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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부웅
이야기를 하자고 한 창힐은 손을 내저었고, 다음 순간 장내는 갑작스럽게 연회장을 바뀌었다. 어전에서 한꺼번에 모두를 순간이동시킨 듯 했다. 그리고 거대한 연회의 상석에 창힐이 앉았고 팔부신중은 그의 근처에 착석했으며, 나는 그 맞은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창힐이 당장 나를 잡아죽이려 해도 어쩔수가 없는데 일단 얘기를 하겠다는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힐이 말했다.
[너를 보낸 건 아마 망량선사겠지.]
"......"
시작부터 정곡이라니.
나는 어떻게 창힐이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몸의 동요를 추스리며 최대한 감정을 조절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창힐이 말을 이었다.
[긴장하지 마라. 망량선사가 널 보낸 거라면 이 자리에서 네게 손댈 생각은 없으니.]
"무슨 뜻입니까?"
달각
창힐은 탁자 위의 젓가락을 집어서 요리를 한차례 헤집었다. 그리고 우아한 방식으로 자신의 그릇에 음식을 옮겨담으며 대꾸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네게 제안을 할 것이다. 그 제안은 강압이나 위력때문이 아니라 너 자신의 필요로 선택하라는 뜻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인가?]
"네."
나는 창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인간에서 [옛 지배자]의 지위까지 승격하며 세계를 주무를 수 있는 권능을 손에 넣었습니다. 더 이상 종말에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터, 도대체 무엇을 원해서 인간세상에 이토록 집착하는 겁니까?"
[흐음...]
내 질문에 창힐은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문득 자신의 옆에 있던 천인 삼장법사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꾸할 가치가 없습니다. 저런 놈에게 우리의 진짜 목적을 알려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천인은 내게 살기를 쏘아보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 놈은 아수라를 비겁하게 죽였습니다. 그 원한을 저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지.]
나는 천인의 말에 황당해서 외쳤다.
"뭐?! 암천향에서 나를 먼저 암살하려 든 건 네놈들이었잖아!"
이게 무슨 적반하장이란 말인가?!
나를 공격해서 없애려 든 팔부신중에게 반격해서 죽였다는 이유로 내가 원한의 대상이 되다니!
천인의 옆에 있던 마후라가가 말했다.
"그는 우리의 동료였고 친구였다. 네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든 우리는 그의 죽음에 복수할 것이다."
"웃기는군! 개소리하지 마!"
나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편리하게 명분을 갖다붙이지 마. 친구의 원한을 앞세우지 말고 날 죽이고 싶다면 닥치고 덤벼!"
"이 애송이가."
비록 2대1로 싸워서 없애긴 했고 신공표의 도움을 받았으나, 아수라는 대결의 결과를 인정하며 죽었다.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도 보패에 자신의 무예의 한계를 부딪혀보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언까지 내게 남겼으니 그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당당한 무인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한이니 뭐니 지껄이는 팔부신중들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먼저 죽이려 든 자에게 반격해서 죽인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팔부신중 놈들은 내 발목만 잡는 것 같다.
창힐이 말했다.
[흥미롭군.]
"당신도 팔부신중 아수라의 주군으로서 내게 죄를 묻고 싶습니까?"
[아니. 아수라는 그저 내 명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점에서 네가 이토록 중대한 존재일줄은 생각지 못했고, 통천교주라고 하는 뜻밖의 강적이 있었을 줄은 몰랐지. 내 잘못에서 눈돌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그렇게 대꾸한 창힐이 혼돈으로 가득한 얼굴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집어넣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이 억지로 인간을 따라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사실 지금도 널 없애고 싶다. 하지만 네 뒤에 망량선사가 있으니 참고있다.]
"망량선사가 있다고 확신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 낙양은 망량선사가 위대한 어둠을 봉인하는 봉인지. 그런 곳에 [옛 지배자]급 권능을 지닌 자 2명의 이목을 속이며 낮도깨비처럼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된다. 결국 망량선사의 의지라고 볼 수밖에.]
