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
암천향(暗天鄕)
귀환한 직후 제천대성이 말했다.
" 신공표는 당분간 이 주변을 맴돌 거다.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생각치 않는 놈이니 우리가 안 도와줘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니, 조심하는 게 좋다."
" ......"
" 습격까진 안 해도 너희를 감시할 게 뻔하지."
제천대성은 신공표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제천대성에게 물었다.
" 어디 다른데 가시려는 겁니까?"
" 당연히 구천현녀를 만나봐야지! 겸사겸사 천계 분위기도 살피고 오마."
" 아."
" 그녀가 함께 있었다면 금오도에서 달기랑 한판 붙는것도 고려해 봤을 거다. 나랑 항우는 신의 단말을 차단할수는 없거든. 시해지술은 그게 가능했을텐데 참 아쉬워... 신공표가 화신의 개입을 막는 틈에 달기를 해치우고 그 요력을 내가 손에 넣었다면."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던 제천대성이 말을 이었다.
" 그녀의 시해지술은 적일 때는 무섭고 아군일 때는 든든하니까 너도 빨리 그녀를 소환할 준비를 해."
" 알겠습니다."
파앗
제천대성이 근두운을 타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항우가 나를 찾아왔다. 항우는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 나와 제천대성, 그리고 구천현녀가 고작 한 인간을 이토록 도와준 일은 유사이래 없었다. 이 정도면 칠요를 다 모을 요건인 거 같은데 다 못 모으는 이유가 뭐지?"
" 윽... 그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 월요와 목요를 가진 십이율주 놈을 명계에서 아직 찾지 못했고... 토요는 황궁 심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 이상하군."
" 네?"
" 그럼 지금 제일 우선해야할 일은 십이율주인지 뭔지를 찾는거다. 왜 그 사실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지?"
" 일단 신공표의 도움이 앞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요괴선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큰 세력을 이루면 앞으로도 편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십이율주를 당장 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어서."
" 뭔가 어설프군."
" ......"
항우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 어쩐지 이대로라면 네녀석과 동료들은 누군가에게 놀아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난 천계 구선산에 돌아가 있을테니 당분간 날 부르지 마라."
" 네?! 어째서..."
" 우희를 찾지도 못했는데 날 부른다면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슈욱
항우도 그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 ......"
" 화날만도 하지. 어찌어찌 좋은 인상이 생겨서 네녀석을 손수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결과는 허공에 헛손질이니, 이 자리에서 널 때려죽이지 않은것만 해도 항우치곤 많이 참은 거 아니겠나?"
천우진이 옆에서 이죽거렸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얼마 전 환술에 속아서 천우진을 공격해버린 일 때문에 미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잠자코 입을 다물자 천우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 후 - 갑자기 진행이 막혔군. 사형의 계책은 금오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다는 전제였으니 다시 한번 사형을 불러서 도움을 받는게 좋을 것 같다."
" ... 정말 그럴까."
" 뭐?"
" 우리 모두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나는 중얼거렸다.
방금 전 항우의 말을 들으면서 반박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말에서 뭔가 느끼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망량의 계책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나나 항우나 둘 다 직감을 중시하며 움직이는 인물들이었다. 뭔가 전체적인 흐름이 요상하게 꼬이고 있었으며 그건 내 의사와 관계없다는 게 분명히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이대로는 큰일난다'라고 하는 분명한 위기의식을 가져왔다.
난 지금 이 상황의 주도권이 없다.
칠요를 모으는 것도 난항이고 그렇다고 창힐과 직접 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갖고 있는 전력 - 구천현녀, 제천대성, 항우 라고 하는 막강한 패가 있으면서도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책략은 틀리지 않았는데 헛손질만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이건 분명히 내가 중요한 걸 빼먹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중요한 건 대체 이 상황에 무엇일까?
" ......"
진소청이 우연히 발견한 비밀공간에서 가져온 그 정체불명의 알 같은건 아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깨어날 기색도 없어보이니 그냥 목갑에 집어넣었다. 저 알을 가져오기 전부터 상황은 이미 꼬여가고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뭐가...
