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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 흥.]
내 질문에 천인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질문에 반응한 건 긴나라였다. 그의 본체는 목이 길다란 인면조(人面鳥)와 같은 기이한 모습이었는데 전설의 괴조(怪鳥)인 가릉빈가(迦陵頻伽)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긴나라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 그렇다. 우리의 주군께선 인간을 구하실 것이다.]
[ 긴나라! 뭐하러 적의 질문에 대답해주는가?]
천인이 긴나라를 힐난했지만 긴나라는 태연히 대답했다.
[ 주군께서 인정할 정도의 적수라면 그 정도는 알려줘야겠지. 그게 숙적에 대한 예의, 그렇지 않은가?]
[ ... 놈과 농담따먹기나 할 생각인가? 우린 먼저 돌아가겠다.]
[ 신경질은. 저 놈과 얘기 좀 한다고 큰일나진 않아.]
긴나라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재차 물었다.
" 긴나라. 당신은 생전에 천축의 대현자였다고 들었다."
[ 그렇다.]
" 설마 당신들 팔부신중 모두가 원래는 영웅(英雄)이었고... 인간을 구한다는 창힐의 뜻에 공감해서 그에게 충성하고 있는 건가?"
[ 당연하지 않은가? 그 분보다 확실하게 인간을 멸망의 운명에서 구원하실 분은 존재치 않는다.]
" ......"
[ 그 분이야말로 인간의 빛이자 영광, 진정한 인간의 왕이시다.]
긴나라는 큰 자부심을 갖고 대답하고 있었다. 신화적 존재로 변했는데도 저 정도의 충성심을 갖고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순간부터 희로애락애오욕이 초월존재의 기준으로 변했을 텐데도 창힐에 대한 충성심이 그 신체의 변화를 웃돈다는 뜻이었다. 측천무후의 백성 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신념이다.
' 저 놈들은 절대 창힐을 배신하지 않겠군...'
딱히 말하지는 않고 있어도 긴나라의 방금 말에 팔부신중 모두가 공감하는 눈빛이었다. 하긴 축융이나 전욱에게 갈가리 찢겨도 결코 배신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저토록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적은 절대 이득이나 고문으로 회유할 수 없었다.
나는 긴나라에게 말했다.
" 그럼 이상하잖아. 우리 목표도 어쨌든 종말과 계시에 멸망할 인류를 구하는 거다. 그러면 서로 힘을 합칠 수도 있잖아!"
[ 힘을 합친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로 창힐이 인간을 완전히 구할 수 있다면 난 창힐을 따를 거다. 그런데 창힐은 자기 목적을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고 나머지 인간들을 억누르기만 하니 어찌 그를 따를 수 있겠는가?"
[ 웃기는군. 그럼 어째서 얼마 전 창힐 님의 제안을 거절했지?]
" 전에도 말했듯 당신들의 주군은 순수하게 인간만을 구하려는 게 아닌 것 같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 당연한 소리를...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가? 죽을 인간은 죽어야 한다.]
" 뭐?"
긴나라 저 놈이 뭐라고 한 거야?
긴나라는 태연하게 말했다.
[ 백웅이여. 네놈이 어떤 인간인지 이제 알겠군. 터무니없는 망상에 휩싸여있는 어린애야.]
" 망상에 휩싸인 건 그쪽이 아닌가? 너희를 따르지 않으면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내가 반문하자 긴나라가 팔짱을 끼며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다! 필요한 인간만 구원할 것이다. 그 외엔 방해되니 우리의 주군을 위해 다 치운다.]
" ......"
[ 십이율도 백련교도 그래서 멸망시킨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대적했던 인간은 다 제거했다. 우리 팔부신중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방해가 될만한 싹을 찾아냈다. 주군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자들도 모두 죽어 마땅했다.]
" ...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 그럼 내가 묻지. 백웅, 너는 인간수가 적었던 고대에 인간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생각하는가? 그때조차도 인간은 결코 화합하지 못했다. 내가 살던 수천 년 전의 천축에서는 수만 명 남짓한 인간 속에서도 수십 개의 단체와 이념이 소용돌이쳤다.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 ... 음."
[ 현재의 이 지상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숫자가 일억... 아니 삼 억 쯤 된다고 보면 그 숫자는 예전보다 수천 배나 늘어났겠지.]
긴나라가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 훗... 그들 모두의 뜻을 규합하여 조화롭게 이끌어 신에게 대항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이 세계를 농락하는 흉악한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의 방해를 뚫고?]
" ... 그건."
[ 내가 아직 인간이던 시절에도 그런 허무맹랑한 꿈은 꾸지 않았다. 강력한 힘을 지닌 하나의 의지가 다른 모든 세력을 흡수하여 대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 어떤 폭력을 쓰더라도... 말이지.]
" ......"
