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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동영이 멸망했다고?!
" 뭐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 아베노 세이메이를 보자, 그는 서글픈 눈으로 말을 이었다.
" ... 신단수가 파괴되고 월요와 목요 마저 사라졌기 때문이야."
" 그게 동영이 멸망하는 이유가 되는..."
나는 말하려다가 문득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 ... 되는구나...'
나는 과거에 십이율주와 만났을때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 하하. 저건 신단수(神檀樹)라고 해. 아홉 개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전설이 있지. 보다시피 왠만한 산만큼 커.]
[ 저 나무가 없으면 정말 큰일 나거든. 그래서 목숨걸고 지킬수밖에.]
[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가 없게 되지. 정말 무서운 일이 생길거야.]
[ 신단수는 해신에게서 고려 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수(神樹)군요.]
[ 뭐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그리고 또 궁금한 거 없어?]
[ 안타깝지만 우리 단의 일족의 힘으로는 해신과 흉신(凶神)의 영향력에서 이 땅을 지키는 게 고작이야. 그 이상을 하려면 적어도 천제(天帝)의 힘이 필요하겠지.]
[ 뭐 그냥 그렇단 얘기야. 정말로 그 숙적들이 현세(現世)에 강림할 리는 없겠지. 우리는 그저 그들의 영향력을 신단수의 힘을 빌려서 차단하고, 그 사신(邪神)을 모시는 교단(敎團)이나 사악한 존재들을 척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상황이지만.]
[ 해인은 목요(木曜)에 속한다. 신단수의 힘을 북돋아주어서 결계를 강화시켜주고 있지. 그 덕분에 해신과 흉신의 권능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신단수처럼 강력한 결계는 아니지만 천총운검도 비슷한 결계를 쳐주고 있지. 동영 땅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검 때문이야. 자기역할 잘 하고 있는 걸 굳이 어찌할 필요는 없잖아?]
" ......"
중원 동북지역 - 고려와 동영의 땅이 마(魔)의 영향력에서 멀쩡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신단수가 강력한 결계를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이율주는 목요 해인을 이용해서 신단수의 힘을 강화시키고 있었고, 거기에다가 신단수가 다 막지 못하는 이족들은 월요 천총운검과 삼신기의 힘이 퍼져나가서 견제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있었기에 고려와 동영은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신단수는 박살나버렸고 월요와 목요를 가진 십이율주는 칠요를 가지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동북지역을 지키고 있던 수호신물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므로 이제 그 땅에 사는 인간들은 아무런 가호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고 입을 다물자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 고려는 아직 왕국이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이족과 요괴들의 발호로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동영은 이미 막부 정권이 붕괴하고 인간의 숫자가 본래의 2할 이하가 되었다. 사실상 인간문명이 무너진 셈이야."
" 신단수와 칠요가 없는 것만으로 그렇게나 망할 수 있는 건가?"
" 삼황오제가 지켜주지 않는 땅이니까."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아베노 세이메이가 천장을 쳐다보았다.
" 불행 중 다행은 얼마 전 해신이 갑자기 기세를 잃고 쓰러진 덕분에 상황이 조금이지만 호전되었다는 것. 내가 널 찾아올 여유가 생긴 것도 그 덕분이다."
" 나를 왜 찾아온 거지?"
아베노 세이메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 이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건 너 뿐이다. 새로운 결계가 필요해."
" 상황은 안타깝지만 난 그런 결계를 만들 능력이 없어."
나는 황당해서 대꾸했다. 물론 인간들이 이족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도와준단 말인가? 신단수나 칠요에 버금가는 결계를 만들만한 능력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 백웅.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또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는데 그걸 원하는가?"
" 또 다른 방법?"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 산제물을 바쳐서 인간의 생존을 도모하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수호자로써 섣불리 행할 수 없는 일이라서 우리 음양사들은 크게 망설이고 있다. 이 방법만큼은 쓰기 싫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네게 부탁하러 온 것이다."
" 산제물이라면... 설마 인신공양?"
" 그렇다. 다만 [옛 지배자]에게 바치는 건 아니다. 변칙적인 방법이다."
" ......"
" 그러나 무고한 생명이 죽는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인신공양을 피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아베노 세이메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선(善)을 위해 노력하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음양도의 수장인데도 인간이 멸망위기에 놓이자 인신공양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 나는 창힐과 팔부신중 놈들과 싸우는것만도 벅찬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아베노 세이메이의 요청대로 동북인들을 위해서 강력한 결계를 만드는건 완전히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안타깝지만 안되겠다면서 거절했으리라.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린다.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감당이 되지 않는 일이 홍수처럼 덮쳐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직감을 따라 사는 편이었으므로 도저히 이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아베노 세이메이에게 말했다.
" 구체적으로 산제물을 이용해서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거지?"
" 음양술과 공양의식으로 기신(機神)을 만들 것이다."
" 기신?"
" 우리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제물의 신. 지금 우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참혹하게 표정이 일그러져서 말했다.
" ... 정말 그 방법밖에 없나? 그건 마도(魔道)에 속하는 방법이다."
" 어쩔 수 없다. 해신이 지금은 잠시 쓰러졌지만 머지 않아 힘을 회복하게 될 텐데, 그 때 우리 인간들은 당해낼 방법이 없어."
서문혜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 그럼 그냥 중원으로 이주하는 건 안되나요? 인간이 그렇게 적게 남았다면 남은 인간들을 모아서 중원으로 피하면 되잖아요. 중원은 삼황오제가 지켜주는 땅이니까."
" 이 상황에는 크게 다를 바가 없고, 동영 땅에 사는 인간들을 모두 이주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남은 인간들은 모조리 죽게 될 터. 터전을 버린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고려 또한 마찬가지..."