"......"
[방금 전 네 물음에 답해주지. 내 목적은 삼황오제를 다 없애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어.'
그저 삼황오제를 다 없애는 것만이 저 자의 진짜 목적일 리가 없다. 그렇게 단순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였다면 지금까지 팔부신중의 복잡다단한 행동이나 계책이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낙양을 점거하며 문명을 발전시키는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삼황오제를 왜 다 없애고 싶으십니까?"
[우문(愚問)이군. 그들을 좋아하는 필멸자도 있던가? 그들은 종말까지 터줏대감을 자처하며 영고성쇠를 조롱하는 폭군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라져야만 한다.]
"......"
저 말은 딱히 거짓이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린다.
창힐은 삼황오제를 없애는 것 이상으로 뭔가, 다른 큰 목적을 원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내 계획을 더 서둘러야 하게 되었다. 본디 천천히 문명을 발전시키며 힘을 모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한 창힐이 내게 말했다.
[네게 도당(徒黨)이 있음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우리에게 힘을 빌려주었으면 한다.]
"힘을 빌려달라고요?"
이어진 창힐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삼황오제의 압작이 더 강해지기 전에 우리는 천계(天界)를 멸망시키겠다. 우리와 너희가 힘을 합치면 아주 손쉬운 일이 될 것이다.]
"......!!"
천계 멸망!
나는 창힐이 먼저 입에 담을 줄은 몰랐던지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계와 창힐, 삼황오제가 서로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시점에서 천계를 치다니? 나는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득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부신중 하나하나가 마왕급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들의 힘만으로도 천계의 전력 절반은 감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 동료들 중에는 칠요를 각각 가지고 있는 구천현녀와 제천대성이 있는데다가 항우도 가세해 줄 것이고 천우진이나 진소청 등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로 창힐의 말대로였다.
'이번 생에... 천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 반박했다.
"그렇게까지 쉬울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왜 금성의 마신이 내려오고 남부의 해신이 날뛰는 이 시점에서 천계를 친다는 무리수를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이 낙양에 펼쳐진 저 소환진은 삼황오제 제곡의 허장성세. 내가 못오게 막는다면 결국 마신들이 달에 체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쉽게 삼황오제가 나와의 전면전을 결정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해신은...]
창힐이 말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크게 반파하여 대양의 해저로 기어들어갔다.]
"... 네? 뭐라고요?"
[누군가의 일격에 치명상을 입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계책을 바꾸기 위해 너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해신이 얻어맞았다고?
대체 왜?
정말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고 허탈하기까지 했다. 해신과 수백만 대군, 사해용왕이 몰려올까봐 지금까지 전전긍긍하며 민간의 피해를 막으려 고심했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해용왕이나 이족 대군은 모두 해신의 마력에 조종을 받고 있으니 본체인 해신이 다쳤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누가 있어서 해신을 일격에 때려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하필이며 이 시점에 공격했을까?
나는 창힐에게 물었다.
"삼황오제가 직접 나선 게 아닐까요?"
[그들은 해신같은 잔챙이한테 일일이 힘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신은 흉신의 부하나 다름없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않는다.]
"......"
[어찌되었든 난 네 대답을 듣고 싶다. 우리와 손을 잡겠는가?]
나는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걸 알아챘다.
이 자리에서 창힐과 손을 잡느냐에 아니냐에 따라서 이번 생의 운명이 결정될 게 분명했다.
'어려워...'
뭐가 정답일까?
창힐과 손을 잡아서 천계를 멸한다면, 천계에 봉인되어 있던 인간의 권능과 재능이 해방될 것이다. 동시에 지금까지 천계 눈치를 보던 것에서 해방되어서 좀 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천계가 사라진다면 힘의 축이 사라지는 셈이므로 [옛 지배자]나 이족들이 훨씬 쉽게 발호할 것이다. 그리고 창힐이 이 세상에서 독주하는 걸 막을 수가 없게 된다.
