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44화 (743/1,615)

744====================

암천향(暗天鄕)

제갈사는 몸이 덜 회복된 듯 잠시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 쿨럭거리던 제갈사가 용중일에게 말했다.

" 그 날, 내가 주문한 건 총 5가지였는데 기억나는가?"

그러자 용중일은 싸늘하게 말했다.

" 기억나지. 하지만 당신의 요청을 내가 다 들어줄 의리는 없었다는 걸 기억하시오."

" 그런건 안 궁금해.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하지."

" 물론 내게 딱히 해가 되는 일도 아닌 듯 하여 하긴 했소."

스윽

용중일은 자신의 손을 위로 들었다.

" 첫째. 백련교 장악과 수신류 척결은 보다시피 해냈고."

그와 동시에 옆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기 시작했고, 그 자는 틀림없는 고수로 보였다. 발걸음과 기세만 보아도 강호에서 최고수로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 둘째. 독고성을 신생 뇌신류 호법사자로 끌어들였으며."

그랬다. 지금 용중일의 옆으로 걸어나온 건 바로 사천의 오지에서 무공을 연구하고 있던 독고성이었다. 다만 그의 무위는 예전보다 현격하게 높아진 듯, 그 경지를 감히 측정하기가 힘들었다.

전신의 뇌정이 무서울 정도로 다져져 있다. 독고성은 틀림없이 자신의 무공을 크게 향상시켰으리라.

용중일이 좌측의 독고성을 힐끔 보더니 우측에 서 있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단아하면서도 청초한 외모였다.

" 셋째. 사공표국의 사공린을 내 수제자로 삼았으며 풍신류의 후계자로 지목했소."

기억난다.

그녀는 사공가문의 영애인 사공린이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피부가 티없이 고왔다. 특히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맑은 눈동자.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성욕 대신에 경외가 일어날 정도였던 것이다. 내가 4번째 삶 이후로 스무 번의 전생동안 세상을 여행하며 여러 명의 절세미녀를 보아왔으나 사공린이 그녀들에 비해 외모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는 이번 생에 나와 일면식도 없었으므로 그저 무감각하고 냉담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여 인격을 제압당했는지 살펴보았으나 그런 기색은 없었고 그저 의문의 방문자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걸로 보였다.

" 넷째. 수신류의 요새를 제압하고 거기에 있던 서적들을 모두 가져왔소. 아, 몰락한 백리가의 후예인 백리정운이라는 청년과 연 왕가의 후예 연종휘도 지금 풍신류에 입문하여 연마중이오."

" 마지막으로 또 하나 있었을 텐데."

" ......"

" 흐흐."

제갈사는 음충맞게 웃었다.

나는 제갈사의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 제갈사는 지금껏 내가 전생하며 짚고가지 못했던 자들의 가능성을 한데 모아서 확인하고 싶어했다.'

5년 전, 제갈사는 어차피 백련교가 붕괴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혼란을 수습하고 백련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건 용중일 뿐이라는 걸 파악했다. 그렇다면 용중일을 교주의 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대신 그에게 여러가지 사소한 부탁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독고성, 사공린, 백리정운, 연종휘.

이들의 공통점은 지금껏 내 전생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보여주거나, 혹은 수상한 점이 있거나였다. 또한 거둘 수 있는 자를 최대한 거두면서 용중일에게 인재를 추천해서 양성하게끔 하면 -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는 그들의 잠재력이나 비밀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그 책략은 지금 잘 먹혔다. 내가 일일이 5년간 데리고다니며 계속 생존하며 키워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는데 용중일이 대신 키워준 것이다.

다만 독고성의 경우 그의 절대지경을 확인하기 위해서나 다름없었지만 나머지 셋은 조금 이유가 달랐다. 백리정운과 연종휘는 그들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사공린은 그녀 자체에 수상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이던 용중일이 입을 열었다.

" ... 마지막. 당신이 내게 알려준 신투지존, 공손세가, 헌원검의 정보를 토대로 신보 헌원검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그 행방은 알 수 없었소."

