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726화 (725/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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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이 자리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나는 창힐 편에 서야할지 제곡 편에 서야할지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간에 대립하는 두 축이 있으면 한쪽 편에 붙는게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였고 운 나쁘면 지금 당장 제압당해서 마치 물건처럼 다뤄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영이 택하기에 앞서서 먼저 주도권과 자립권부터 얻어야한다는 걸 알아챘다.

'으...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해.'

막막하다. 저 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무슨 주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히 뭐라 해야한다는 말인가? 나는 너무 정보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 전 신경쓰지 말고 얘기 계속 하시지요..."

[......]

[......]

양쪽 진영 모두가 조금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나를 보고 있다.

아, 역시 이건 좀 바보같은 소리였나.

화악

그 순간 팔부신중 천인이 확 손을 펼쳐서 내게 그물같은 거대한 기운을 뿌렸다. 나는 진소청이 예전에 당했던 경험으로 전승했으므로 이것 또한 무공으로는 피하거나 막는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소청처럼 의념을 이용해서 중화시키는 본능적인 기술은 나로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날 먼저 잡으려는구나!'

화룡신검을 꺼내서 대비하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한 수 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나도 당황해서 그 정도 대비를 하지 못했다.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투웅!

[어디서 감히 본좌 앞에서 손을 쓰는가?]

순간 제곡의 중후한 기운이 퍼져나오며 천인의 술수를 무효화시키고 도리어 천인을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크핫. 아직 난...]

천인 삼장법사의 신형이 피화살을 뿜으며 뒤로 쓰러지자 그가 본체를 드러내려는 듯 더 큰 기운을 끌어냈으나, 그는 인간형에서 본체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쿠구구구

그건 마중마(魔中魔)가 천마(千魔)를 앙복시키는 광경이었다.

제곡에게서 뿜어져나온 미증유의 마력이 한꺼번에 팔부신중을 압박하고 있었다.

제곡의 한쪽 팔이 앞으로 향해져 있었고 그의 장심에는 시뻘건 눈이 새하얀 눈동자를 번쩍 뜨고 있었다. 그 시선은 천인을 향하고 있었고, 천인은 변신하다말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몸을 부들거리며 벌레처럼 뒤틀었다. 그는 술법을 써서 대항하기는 커녕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제곡은 오만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보는'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벌레놈들아.]

퍼벅!

[으어억.]

삼장법사의 팔 한쪽과 다리 한 쪽이 난데없이 뜯겨서 날아갔다. 잔인한 장면이었지만 다음 순간 용상 위에 있던 창힐이 손을 한 번 내저었고 삼장법사는 금세 원래 상태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창힐이 자신의 힘으로 팔부신중을 회복시켜준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창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제곡이 자신의 팔을 거두며 창힐에게 말을 걸었다.

[창힐. 저 놈은 네가 불러왔느냐?]

제곡이 직접 말을 걸자 그제서야 창힐이 대답했다.

[아니다. 또 다른 상위존재가 개입했다.]

[그래 보이는군. 내게 주는 선물인가?]

[그건 모른다.]

뜻밖에 제곡은 창힐의 말을 순순히 긍정하는 듯 했다. 대신격이라서 인간을 초월하는 지각을 이용해서 인과율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창힐에게 다시금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너는 우리 계획에 순순히 따르겠느냐 아니면 끝까지 맞서겠느냐?]

우리 계획?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삼황오제들은 금성의 고대신마들을 강림시켜서 지상을 쓸어버리고 가면을 벗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

그리고 금성의 괴물들이 지상에 귀환하는 걸 창힐이 막자 제곡이 삼황오제의 대표로 창힐과 교섭하러 온 게 분명하다. 사실 이건 우리 계획의 일부였으므로 내가 모를 수는 없었다. 달과 반왕전에 직접 잠입한 천우진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정보를 얻어낼수는 없었으리라.

그러자 창힐이 제곡의 말에 대답했다.

[너무 어설플 계획이지 않은가? 확실히 얘기하자면 당신들이 그들을 불러 지상을 청소하여 인과율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한들 만신전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고대처럼 [옛 지배자]와 다시 겨루며 힘낭비나 하는 나날이 다시 찾아올 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제곡은 음울하면서도 가학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삼황은 몰라도 우리 오제(五帝)가 힘을 합쳐도 당해낼 수 없는 단일존재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우주의 그 어떤 위대한 존재도 우리보다 뛰어난 결속력은 가지고있지 않지. 저 천상의 존재가 아닌 이상은 그 누구도 우릴 막을 수 없다.]

[......]

