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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세계수?!
나는 세이메이에게 그 말을 듣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 세계수라니. 어떻게 그걸 알아볼 수 있지?"
" 나와 동화되어 있는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가 이 씨앗에 반응하고 있다. 보이는가?"
쿠르르륵
세이메이가 자신의 손을 내밀자, 거기에서는 기이한 햇빛의 문양이 일렁이면서 마치 액체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문양에서 심상치 않은 힘이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게 신력(神力)의 일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세이메이에게 말했다.
" 동화했다고? 넌 과거에 동영을 구하기 위해서 아마테라스를 소환했다고 하지 않았나."
" 그냥 소환한 것만으로는 수해의 왕을 막을 수 없었지. 내 인간으로서의 형질을 버리고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야 전설적인 존재의 권능을 사역하는 게 가능했어."
세이메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 ... 내 몸의 절반은 그녀의 소유. 그 당시에 그녀가 먹어치운 셈이지. 소환사인 내 몸을 먹어치우고 있기에 아마테라스는 인과율 걱정 없이 계속 강림해있을 수 있는 것이다."
" ......"
" 그래서 난 불로불사지만 필멸. 언젠가는 그녀가 날 모두 먹어치울거다."
나는 세이메이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놈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처지인데도 인간에게 완벽하게 공감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그런 까닭에 나는 알 수 있다. 이 씨앗은 분명히 세계수다. 세계수인지 아닌지 가장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건 신격이기에."
세계수.
나는 그 말을 되뇌였다.
본래 나는 세계수에 대해서 잘 몰랐다. 고려의 북부에 있는 신단수가 아홉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존재였고 강력한 결계의 역할을 했으며, 혼돈에서 태어난 가장 완벽한 생명이라고도 했으나 사실상 제갈사에게 마도를 배울 때까지는 그게 뭔지 잘 몰랐던 것이다.
나는 과거 제갈사가 해줬던 세계수의 설명을 떠올렸다.
[ 이 세상의 바깥에 '혼돈'이라고 불리는 근원이 가득 차 있는 우주가 존재하며, 그 넓이는 무한대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행성이나 은하, 세계의 모든 것이 혼돈에 귀속되지.]
[ 그리고 혼돈은 무수한 생명을 낳으며 무수한 문명을 창조했다. 혼돈이 만물을 잉태하여 우주를 넓히는 동안 이 세상 여기저기에서 혼돈의 밀도가 변이하며 파괴 또한 같이 일어났지. 그 와중에 생명을 초월한 존재가 태어났으며 태고에 무수한 문명이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그들을 숭앙했으니, 그를 [옛 지배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 그런데 [옛 지배자]와 비슷한 혼돈의 밀도에서 탄생했으나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그저 생명으로서의 완결에 도달한 혼돈이 존재한다.]
[ 우주의 무한한 세월 속에서 기적적인 확률로 탄생하는 가장 완벽한 혼돈의 정화, 그것이 바로 세계수.]
[ 혼돈의 알에서 부화하지 못한 [옛 지배자]라고 불러도 좋겠지.]
[ 그렇기에 세계수는 [옛 지배자]조차 견제하는 강력한 결계가 될 수 있으며, 무수한 필멸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확률을 만들어내는 희망인 것이다.]
나는 동시에 제갈사가 말해줬던 껄끄러운 말을 기억해내며 말했다.
" 하지만... 세이메이. 세계수란 건 원래 물질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존재 아니었어? 이 별은 물론이고 성계(星界)를 뒤져도 하나 찾기가 힘든 존재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
제갈사가 말하길, 1광년 내를 뒤진다 해도 세계수가 그 무량한 우주공간 속에 존재할 가능성은 무(無)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다중차원적 존재인데다 차원을 제멋대로 옮겨다니는 능력까지 있어서 물질계에서 발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주를 여행하는 고위 이족들조차도 세계수를 발견하는 일 자체를 희귀한 일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고려 북부에 세계수가 자생하고 있는 건 엄청난 확률의 기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고려의 신단수를 부술 때부터 또 다른 세계수를 찾을 기대따위는 버렸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제갈사도 제갈유룡과 싸우는 위험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신단수의 밑둥에 숨겨져 있던 미발아 상태의 씨앗을 억지로 얻어낸 것이리라.
