
쿠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천공에 떠 있던 팔부신중의 본체들이 서서히 결계를 유지하던 걸 멈추고 동면에서 깨어나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황궁에서 거대한 마력이 솟구치더니 천지를 뒤엎을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시뻘건 안광과 함께 엄청난 마물의 포효가 세상에 울려퍼졌다.
[ 제곡이여, 나의 주인께서 네놈을 없애라 하셨느니!]
역시 저 놈이 세 명의 수문장 중에 한 놈이었구나!
나는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싸움은 창힐측의 팔부신중과 3대 수문장이 힘을 합쳐서 제곡 본체와 천계 군세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되리라. 거기에 창힐이 본체로 끼어들것까지 생각하면 실로 어느 쪽이 이길지 예측불허라고 할 수 있었다.
' 그래... 쓸 거라면 지금 써야지!'
굳이 내 스스로 적지에 위험하게 기어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스으으
나는 천천히 손바닥에 있던 현왕의 인을 꺼냈다. 그리고 제천대성과 공공, 천우진을 한 번씩 돌아보며 말했다.
" 현왕의 인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고 있지?"
" 알아. 걱정 말고 해라."
" 좋아. 그럼..."
나는 목갑 안에 모든 칠요와 보물을 넣은 후 천우진에게 넘겼다. 또한 제천대성과 공공, 제갈사는 다같이 나를 둘러싸고 봉인할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가 다 끝나자 나는 곧장 낙양성에 모습을 드러낸 마물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오오오오
" 현왕의 인이여! 나의 의지로 발동하라!"
파앗!
시야가 급격하게 꺼진다. 동시에 내 의식이 어디론가 크게 빨려들어가며 다른 곳으로 향한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그 변화가 끝나자 나는 낙양의 상공을 아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청 크고 높다.
지상에서 최소한 이백여 장은 되는 높이가 아닐까?
그리고 먹구름이 가득 낀 전방에서 제곡의 흰 몸뚱이가 천천히 현신해서 다리 두 짝이 다 내려오는 게 눈에 보였다. 막상 정면에서 이렇게 보니 마치 남이 알몸으로 걸어나오는 걸 지켜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꼬리를 움직여 본다.
살랑거리며 움직인다. 그런데 살랑거리는 움직임만으로도 꼬리 밑에 있던 집이 몇 채 부숴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또한 이 엄청나게 거대한 몸뚱이와는 달리 내 감각은 심지어 털 한올의 아주 미세한 감각마저 느끼고 있었다.
내 원래 몸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된다. 내 원래 몸도 엄청난 내공을 압축해둔 덩어리였지만 이 몸은 진정으로 신이나 다름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다. 그 자체로 천재지변이었다.
' 이야... 대단한데.'
나는 이 육체에 감탄했다.
동시에 나는 사방에 몰려와 있는 수백 명의 천계 선인들이 나를 봉인하려고 술법을 펼치는 중이라는 걸 깨닫고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려서 앞발을 들어 황궁 건물에 휘둘렀다.
콰앙!
황궁이 통째로 터져나가면서 건물이 폭풍맞은 듯 비산했다. 나는 동시에 땅에서 뛰어오르며 입을 쩍 벌려서 깊은 숨을 토해내었다.
쿠콰콰쾅!!
화염의 입김이 토해짐과 동시에 황궁이 전소되었다.
[ 아니?!]
[ 어찌 저 마왕이 자기 편을 공격하는가.]
[ 오오... 해괴한 일이로다.]
땅밑에 있던 신선들은 물론이고 투선들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껄껄 웃었다.
[ 우하하하하하하!!]
그렇다.
현왕의 인의 발동효과는, 바로 그 어떤 상대라 해도 몸을 교체하는 것!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이 능력을 이용해서 - 신의 가호를 받은데다 봉인도 모두 풀려버려서 그 어느 전생보다도 강력해져 있는 마왕(魔王)이자 사도이며 여와의 분신이었던 달기(?己)의 몸을 빼앗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