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41화 (74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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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흑요석을 신공표에게 던지자, 놈은 바로 손으로 받지 않았다. 이름의 언약까지 했는데도 의심이 있는 듯 허공에서 염동력으로 잡아챈 후 이리저리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한참 후에야 신공표는 흑요석을 손에 쥐었고, 빠르게 기억이 녀석에게로 깃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 태상노군의 유언.'

나는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흑요석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 나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남긴 마지막 의지이자 분신. 그대가 나를 보고 있음은 아마도 누군가가 신의 힘을 이용해서 절교의 교주인 신공표의 봉인을 풀고 있음이리라.]

[ ... 그대가 선인지 악인지 내가 판별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신공표처럼 아까운 재목을 쉽사리 소멸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지닌 혼돈의 재능은 치우(蚩尤)의 시대에도 희귀한 것이었으니, 신(神)에게 대항하고자 그녀를 봉인이라는 형태로 보호하고싶었다.]

[ 그대가 이걸 보고 있을 때쯤에는 아마도 나와 원시천존은 소멸해있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복희의 가면을 벗겨 강제로 원형으로 돌아가게 만든 의문의 마(魔)가 시시각각 천계를 위협함이 느껴진다. 우리가 그 자의 암산을 막아낼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리라... 전대 통천교주 또한 그 자에게 소멸당했다.]

[ 실로 두렵다. 그 존재는 인류 전체를 그저 놀잇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 거대한 마신(魔神)을 봉인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없을까.]

[ 그대여. 홍균도인(鴻鈞道人)이라 자처한 그 혼돈의 존재... 영보천존이라 자처하며 천계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그 혼돈의 신을 해치울 수 있는 건 신공표의 사보검 혹은 칠요 뿐이다. 부디 그녀에게 대곤륜 후계자로써의 진정한 사명을 일깨워다오!]

그 내용에는 태상노군, 복희의 직계제자이자 천계의 창립자가 남긴 고대의 음모가 깃들어 있었다. 삼청 영보천존이자 홍균도인이었던 존재가 사실은 혼돈의 마신이었으며, 그 존재가 삼황오제 복희를 습격하여 원형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상노군의 예측대로 천계 삼청인 태상노군과 원시천존은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실종되었고, 천계 사어의 좌는 비어있게 되었다.

과연 신공표는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신공표를 주시하자, 그녀는 혼란스러워했다.

[ ... 뭐라고? 영보천존이 홍균도인이었다고...? 그럴 수가.]

"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네가 여의봉에 봉인되었을 때는 이미 천계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거다. 넌 통천교주씩이나 되면서 지금 이 순간까지 흑막의 존재를 전혀 몰랐잖아."

[ 큭...]

" 네가 인간을 구원한답시고 일으킨 봉신전쟁은 잘 짜여진 연극에 불과했어."

[ 닥쳐!]

나는 차분하게 머릿속에서 정리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의문의 마신은 삼황 복희를 습격해서 지성을 잃어버리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놈이 천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상황에서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진짜 적이 누군지 알기는 해?"

[ ......]

" 태상노군은 네가 대곤륜의 후계자라고 인정했다. 게다가 통천교주의 지위까지 가진 너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 그런 네가 지금 해야할 일이 우리와 언성을 높이면서 칠요를 다투는 거냐? 그래서 칠요를 얻으면 마땅한 계획이라도 있어?"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다행이다.

신공표의 눈이 비교적 차분하게 되돌아왔다.

나는 지금 이야기하면 먹힐거라는 걸 직감하고 말을 이었다.

" 완전히 동료가 되란 소리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려면 적어도 우리와 적이 되어서는 안 돼. 마찬가지로 우리도 네 도움이 필요하다. 천계에 있는 흑막의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는 우리와 손을 잡자는 말이다."

나는 천천히 신공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 칠요의 힘은 공유하자. 우린 그럴 의사가 있어."

[ 이전에도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군.]

" 이번엔 달라. 적극적으로 네가 우리를 도와줘야 해."

[ 뭐?]