반면에 창힐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창힐의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딱히 천계를 쳐서 없앨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쪽의 전력이 막강하다 해도 우리끼리만 쳐서 없앨 수 있을 정도로 천계가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구천현녀나 제천대성 항우등이 아무리 강해도 천계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강력한 신선들이 버티고 있고 서왕모까지 있었다. 괜히 큰 기회를 놓치는 것밖에 되지 않을수도 있다.
나는 문득 망량선사의 말이 생각이 났다.
[넌 만일에 인류를 구할 수 있지만 세계가 멸망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역(易)이 일어나지. 인류는 멸망하지만 세계는 구원받는다.]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의 선택하겠다는 말인가. 재미있군.]
[흘러가 보아라. 생선을 구워준 댓가로, 이 삶에서 네게 선택할 기회를 줄 터이니.]
조금 전에 했던 말 중에서 선택이란 게 설마 지금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가?
'고양이 녀석은 뭘 원하는 거야.'
확실한 건 창힐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때 했던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
결정했다.
나는 창힐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지?]
창힐은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무엇을 추구하든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낙양을 차지한 순간부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내케 유리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보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협력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껏 네 목숨을 노려왔던 원한 때문인가?]
"그것도 있겠지만, 조금 다릅니다."
[뭐가 다르지?]
나는 내 직감을 담아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그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럼 삼황오제의 뜻에 따를 생각인가?]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과도 손을 잡기는 싫군요."
창힐이 냉엄하게 말했다.
[그럼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네가 이 궁에서 나가는 순간 네 뒤에 망량선사가 있더라도 너희를 확실히 말살하겠다.]
"......"
백련교주.
제갈유룡.
십이율주.
그 세 명에게서 느껴지던 광기어린 진심이나 목적성과는 달랐다. 감히 내가 [옛 지배자]의 경지에 오른 창힐을 섣불리 잴 순 없겠지만, 어쩐지 창힐은 근본적으로 그 셋과는 다른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좀 더 계산적이고 차가운.
그리고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차원이 다른 집착.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알 수가 없지만 창힐에게 섣불리 협력했다가는 씻을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았다.
'미안하오, 망량...'
망량은 우리가 이번 생에 뭔가 이뤄도 이룰 것이라 했다. 천계 멸망이라는 대업적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쉽게 날리는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눈 앞의 이득보다 내 신념이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창힐에 대해서 더 정보를 캐내도 좋았을테지만 저 자는 나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데다 중요한 정보를 줄 리도 없다. 게다가 고대적부터 교활한 술수로 이름을 알린 자에게 섣불리 질문을 해댔다가 내 정보만 읽히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고개를 돌리고 황궁을 빠져나가려 하자 뒤에서 창힐이 말하는 게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힐끔 뒤돌아보자 창힐이 말했다.
[망량선사에게 전해라.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이 세계의 미래가 정해졌다고.]
"......"
나는 대꾸하지 않고 걸어나갔다. 나를 망량선사의 심부름꾼 정도로 취급하는 건 둘째 치고 이제 창힐과 길이 갈라졌기에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망량선사조차도 미래를 알 수 없다고 자인하는데 도대체 창힐이 그걸 자부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만하다.'
내가 창힐과의 첫대면에서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타닷!
나는 고개를 젓고는 황궁에서 빠져나와서 내성의 벽을 넘어서 뛰었다. 허공답보를 발휘해서 잠시 허공에 체류하자 낙양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직까지 허공에는 금성의 마신때문에 어두운 소환진이 유지되고 있었고, 낙양 내는 어둠으로 가득 했다.
동시에 먹구름 아래에서 증기가 끓어오르며 강철으로 만들어진 기관들이 김에 내뿜었고, 알 수 없는 과학기구를 끌고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 세상이 어둠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거라는 예감이 든 것은 어째서일까
'동료들을 만나야해.'
나는 활공하듯 낙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더욱 더 상황이 격렬해질거라는 예감에 휩싸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