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
암천향(暗天鄕)
나는 구천현녀의 시해지술로 낙양을 보는 천리안을 공유하기로 했다. 일단 내가 직접 상황을 보아야 어떻게 해야할지를 감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 제곡의 팔이...'
몇 번이고 보아왔던 삼황오제 제곡의 팔이 뇌풍호우를 머금고 낙양의 상공을 움켜쥐는 듯 떠올라 있었다. 구름 너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전과는 달리 그 뒤편에는 본체가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팔만 소환된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암운덩어리 앞에는 팔부신중이 제각기 본체로 현신해서 원형으로 둘러싸서 거대한 결계를 펴고 있는 중이었다. 그 결계는 낙양성을 통째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결계 바깥쪽에 천계의 신선들이 술법을 펼쳐서 공성에 들어간 모습이 보였다.
아직까지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명백히 전쟁(戰爭)이 시작된 것!
' 제곡은 일단 본체를 드러낼 생각으로 보이는군.'
지금까지는 간접적으로 금성의 마신을 소환하며 압박을 주려 했으나 이제는 본인이 먼저 현신해서 낙양을 휘저어버릴 생각으로 보였다. 전면전을 선포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팔부신중들이 힘을 합쳐서 결계를 만들었다 해도 제곡을 오래 막을 순 없으리라.
나는 주의깊게 팔부신중의 숫자를 세었다.
확실히 남아있는 모든 팔부신중이 전면에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 황궁은 텅텅 비어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지금 내가 읽은 상황과 내 생각을 동료들에게 흑요석으로 전했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 백웅. 구천현녀의 시해지술로도 칠요의 위치까지는 탐색하지 못한다 했지. 그러면 지금 팔부신중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해도 무작정 황궁 내로 들어가는 건 안된다. 그렇다 해도 지금이 아니면 들어갈 기회가 두번다시 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지?"
" 가능하면 창힐까지 전방에 나와서 제곡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또한 운의 영역."
" 흠."
" 이번 작전의 전제는 무모한 돌입이다. 이건 돌입을 언제 하느냐가 관건이군."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책략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건곤일척의 순간!
나의 명운과 직감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뜻이리라.
나는 머리를 굴렸다.
' 토요... 토요는 대체 어디 있을까?'
머리가 좋아진 나와 제갈사가 같이 머리를 굴렸는데도 현재 토요가 있을것으로 짐작되는 위치가 딱히 없었다. 상대가 제갈유룡이었다면 제갈사가 그의 심리를 읽어내서 어느정도 책략을 짜겠지만 상대가 창힐이었기에 수읽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창힐의 입장에서 그는 절대 도난당하지 않는 장소에 토요를 숨겼다는 사실 뿐이다.
그 어떤 강적이 와도 토요를 도둑맞지 않는 장소가 어디일까?
' 창힐이 칠요를 자신의 몸 속에 삼키는건...?'
그렇게 되면 창힐을 죽여서 그 배를 갈라서 꺼내야 하는데 지독히도 비현실적인 일이다. 창힐의 권능은 삼황오제에 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 아냐, 다행히도 그건 안 돼.'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봤으나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칠요에 새겨진 문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최초의 문자!
모든 칠요에는 사황 창힐이 직접 봉인을 걸어두었는데, 그 봉인은 기본적으로 새겨져있는 갑골문자 뿐만이 아니라 최초의 문자이기도 했다. 어째서 자승자박에 가까운 행위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최초의 문자는 창힐에게 있어서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칠요를 자기가 먹어치우는 건 자멸행위일 것이리라.
즉, 좋든 싫든 창힐은 칠요를 신외지물로 취급해서 몸 바깥에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어지간한 이공간이나 이계에 술법으로 봉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힐은 강대한 신격이지만 그런만큼 그의 적 또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삼황오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제곡이 쳐들어오는 걸 보면 창힐이 어줍잖은 공간술법으로 칠요를 숨겨둘 경우 금세 삼황오제나 신적존재들에게 강탈당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공간술법이라도 삼황오제쯤 되면 아주 간단하게 박살낼 수 있다.
' 그렇다고 팔부신중한테 주지도 않았겠지...'
팔부신중은 창힐 대신 전방에 나와서 싸우기 때문에 삼황오제에게 살해당할 가능성도 있다. 그 경우 팔부신중이 칠요를 갖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빼앗길수도 있으므로 절대 부하들에겐 주지 않았으리라.
