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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우리는 금요를 얻은 후 정면으로 나가서 대영제국 총독부에 도착했다. 총독부는 파우스트 박사와 변신으로 갈가리 찢겨서 폐허가 되어 있었고 그는 변신을 푼 상태로 흑사병 가면을 쓰고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파우스트 박사가 달을 등진 채 말했다.
"동방의 영웅이여, 수호자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하오."
"별 말씀을...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는데 추가병력은 오지 않소?"
"오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대꾸한 파우스트가 시뻘건 고깃덩어리같은 걸 손바닥 위에 올려서 보여주었다. 그 고깃덩어리는 시뻘건 핏줄과 힘줄이 울긋불긋 돋아난 채 활발하게 꿈들대고 있었다.
"이 근처의 병사들은 모두 뇌에 이 종양을 이식받아서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움직이고 있었소. 이 종양을 통솔하던 대마도사를 그대들이 쓰러뜨렸기에 그들은 일제히 사망했고, 외부로 상황이 번지지 않았소."
"... 끔찍하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갈사에게서 마도를 공부했기에 대영제국 총독부가 병사들에게 어떤 짓을 저지른지 알아챈 것이다.
통합체!
마도에서 자주 쓰이는 수법으로 벌레나 촉수를 내면에 기생시켜서 아예 이족으로 타락시키거나, 그게 아니라도 정신을 하나의 통제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통합체 마법을 당한 순간 인격은 말소당하며 삶과 죽음을 조종당했기에 아주 질이 나빴다.
베루스는 파우스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지금은 마도사들의 세력을 몰아내야 해서 바쁠 듯 하오. 만일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나중에 부르시오. 마테오 리치를 통해 연락을 받겠소."
"그러시오."
이대로 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되겠지만 사실 그건 내 입장에서 꺼려지는 일이다. 지금부터 할 일은 중대한 비밀도 품고 있을텐데 아무리 우호적이라고 해도 타 세력의 간부에게 보여주기엔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베루스의 제안은 되려 내 쪽에서 고마웠다.
파앗
우리는 서방에서 되돌아와서 당산이 있던 사천당문의 건물로 왔다. 당산은 이제야 최면의 여파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하군. 배신한건 아니었어."
"흠... 이 보패의 정신공격이 그렇게 강한 건가?"
나는 팽조에게서 얻은 전리품 중 하나인 마가사장의 보패, 흑비파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당산이 말했다.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비파의 음을 듣는 순간 내 오감과 신경이 모조리 마비되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강호에서 사용하는 음공(音功)과는 차원이 달랐어. 내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했지만 통하지 않았어."
"어디."
디리링
나는 흑비파의 현을 뜯어보았다. 하지만 딱히 아무도 최면이나 세뇌에 걸리는 기색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천우진이 말했다.
"보패라는 건 쉽게 발동할 수 있는 게 있는 반면 사용법이 까다로운 것도 있지. 그 흑비파는 오랜 기간 수련을 거쳐서 정확한 수법으로 발동하지 않으면 써먹을 수 없는 종류다. 제약이 있는 대신 위력이 더 강해진다는 특징이 있지만."
"윽. 설마 다른 보패도?"
"다 꺼내 봐."
천우진은 내가 목갑에서 꺼낸 목갑들을 모두 차례대로 살펴보더니 말했다.
"청운검, 팔괘자수선의, 화호초, 혼원산, 장홍색 등등 팽조가 갖고 있는 건 대부분 그런 종류군. 아마 고대의 보패이기 때문에 더 까다로운 점도 있을 거다. 후세에 만들어진 보패일수록. 사용법이 간편하게 마련이라서."
"흐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보패들을 얻더라도 바로 동료들에게 장비시킬 수는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개 중 팔괘자수선의를 꺼내들어서 말했다.
"이건 천계 최고의 수호법의라던데 따로 입는 법이 있는거냐?"
"당연히 있겠지. 그건 날개옷이라서 그냥은 못 입어. 정해진 주문을 외우면 시전자에게 저절로 착용되어서 입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다만 주문은 잘 모르겠군."