[칠요도 금방 다시 모이겠지.]

제곡이 힐끔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소름끼쳤다.

[네놈은 우리의 눈엣가시지만 이번 한번만은 봐주겠다고 말하는거다, 창힐. 낙양의 보호를 거두고 다시 외차원의 어둠속으로 되돌아가라.]

[거절하겠다.]

꿈틀

창힐이 단오하게 거절해버리자 제곡의 양쪽 팔에 맺혀있던 피빛 안광이 더욱 시뻘겋게 변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나타내듯 실핏줄이 불거지면서 다시 마력을 뿜어내었고 장내는 더욱 강한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창힐... 네놈의 같잖은 팔부신중을 믿는 건 아닐테지. 네놈이 외신(外神)의 보호를 받고 있을때라면 몰라도 지상에 직접 나와서 그 가호가 약해진 지금, 언제든 우리는 널 쳐죽일 수 있다.]

제곡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협박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닌지 창힐의 앞을 막고 있던 팔부신중들도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곳에서 삼황오제 본체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팔부신중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그러자 용상 위에 앉은 창힐이 손깍지를 끼며 대꾸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은가? 인과율이 신경쓰여서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허세가 가관이군.]

[네놈... 정말 죽고싶나?]

[나야말로 말해두지. 날 죽이면 '그 분'께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다.]

[......]

[달에 있을 때보다 가호가 약해진건 사실이고 그 분께서는 직접 힘을 쓰는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그 분의 수호 아래 있는 한, 당신들은 날 못 건드린다. 그 분이 직접 움직이는 순간 우주의 악몽이 덮쳐오리라.]

[어차피 봉인된 존재이거늘.]

쿠르르르...

파앙!

제곡의 날개가 크게 펼쳐지더니 더욱 강력한 마력을 떨쳐냈다. 장내에 소용돌이가 일으나는 듯 했고 그 농밀한 힘의 밀도는 평상시보다 수천배 이상 강렬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긴나라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주군!! 안 됩니다! 제곡이 본체를 현신하려 합니다. 그럼 모두 죽습니다."

[진정하라. 저 놈은 그렇게 못 할 것이다.]

창힐은 긴나라의 참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용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대로 제곡이 본체를 드러내면 꼼짝없이 치명상을 입을 위기일텐데도 자신의 판단을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쿠구구

잠시동안 흰 번개가 소나기처럼 지나가며 제곡의 거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형상이 흑백으로 비춰보인 건 착각기었을까? 하지만 창힐의 말대로 제곡은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려다 말고 멈춘 듯 했다.

제곡은 다시 화신으로 되돌아오며 말했다.

[... 인정하지. 네 놈은 예전과 다름없이 교활하고 영민하다는 사실을.]

[삼황오제의 찬사에 몸둘바를 모르겠네. 그리고 내 대답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주시길.]

창힐이 조롱하듯 대답하자 제곡이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까불어댈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그리고 저 놈은 내가 가져가지.]

저 놈?

나는 그게 바로 나를 가리킨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를 즉시 제압하고 칠요를 뺏아가려는 게 분명했다.

스스스

제곡이 천천히 내 쪽으로 손을 뻗자 아까처럼 혈광을 뿜어내는 날개달린 팔이 보였다. 저 장심에 달려있는 눈이 피빛을 내뿜으면 팔부신중조차 순식간에 미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으아아악...!!'

나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이제야 역대 최강급의 동료들을 다 모았다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개판이란 말인가?! 그 망할 고양이가 나를 이런데서 개죽음시키려고 보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데서 죽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화룡신검과 화요를 동시에 꺼내서 들었다.

검강(劍罡)!

화요의 힘과 화룡신검의 힘이 쌍염(雙炎)으로 변해 검극에 맺힌 후 선연한 강기로 내려앉았다.

콰칭

검강은 가장 단순한 의념절기에 속했으나 그럼만큼 무(武)의 이해가 높으면 높을수록 막대한 힘을 비축하는 게 가능했다. 이 상황에서 뇌신류 절기 중 어떤 걸 써도 통할 리가 만무했으니 일단 힘만이라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 에라이 제기라알!! 덤벼!"

하지만 필생의 무학을 끌어낸 상태인데도 나는 마음속이 암울함으로 젖어 있었다. 이런 걸로 삼황오제 제곡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 발악해보거라.]

제곡은 비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동시에 핏빛 눈알이 번쩍 떠지며 숨막히는 마력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그 순간 화룡진인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화룡진인,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런데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어!

내 간절함 외침이 닿인 걸까? 화룡진인의 대답이 내 마음속에 울려퍼졌다.

