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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망량선사의 마을에 도착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 내가 먼저 스승님의 의사를 묻겠다."
그렇게 말한 천우진은 먼저 마을에 들어갔는데, 이상하게도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았다. 단지 의사만을 묻는다면 이렇게나 오래 걸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뭔가 수상쩍음을 느낄 때쯤이었다.
화아앗
갑자기 마을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안개가 번져나오는 듯 했다. 그리고 피할 틈도 없이 나는 그 안개에 닿였고 급속히 잠이 드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멸혼보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느새 안개는 내가 피한 곳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 윽..."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동료들은 이미 오리무중이나 다름없는 안개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의 수마를 버티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
나는 익숙한 오솔길 풍경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몇 번을 왔을까, 익숙해질 때도 됐을텐데도 늘 여기에 왔을 때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 망량선사!!"
그 대답은 곧 들려왔다.
[ 암천향에서 살아돌아왔군.]
검은 고양이가 입에 생선을 문 채 나타나 있었다. 망량선사는 앞발으로 생선의 비늘을 가르며 헤집는 듯 하다가 문득 내게 생선을 앞발로 밀었다.
[ 씻어서 구워라.]
" ......"
내가 왜?!
하지만 예전에 간식을 줬을 때의 경험에 미뤄보면 이 행위 자체가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생선을 가져가서 강물에 먼저 씻고, 그 다음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운 후 가재도구를 이용해서 굽기 시작했다. 생선의 비린내가 조금 가시며 노릇노릇하게 익기 시작하자 망량선사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 익숙해 보이는군.]
" 그야 뭐..."
표사일을 할 때 제대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면 표사들은 대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해야할 때가 많았다. 특히 표사행은 단체행만 있는 게 아니었기에 생존을 위해서 야생동물 사냥이나 조리법 정도는 필히 익혀둬야 하는 것이다. 덤으로 표행에서 낙오될 경우가 있기에 최소한의 추적술 정도는 교육받았다.
잠시 후 고기가 다 익자 나는 뼈를 발라내서 망량선사에게 건네주었다.
촵촵하면서 망량선사가 먹는 소리가 들렸다. 망량선사는 말없이 물고기를 먹어치우다가 다 먹자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다.
[ 지난번에 널 만나지 않은 이유는 인위적인 인과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흠칫!
나는 깜짝 놀라서 망량선사를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아주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계획되어 짜여진 흐름... 한낱 작은 굴레에서는 쉽게 짤 수 없는 직조(織造)였지.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너를 만나다가 나조차 인과의 흐름에 말려들거라 생각했었다.]
" ......?"
이게 뭔 소리야?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 이젠 해결되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았지.]
" 누군데?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 ......]
망량선사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 넌 만일에 인류를 구할 수 있지만 세계가 멸망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어... 그게 무슨 상황이야."
[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현재 가장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 네 선택을 듣고 싶다.]
" 만일에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 역(易)이 일어나지. 인류는 멸망하지만 세계는 구원받는다.]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 어? 뭔 소리야? 인류가 망하는데 어떻게 세계가..."
[ 네 대답을 원한다.]
" 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왜 망량선사가 난데없이 이런 낮도깨비같은 질문을 하는거지?
하긴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게 한두번이 아니라서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질문은 왠지 중대한 선택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망할 고양이 하면서 버럭거릴수가 없어서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는 구하지만 세계가 멸망한다.
인류가 멸망하지만 세계가 구원된다.
... 모르겠어.
이게 무슨 차이가 있지?
그것보다 후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싸그리 죽어서 절망의 바닥에 내팽개쳐지면 나머지 세계가 구원받아도 의미가 없다. 어쨌든 지금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겠지만 마음에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말 속에 함정이 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망량선사에게 말했다.
" 그럼 다 망해야지."
[ ......]
망량선사는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묘안(妙眼)이 저렇게 떠 지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놈의 본질을 생각하면 내가 미친놈일지도 모른다. 망량선사가 귀를 쫑긋하는 반응을 보였다.
[ 설마 둘 다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 대충 찍어본 건가?]
윽.
나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말을 갖다붙여보기로 했다.
" 아니 뭐... 가능하면 다 구하고 싶어. 그건 안되냐?"
[ 안 된다면?]