" 지금은 우리가 따로 놀 때가 아니란 말이다. 창힐은 이미 낙양을 점거해서 세계를 변화시킬 주도권을 얻었고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모든 걸 집어삼킬 거다. 우리 중 누구도 창힐을 혼자서 감당할 순 없어."

[ ... 음.]

신공표는 침음성을 냈다. 그러더니 말했다.

[ 그러는 네놈들은 천계에 있는 흑막의 정체를 알고 있단 말이냐?]

" 상당히 근접해 있어."

[ 뭣이...!!]

나는 천천히 신공표를 구슬렸다.

" 그리고 궁금하지 않나? 지금 이 칠요까지 손에 넣으면 우리에게는 오요(五曜)가 손에 들어오는 셈이지. 황궁에 토요 팔괘도가 있으니 그것만 얻으면 육요가 모인다."

[ ......!!]

" 육요를 모으면 일요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건 알고 있나?"

신공표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말했다.

[ 칠요가... 다 모일 수 있다는 말이냐!]

" 그래. 네가 협력만 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마침내 신공표는 선심을 쓰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알았다. 너희에게 협력해 주겠다.]

원래 나였다면 여기서 크게 기뻐하며 신공표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 신공표, 저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새끼는 언제든 말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지금 머리가 크게 맑아져 있었고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꿰뚫는 게 가능했다. 여기서 만족해선 안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 말만으로는 안 돼."

[ 뭣이?]

" 난 네게 흑요석을 넘기기 위해 이름의 언약을 했다. 너도 마찬가지로 육요를 모을 때까지 우리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며 배신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해 줘야겠어."

[ 미친 놈! 내가 뭐 하러?]

"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썩 내키지 않지만..."

스윽

나는 화요를 꺼내서 한손에 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구천현녀를 쳐다보았다.

" 구천현녀께 수요에 이어 화요도 바칠 생각이다."

신공표가 깜짝 놀랐다.

[ 뭐라고?! 너 미쳤냐?! 칠요를 남의 손에...]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할 말만 했다.

" 그리고 구천현녀께 칠요를 공양한 댓가로 신공표 네놈을 말살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넌 세상이 끝날 때까지 구천현녀를 피해야 할 것이다."

[ 크윽!!]

" 감당할 자신 있어?"

[ 자, 잠깐만...]

신공표는 낭패한 기색이었고 초조해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구천현녀는 이미 수요를 공양받은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전신의 힘을 되찾고 인과율에 저촉될 정도의 강력한 존재로 변모했다. 그런 구천현녀가 칠요를 하나 더 얻게 된다면 말 그대로 [옛 지배자]에 버금가는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신공표라고 해도 그런 구천현녀를 적으로 돌리면 살아남기 힘들 게 분명했다.

신공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 그렇게 쉽게 공양하지 못할걸! 천상천하의 이목이 인과율 때문에 즉시 그녀에게 쏠릴텐데 그 여파를 감당하긴 쉽지 않을 거다.]

" 그럴수도 있겠지. 그럼 제천대성께 화요를 드릴 거다."

[ 뭐엇...]

" 대성이 칠요의 주인이 되면 마찬가지로 네가 감당하기 힘들거다."

나는 확신에 가깝게 말했다. 구천현녀가 칠요를 2개 얻은 것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제천대성은 애초부터 천계 최강의 투선이다. 그런 제천대성이 칠요를 손에 넣으면 인간인 나와 달리 그 힘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고, 백중세인 지금과 달리 신공표를 충분히 이기고도 남으리라.

제천대성은 내 의도를 읽은 듯 히죽 웃으며 맞장구쳤다.

" 오, 그래도 좋아. 나야 고맙지. 잘 쓸 자신 있다구."

[ ......]

" 신공표, 그 상황이 되면 난 절대 네놈 사정을 안 봐줘. 괜히 칠요에 욕심부리다가 내 소형제 백웅한테 뼈를 깎는 선택을 하게 만든 셈이니, 최선을 다해 네놈 대가리를 깨주겠다."

제천대성이 진심이란 걸 확인한 신공표는 더욱 쪼그라든 기색이었다. 화요를 가진 제천대성이 덤벼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란 걸 알아챈 것이다.