그런데 설마 화요 옆에 있던 용화수의 씨앗이 세계수였다니?
세이메이가 말했다.
"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그대들 측 책사인 망량이 내게 이걸 주라 했다면, 그는 용화수의 씨앗이 세계수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군."
" 음..."
" 확실히 이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아니, 될 게 분명하다. 정말로 이걸 내게 주겠는가?"
" 그래. 줄게."
내가 확실하게 대답하자, 세이메이가 문득 감격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손을 붙잡았다.
" 고맙다, 백웅이여. 세계수의 씨앗을 내게 넘겨준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니. 그대는 동영의 은인이다."
" ......"
나는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용화수 씨앗의 가치는 둘째치고, 필연적으로 일의 선후관계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 세계수를 부순 건 우린데...'
비록 제갈사의 계책이었고 천우진이 핵의 파괴를 실행했으나 내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전생을 하면서 신을 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나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결국 내 동료들은 나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큰 원인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세이메이의 감사를 차마 똑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 난... 감사 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세이메이가 말했다.
" 그대들 일행이 고려에 있던 세계수의 파괴와 관련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 때의 대전은 나도 식신으로 관찰했으니 전말은 얼추 다 보았다."
" ......!!"
"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대들에게 큰 원한을 품고 언제고 복수하겠다 생각했지... 그러나 동영이 위기에 처하자 모든 자존심과 원한을 접고 이 곳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대가 아직 대의(大義)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대들에게도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 세이메이."
" 난 그대들에게의 원한을 잊겠다."
아베노 세이메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을 준 보은(報恩)을 기필코 갚겠노라."
자신의 원한을 흘려보내고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니, 세이메이 또한 큰 그릇인 건 틀림없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세이메이에게 물었다.
" 세이메이. 제갈사는 세계수가 생장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어. 아무리 해신이 지금 침묵하고 있어도 단기간에는 불가능할텐데 어떻게 세계수를 키울 셈이지? 최소한 천 년 단위라고 알고 있다."
" 그건 내가 해결하겠다."
간략하게 대꾸한 세이메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을 종이로 바꾸어서 이동하는 음양술인 듯 했다.
" 백웅이여... 부디 건승을 기원한다."
파앗
세이메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은빛으로 빛나며 이명만이 계속 울리던 호수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공간이 떨린다. 정확히는 눈 앞의 시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망량의 환영이 호수 위에 소환되었는데, 그는 옆에 명경을 놔둔 채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이 엄숙했기에 나는 절로 그를 쳐다보게 되었는데, 망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백웅. 흑패로 십이율주를 없앤 건 좋았소.]
" 이제 괜찮은 거요?"
[ ......]
망량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를 쳐다보았으나 망량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지금부터, 명경에 비축되어 있던 모든 영상과 기억, 경험을 백웅 당신에게 넘기겠소. 동시에 명경의 힘을 빌어서 숙부를 그쪽으로 보낼 것이오.]
" ... 무슨 말이오? 당신은 같이 안 온단 말..."
나는 말하다 말고 뭔가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지금 망량의 표정에 담겨있는 게 그저 엄숙함이 아니라 결연함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친듯이 외쳤다.
" 안 돼!! 그만두시오. 왜 그러는지 몰라도 다같이 되돌아올 방법이 있을 거요."
[ ... 이제 없소.]
망량은 허무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 방금 전, 십이율주가 갑자기 당해서 쓰러지면서 칠요 두 개가 공명(共鳴)하면서 엄청난 진동이 전륜성왕의 궁전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소. 십이율주를 공격하던 명계의 간부와 옥졸들은 모조리 소멸했고, 궁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것이오.]
" 망량!!"
[ 이 곳도 오래 버티지 못하오. 그러나 이 명경을 가지고 숙부와 함께 무사히 탈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소.]
" 빌어먹을!! 그런 소리 마시오."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구해내겠소."