" 다 구원할 수 없다고... 음... 그럼 전자든 후자든 어차피 망할 것 같은데, 그러면 확실하게 다 멸망해버리는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 인류가 망해도?]
" 후자의 경우에도 인류가 딱히 행복하게 존속할 거 같진 않다고. 어설프게 고통받으며 살아가느니 그냥 깔끔하게 죽는게 나은 경우가 많잖아. 어차피 그 결정은 내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야."
[ 정상인의 발상은 아니군.]
" 쳇... 정상인이 아니라서 미안하군."
나는 투덜거렸지만 말하고 보니 왠지 이게 정답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까지 희망이 없어진다면 차라리 생지옥을 겪지 않게 다같이 소멸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죽느니만 못한 꼴을 자주 보아온 터라 이게 되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망량선사가 말했다.
[ 허나 고통은 감정의 일부이며 생체신호의 하나에 불과하지. 정신적 고통이란 것도 차원을 넘어선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정신에 작용하는 유희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너희의 감정이나 이성은 그저 오락거리에 불과해. 고통의 유무만으로 세계의 존속을 정할 수 있을까?]
" 그게 초월자들의 관점이냐?"
[ 그럴지도.]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모든 게 언젠가는 망하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 더욱 중요한 건 쎈놈이 약한놈을 괴롭히느냐 아니냐 아닐까? 나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평등하게 모두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억울하진 않겠지."
[ 억울하다라... 그럼 너도 인간을 구하려 모험하지 않고 그냥 신이 되면 되지 않은가? 신이 되면 그들과 같은 도락을 우주가 끝날 때까지 누릴 수 있다. 인간일 때는 상상치 못했던 차원의 유희를 즐길 수 있지.]
" 그 신이라는 놈들도 지금 종말과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며? 그 놈들도 결국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무의미해."
나는 순간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 ... 그리고, 난 놈들과 같아지기 싫어."
그건 19번째 삶이 종말을 맞이할 때 느꼈던, 내 생에 가장 강렬한 감정이었다. 그 때 나는 인간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낌과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가 아직까지도 내 몸을 태우면서 끊임없이 일으켜세우고 있다. 신들의 종말을 기필코 지켜보고 말겠다는 의지가 내가 겪는 모든 사망의 고통과 고난을 태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걸 결코 용납할 수 없다.
" 우주가 망하더라도, 자칭 신이라는 놈들만큼은 다 죽여버리고 말테다. 다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게 나아!"
나는 분노를 담아서 외쳤다.
그러자 망량선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을 선택하겠다는 말인가. 재미있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망량선사가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그렇다기보다는 놈 답지않게 뭔가 들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 어, 근데 그 직조된 인과의 흐름이란게 대체 뭔데?"
[ 말해줄 수 없다. 넌 아직 그 흐름 속에 있으니까.]
" 뭐라고! 내가 함정에 걸려든 거냐!"
[ 함정일까...? 되려 네 동료들은 좋아할지도 모르지.]
" ......?"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망량선사가 말했다.
[ 그 흐름은 네게 직접적인 파멸이나 흉행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흐름이 궁극적으로 이득을 주는 건 네가 아니라 다른 놈이다. 물론 인과율 때문에 그 놈이 누군지는 말해줄 수가 없다.]
" 제길! 제물을 공양하면 알려줄 수 있냐? 아니 흐름을 풀어 줘!"
[ 안 된다.]
" 왜?"
[ 나도 이 흐름의 끝에서 네 선택을 보고싶기 때문이지...]
" ......"
즉 망량선사 놈은 내게 이상한 인과율을 부여한 놈이 누군지 알고 있고 풀 수 있는데도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놔두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 이 망할 고양이 놈! 그럴거면 나한테 왜 생선을 굽게 시킨거냐!"
[ 고양이가 어떻게 생선을 굽느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 이, 이건 네 꿈이잖아. 네가 창조주니까 네 맘대로 하라고."
[ 꼭 그렇지도 않지. 그 생선은 특별한 거였다.]
" 누가 준 건데?"
[ 비밀이다.]
알쏭달쏭한 얘기를 한 망량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 흘러가 보아라. 생선을 구워준 댓가로, 이 삶에서 네게 선택할 기회를 줄 터이니.]
파앗!