[ 우우우...]

나는 신공표가 눈치를 살피자 버럭 노갈했다.

" 선택해! 이젠 창힐 때문에 더 이상 네놈 눈치볼 여유가 없는 상황이야! 이 이상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면 죽여버리겠다!"

[ 으으으!]

" 싫으면 가도 돼! 대신 넌 다음부터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거다. 대곤륜 후계자로서 태상노군의 유지를 헛되이 할 거면 그것도 좋겠지!"

신공표는 크게 끙끙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 알았다... 약속하겠다. 그 대신에 네놈들이 나와 칠요의 힘을 공유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줘야겠다.]

" 그렇게 하지. 필요하다면 네게 칠요를 빌려줄수도 있어. 하지만 그걸 갖고 도망가거나 배신하면 즉시 넌 언약으로 심판받을 것이다.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될 거다."

[ ... 동의한다.]

신공표는 완전히 죽상이 되고 말았다. 원래 힘의 차이 뿐이었다면 신공표가 언약따위 무시하고 가 버렸겠지만, 태상노군의 유언을 보자 최소한의 의무감이 생겨서 내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우리와 적대하면 자신이 꿈꾸던 대의가 근본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에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 뭐, 그게 저 녀석이 뼛속까지 악은 아니란 뜻이긴 하지...'

나는 신공표가 너무 압도적인 재능을 휘둘러왔기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되었으나 근본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적으로 악이었다면 애초에 태상노군이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괜히 봉신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승인 태상노군에 대한 의리.

왠지 그게 신공표의 이기심을 억누른 듯 했다.

[ 백웅. 칠요를 받으십시오.]

우웅

구천현녀가 내게 월요 삼종신기와 목요 해인을 넘겨주었다. 나는 두 개의 칠요를 받는 순간 전신에 정순하면서도 강력한 힘이 깃드는 걸 느꼈다.

쿠우우우

" ......!!"

나는 깜짝 놀랐다. 그저 칠요 3개를 몸에 장비하고 있을 뿐인데 이렇게나 거대한 힘이 끓어오른단 말인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현상이었으므로 놀라서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 그저 갖고만 있어도 이렇게 강한 힘이 생길 수 있습니까?"

[ 칠요는 거대한 우주적 존재들의 약속이 맺혀 있는 보물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공명하며, 마치 형제처럼 서로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칠요가 그렇게나 가까이에 있다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또한 2개와 3개는 차원이 다르기도 하지요.]

" 으음."

하긴 지금 보니 월요와 목요는 모두 해방된 상태였다. 해방칠요를 2개, 미해방 칠요를 1개

갖고 있는 상태이니 어찌보면 이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 해도 장비한 것만으로 이 정도면 제대로 힘을 끌어내면...'

예감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예감이.

아무튼 다행이기도 했다. 지금 생겨난 거대한 힘이 내게 큰 성과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 음신지력이 회복되었어!'

신공표의 봉인을 풀 때 소모했던 음신지력이 한꺼번에 회복되었다! 그렇다 해도 이번생에 전욱의 동상으로 얻은 이득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어쨌든 이득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화안금정이나 의기천추의 가호 등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한층 쓰기 쉬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칠요 3개를 모은 것만으로 이 정도라면, 과연 4개나 5개, 6개를 모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 칠요를 공명시킨다면?

나는 힘의 잔류를 음미하다가 말했다.

" 팔부신중이 이 근처에 있군."

칠요를 모으면서 일시적으로 육감이 크게 향상된 덕분일까? 나는 화안금정의 범위가 갑자기 넓어지면서 근처 수십 리를 한번에 볼 수 있게 되었고, 멀리에 팔부신중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 적은 총 세 명...'

제천대성이 내게 말했다.

" 잘 됐군! 이 절호의 기회에 팔부신중을 해치우자. 놈들은 칠요의 힘에 약하니 확실히 소멸지경까지 몰 수 있을 거다."

제천대성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게다가 지금은 신공표까지 아군으로 끌어들인 상태이기에 아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다. 아마 거의 상처도 입지 않고 이길 수 있으리라.