망량이 틀린 건 아니다. 망량부터 의심한다면 지금 내가 움직인 건 무의미하며, 앞으로도 무의미하다. 이건 이성과 책략의 문제가 아니다.
" 아."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천우진에게 말했다.
" 천우진. 혹시... 나도 모르게 나를 조종할 수 있는 술법같은게 있을까?"
" 당연히 있지."
" 어떤 술법이지?"
내 질문에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아주 많아. 한두개가 아니지. 이혼대법도 원리가 다를뿐 현혹세뇌 계통인건 마찬가지 아닌가? 하물며 중원역사에서 도맥이 권력과 영합한 적이 한두번도 아니고 내가 아는것만 수백가지는 될 거다."
" 하지만... 그저그런 술사가 내게 세뇌술수를 썼다면 네가 바로 알 수 있겠지?"
" 당연하지. 뿐만 아니라 네게 구천현녀와 화룡진인이 강림한다는 걸 생각해라. 그들이 직접 강신해서 가호를 내리는 네게 세뇌술이나 정신술을 걸어서 성공시킬만한 술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 그럼 인간이 아니라 이족이나 대라신선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 ... 정말 고위 이족중의 고위층이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정도면 신(神)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예를 들어서 선지자같은 놈이라면 강력한 의식을 치르면서 널 조종하는게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마도왕으로 불리며 [옛 지배자]로 분류되기도 한다는 건 알고 있지?"
" 음..."
" 뜬금없이 그런걸 물어보는 이유가 뭐냐?"
" 넌 천재니까 내가 왜 물어보는지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대답하자 천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 웃기지 마. 네가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고? 이 세상에서 너보다 고위존재의 강신을 많이 받고 이목이 쏠린 놈이 어디있다고? 그런건 있을 수 없어!"
" ......"
하지만 나는 천우진이 단정짓는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기묘한 불안감과 아슬아슬한 불운, 이 모든 것이 그런 결론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쩐지 이대로라면 네녀석과 동료들은 누군가에게 놀아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항우의 말이 머릿속에 박힌다.
이게 정말로 내 기분 탓인가?
그렇다기에는 지금껏 여행을 하면서 단련되어 온 경험와 육감이 자꾸만 이상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
" 천우진. 그래도 좀 생각해 봐. 만일 누군가가 지금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를 조종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게 누구일까?"
" ......"
천우진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너의 적이겠지."
" 하지만, 적이 직접 나를 조종한다기엔 지금껏 누군가에게만 도움되는 일을 한 적은 없어."
" 빌어먹을... 지금 네놈과 얘기하고 있으니 미친놈의 하소연을 듣는 것 같아."
신경질을 내던 천우진이 말했다.
" 난 모르겠다. 다른 놈을 불러서 얘기해 봐."
결국 천우진이 더 얘기를 들어주지 못하겠다며 가 버리자, 나는 별 수 없이 나머지 인간동료들과 공공을 모두 불러서 내가 갖고 있는 기묘한 불안감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은 바로 당산이었다.
당산은 내 불안감을 듣자마자 말했다.
" 만독문(萬毒門)의 충술(蟲術) 얘기가 생각나는걸."
" 만독문?"
" 운남 만독문 알지?"
" 알아. 원래 너희 사천당문의 경쟁자였고 운남의 패주이자 문주인 독마(毒魔)는 마도팔마(魔道八魔) 중 하나잖아."
" 여기 지하실에 독마의 목을 베어서 전시해놨거든. 만독문은 내가 얼마전에 멸망시켰어."
" ......."
뜬금없는 당산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난 황당해서 말했다.
" 왜 멸망시킨 거야?"
" 사천무림을 휘젓고 다니는데 방해되서... 그리고 내 무형지독을 향해 연구하려면 놈들의 기술과 경험을 얻어야 했거든."
" ......"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성인만 다 죽였고 어린애들은 살려서 놔 줬으니까."
태연하게 엄청난 소리를 한 당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 만독문을 멸망시키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독술과 충술에 대한 걸 다 캐냈어. 내가 들은 이야기 중에서 충술 얘기를 하자면, 벌레한테 벌레를 기생(奇生)시키는 수법이 아주 흥미롭더군."