제갈사가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 진짜인가? 이미 찾아놓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 믿든말든 그건 당신 마음이오. 어차피 내가 그걸 들어줄 의리는 없었다는 걸 다시 유념하길."

용중일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말했다.

" 자, 그럼 당신들이 본교에 방문한 이유는 들어야겠소만."

제갈사는 힐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말해야 한다는 뜻인 걸 눈치챈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용중일에게 말했다.

" 용 교주. 나는 백웅이라 하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소?"

용중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오. 당신은 전대 백련교주에게 진소청이 도전할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로 백련교 내에서 공적으로 지정되어 무수히 많은 정보원들이 당신의 행방을 찾아다녔소. 그러나 신단수의 싸움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대로 세상에서 잊혀졌지."

" ......"

나는 용중일의 대답에서 약간 섬뜩함을 느꼈다.

' 내가 놈의 아버지인 용비천을 동료들과 함께 죽인 건 언급하지 않는군...'

간접적으로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을테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이 대담에서 부친의 원수를 접어두고 냉정하게 임하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건 원수를 잊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용중일이 진정 무서운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자가 복수를 하려 들면 진정 후환이 무서웠으므로 실력은 둘째치고라도 절대 적으로 만들고 싶은 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나는 이 자리에서 용 교주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고 싶소."

힘으로 용중일을 제압하고 빼앗을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싶지는 않다. 전생을 하다보면 누가 적이고 아군이 될지 모르는 상태인지라, 섣불리 양아치 짓을 하는 건 좋지 않다. 가능하면 무인 대 무인으로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뇌신류의 무인이기 때문이다.

" 이야기해 보시오."

" 지금부터 그쪽의 독고성, 사공린, 그리고 당신까지 나서서 무인끼리 삼대삼의 친선비무를 했으면 하오. 삼전 이선승제. 다만 단순한 친선비무는 아니고 대가를 걸겠소."

" 대가라..."

" 우리쪽이 승리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묻는 한가지 질문에 무조건 솔직하게 답변해줘야 하고, 또한 수신류에서 입수한 서적을 우리가 조사할 수 있게 해 주시오."

" 당신들 쪽이 진다면?"

쿠웅!

나는 화요를 꺼내서 땅에 꽂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이건 칠요의 보물 중 하나인 화요 간장이오. 우리가 진다면 이 칠요를 조건없이 당신에게 주겠소."

" ......!!"

용중일의 눈이 크게 떨렸다. 그 눈빛은 명백히 탐욕을 담고 있었다.

" 어떻소?"

" 잠시... 그게 화요인지 내가 확인해봐야겠소."

" 그러시오."

휘익!

나는 내공을 담아서 화요를 용중일에게 던졌다. 용중일이 받아챙겨서 도주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나는 왠지 그럴 놈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생각이 얕은 놈이었다면 백련교를 수습하는 대업은 이룰 수 없었으리라. 용중일은 가볍게 받아내고는 화요를 천천히 살폈는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진품이군. 나는 백련교주로서 그 내기에 응하겠소."

용중일이 내게 다시 던져서 화요를 되돌려주었다. 나는 화요를 잡아채며 대꾸했다.

" ... 좋소."

또다시 의문이 남았다. 저 놈은 어떻게 일견에 저게 진짜 화요간장이라는 걸 확신한 걸까? 선사시대나 다름없는 고대적부터 남쪽대륙의 오지에 봉인되어 있었던 전설의 신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목과 지식은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건 - 저 놈은 이미 칠요의 존재와 그 가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내기를 수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또한 이 비무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인간'으로 제한하겠소."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당신 근처에 현현해 있는 강대한 신적 존재들은 안된다는 소리요."

" ... 알았소."

놈은 신적인 존재의 힘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 했다. 놈만이 보유한 능력은 아니고 절대지경에 도달한 자들은 대개 그런 야성적인 감각이 있곤 했다.

나는 별 수 없이 놈의 말을 인정하고 비무에 임하기로 했다.