[ 우리가 가장 옳다. 우리의 왕이야말로 인간의 왕이다.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여 신적인 힘을 손에 넣은 우리가 인간을 선별해서 구원해주는 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네놈이 말하는 게 어린애같다는 이유를 알겠나?]
나는 긴나라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즉, 창힐의 세력은 수많은 인간족 영웅이나 현자들이 저마다 인간을 구하려하는 모든 방법론이 거추장스럽다 여기고, 그들 모두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방법만을 추구한다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모든 인간을 제거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말에서 오만함을 느끼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웃기지 마!"
[ 너도 똑같지 않은가?]
" 뭐?"
[ 5년 전의 세계수 대전에서 백련교와 십이율의 연합은 허망할만큼 쉽게 자멸했지. 물론 정면싸움에서도 우리가 이겼겠지만 그 배후에서 무너뜨린 진정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바로 백웅 네놈과 네놈을 추종하는 자들이었겠지.]
" ......"
[ 너희도 백련교와 십이율이 방해되어서 해치우려 한거잖나? 뭐가 다르다는 거냐.]
긴나라는 그저 내가 범인일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이었지만 놀랍도록 사실에 근접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긴나라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비록 제갈사의 책략이긴 했지만 어쨌든 백련교와 십이율을 치우니 우리가 움직이기 엄청나게 편해졌다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긴나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 똑같지 않아."
[ 똑같다. 인간은 본디 혼돈의 찌꺼기일 뿐, 태어날때부터 악한 존재. 우매하며 저만 잘난 줄 알고 이기적이지. 인간의 선의(善意)따위로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는 걸, 우리 팔부신중 모두가 인간시절에 깨달았다...]
회상하듯 중얼거린 긴나라가 말했다.
[ 이 세계에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존재하지 않으며 징선권악(懲善勸惡)이 창궐하고 있다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도 악에 물드는 것! 그러나 우리가 본질적인 악에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의 주군이신 창힐 님께서 위대한 초인(超人)이자 신이 되어서 이끌어주시는 것이다.]
" ......"
저 긴나라 놈이 팔부신중의 책사역할이라는 걸 감안하면 소름이 돋는다. 책사조차도 창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광신(狂神)으로 변할 정도라니, 창힐은 어떤 존재란 말인가?
[ 그럼 작별이다, 백웅. 결국 너도 그저그런 인간에 불과했구나.]
파앗
잠시 후 팔부신중들이 공간이동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말없이 지켜보았고 선지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 묘하군. 팔부신중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왜 안 했는가...?]
"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 지금의 저 놈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진심으로 부딪혀도 통하지 않아."
신념을 가진 적.
그런 걸 마주친 게 처음은 아니지만 팔부신중은 달랐다. 마치 하나의 절대군주를 중심으로 뭉친 군신(君臣)관계인 듯 했고 심지어 신앙마저 느껴졌다. 저들을 상대로 아무리 내가 설득하려 해봐도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긴나라의 논리는 확고했고 나도 듣다보니 혹하는 점이 있었다.
확실히 창힐은 인간족 영웅의 입장에서 엄청나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이미 신위를 얻어서 신적 존재들과 대등한 지위에 오른데다 인간을 종말에서 구원할 수 있는 확고한 방법을 구축한 듯 했다. 나 또한 전생을 거쳐오면서 나만의 신념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에 빠져들었으리라.
하지만 - 위화감이 있다. 그건 창힐의 제안을 받았을 때 즉석에서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 창힐은... 왜 이중으로 계약을 맺은 거지?'
오만함과 더불어 심상치 않은 껄끄러움이 느껴진다. 창힐을 보호해주는 존재가 따로 있고, 거기에 창힐은 누군가와 추가로 계약을 맺었다. 또한 창힐은 칠요에 깊숙히 관여했는데 정작 칠요에 집착하는 건 제곡이었고 낙양 성내에서 창힐은 화요를 가진 나를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 자제심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황제와의 관계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으며 황제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창힐이 인간을 구원하는 군주라고 하기엔 너무 껄끄러운 부분이 많다.
' 뭔가 이상해.'
혹시, 팔부신중조차 창힐에게 속고있는 건 아닐까?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선지자가 말했다.
[ 저렇게 엄포를 놓고 갔으니... 네게 창힐에 관련된 정보는 줄 수 없다... 그러나 알의 대가는 크니... 궁금한 게 있다면 일단 다 대답해주지...]
선지자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 선지자! 난 혹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나?"
내 질문에 선지자는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데굴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세심하게 살피더니 촉수를 일렁였다.
[ 모르겠군... 그런건 안 보이는데... 있다 해도 조종당하는 놈이 그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허술한 술법이 아니겠지... 설마 정말로 긴나라 말대로... 망상에 걸린 건가...?]
" 제길! 농담하는 거 아냐. 으, 뭐라고 해야하지..."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다가 말했다.
" 너는 물론이고 구천현녀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내 운명을 조종할 수 있는 술법이 존재하냔 말야. 그런 술법사나."
