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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 ......]
내 말에 태허천존은 마치 넋이 나간 듯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내게 '뭘 믿고 이러느냐'는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뜻밖에도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칠요가 다 해방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고 하는 소리겠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여와는 굉장히 그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칠요가 해방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구름 위의 존재들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자리에서 약해보이면 바로 상대가 나를 찍어누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 알만큼 알지. 당신은 내 각오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 흐음...]
그 때였다.
쿠르르릉
의식을 벌이고있는 부지 위편의 창공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끼며 흐려졌다. 동시에 뇌우가 몰아치며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사위가 어둠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천대성이 내게 외쳤다.
" 어이!! 천계에서 거대한 문이 열리고 있다!!"
" ......"
" 그녀가 직접..."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밝게 비치는 저 빛덩어리 뒤편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라 수백에 가까웠고, 나는 그게 바로 서왕모와 그녀가 대동하는 무수한 대라신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엔 나타태자나 이랑진군의 환영도 보였기에, 투선 또한 총출동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힐끔 태허천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 당신이 서왕모를 불렀습니까?"
태허천존은 실쭉 웃으며 말했다.
[ 그럴 리가. 스스로 몸이 달았나보군.]
" 그녀를 천계로 되돌려 보내십시오."
[ 말했듯, 그럴 이유도 능력도 없다. 서왕모가 스스로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너와 결판을 내려는 걸 어찌 막을까?]
태허천존이 내 속을 뒤집어놓으려는 듯한 말투를 했으나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아군들을 한번씩 둘러보았다. 특히 구천현녀와 제천대성을 쳐다보자 그들은 내 의지를 이해한 듯 했다. 제천대성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참나!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잖아."
" 어차피 방법이 없습니다."
서왕모는 천계 대라신선을 끌고 와서 우리를 확실히 없애버리고 칠요를 빼앗을 생각이 분명했다. 충분한 인과율이 없겠지만 서왕모 입장에서는 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칠요 5개를 얻는 게 이득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지난번처럼 또다시 천계 전체와 전쟁을 벌일 판이다.
대라신선은 그렇다 치고 저정도 기세라면 서왕모는 여와의 힘을 빌려와서 싸우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황 여와의 힘을 이길 방법은 우리에게 없다.
" 알았다."
휙하고 제천대성이 자기가 갖고 있던 금요를 구천현녀에게 던져주었고, 나 또한 화요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자 구천현녀가 서서히 시해지술을 발동시키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칠요의 해방쯤 되면 구천현녀도 집중해야 하는 듯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빛으로 휩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허천존이 놀란 듯 말했다.
[ ... 진심인가?]
" 왜 내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이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된거 끝장을 봅시다."
이 자리에서 꿀리면 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쪽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기호지세를 수도 없이 겪은 나였기에 특유의 감각이 나를 이 선택으로 이끌고 있었다. 오요의 힘을 모두 해방한다면 최소한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흔들리지 않자 태허천존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 그 선택은 모두를 파멸시키는 선택인데도? 최후의 승자따위는 아무도 없을 선택이다. 창힐도 서왕모도 너도... 삼황오제도 파멸한다.]
" 알게 뭐지?"
[ 크... 크크...]
태허천존은 기이한 미소를 흘렸는데 어쩐지 만족스러워보였다.
[ 맘에 들어... 수백 가지 경우를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따악!
[ 혼돈, 일어날지니.]
태허천존이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갑자기 시꺼먼 혼돈의 구름이 생겨나며 하늘의 빛이 사라지고 뇌우가 멈췄다. 열리고 있던 천계의 차원문이 난데없이 시간이 역행하듯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대라신선들은 당황했는지 허우적거렸지만 그 변화를 멈출 수는 없는 듯 했다. 대라신선들이 강력한 술수를 전개하기 시작했으나 마치 구름처럼 퍼져나오는 혼돈의 영역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있었다.
혼돈이 시간을 먹어치운다.
자칭 선인이라는 자가 혼돈 그 자체를 저토록 자유자재로 사역하다니!
제일 선두에 있던 서왕모가 불쾌한지 노성(怒聲)을 떨쳐냈다.
[ 태허천존... 이게 무슨 짓이지!! 그만둬라!]