창힐이 토요를 숨긴 장소.
그 장소를 유추한다는 건 고대적부터 황제의 심복으로써 간교한 지혜를 뽐냈던 창힐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토요의 위치를 확정할 수 없어서 지금껏 망설인 것이다.
그 때였다.
서문혜가 문득 입을 열었다.
" 백웅 님. 차라리 창힐을 공격하는 제곡에게 합세해서 창힐을 완전히 타도하고 나서 토요를 얻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숨어들어가도 토요를 얻는 보장이 없다면..."
" 그렇지 않소. 그 때는 창힐을 없애고 기세등등해진 삼황오제를 상대로 토요를 쟁탈해서 얻어내야 하는데 훨씬 어려워지게 되오."
" 아..."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말했다.
" 창힐이 전면에 나오는 걸 기다릴 여유는 없소. 황궁에 바로 진입해서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토요를 찾아내겠소."
창힐과 전면전은 벌일 수 없지만 지금의 동료들이라면 피해를 줄여서 도망치는건 확실히 가능하다. 만일 창힐이 생각보다 약하다면 한차례 물질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파앗!
우리는 구천현녀의 시해지술을 써서 곧장 황궁의 천문각 앞에 도달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눈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는 괴인들이 걸어나왔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몸에서 상당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쿠아아악!!
잠시 후 그 괴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터뜨리며 무언가로 변신했다.
' 용인? 마인? 아니... 어느쪽도 아니군. 이름붙이자면 귀인(鬼人)인가.'
굳이 따지자면 머리와 사지가 나찰처럼 변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여태껏 완전히 용인의 모습을 하거나 이족의 형상을 품고 있던 마인과는 달랐다. 변신한 놈들 중 몇 놈이 우리쪽에 덤벼왔다.
퍼펑!
그 순간 공공이 주먹을 내뻗어서 귀인들을 쓰러뜨렸다. 공공은 이전보다 힘을 많이 회복했는지 굉장한 신력을 내뿜고 있었고, 그는 영 껄끄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강하군. 조심해라.]
쉬쉬쉭!!
공공의 경고는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귀인들이 빠르게 몸을 달려서 아군에게 덮쳐왔는데 그 속도와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에 봤던 용인들 이상, 굳이 따지자면 간부급이었던 사신위의 이족변화와 대등한 수준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인간 동료들은 진소청을 제외하고는 다들 크게 당혹해하는 기색이었으며 즉살만을 피하는 상태였다.
용마인보다 더 강화될 줄이야!
이래서는 이미 인간의 수준에서 상대하기 힘든 놈들이다.
' 제길! 창힐이 원래 있던 용마인들을 자기 힘으로 강화시키기라도 한 건가?'
이길 수는 있다. 다른 전생이었다면 몰라도 이쪽의 전력도 사상최대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인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기에 이대로 싸우면 체력을 크게 소모할 게 분명했다.
신공표가 별안간 허공에 떠올라서 광소를 내질렀다.
[ 아하하하!! 육혼번이여!!]
후두두둑
신공표가 내뿜은 흑색의 육혼번이 마치 살아있는 폭풍처럼 소용돌이 치며 사방을 휩쓸었다. 강력한 신체능력을 지닌 귀인들은 대부분 육혼번의 범위를 피했으나, 신공표는 다음 순간 사보검 중 하나를 내뿜었다.
[ 끌어당겨라 절선검(絶仙劍)!]
구오오오
뇌광이 일더니 사보검 중 절선검이 튀어나와서 엄청난 흡인력으로 사방에 있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귀인들은 저마다 하늘을 뛰어다니거나 땅바닥에 몸을 박아서 버티려 했으나 헛수고인지 하나둘씩 소용돌이치는 육혼번에 끌려들어와서 혼백째로 잡아먹히고 말았다.
가공할만한 광역섬멸기를 시전하고 있는 신공표를 보던 제천대성이 말했다.
" 백웅. 이 자리는 저 녀석한테 맡기고 저 안쪽 건물로 들어가 보자. 저 안쪽이 심상치 않다."
" 네."
다같이 도우면 더 빨리 귀인들을 해치울 수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시간을 오래 끌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재빨리 황궁의 가장 심처, 본디 황제가 기거하는 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본디 이 곳에는 연금술사의 사악한 실험실과 함께 수정석비가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무의미한듯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 때였다.
우르릉
천둥같은 소리가 한번 안쪽에서 울렸다. 공격인가 싶어서 다들 움츠러들었으나 그런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보였다.