"알 방법이 없을까?"
"무의미한 질문이군. 네게 강림한게 누구인지 잊어버린 거냐? 다른 선인도 아니고 그녀가 강림했는데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있을까?"
"아!"
나는 옆에 소환되어 있던 구천현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천우진의 말대로 여기있는 모든 보패들의 작동방법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오오!"
그랬다 구천현녀는 천계 최고의 술법대가! 게다가 보패를 보관하는 비고동의 존재도 잘 알고 있었으며 전신으로 전쟁에서 싸우기도 했으므로 보패의 발동법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 망량에서 풍화비파라는 보패를 내려준 적도 있었으니 웬만한 보패는 잘 다루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구천현녀가 말했다.
[작동법을 알려드리겠지만 미숙한 자가 보패를 섣불리 쓰면 스스로 해하게 될 터이니 명심해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구천현녀에게 작동법을 들은 후 팔괘자수선의를 시험삼아서 착용해보려 했다.
하지만 주문을 외우다 말고 뭔가 힘이 부족해서 헉헉대자 천우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듯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미숙한 자는 안된다고 했지. 그 팔괘자수선의는 최상급 보패지만 그런 만큼 높은 술력이 요구하기 때문에 착용하기 힘들거다."
"헉... 그럼 못 입는 거냐?"
"음신지력을 술력대신 쓰면 안될것도 없겠지만 지금도 힘에 부친데 억지로 입어봐야..."
"크흠."
천우진의 말이 옳았다. 나는 별 수 없이 팔괘자수선의를 입으려던 걸 멈추었다.
'술법의 이해력과 술법력 자체가 높아져야겠군'
보패라는 건 장비한 후에도 장비한 자의 힘을 빨아먹는 성질이 있었기에 어거지로 착용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내가 입맛을 다시자 서문혜가 말했다.
"백웅 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야 물론 망량의 계책대로 할 것이오."
나는 서문혜의 말에 대답하며 천우진을 돌아보았다.
"계획에는 네 역할이 중요해. 괜찮겠지?"
"문제 없다. 지금까지는."
"......? 뭐야?"
천우진은 이상한 어투로 대꾸한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부턴 생길 것 같단 말이다."
쿠웅!!!
갑자기 우리가 앉아 있던 건물 전체가 크게 요동치며 천지가 통째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의자가 뒤엎어질 정도의 진동이었기에 다들 깜짝 놀라서 반응했다. 구천현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들켰군요.]
"구천현녀! 무슨 일입니까?"
[천우진이 말했듯, 제 힘은 인과율로 제약받는 영역에 있습니다. 또한 수요를 공양받은 순간부터 저는 제 힘의 기척을 서왕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팽조를 쓰러뜨릴 때는 그 마무리를 쉽게 할 수 없었군요.]
"헉! 설마 서왕모가?"
나는 경악했다.
이 자리에 서왕모가 직접 찾아왔다면 우리 모두 끝장이다!
아직까지는 전생하면서 그 어떤 꼼수를 쓰더라도 서왕모와 그 진짜 본체를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천우진이 옆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구천현녀께서 그 정도로 허술하진 않아. 그럴 바에야 그냥 팽조를 억지라도 우리끼리만 쓰러뜨리게 했겠지. 서왕모나 천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힘의 파장을 숨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절반은 실패했다는 뜻이다."
"절반의 실패? 무슨 소리야."
"지금 나와 구천현녀가 쳐 둔 결계가 크게 뒤흔들렸지. 그 결계는 어지간히 강력한 보패가 아니면 미동도 하지 않아. 그러나 일격에 반파되어버렸고 좀 있으면 결계가 뚫릴텐데, 이 정도로 강력한 놈이 그리 많던가?"
"......"
"천계의 보통 대라신선은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구천현녀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의 움직임에 신경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와 강한 인연을 맺은 백웅, 당신이 현계에 돌아오는 걸 예의주시하고 있었을지도요... 그가 그렇게나 예민해진다면 아무리 저라도 끝까지 정체를 감출 순 없습니다.]