세이메이가 내게 간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부탁이다. 결계를 만들게 도와 다오."
" ......"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마 내가 갖고 있는 칠요 중 하나를 그에게 넘겨주면, 그가 칠요를 가지고 새로운 결계를 만드는 데 쓸 수 있으리라. 칠요 하나만 있어도 세이메이가 동영의 인간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요새를 만드는 건 가능하리라.
' 아마 세이메이도 그걸 기대하고 왔을지도...'
하지만 지금 칠요를 그에게 넘겨주면 전력이 크게 약화된다. 뿐만 아니라 세이메이에게 준 칠요를 다시 누군가에게 강탈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인간들이 불쌍하다지만 그리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미룰 수도 없다. 그가 멀리 중원의 사천까지 온갖 술법을 동원해서 찾아온 거라면 그는 더 이상 내 대답을 기다릴 여유같은 건 없다는 뜻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생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동영의 백성들을 위해서 칠요를 넘겨줄 수 있는가?
나는 크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하루만 기다리시오. 동료들과 상의해 보겠소."
나는 그 날 밤 호수에 거울을 빠뜨려 망량을 불렀다. 망량은 모습을 드러낸 후 말했다.
[ 백웅. 선지자와의 거래는 잘 지켜보았소. 나는 당신의 거래에 훌륭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소. 많은 보물을 잃었으나 당신이 얻은 현왕의 인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소.]
" 다행이군..."
나는 망량의 칭찬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망량이 말을 이었다.
[ 아베노 세이메이의 요청을 들어줄 방법은 하나 있소.]
" 그게 무엇이오?"
[ 용화수의 씨앗을 동영에 심는 것이오. 그로써 고려 또한 많은 짐을 덜게 될 것이오.]
" ......?"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나는 지금 용화수의 씨앗을 갖고 있지만 화요 옆에 덤터기처럼 있었던 이 씨앗이 대체 뭐라는 말인가? 망량이 말을 이었다.
[ 세이메이에게 용화수의 씨앗을 주면 그가 알아서 할 것이오. 칠요를 넘겨줄 필요까진 없을 것이오.]
" 음, 알았소."
[ 그리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소.]
" 무엇을 말이오?"
[ 십이율주는 명계에 없소. 명경으로 이 정도로 비췄는데도 없다면 없다고밖에 할 수 없소. 굳이 생각해볼 가능성이 있다면 그가 명경에도 비치지 않을 정도로 교묘한 아공간을 만들어서 몸을 숨겼다는 건데,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오.]
" 으음! 놈은 대체 어디 갔단 말이오? 분명 죽었는데..."
[ 어쩌면... 딱 한 군데 생각나는 곳이 있긴 하지만...]
" 그게 어디요?"
망량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털었다.
[ ... '옛 대륙'이오.]
" 옛 대륙이라면..."
[ 십이율주 본인이 언급했던 그 장소. 그는 거기에 도피해있을 가능성이 높소.]
나는 예전 제갈사의 설명을 기억해냈다.
[ 놈이 [옛 대륙]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이지. 너무 수상해.]
[ 하긴 신비(神秘)에 속하는 마도의 비밀이니 모를 수밖에 없겠지.]
[ [옛 대륙]이란 건 지금의 세계가 성립하기 전,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대륙을 의미한다. 그 때의 문명은 지금보다 훨씬 뛰어났고 강력했지.]
[ 하지만 그 문명은 하루아침에 유실되었고, 그게 무려 일만 년 전의 일이다. 이 중화대륙의 역사가 길어봐야 5천년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인간이 알 수 없는 시대의 일이지. 마도사들 사이에서도 비전 중의 비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비밀.]
[ 그런 걸 놈이 이야기했고, 또한 [옛 대륙]으로 향하는 통로를 언급했다는 건... 도저히 간과할 수가 없어. 나 또한 나름대로 강력한 마도사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옛 대륙]으로 향하는 통로같은 건 들은 적도 없다. 그런건 마도서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저 설명은 십이율주가 [옛 대륙]으로 가는 안전한 통로를 가르쳐주겠다고 우리에게
거래를 제시했을 때 제갈사가 의심하면서 나온 것이었다. 마도사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전설의 비경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 [옛 대륙]은 무려 일만년 전 선사(先史) 시대의 일이고 하루아침에 유실된 게 아니오? 그리고 제갈사는 [옛 대륙]이 지각변동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했소. 바다 밑에 가라앉은 대륙에 어떻게 죽은 인간이 갈 수 있겠소."
[ 그렇소. 본디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 팔부신중에게 패배해서 죽은 십이율주가 명계행을 거부한 채 [옛 대륙]으로 칠요 두 개를 가지고 가 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오.]
망량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소. 명경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명계에 없으니 그 곳 밖에는...]
말을 하던 망량이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아니?! 나타났다...!!]
" 뭐라고! 십이율주가 말이오?"
[ 그렇소! 그가 명계에 나타났소!]
" 윽, 당장 가겠..."
[ 산 자인 백웅 당신은 여기에 바로 올 방법이 없소. 잠시 기다려 보시오.]
망량은 자신의 몸 앞에 명경을 소환해서 뭔가 살피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 말도 안 돼.]
" 왜 그러시오?"
[ 십이율주는... 생자(生者)의 육신을 가진 채 나타났소.]
" ......!!"
망량이 크게 당황했다.
[ 잠깐... 그가 향하는 곳은... 어째서 여기로... 설마 그의 목표는...]
파직!
망량과의 교신이 갑자기 끊기고, 거울이 만들어낸 이공간이 사라졌다. 나는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 명계로 가야 해."
망량과 제갈사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