첫 비무에는 진소청이 나섰다. 본디 진소청은 마지막 비무에 내보내는 게 정석이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고, 가능하면 확실하게 1승을 챙기고싶은 마음이 있었다.

진소청의 상대로는 독고성이 출전했다. 독고성은 진소청을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네가 이광의 제자라는 소리는 들었다. 어찌 세상일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구나."

" 뇌신류 제자 진소청이 어르신을 뵙니다."

진소청은 크게 예를 갖춰 포권한 후 말했다.

" 어르신께서는 어찌 신생 백련교에 들어오시게 됐습니까?"

" 용중일은 구원을 잊고 뇌신류를 재흥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만악의 축인 전대 백련교주가 죽었으며 그의 아비도 뇌신류의 손에 죽었으니 원한은 상쇄된 것이라 했고, 나 또한 그 말에 납득했다. 지금 뇌신류에 중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재부흥이다."

독고성이 씁쓸하게 말했다.

" 전대의 원한을 더 이상 젊고 재능있는 아이들의 업으로 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그랬군요..."

" 네가 오늘 무슨 일로 본교를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 뇌신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

우웅

독고성의 검에서 검뢰가 들끓었다. 진소청은 독고성을 마른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지금의 저는 뇌신류를 위해 싸울 수는 없습니다."

"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진소청은 창을 독고성에게 겨누며 입을 열었다.

" 오로지 왕을 위하여!"

일섬(一殲)!

그들의 대결은 그저 한 번의 충돌로 끝났다. 진소청과 독고성 사이에 미세한 시간의 격류가 요동치더니 독고성의 검뢰가 진소청의 목을 베었고, 진소청의 창극은 독고성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니 - 그렇게 보인 것 뿐인가.

실제로는 서로의 급소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고, 그들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방금 전의 대결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독고성의 검뢰는 너무나 빨라서 인간의 신체능력으로는 도저히 막을수도 피할수도 없었다. 나는 과거에 독고성을 상대로 검뢰를 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속도였다. 마치 번개 그 자체로 화하는 듯 했으므로 독고성이 이미 절대지경에 올라있으며 그의 검뢰 또한 절대지경의 의념을 체현하여 뇌신지혼에 버금가는 번개의 힘을 성취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저 검이 번개로 변하는 - 단순한 절대지경이었으나 단순한 만큼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진소청은 그 검뢰를 찰나지간에 뇌신지혼으로 흘려내며 자신의 창을 독고성의 급소에 박았다. 독고성 또한 절대지경에 올라 있기에 진소청의 공격에 재반격하며 뇌신검무로 대응했고, 진소청은 재반격에 재반격으로 응수했다.

거기까지도 한 수가 끝나지 않았으니 서로의 초수가 무화된 상태에서 신경전에 들어간 것!

여기까지가 한 호흡이었다.

또한 길고긴 절대지경 끼리의 일초식 대결인 것이다.

나는 이게 무승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윽고 독고성이 자세를 풀며 한숨을 쉬었다.

" 후우, 내가 졌다."

" ......"

" 이 상황에서 내게 한 수를 물러줄 수 있다니, 너는 정녕 무림역사상 최고의 천재구나..."

" 사조의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한 수를 물러줬다고?

내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나는 급히 옆에 있던 당산을 보았으나, 놈 또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 ... 나, 나도 모르겠군."

모르겠다. 방금 어떤 양보가 있었던 걸까?

한 수의 양보가 도저히 내 안목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다만 그걸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방금 전 격돌한 진소청과 독고성, 그리고 멀리서 보고 있던 용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절대지경에서도 상당히 높은 격에 도달한 자만이 읽어낼 수 있는 미세한 흔들림이 분명했다.

' 지금 독고성은 분명히 절대지경인데.'

지금의 진소청은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는 걸까?

내가 아연해하고 있을 때 멀리 옥좌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용중일이 말했다.

" 첫 비무는 우리측의 패배군. 다음은 사공린을 내보내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