[ ... 의무... 행할 때가... 되었다... 인과율... 넌... 수호...]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걸 느꼈다. 주위 사람들을 보았지만 나 외에는 다르게 들은 기색이 없었다. 아마 나만 이질감을 느낀 듯 했다.
' 뭐지?'
나는 옆에 있던 제갈사를 쳐다보고 내가 들은 걸 말해줬지만 제갈사도 잘 모르는 기색이었다.
환청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중대한 의미가 있는 듯한...
타닷
우리는 계속 말없이 안쪽으로 내달렸다. 침묵이 불길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문득 공공이 외쳤다.
[ 함정이다!]
퓨웅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눈 앞의 시야가 뒤흔들리면서 동료들이 모조리 내 근처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모험경험이 많았고 얼마 전 금오도에서 전투한 적이 있었으므로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 아공간술법!'
나나 제천대성, 공공, 천우진 등은 괜찮겠지만 술법을 모르는 동료들은 위험하다! 나는 급히 예전처럼 화요와 화룡신검을 교차하며 화룡진인의 힘을 빌렸고, 빠르게 시공을 가로막는 벽을 벨 수 있었다. 화룡의 표식이 남겨진 자리를 긋자 무저갱같던 주변광경이 뒤바뀌며 원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옆에 있던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진소청이 지긋이 땅바닥을 보며 말했다.
" 잘 보니 이건... 팔괘도법이구려."
" 흠...!!"
" 이 팔괘술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속 아공간함정이 발동되는 구조같소."
그랬다.
바닥에는 팔괘의 도형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도형은 빙글빙글 돌고 있다가 다른 자리로 이동하기도 해서, 마치 바닥 자체가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힐끔 천우진을 쳐다보았는데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해제 못 해. 전에도 말했겠지만 나도 팔괘를 알긴 알지만 달인의 경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 함정은 달인을 넘어선 경지이니 파해하기 힘들다."
" 환신의 능력으로도 말이냐?"
" 제길. 내 술수는 시해지술과 달리 만능이 아니야. 이런 기계적인 진법을 상대로는 더 약하다. 이건 신력으로 만들어진 거라 힘으로 깨부수기도 힘들고."
" 그럼 별 수 없군. 만능인 시해지술의 힘을 빌려야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구천현녀를 불렀다.
" 구천현녀님! 이 팔괘도형을 깨 주십시오."
[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구천현녀는 내가 불러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전방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일행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리자, 구천현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 그랬군요... 그랬던 거군요.]
그녀는 제일 안쪽을 쳐다보고 있는 듯 했다. 마치 그 곳에 무언가가 있는 듯.
" 구천현녀님...?"
[ 백웅이여.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파앗!
그 순간, 내 손 위에는 수요가 나타났다. 구천현녀가 내게 수요를 돌려준 것이다.
" ......?!"
아니 이건 무슨?!
내가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자, 구천현녀는 아니나 다를까 인과율을 잃고 서서히 이 공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천계로 재송환되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나를 돕기를 포기했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악을 써서 외쳤다.
"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를 배신하는 겁니까?!"
[ 배신이 아닙니다. 제 본질에 충실할 뿐.]
" 그럼 무슨... 당장 돌아오십시오! 수요가 부족하다면 화요라도 드리겠습니다."
내 간절한 외침에 구천현녀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 당신이라면 이 길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때,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 분께서 읽어내신 인과율은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부디 당신에게 왕의 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스
그 말을 끝으로 구천현녀는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있던 그녀와의 인연과 단말이 툭 끊어져 버리는 걸 느꼈다. 그녀 쪽에서 수요를 돌려줘버리고 나와의 인연을 단절해버린 것이다. 이걸로 앞으로의 전생에서도 구천현녀의 조력을 받으려면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리라. 안정적으로 구축한 인연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이었다.
" ......"
해방된 수요가 내 손에 되돌아왔지만 이건 결코 이득이 아니다. 지금까지 칠요를 빌미로 그녀에게서 엄청난 조력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게 불가능한 시점이 많았다. 그런데 황궁 최심부 진입을 눈앞에 두고 난데없이 구천현녀가 떠나버리다니?! 이건 굉장히 큰 전력의 손해였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가버린 이상 신공표를 억누르기가 한층 더 힘들어지고 말았다. 내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옆에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 당황할 필요 없다. 지금은 일단 나아가라."