선지자가 껄껄 웃었다.
[ 그런게 어딨나... 나와 구천현녀조차 속을 수밖에 없는 마법이나 주술이 어딨다고...]
" 정말이냐? 계속 이상한 감각이 느껴져서... 일도 잘 안 풀리고..."
[ 크크... 운이 안 좋나 보지... 그런게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선지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의혹어린 눈으로 촉수와 눈을 내 쪽으로 향하며 한참이나 주시했다. 갑자기 선지자의 행동이 달라지자 나도 긴장해서 굳었는데, 선지자가 잠시 후 탄식했다.
[ 믿기지 않는군... 그건 정말로 순수한 육감으로 생겨난 의심인가?]
" 사실은 망량선사가 뭔가 말해 줬어."
[ 그런가... 과연... 망량선사... 절대적 존재... 그렇다 해도... 전생자란 존재는 역시... 믿기지 않는 감각...]
" 진짜 내가 뭔가 걸린거냐?!"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묻자 선지자가 말했다.
[ 모른다... 적어도 내 수준에선 알 수 없다... 지금도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 뭐? 그럼 그 반응은 뭐야."
[ 알 수 없는 걸 알 수는 없다. 당연하지 않나? 애초에... 내 생각이 맞다면... 그건 술법이나 마법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지... 구천현녀도... 알 수 없는게 당연하지... 삼황오제도 몰라...]
" ......?"
[ 네 의심은 합당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대로의 상황이라면... 알아봤자 어찌할 방법은 없다... 심지어 신조차도... 간섭할 방법은 없어... 우주의 섭리상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니까...]
" 으윽... 어떤 술법인 거냐."
[ 술법이나 마법이 아니다... 그래... [굴레]의 영역이지.]
" ......?"
[ 허나 망량선사가 지켜보고 있다면... 흐흐... 역시 신경쓸 필요가 없는 거겠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던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 신경 안 써도 된다... 넌 망량선사의 말대로... 흘러가다가 선택만 하면 되는 것... 그게 전부다...]
" 빌어먹을!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한다는데 신경 안 쓸 놈이 어딨어?!"
[ 업(業)이 어떤 구조인지 알고 있지 않나...? 넌 꼭두각시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식이
아니야... 결과는 같더라도 과정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네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똑똑한 놈이라면 이 정도만 말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걸 깨달을 터.]
뭔가 한심하다는 듯 말하던 선지자가 말했다.
[ 좋아... 멍청한 네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실제로 도움을 좀 주지...]
" 어떻게?"
[ 창힐도 엿먹이고 싶으니... 말이지...]
스스스스
선지자가 촉수를 뻗어서 내 양손에 접촉했다.
[ 우선... 우리 종족의 기술로 지금 네가 가진 가호를 증폭시켜 주겠다... 그리고...]
주황빛이 내 전신에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손등에 뭔가 이상한 표식같은게 빛나기 시작했는데, 그 표식은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의아해서 그 표식을 쳐다보자 선지자가 말했다.
[ 내가 전생자인 네게 여태껏 어떤 능력을 거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능력만큼은 아마 처음 받는 것이리라... 그건 제왕만이 쓸 수 있는 권능...]
" 이게 무창의 탑 무제한 이용권같은거냐?"
[ ......]
" ......"
[ 설마... 내... 내가... 그런것도... 거래했었나...]
" 응."
[ 도대체 무슨 일인가... 창힐이... 널 경계하는 이유가 있었군...]
선지자는 좀 충격 받은듯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후 말했다.
[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르는... 나의 고유한 권능... 현왕(賢王)의 인(印)...]
" 현왕의 인?"
[ 오로지 나... 종족의 왕만이 대대로 계승하는 능력...]
선지자가 말했다.
[ 이번 생에 딱 한 번 밖에 못 쓰겠지만... 부디 그 능력으로 운명을 농락하길 바란다...]
나는 현왕의 인이 어떤 능력인지 선지자에게 설명을 들었다.
" 음..."
하지만 강력한 능력이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판이 커진 상황에서 어떻게 써야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적절하리라.
' 그래도 소득이 있는 게 어디야!'
나는 선지자에게서 물러나와서 천우진을 기다렸고, 잠시 후 천우진이 돌아와서 나를 데리고 본거지로 돌아갔다. 본거지 앞에 선 천우진이 말했다.
" 손님이 있군."
손님?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찾아온 자의 얼굴을 보자 약간 놀랐다.
" 아베노 세이메이."
그는 동영의 인간들을 수호하는 수호자이며 최고의 대술법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미동(美童)의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어딘가 지쳐보였다. 아베노 세이메이는 정좌한 채 앉아있다가 내게 말했다.
" 늦지 않게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군..."
" 무슨 일이야? 여긴 어떻게 찾아왔고..."
" ......"
아베노 세이메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 동영이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