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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 그냥 당할 것 같으냐!]
십천군은 갑자기 시공간을 뒤바꾸며, 아까처럼 십절진을 겹치면서 그 위력을 증대시키는 듯 했다. 8명의 십천군이 그 힘을 합치자 나를 합공할 때보다 훨씬 위력이 강해졌으며, 특히 금광성모와 왕천군이 주축이 되어서 신공표를 억누르는 듯 했다.
신공표는 호전적인 표정을 지으며 사보검을 허공에 띄웠다.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끼어들지 말지 망설였는데, 천우진이 내게 말했다.
" 내버려 둬. 우리 일 아니야."
정말 괜찮을까?
그 순간 신공표의 사보검 중 하나가 허공에서 진동했고 신공표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육선검(戮仙劍), 찔러라.]
푸확
푸른 피분수가 터져나왔다. 뜬금없이 시공을 격한 칼날이 왕천군의 어깨죽지를 잘라버리고 다리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틀림없이 치명상으로 보였으나 왕천군은 도리어 히죽 웃으며 신공표에게 말했다.
[ 빗나갔군.]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왕천군은 바로 자신의 몸뚱아리를 재생시켰다. 그는 요괴선인이라서 인간과 달리 쉽게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천군의 대응에 신공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 시공을 뒤트는 홍수진(紅水陣)이 꽤 발전했구나. 수천년 동안 제법 수련을 했나? 그래봤자 죽을 운명!]
쿠구구구
신공표의 등 뒤에서 시꺼먼 천 같은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거렸다. 그 모습을 본 진천군이 공포를 담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 유, 육혼번(六魂幡).]
[ 하하하.]
육혼번은 갑자기 여섯 가닥으로 뻗어나가더니 십절진의 공간을 가득 집어삼키려는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금광성모의 금광진이 빛줄기를 뿜어내며 육혼번을 끊으려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시꺼먼 덩어리가 공간에 가득찼으며, 이윽고 칠흑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천우진이 친 결계 덕분에 안전할 수 있었다. 나는 천우진에게 물었다.
"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 그냥 구경이나 해라."
천우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으니."
천우진의 말대로였다.
잠시 후 육혼번이 걷히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8명의 십천군 중에서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왕천군과 금광성모 뿐이었다. 그나마 그들도 극도로 지친 표정이라 체력과 기력이 다 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십천군들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신공표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 왜 그러느냐. 나는 아직 사보검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육혼번에 다 끝장났느냐?]
[ 말도... 안돼... 정말로 전성기의 힘을 다 찾았단 말인가. 아니, 이건 그때 이상의...]
[ 통천도의 힘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 당연하지 않느냐?]
[ ... 크윽.]
왕천군이 절망했다. 그는 잠시 후 이를 악물고 말했다.
[ 신공표! 우리를 다 죽이고 무엇을 얻을 생각인가? 빈껍데기가 된 금오도를 얻어서 어쩌려는 거지?]
[ 후후.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너희가 내 부하가 되면 그것나름 좋겠지만 내 목적은 처음부터 통천도의 동력(動力)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 달성하면 너희는 계륵이나 다름없다.]
[ ......!!]
[ 마지막 기회를 주지. 내 부하가 되겠느냐 죽겠느냐?]
왕천군은 극도로 망설이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뭔가를 느낀 듯한 표정을 짓고는 되려 미소를 지었다.
[ 웃어?]
[ 후후후. 너흰 끝장이다...]
쿠웅!
갑자기 통천도 전체가 뒤흔들리며 큰 진동이 일어났다. 진동의 규모로 볼 때 마치 이 통천도를 거대한 운석이 들이박은 듯 했다. 분명히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는 징조였기에 다들 놀라고 있자 왕천군이 말했다.
[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물러난다고 약속하면 저 녀석을 멈춰주겠다.]
[ ......]
신공표는 차분한 안색이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신의 사도가 되어버렸구나.]
[ 물러나...]
퍼억!
왕천군이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사보검이 날아들어서 일순간에 십천군들을 몰살시켜 버렸다. 십천군들은 육혼번에 체력과 기력이 다 빨아먹혀서 저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처참하게 학살을 일으킨 신공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보검을 회수한 후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제천대성, 나와 거래하지 않겠느냐?]
" 뭔 소리야?"
어느 새 우리 뒤편에는 제천대성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그는 모든 방해를 뚫고 통천도의 심층부까지 찾아 온 것이다. 제천대성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신공표가 말을 이었다.
[ 지금 밖에는 신의 사도가 된 달기(?己)가 봉인이 해제되어 날뛰고 있다. 너희가 놈을 잡아주면 앞으로도 너희를 도와주마.]
제천대성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 ... 나도 그건 봤는데, 어째 선심쓰는 것처럼 얘기한다? 애초에 우리가 통천도를 장악하는 걸 도와준 시점에서 네 녀석은 우리한테 빚이 있는데 말이지. 항우가 두 놈 해치우지 않았다면 방금 전에도 그렇게 쉽게 처치하진 못했을걸. 우리가 안 도와줬으면 너 혼자서 통천도의 방어를 뚫는데 힘을 다 소모했을거고."