" ... 빌어먹을."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냉정을 되찾고는 목갑을 꺼냈다.
" 나와라 제갈부!"
제갈부가 목갑에서 멍한 표정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인형상태인 제갈부에게 명령했다.
" 이 팔괘의 진을 해제해라!"
" ......"
제갈부는 초점없는 눈으로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 해제... 불가능..."
"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제갈유룡이나 망량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팔괘를 잘 알며, 심지어 제갈공명의 진법까지 발동 가능한 놈이 바로 제갈부였다. 그래서 이 놈이 아니면 팔괘함정을 정상적으로 해제할 방법이 없는데 불가능이라니?
제갈부가 말을 이었다.
" ... 이 진법은... 개념을 먼저 세우고... 이론을 덮어씌운 것... 진법으로 보여도 진법이 아니다... 신력(神力)의 부산물... 그 자체로 살아있는 무언가... 작성자는... 결코 인간이 아니다..."
" 음..."
" 팔괘모양으로 생긴 개념생명체... 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걸 만든 놈은 제갈유룡이 아니다.
하긴 제갈유룡의 역량으로 우리를 멈춰세울 정도의 진법을 뜬금없이 만든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오랜시간 노력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제갈유룡은 이미 제갈사에게 봉인당해 있었고 지금도 당해 있다. 그럴만한 여유 자체가 없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 단 하나의 행로(行路)가 남아있으니... 작성자가 원하는 길... 누군가가 길 하나만을 마련해놓고...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 힘으로 부술 수는 없나?"
" 가능... 하지만... 정상적인 진법이 아닌만큼... 그 여파는 각오해야..."
" 무슨 뜻이지?"
내가 되묻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설명했다.
" 진법의 소멸이 아니라 힘과 힘이 부딪히므로 광대한 파멸이 대지를 뒤엎을거란 말이다."
" ... 흠."
" 보통 진법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진 않지만 이 진법은 특수한 생명체에 가까우니."
나는 짧게 탄식했다.
나는 방금 전 칠요의 공명을 이용해서 이 장애물을 단번에 파괴할 생각이었는데, 그렇다면 폭발에 휩쓸려서 이 황궁부지 전체는 물론 낙양이 통째로 날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난데없이 몰살당할 확률도 크다.
옆에 있던 당산이 물었다.
" 날아가는 건 안되려나?"
천우진이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띠껍게 대꾸했다.
" 해 봐. 해 보라고."
" 쳇, 안되나보군."
" 어쩔거냐 백웅?"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 진법이 남겨놓은 하나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 진심이냐? 함정일 거다."
" 함정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수고스러운 함정을 남겼다면 분명 나와 얘기하고싶은 게 있다는 말이겠지. 그건 창힐은 아닐 거다."
내 감이지만 창힐은 이 진법을 만든 존재가 아니다.
제 3의 무언가가 이 황궁 내에 있다.
그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칠요 중 토요에 대한 단서가 하나도 없으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보를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천현녀가 사라졌다고 해도 아직 우리 전력은 막강하므로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갈부를 쳐다보며 명령했다.
" 제갈부. 행로를 찾아내라. 다같이 그 행로로 갈 수 있겠지?"
" 그렇... 다..."
스스스
제갈부는 이윽고 팔괘의 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주문을 외며 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방위로 걸으며 진법을 파해하기 시작하자 그의 발밑에 있던 팔괘는 빛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고, 우리도 제갈부의 뒤를 따라 빛이 사라진 통로에 발을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약 오백 보 정도를 걸었을 때 제갈부가 멈춰섰다.
그 곳에는 보물이 잔뜩 산처럼 쌓여있는 방이 있었고, 거대한 방의 금화 산더미 위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있었다. 그 자가 바로 우리를 여기까지 초대한 자가 분명했다.
그 자는 한참동안 우리를 훑어보다가 내게 시선을 향하며 빙긋 웃었다.
" 창힐의 옥좌에 가지 않고 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군."
" 너는..."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 백발의 초상기인!"
그랬다.
내가 과거에 유신이라고 이름붙였던 백발의 초상기인이 황금의 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백발의 초상기인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 그런 호칭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음... 진(秦)이라고 불러라."
" ... 그게 네 이름이냐?"
" 딱히."
그는 뭔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장난감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자칭 '진'이라고 한 백발의 초상기인이 말을 이었다.
" 칠요의 탐색자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토요를 네게 줄테니 나와 거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