지상에 있던 태허천존은 하늘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 그대에게 실망이군. 이토록 재밌는 판을 그토록 멋없는 방법으로 망가뜨리려 하다니, 삼류(三流)의 운용.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게 한 그대의 잘못이오.]
[ 여(余)를 배신하는 건가?]
[ 그럴리가. 머리나 좀 식히시길.]
스으으으
이윽고 천계에서 뚫은 차원문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서왕모의 간섭을 물리친 태허천존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지. 칠요의 해방은 일단 멈춰라.]
" 알겠습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엄과 압박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나는 태허천존이 이제야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기에 그 또한 태연하게 연극을 하고 있었겠지만, 이제 그는 껍질을 한꺼풀 벗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짝 보여준 진면목에 나는 다소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삼황 여와의 의지를 정면으로 배척할 정도의 능력.
대체 저 놈의 진짜 정체는 뭐란 말인가?
구천현녀가 칠요 해방을 멈추고 화요와 금요를 각각 돌려주자 태허천존이 입을 열었다.
[ 조건이 4가지였지. 창힐을 공격하고 제갈사를 회복하고 옥황상제, 서왕모를 억제하며 내가 세상에 간섭하는 걸 그만두라고.]
" 그렇습니다."
[ 말했듯 식토로는 어림도 없다. 그 사실을 스스로 알 텐데 왜 과한 요구를 한 거지?]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 왠지 당신이라면 들어줄 것 같았으니까."
[ 왜?]
" 당신은 그냥 재밌는 걸 보고싶어 할 뿐이니까!"
[ ......]
태허천존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채고 말을 이었다.
" 재미를 원한다면 내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을 보여드리죠."
[ 내 지력(知力)을 넘어서는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건가? 그건 이 우주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텐데...?]
" 하지만 그런 당신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는 읽지 못했잖습니까?"
[ 크크크... 그게 중요하지...]
껄껄 웃던 태허천존이 말했다.
[ 내가 4가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희 일행은 칠요를 해방하는 선택 외에는 없을 것이고... 그 전개가 오로지 파멸로만 향하는 게 사실이다.]
" 그렇소."
[ 재미... 재미라... 흐음.]
태허천존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원래라면 네 요청따윈 씨도 먹히지 않는다. 나는 관찰자이자 투자자... 나는 힘으로 다 뒤집어엎는 저급한 진행을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나의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떻든간에 나는 관조한다.]
" 왜입니까? 당신에겐 삼황에 버금가는 힘이 있는 것 같은데."
[ 종말까지 이 세계는 나의 놀이터. 그리고 창조자에게 있어서 지고한 행복은 존재감을 지울 때 드러나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태허천존이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지금 잘 보니, 이미 한 놈이 반칙을 저질렀군. 그 반칙때문이라도 네 요청을 특별히 수락해주지. 어처구니 없는 야망이야... 크크.]
" 누가 반칙을 저질렀단 겁니까?"
[ 스스로 알아내 보아라. 그것 또한 놀이의 한 재미.]
" ......"
[ 확실히 이대로는 재미없겠어. 우리는 그 짓을 안 하는것 뿐이지 못하는게 아닐진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은 참 멍청해지는구나.]
" 그래서 어쩔 생각입니까."
태허천존이 싱긋 웃으며 다시 손가락을 마주쳤다.
따악!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환한 빛이 터져나왔으나 먼 하늘이었다. 그 빛은 천계의 대군이었고 낙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사상태에 빠져있던 제갈사가 마력을 쫓아내고 정신을 차린 게 느껴졌다.
[ 4가지 요청 중 3가지는 들어 줬다. 천계는 낙양을 공격하고 있고 제갈사라는 인간도 회복시켜 주었으며 옥황상제와 서왕모에게 금계(禁契)를 내려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 진짜입니까?"
[ 진짜다. 이제 내가 사라져주면 끝나는 거겠지.]
나는 태허천존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봤다. 옥황상제와 서왕모에게 제약을 걸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을 뿐더러 저 수상한 놈이 정말로 끼어들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진짜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이름을 걸고 약속하십시오."
[ 존재의 이름을 걸라고?]
태허천존이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하더니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그렇겐 못 해...]
" 왜입니까?"
[ 난 봉인되었으니 이름을 걸 수 없다. 하고싶어도 못 하지.]
" 봉인? 누구에게 어떤 봉인을 당했습니까."
[ 대답 못 한다.]