[ 윽.]
" 그리고 달기는 너 혼자서 잡지 그러냐? 통천도의 영력을 이용해서 사보검과 육혼번을 쓰면 못할 것도 없을텐데."
[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신공표의 말에 제천대성이 코웃음을 쳤다.
" 웃기시네~ 달기가 인과율을 얻어 신의 힘을 무한정 공급받는 상황이 두려운 거잖냐. 그래서 인과율의 화살을 우리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거 다 알아."
[ ......]
" 우리가 알 바 아닌 일이야. 이 자리는 네 녀석 혼자 살아남고 나중에 약속이나 지켜!"
제천대성이 고개를 휙 돌리자 신공표가 급히 말했다.
[ 달기가 두려우냐? 겁쟁이 녀석.]
그러자 제천대성은 뜻밖에 고개를 끄덕였다.
" 어 두려워. 적어도 지금의 달기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럼 이만!"
[ 으... 잠깐만! 잠깐! 잘못했어.]
더 이상한 건 신공표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진짜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거의 애걸복걸하듯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 ... 금오도의 귀한 보패를 원한다면, 몇 개라도 넘겨주마. 너희가 원하는 보패와 보물을 뭐든 주겠다! 그러니까 좀 도와줘. 이대로는 금오도가 멸망한다!]
" ......"
제천대성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예전에 나와 했던 약속대로 나를 돕기로 하면서 내게 최종결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나는 제천대성의 의리에 약간 고마움을 느끼면서 제천대성에게 물었다.
" 제천대성. 지금의 달기가 그렇게 위험합니까?"
쿠웅!
다시 한 번 통천도가 흔들렸다. 아까보다는 진동이 덜했지만 역시 위압감을 일행에게 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내 질문에 제천대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 어. 방금 내가 했던 말 그대로야. 지금 달기를 상대하는 건 바보짓이지."
" 왜입니까? 항우나 제천대성 중 한 분의 힘만으로도 달기 정도는..."
" 지상계에 소환된 달기를 상대하는 정도라면 아마 그렇겠지. 근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
" 네?"
" 으, 술법사. 네가 좀 설명해라. 난 귀찮다."
제천대성이 천우진을 지목하자 천우진도 마치 파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 백웅. 물론 지상계에 인과율을 갖고 소환된 달기도 강력하다. 그러나 지상에 소환된다고 해서 금오도에 묶여있는 본체의 제약이 없어진 건 아니야. 그저 큰 자물쇠 몇 개를 해제하고 지상에 소환된 셈이지."
" ......?"
" 경우가 달라."
천우진은 한숨을 쉬었다.
" 지금 우리는 황궁의 신과 정면으로 계약해서 거래한 금오도를 쳐서 멸망으로 몰아간 침략자들이다. 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일이고, 지상에서 인간술법사가 소환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인과율과 권능을 부여하는 게 가능해. 뿐만 아니라 지금의 달기는 모든 천계의 봉인이 해제된 게 느껴진다."
" 뭐?! 그 봉인이 다 풀렸다고?"
" 그래. 황궁의 신이 직접 다 풀어줬겠지. 달기가 침략자를 격퇴하라는 명분으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달기의 거대한 본체를 얽어매고 있던 그 수많은 천계 대라신선의 봉인들!
그게 전부 풀려버렸단 말인가?
" 또한 봉인해제된 달기는 사도로써 신의 지원을 직접 받으니 불사신(不死神)이 분명할 것이고, 술법력도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내 환술도 지금의 달기에게 먹힐지 확실하지 않아. 설사 그 달기보다 항우나 제천대성이 더 강하다고 하더라도, 달기는 싸우면서 계속 강해질 것이다."
" ......!!"
" [옛 지배자]가 직접 간섭한다는 건 그런 뜻이지."
" 그럴수가..."
" 달기의 본질은 삼황 여와의 음신(陰神)이다. 본래부터 요괴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니 지금은 천지를 부수는 재앙이 되어버렸어."
그 때였다.
" 뭘 고민하나?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오지랖놓는다고 고민하는 건 천하의 바보천치지."
항우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입구쪽에서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항우에게로 향했고, 항우 뒤쪽에 공공이 따라들어오는 게 보였다. 공공도 자신의 거검을 등 뒤의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 내 생각도 같다. 우리 일이 아니니 그냥 나가자.]
모두가 반대한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할 게 없었기에 신공표에게 말했다.
" 미안하군. 도와준다는 약속은 지켰으니 나머지 일은 네가 알아서 해."
[ 수천 년만에 통천교주로서 통천도를 되찾았는데 포기하라고? 그렇겐 못 해!]
" 알 바 아니란 말이지."
[ 으으으! 이 놈들... 정 그렇다면 네놈들 일로 만들어 주마.]
신공표의 눈에서 흉광이 번득였다. 그녀가 손을 들며 외쳤다.
[ 뭐가 나오든 너희는 내 일을 도와주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파지직!