" ......"

" 명계처럼 먼 곳에는 창힐 본인이 도우러 오기도 힘들테니까."

하지만 나는 또다시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예전에 태산에서 느꼈던 기이한 육감이 거부감을 일으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도 구천현녀가 팔부신중 마후라가를 쓰러뜨리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거부했다.

' 좀 이상해.'

왜인지는 모르지만 - 팔부신중을 각개격파하는 건 그리 좋은 전술이 아닌 것 같다.

창힐과 대화했을 때부터 느꼈다.

팔부신중은 뭔가 이상한 존재들이다.

' 창힐이 정말로 자기 화신을 아낀다면... 화신의 수를 줄여서 강력한 1체를 만드는 게 정상이 아닌가?'

물론 마왕급 존재 8명도 강력하지만 - 삼황오제 제곡의 화신이 혼자서 팔부신중을 압도하는 걸 보면 딱히 그렇게 변명할 수도 없다. 같은 화신이라 해도 어느 정도 힘을 몰아주느냐에 따라 압도적인 격차가 날 수 있다는 걸 눈 앞에서 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화신 8명을 유지한다는 것 -

그게 정말로 부하에 대한 호의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일까?

비록 지금 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6체의 화신조차도 너무 많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팔부신중이 단순히 창힐의 부하이며 화신이란 걸 넘어선 무언가이기에, 야금야금 쓰러뜨리는 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마치 함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논리와 직감 중 어느 쪽을 따를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 아뇨. 놈들과 부딪히지 않고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제천대성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 ... 진심이냐? 이런 좋은 기회를?"

" 죄송합니다. 하지만 왠지 아닌 것 같습니다."

" 흐음... 어쩔 수 없지."

나는 검마와 망량의 마지막 기억을 마주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혼돈 속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확신할 수 없는 걸 확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느낌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방법이라는 걸 - 검마와 망량에게서 배운 것이다.

파앗!

우리는 신공표까지 데리고 사천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칠요의 획득상태와 현재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술을 동원해서 제갈사의 상태를 점검했으나 그는 몸 여기저기에 부상의 흔적이 있을 뿐 신체는 멀쩡했다. 단지 가사상태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천하오대의원 중 광명신의 하서명을 찾아갔다. 고려는 물론이고 세계가 망해가는 상태에서 십이율 이목따위 신경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화서명이 제갈사를 진맥한 후에 말했다.

"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 없소. 이 가사상태의 이유를 모르겠구려."

" ......"

제갈사는 예전에 죽을 위기였던 진소청을 살리기 위해서 마왕 시몬 마구스와 추가 계약을 맺었고, 명계로 도피했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때 맺었던 추가계약 때문에 제갈사의 영혼 그 자체가 괴롭힘받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구천현녀에게 제갈사를 치유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녀가 말했다.

[ 누군가에게 영혼을 빼앗긴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지금 강력한 마력에 얽매여서 변질되고 있습니다.]

" 변질되고 있다고요?"

[ 아마 그 마왕이란 존재가 불어넣은 힘 때문일 것입니다. 강대한 마력이 심대한 부상에서 제갈사의 몸을 회복시켜주었으나 동시에 그를 마(魔)로 바꾸려고 하는 중입니다.]

" 치유할 수 없겠습니까?"

[ 못 합니다. 이 마력은 계약관계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계약의 종주가 승인하지 않으면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즉시 인과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제기랄, 마왕 놈... 역시 제갈사에게 수를 쓴 거야.'

순순히 마에 속하는 자가 남 좋은 일만 시켜줄 리가 없다. 마왕 시몬 마구스는 제갈사를 강대한 중마로 변이시켜서 자신의 강력한 종복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므로, 일부러 그를 마력으로 괴롭히고 있으리라. 아직 제갈사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마력의 유혹을 스스로 견뎌내고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구천현녀한테 억지로 치유를 빌면 우리는 큰 전력을 잃게 된다. 여의봉을 내놓은 이상 인과율을 섣불리 소모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당분간 제갈사의 조언을 받기는 힘들거라 생각하고 천우진에게 방법을 찾아볼 것을 부탁했다.