" 봉인된 존재인데 어째서 태허천존을 자처하고 있지요?"
[ 대답 못 한다.]
" 당신이 삼청을 습격한 홍균도인입니까?"
[ 대답 못 한다.]
" 당신은 [옛 지배자]입니까?"
[ 대답 못 한다.]
" 당신의 진짜 이름은?"
[ 대답 못 한다.]
태허천존은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안 줄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질문할 때마다 그저 섬뜩한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 즉 이 세계를 농락하는 흑막으로써 반칙을 응징하기 위해 내게 도움을 주지만... 그 이상은 도와주지 않겠다는 건가.'
하긴 제물도 거의 없이 이 정도 성과를 얻어낸 거면 다행이다.
나는 확실히 할 셈으로 태허천존에게 말했다.
" 그럼 태허천존의 이름이라도 거십시오."
[ 크크... 크크크크. 태허천존의 이름을 걸고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다. 천계에서도 사라져 주지.]
그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냉큼 수락했다.
태허천존은 이내 자신의 모습을 점점 옅게 만들면서 말했다.
[ 자아... 원하는대로 모든 간섭을 물리쳤다... 조작된 운명 속에서 네가 보여줄 결과가 어떤건지 기대하고 있으마...]
파앗!
태허천존은 즉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뻔히 보다가 말했다.
" 제갈사와 얘기해야겠어."
나는 제갈사를 눕혀둔 방으로 가서 그가 깨어난 걸 확인했다. 태허천존이 소원을 들어주는 순간 제갈사를 괴롭히던 마력이 씻은듯 사라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을 차린 제갈사에게 즉시 흑요석으로 방금 전의 기억을 넘겨 주었다.
제갈사는 기억을 받은 후 말했다.
" 과연, 지금은 명경의 각성효과와 현왕의 인의 부가효과 덕에 일시적으로 천재에 가까운 두뇌회전 능력을 손에 얻은 건가? 평소보다 훨씬 얘기하기 용이하겠군."
" 제갈사. 내가 방금 태허천존을 부른 게 틀린 선택이었던 거냐?"
" 훗... 그걸 내게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네가 뭘 선택하든 그건 왕의 선택. 네 명운이 향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어."
" ......"
" 하지만 태허천존의 호의는 이번 생으로 한정될 게 분명하다. 다음 생부터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흑막에게 직접 말을 거는 건 너무 큰 위험이다. 그 자는... 정말 위험해."
" 알겠어."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두뇌능력이 향상되었다 해도 아직 세부책략은 서툴테니 도와주지. 지금 해야할 일은 두 가지가 있다."
" 그게 뭐지?"
" 첫째. 용중일과 접촉해라. 둘째. 천계가 창힐을 치고 있을 때 토요의 위치를 알아내라."
" 아직 전면전은 안되는 건가?"
제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중요한 건 팔부신중이 아닌 창힐이니까. 그리고 지금 천계는 제대로 인과율을 준비해서 쳐들어간 게 아니라 태허천존의 강요로 쳐들어간 것이니 얼마 싸우지 않고 물러날 게 분명하다."
" 그렇군."
" 용중일과 접촉해야하는 이유는 알고 있지?"
" 물론."
제갈사는 뭔가 감동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 세 마디 할걸 한 마디로 줄인 기분이군..."
파앗!
나는 재빨리 구천현녀의 시해지술을 빌어서 용중일을 탐색했다. 그리고 용중일의 대략적인 위치를 시해지술로 알아낸 후 동료들과 함께 용중일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
" 당신들은..."
나 대신에 제갈사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 용중일, 시킨 숙제는 다 했겠지?"
의자에 앉아 있던 용중일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 물론이오."
그가 현재 앉아있는 곳은 백련교 구 본단의 큰 옥좌였다.
본디 그 자리의 주인은 - 백련교의 지존뿐이었으나 그는 5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 대신에 용중일이 앉아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용중일은 천천히 말했다.
" 나 백련교주(白蓮敎主) 용중일, 그대들이 백련교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그랬다.
제갈사는 5년 전 백련교가 붕괴할 것을 예측하고, 용중일에게 기회를 봐서 백련교를 수습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용중일은 제갈사의 조언대로 수신류를 멸하고 나머지 백련교 잔당을 모아서 신생 백련교를 수립하고 그 교주위에 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