[방금 전, 내 본체가 힘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대는 걱정 마라.]

그 순간, 나는 화룡진인의 도움을 받아서 화요천염을 해방하면서 동시에 화룡신검에서 용형검강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무아지경에서 내가 알고 있던 무학들이 혼돈처럼 섞이는 느낌과 함께 모든 집중력이 검 끝에 맺히는 걸 느꼈다. 화룡의 머리가 용트림하며 두 개의 신기(神器)에 담긴 막강한 힘을 떨쳐내었고 내 몸에 있던 내공이 죄다 쥐어짜지는 기분이 들었다.

합체절기(合體絶技)

천도용왕파(天到龍王波)

꽈광!

화룡의 아가리가 제곡의 손아귀에서 뿜어져나온 힘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허공에서 거대한 파장이 울렸다. 그 파장은 뜬금없이 지진을 일으켰고 잠시 후 낙양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허억, 허억, 허어억."

나는 고작 일 초식의 방어에 내가 갖고있던 내공을 모조리 다 써 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까지도 대라신선의 능력을 끌어쓸 때 내공소모율이 극심하긴 했지만 이번 합체절기의 시전에는 차원을 달리하는 내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제곡이 제압하려는 한 수를 막긴 막았기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응룡의 힘?]

그러자 제곡이 놀란 듯 말했다.

[그래... 전욱이 관심있게 널 지켜본 이유가 있었군. 설마 만신전의 응룡이 직접 개입하면서까지 지켜주려는 인간이라.]

"허억, 허억!! 제, 제곡 님. 물러나 주십시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그 가면을 꼭 벗으셔야 합니까? 그대들 삼황오제에게 오백 년 정도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들이 멸하는 게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종말까지 시간을 좀 주십시오."

[......]

그 순간 장내에 표한 정적이 감돌았다. 제곡은 더욱 흥미를 느낀 듯 말했다.

[호오. 우리의 '가면'에 대해 알고 있고... 그리고 우리 목적까지 알고 있는가. 넌 정말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정해진 멸망의 시간에 망하는게 인간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이 시대만큼은... 오백 년 만큼은 평화롭게 이어갈 수 있도록 놔둬 주시옵소서."

[... 건방지군.]

"네?"

제곡은 오만하게 대꾸했다.

[너희는 받아들이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다. 너희는 우리의 피조물이며 창조된 하급 존재들. 그것도 혼돈도 거의 갖지 못한 약해빠진 놈들... 우리의 행사에 감히 의견이라도 올릴 자격이 된다 생각하느냐?]

"......"

[그리고 너는 인류라 하는 군체(群體)의 일부에 불과하지. 네가 이 땅에 살고있는 모든 인류의 의지를 대표할 자격이 있느냐? 한낱 벌레에게 우리 삼황오제가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가치가 없다.]

"그건..."

[응룡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자격이라면 인정해주지. 넌 응룡에게 인정받았으니.]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나는 제곡의 말이 전욱보다 더욱 심한 어조라는 걸 알았으나, 실상은 어투의 차이일 뿐 사상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걸 알 있었다. 전욱도

'자격...'

제곡은 자격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생트집이겠지만, 신왕(神王)이자 우주의 [옛 지배자]와 맞먹는 자신들과 대화하려면 그정도의 격(格)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삼황오제와 여러번 대면해 왔기에 제곡의 말뜻이 뭔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

"그럼 어떤 자격이 필요합니까?"

[왕(王).]

제곡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왕과 대등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같은 제왕 뿐. 인간같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네가 왕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네 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

[네게 호감이 가긴 하지만 애완동물 이상의 느낌은 들지 않는구나.]

그 때였다.

옆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창힐이 말했다.

[제곡.]

창힐이 서서히 용상에서 일어섰다. 그가 제대로 움직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제곡의 시선이 창힐에게 향하자, 창힐은 혼돈으로 물든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슬리게 하는군...]

[큭, 네놈 설마.]

제곡은 뭔가 알아챈 듯 낭패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사라져라.]

번쩍!

갑자기 창힐의 말과 함께 번개가 내려치더니 제곡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틀림없이 창힐의 술수였기에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술수 한 번으로 제곡의 화신을 지워버렸다고?'

방금 전까지 약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는데 저 정도의 힘이면 삼황오제와 동격인 게 아닌가? 나는 창힐이 끝까지 정보를 얻으려고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제서야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저 놈이 [옛 지배자]의 경지에 올랐다는 걸 확실하게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백웅이여.]

창힐이 말했다.

[이야기를 하지. 네게 제안하고싶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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