"제길... 설마... 그 놈인가...!!"
나는 그제서야 뜬금없는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쿠콰쾅!!
다시 한 번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그 진동은 땅을 찌르르르 울리다가 한참 후에 멈추는 듯 했다.
"......"
나는 그 섬뜩한 침묵의 정체를 알아챘기에 침을 꿀꺽 삼켯다.
결계가 깨진 것이다.
단 두 방만에 최고위 존재들이 펼친 결계를 박살낼 수 있는 존재가 지근거리까지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소청은 그 순간 내 곁으로 오더니 창을 들고 최대 수준의 경계태세를 취했다. 진소청 또한 어떤 존재가 나타났는지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진소청이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
"만일의 경우에라도, 백웅 당신이 도망칠 틈만큼은 벌겠소."
"... 너무 단정짓지 마시오.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 거요."
나는 불안해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진소청이 말한 대로 최악의 상황이 곧이어 찾아올지도 몰랐다. 나는 아까 전부터 우리 주변을 주시하고 있던 신공표의 은밀한 기척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달으며 이를 으득 깨물었다.
'제길, 싸우기 싫단 거냐...'
이래서는 신공표의 조력도 받기 힘들다.
저벅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앞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백웅 소형제 아니야?"
나는 나를 아는체하는 그 목소리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동료들과 함께 그를 주시하고 있자, 그는 자신의 귀밑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럼 안 되지.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중원에 되돌아왔으면 나한테 다시 인사라도 하러 왔어야 되는거 아니냐?"
"......"
"거 참. 꿀먹은 벙어리군. 내가 너한테 뭐 섭섭하게 한 거 있었나? 하긴 이렇게 숨어서 뭘 꾸미고 있었던 일이 뭔지 궁금하긴 하네."
그가 내게 아쉽다는 듯 말하기를 부추겼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상대방이 짐짓 쾌활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말투 저변에 은근한 분노와 의심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상대의 감정이 격하게 될 우려가 있었고 괜히 트집잡힐 수도 있었다.
내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자 그가 내 옆에 있던 구천현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구천현녀. 당신도 당신이군. 안 본 사이에 칠요 하나를 냉큼 먹어놓고 무슨 계약을 꾸미고 있었던 거지? 그래도 당신은 삼황오제에 굴하지 않는 마지막 양심일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좀 실망할 기분이야."
[... 다른 신선들과 함께 찾아왔나요?]
"그래, 뭐, 비번인데도 부득불 나를 따라오겠다는 성실한 녀석 한 놈하고 같이 오긴했어. 소개시켜줄까?"
스윽
그가 손을 옆으로 벌리자 어둠 속에서 슬며시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동료를 소개했다.
"이 쪽은 천계 투선중에서도 비교적 신입인 장삼봉(張三?)이야. 인간들한테는 꽤 유명할텐데 다들 알고 있을 것 같고."
"......"
모를 리가 있겠는가.
무당파의 초대종사이자, 철대절학의 창안자이며 원말명초에 무림의 최강고수로써 천하를 아울렀던 절대고수를!
장삼봉은 소개를 받자 구천현녀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구천현녀시여. 장삼봉이 귀인을 다시 뵙니다.]
[그대는 이 곳에 어찌 오게 되었습니까?]
[얼마전 천지의 생사길흉을 점쳤는데 곧 천지가 역전할 대흉의 운을 마주친다는 점괘를 얻었습니다. 그 흉을 해결할 방도가 곧 생긴다고 하여 우연히 대성(大聖)을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들이 대화하는 도중에 '그'가 다시 끼어들었다.
"자자. 회포는 나중에 풀고... 일단 구천현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게 있어."
[무엇입니까?]
"구천현녀."
쉬익!
제천대성(齊天大聖)이자 투전승불(?戰勝佛)이라고도 불리는 천계 최강의 투선.
미후왕(美?王)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며 씨익 웃었다.
"수요 내놔. 안 그러면 패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