갑자기 공간이 크게 일그러졌고, 그 곳에서 가공할만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항우나 제천대성조차도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의 막대한 마력이었고 당산이나 서문혜는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 무슨 짓을 한 거냐?"
[ 이 곳으로 [옛 지배자]의 화신이 넘어오려고 하는 걸 막고 있었는데, 이제 안 막으련다.]
" 뭐?"
[ 크크... 능력껏 탈출해 봐!]
파앗
신공표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제천대성이 자신의 분신들을 뿜어내어서 술법을 시전했고, 천우진 또한 급급여율령을 외우며 그런 제천대성을 보조했다. 제천대성의 본체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 젠장. 시간문제군. 항우 너도 도와."
" 흥."
항우는 불쾌한 듯 했으나 성좌의 기운을 뿜어내서 말없이 도왔다. 그도 지금 상황을 곤란하다고 여기는 듯 했다.
" 공공 당신도."
[ 알았다.]
강력한 존재들이 차원문을 막기 시작하자 나는 질문했다.
" 무슨 일입니까?"
" 보는대로다. 달기로는 모자랄거라 생각해서 신이 직접 이 자리에 강림하려는 거지. 그런 건 상대할 수 없어. 이대로 대충 도망치면 우리의 뒤꼬리를 잡고 습격할테니 일단 막아두는거고."
" 당장 도망쳐야겠군요."
" 아까부터 그러자고 했잖아. 제길. 막을 수 있는 시간이 꽤 아슬아슬하겠는데."
제천대성은 고개를 털더니 내게 물었다.
" 그러고보니 진소청은 어디 갔어?"
" 아."
" 빨리 찾아 와. 여기 놔두면 틀림없이 죽어."
" 자, 잠시만요."
나는 급히 서문혜와 당산에게 진소청의 행적을 물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했고,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구천현녀가 있었다면 시해지술의 힘을 빌어서 금방 찾았을텐데 지금은 그렇게 편리한 방법은 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였다.
" 백웅."
진소청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밖에서 걸어오면서 말했다.
" 오면서 이상한 걸 발견했소."
" 그건?"
" 알 같소."
진소청은 품에 하나의 알을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급히 말했다.
" 다 왔으니 탈출합시다!"
파아앗
잠시 후 천우진이 대규모 전이술으로 우리 모두를 이동시켰고, 우리는 잠시 후 당산의 사천당문 폐허지에 도착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공에는 약 백여 장 정도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거대하게 변한 달기의 본체가 나타나서 통천도를 통째로 박살내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 크아아악.]
쿠콰콰쾅
콰콰쾅
달기가 비명을 지르듯 몸과 꼬리를 그저 부딪히는 것 뿐인데도 십절진의 강력한 요력으로 보호받고 있던 거대한 통천도가 통째로 부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달기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질 때마다 금오도 전체에 수백 줄기의 번개가 치면서 세계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나는 차원문 너머에서도 달기의 강력한 힘을 실감할 수 있었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 강하다.'
천우진이나 제천대성의 말대로 저 금오도에 있는 달기는 인간계에 소환되었을 때보다 수십 배나 강한 게 분명했다. 저 자리에 남아서 그대로 달기와 싸웠다면 아마 큰 희생을 치르거나 몰살당했으리라. 사도라는 존재는 인과율만 허용된다면 사기적인 강력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걸 눈 앞에서 실감한 것이다.
제천대성은 한숨 돌렸다는 듯 말했다.
" 천만다행으로 흔적은 안 읽히게끔 빠져나왔군. 하지만 달기에게 주어진 인과율은 그대로니까..."
천우진이 그의 말을 받았다.
" 누군가가 인간계에 달기를 소환한다면 저 힘을 고스란히 가지고 올 것이오."
" 그래. 그게 문제지."
" ......"
나는 아직 위험이 완전히 가신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걱정되는 걸 천우진에게 질문했다.
" 팔부신중이나 창힐이 달기를 현세에 소환할 수 있을까?"
" 가능하겠지만 그건 걱정 안해도 될걸."
" 왜?"
" 창힐과 황궁의 지배자는 동맹관계겠지만 [옛 지배자] 사이에 진정한 신뢰관계같은 건 있을 수 없지. 지금의 달기는 인과율을 잔뜩 먹고 강력해져 있는데 창힐의 성격상 저런 놈을 자기집 안방에 들여놓을까."
" 아."
" 팔부신중의 힘으로는 '저걸' 제어할 수 없어. 당분간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거다."
하긴 지금의 달기는 하위 [옛 지배자]급이라 봐도 무방할 듯 했다.
창힐은 교활하고 정밀한 책략을 구사하는 걸 좋아했고 자신의 의도대로 판이 돌아가지 않으면 아예 포기해버리는 성격이므로,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저런 달기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진소청은 한숨을 쉬었다.
" ... 결국 얻은 건 비밀공간에서 얻은 이 알 뿐이구려."
" ......"
나는 알을 보면서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알이 대체 뭐가 중요하겠는가.
' 신공표 개같은 놈...'
결국 금오도행에서 개고생은 했지만 얻은 게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