" 기생?"
" 그래. 벌레는 다른 벌레의 몸 속에 들어가서 같이 살 수 있어. 그리고 기생충은 숙주의 행동과 생태를 조종하면서 자기 뜻대로 몸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 숙주는 자신이 조종당하는지도 모르고 천적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해."
" ......"
" 혹시 누군가가 당신한테 기생충을 기생시킨건 아닐까, 으흐흐."
나는 당산의 장난스런 표정을 보자 그제서야 이 놈이 나를 놀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 빌어먹을. 장난하지 마. 그런 충술사가 어딨어? 그리고 설령 기생충술을 내게 썼다 해도 구천현녀나 화룡진인의 가호를 속일 순 없어. 게다가 그 정도의 충술사가 무림에 존재했다면 백련교주조차 없애고 무림을 정복했을거다."
" 뭐어~ 그냥 그런 경우도 있을수도 있어서~"
당산이 이죽이는 동안 서문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백웅님. 제가 듣기에는 너무 과한 걱정이라고 생각되요. 천우진 님이 화를 낸 것도 이해가 되는데,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그냥 감이오. 하지만 그 감이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소."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 백웅. 나는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고 있소."
처음으로 내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진소청이었다! 진소청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확실히 지금 우리 상황이 주도권없이 끌려다니는 건 사실이고, 그 이유도 명확하지 않은 게 맞소. 그 이유에 우리 자신의 부덕이 아니라 타인의 외력(外力)이 끼어들었다는 건 설득력이 있소. 다만 감 때문에 의심만 하는 걸로는 그걸 입증할 수 없지."
" 어떻게 해야겠소?"
그 때 공공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 즉, 힘이 있어도 뭘 해야할지 모르겠고, 어디를 공격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게 요점이군.]
" 그렇습니다만..."
[ 너를 조종하는 의문의 뭔가가 있다는 건 둘째치고 그렇다면 누가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하는 적(敵)인지를 확실히 하는게 먼저가 아니겠는가? 지금 제일 쳐야하는 놈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 그야..."
나는 창힐과 팔부신중이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들을 먼저 치기엔 힘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쓰러뜨린다 해도 남좋은 일만 시켜주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망량이 계책을 세워서 신공표와 금오도 전력을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계책이 실패해버린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 그럼 천계를 쳐야 하나?'
그것도 아니다. 천계 자체가 악은 아니었으며 어찌되었든 창힐이 제멋대로 할 수 없게끔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어장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유사시에 천계가 삼황오제의 명령을 받아 천제를 놓고 창힐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창힐도 함부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천계를 우리가 먼저 치는 것도 하책이다.
그렇다고 얼마 전에 창힐과 교섭했던 삼황오제 제곡을 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삼황오제와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힘이 없을 뿐더러, 마찬가지로 제곡이 창힐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거대한 세력들이 새롭게 힘의 균형을 이루는 길항상태!
마치 인간계 삼대세력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와 같았기 때문에 나는 명확한 하나의 적수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 ......"
[ 내 생각에는 지금은 은인자중하면서 힘을 키울 때다. 누군가가 균형의 끈을 끊는 순간 맹렬하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게 최선이지. 그렇지 않은가? 아마 망량이란 자에게 책략을 논의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듯 싶군.]
" 그럴지도요..."
공공의 말대로 망량 또한 힘을 키우는 책략을 꽤 선호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책을 짜도 절대적인 힘이 부족하면 쉽게 망가지는 걸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적들은 산재해 있고 이렇다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뭐하러 먼저 나서겠는가?
" ... 하지만..."
정말 마음에 걸린다.
정말 지금 내가 행동하는 게 내 자율의지인가?
보통 인간이 볼 때는 터무니없는 고민이며 미친놈이나 할법한 망상이지만, 나는 이 의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자꾸만 이 순간을 놓치면 큰일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운(運)인가 명(命)인가.
나는 내 직감을 보충하기 위해 모험을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 선지자를 찾아가겠습니다."
상황의 변수를 알아낼 능력이 이 쪽에 없다면, 대가를 바쳐서라도 알아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