[ 방법이 없진 않겠지. 그러나 그 방법이 마도(魔道)라면 난 단호히 거부하겠소.]
" 망량."
[ 백웅, 명심하시오. 당신은 최후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서는 안되오. 효율을 포기하더라도 스스로가 인간임을 지키는 것이 바로 왕도(王道)가 될 것이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 대체... 이게 무슨..."
[ 숙부는 늘상 말했소. 우리는 무한대의 기(其)를 두는 주군을 위한 책사이며 장기말일 뿐이라고...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서 섣불리 기회를 놓치다가 다같이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 될 것이오.]
망량은 문득 웃었다.
[ 지금이라도 속이 편해지는군... 나는... 그동안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여 미안했소.]
파앗 -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서서히 눈이 감김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며, 호수를 통해서 제갈사의 몸이 이쪽으로 소환되는 걸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 네 운명은... 결국... 에게로... 흐르게 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대의 제관을 쓴 환영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돈이 휘몰아치는 듯 했다.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울려오는 가운데 그 목소리가 강요하듯 내게 언성을 높이는 것을 느꼈다.
[ 어째서... 그 때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 거지...? 가장 편하고 확실하게 승리할 방법이 눈 앞에 있거늘...]
[ 너 또한 왕이 되고싶은 거겠지...]
[ 하지만... 나는... 네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또 한 번의 기회?
내가 그 말에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말했다.
[ 간단하게 생각해라... 스스로 싸워 이겨내는 건 환상...]
[ 강자에게 붙어라... 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를 얻을 터...]
[ 모두가 두려워하는 종말조차...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된다...]
[ 종말이 끝난 후의 영생과 천년왕국을 누릴지어다...]
[ 가장 간단한 답으로... 향해라...]
저 놈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스아아앗
' 오오...'
동시에 솔깃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목소리가 보여주는 환영이 수많은 부귀영화와 미녀, 그리고 엄청난 쾌락을 내게 느끼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었으며 대명제국의 황제가 부럽지 않은 무시무시한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껏 쾌락과 동떨어져 있었던 내게는 굉장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 백웅.]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나를 유혹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으며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쾌락의 환영을 떨쳐내고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 나는 생전에 자네를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군.]
나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꾸를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슬픈 기분이 들어서 그만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왜 이러지.
나는 저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 그래.
그렇다.
나도 생전에 저 사람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 왜 우는가? 하하, 이래서야 울보에게 내 딸을 맡길 수는 없겠군.]
[ 뚝 그치게. 자주 울면 사람이 얕아보인다네.]
그는 쓴웃음을 짓는 듯 하다가 내가 겨우 눈물을 그치자 말했다.
[ ... 내 부친께서는 생전에 동서고금의 무예이론을 탐독하는 걸 즐기셨지. 왜검술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검예를 크게 바꾸기도 했어. 그런 부친이 내게 말하시길 -]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 이 세상 어딘가에는 만무만식(萬武萬式)의 요체로 회귀하는 궁극의 경지가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지. 이론상의 경지지만 그걸 달성하는 자는 천하를 제패할 것이라고도.]
[ 나는 십이율주와의 전투에서 그 경지에 도달한 자를 직접 볼 수 있었네.]
[ 그것이 바로 절대지경 천의무봉(天衣無縫).]
우우웅
순간 그와 나 사이에 투명한 검이 나타났다.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거머쥔 그는 내게로 검을 향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자네와 내가 검을 맞대고 서 있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 실력차가 가늠이 되지 않을 때는 물론이요 서로를 알지 못할 땐 당연한 일. 우리가 적수를 '노려보는 건' 바로 그 때문일세. 그건 검사는 물론이고 무인(武人)의 숙명(宿命)과도 같은 두려움.]
[ 그러나 만일에 상대를 노려볼 필요가 없는 자가 있다면?]
[ 그 자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미지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일세. 또한 서로 살육을 나누는 관계에서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야.]
[ 그러나 반대로 그를 상대하는 자는 무한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네. 단기간에 결판을 내는 유형의 무인일수록. 미야모토 무사시가 바로 그런 자였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 기억해두게. 천의무봉은 예지능력이 아닐세.]