나는 잠시 후 머리가 아픈걸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 큭, 망할 고양이... 다들 무사해?"
정적.
" 어."
나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당연히 망량선사의 안개가 걷히고 나면 동료들이 주변에서 수면에서 하나둘씩 깨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동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것도 아까 망량선사의 마을 근처가 아니었다. 준봉고령이 근처에 보이고 밭뙈기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풍경 대신에 차가운 돌으로 만들어진 기둥과 바닥이 보였다. 이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황궁!'
착각할 수가 없다. 나는 수십번의 전생을 하면서 황궁에도 무수히 드나들었기 때문에 건축양식이나 내부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수 년간 황궁내에서 일하고 있는 문관보다 훨씬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은 정적에 휩싸인 채 주변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구천현녀!"
나는 급히 구천현녀를 불렀다. 하지만 구천현녀는 내게 소환되지 않았고 그저 공허한 외침만 울릴 뿐이었다.
' 왜 안 돼?'
나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나는 황궁 내부에 있고 구천현녀가 소환되지도 않는 것인가? 너무 막막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축지법을 써서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려고 생각했다.
타다닷
나는 바로 문 밖으로 나가서 축지법과 멸혼보를 병행하며 달아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 밖에는 또 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도 열어도 계속 방이 보였다. 나는 이게 술수로 만들어진 진법이며 무한회귀형식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제길. 이건 또 누가 만든 진법이야.'
이런 진법을 깨려면 힘으로 박살내거나 정해진 파해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힘으로 깼다가는 내가 여깄는걸 누군가에게 바로 들킬 것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재빨리 제갈부를 목갑에서 꺼냈다. 그리고 제갈부에게 명령했다.
" 제갈부! 이 진법을 파해해라."
제갈부는 망설임없이 동서남북의 방향 중 하나를 정해서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파해법대로 움직이더니 이윽고 사방의 진법이 풀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르륵
나는 제갈부를 다시 목갑에 집어넣고 문을 열었다. 내가 있었던 방은 사실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고 문 밖으로 나오자 누군가가 있었다.
여기는 어전(御殿)이다.
장내에는 총 8인의 신형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진형은 명백히 갈려있었고 1대 7의 형상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7명이 몰려있는 쪽에는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용상이 있었고 용상에 앉은 자가 맞은편에 있는 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황제?'
황제가 아닌 것 같다. 황제는 저런 얼굴이 아니다.
그렇기는 커녕 - 저게 인간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인간의 외관이 존재하고 있지만 저 얼굴을 보는 순간 기억이 없어져버린다. 저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혼돈이 뭉친 듯한 형상이 얼굴을 이루고 있었기에 위화감이 굉장했다.
쿠오오오
그와 마주보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제왕의 용포를 입은 채 푸른빛 날개를 크게 뻗치고 있는 어둠의 존재였는데 흉악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력한지 나머지 7명이 도리어 눌리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진법을 깨고 나오자마자 그들 8인의 이목이 모조리 내게로 쏠렸다. 나는 움찔하며 약간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 주인이시여, 저 자는 백웅. 어찌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야차다.
[ ......]
주인이라고 불린 용상 위의 존재는 그저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맺힌 혼돈은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스으으
동시에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해보이는 두 존재의 이목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는 순간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마력이 내 심장을 헤집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많은 이족을 만나보았지만 이런건 마왕급 존재한테서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마력은 사실 느껴본 적이 있다.
전생하면서 자주 느낀 건 아니지만 - 어떤 존재가 이렇게 강력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
순식간에 지옥으로 불려나온 셈이기 때문이다.
' 설마...'
내게 시선을 향하고 있던 고대제왕이 순간 웃는 것처럼 보였다.
[ 칠요를 가지고 있군, 필멸자여.]
" ......"
[ 본좌에게 바친다면 나, 제곡의 사도로 삼아주겠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떤 자리로 순간이동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 빌어먹을...!!'
창힐과 제곡의 회담자리!
창힐이 팔부신중을 모조리 끌고나와서 삼황오제 제곡과 담판을 짓는 자리에 끌려나온 것이다. 내가 소환된 곳은 어전 근처에 제갈유룡이 평소에 방어결계를 쳐둔 곳이었고, 이 일대에는 신들이 직접 결계를 치고 있으니 이 자리에 구천현녀를 소환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