" 알았다. 최대한 알아보지."

나는 이야기가 대충 정리되자 내 생각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 창힐이 갖고 있는 토요 팔괘도를 뺏아야 합니다. 그리고 토요를 뺏은 후 육요를 한꺼번에 해방시켜, 마지막 칠요인 일요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 흠, 일요라... 백웅, 넌 정말로 황제의 만신전에 가면 뭔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냐?"

제천대성이 뭔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으나 나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대답했다.

" 네. 어차피 이대로는 종말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아있는 다른 삼황오제들은 종말을 막아줄 권한도, 의지도 없죠. 그렇다면 삼황오제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황제의 뜻을 바꾸어서 인간 멸망을 유예하거나 아예 막아버리는 게 낫습니다."

" ... 그게 잘 될지 모르겠다만 일단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건 맞구만."

제천대성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신공표가 말했다.

[ 이제 내게 말해줄 때가 되었을 텐데? 천계의 흑막이란 게 대체 누구냐?]

" 서왕모이자 여와."

[ 뭐?]

" 서왕모가 바로 여와의 화신이란 말이다."

[ 헉...!!]

신공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좌중에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자 더욱 충격을 받은 듯 했다.

[ 그, 그건...]

" 하지만 사실 그녀도 진짜 흑막이 아닐지도 몰라."

[ 무슨 소리냐?]

" 여와는 서왕모라는 화신을 만들어서 천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지만 삼청 태상노군이 이야기한 마신은 여와와 서로 다른 존재야. 천계를 엉망으로 만든 건 여와가 혼자서 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 ......]

" 그리고 어쩌면... 그저 동맹관계일 수도 있어."

신공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 동맹? 삼황 여와의 부하가 아니란 말이냐? 아무리 홍균도인이 [옛 지배자]급의 마신이라지만 여와는 보통 지배자보다 현격히 높은 존재다. 전 우주를 통틀어도 여와처럼 강력한 신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 틀림없어. 그들은 상호 복종하는 관계는 아냐."

나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 거인족. 약속을 했으면 꼭 지켜주게.]

[ 그녀의 동료라기보다는 투자자 내지는 관찰자같은 거라네.]

[ 난 싸우는 걸 별로 안좋아하고, 딱히 자네와 싸우고 싶지도 않아. 그저 그녀와의 약속을 이행해줬으면 하는군.]

[ 뭐, 나로서도 이 상황은 흥미롭지만 이런 식으로 흉신이 중원을 제패해버리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건방진 애송이가 날뛰어도 워낙 타고난 힘이 강해서 억제할 놈이 없어. 너무 상황전개가 빠르다는 거야. ...거인족 네가 그럴 마음이 없다면야 어쩔 수 없지.]

[ 나가주게. 더 이상은 끼어들지 않을테니.]

23번째 삶의 막바지였다.

공공이 천계에 쳐들어가서 여와의 화신인 서왕모를 어떻게든 해치웠는데, 공공이 그 시체의 힘을 흡수하려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존재가 공공을 만류하고 서왕모의 시체를 빼돌렸는데 그 정체가 엄청나게 수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는 전혀 서왕모를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왕모에게 '투자' 혹은 '관찰'을 하고 있다면서 최소한 대등한 관계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오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때의 말투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 - 그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 스스럼없는 하대(下對)였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 지금부터는 계속 도박이다."

당초에는 미해방 칠요를 많이 모아서 서왕모에게 윽박질러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거대한 판의 주도권은 서왕모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왕모이자 여와인 존재는 읽히지 않는 인과율에 불안해하면서 보수적으로 현 상태를 지키려 할 뿐, 전혀 세계를 주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주도자는 바로 서왕모를 지켜보는 흑막.

창힐을 제대로 견제하려면 금성의 마신을 소환하거나 천계를 도발할 게 아니다.

팔부신중이나 때려잡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는 의문의 흑막과 거래해야 한다.

" 태허천존(太虛天尊)을 소환하겠어."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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