[ 그러나 - 언제나 후발(後發)로 선제공격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일세. 이게 어떤 차이인지는 자네가 언젠가 그와 무예를 맞대보면 알 수 있을 것일세.]
[ 직접 싸워보면 천려일실(千慮一失)은 커녕 억려일실(億慮一失)조차 없네.]
[ 사실 이론상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라고 보지만... 십이율주는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무예를 쌓아온 모양일세.]
[ 천의무봉보다는 차라리 육의성천도나 뇌신지혼이 인간적일 정도지.]
[ 절대지경이 인간의 삶을 반영한다 생각하면, 십이율주의 삶은 상상조차 가지 않네.]
하나하나의 내용이 머릿속에 박힌다.
아니, 새겨진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내 무예의 오성은 분명히 빈약하기 짝이 없을테지만, 지금 상대의 말은 그저 말로 설명하는 걸 넘어서서 동시에 생생한 육감을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천의무봉을 상대하면서 생각하고 겪었던 모든 무인의 체감이 내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얻었던 절대지경이 응축되어서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마치 내가 암천향에 없었을 때의 공백은 아예 없었다는 것처럼, 그 깨달음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마치 검마의 삶을 대신 느끼는 기분이 되었고, 그게 내 안에서 조그마한 결정을 만들어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아.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어.
내가 그 깨달음을 되새기고 있을 때 문득 그가 팔짱을 끼며 내 뒤편에 있던 환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 저게 바로 자네를 구속하는 망집이었군.]
저게 뭔지 알고 있습니까?
[ 나도 모르네. 저게 뭐지?]
[ 사실 본래의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 사념에 불과한 내가 어쩌니 저쩌니 할 수도 없지.]
[ 하지만 신경쓰지 말게. 알지도 못하는 걸 신경써봤자 손해일 것 같군.]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게 내 운명을 갖고놀려 한다고 생각하면...
[ 백웅 자네를 흔들려 한다는 것은, 자네가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이란 뜻이지. 그렇지 않은가?]
아.
[ 언젠가 자네는 신조차 죽이려하는 사나이가 아닌가. 신도 죽일 사내가 저런거에 겁먹으면 체면이 안 살지.]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씩 웃는 상대의 모습에서 큰 위안과 용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겪었던 압박과 기이한 현혹이 한순간에 마음속에서 씻겨내려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나를 유혹하던 환영이 작아지면서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고, 내 의식이 서서히 표층으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눈 앞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지금까지 내게 무학의 깨달음을 전해주던 자 말고도 또 한 명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새로이 나타난 자는 부채를 펄럭이며 말했다.
[ 백웅. 이 생에서 당신이 쉴새없이 흔들리는 건 자기자신의 의지가 아니오.]
[ 앞으로도 무수한 고난이 있을테지만, 지금의 고난은 다분히 인위적인 것.]
[ 하지만 이겨내시오.]
그가 싱긋 웃었다.
[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소?]
옆에 있던 자가 흠칫했다.
[ 어허. 이 친구... 내가 했던 말을 또 하는군.]
[ 미안합니다. 워낙 명언이라서...]
[ 하하하. 이만 갑세.]
[ 그러지요.]
그들은 껄껄 웃으며 서서히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가지 마.
왜 나만 두고 가는 거야.
나는 원망스러워서 입술을 짓씹다가 눈물을 훔쳤다.
... 아니, 난 그들과 다시 만날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헤어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난 몇 번이나 이런 괴로움을 느껴야 할까.
몇 번이나 이런 슬픔을 느껴야 할까.
이 수라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분노밖에 없는데도, 그것만으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 ... 이긴다. 어떻게든 이긴다."
말부터 먼저 나왔다.
나는 눈을 서서히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장내에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제갈사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누워있을 틈은 없다.
나는 눈에 심지를 켜면서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 가자! 주인잃은 월요와 목요를 회수하러 간다!!"
이길 방법이 보인 이상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검마와 망량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전생에서 승리하고 말겠다!
그게 그들에 대한 보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