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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우리는 전이술을 써서 대영제국 총독부 인근의 언덕으로 이동했다. 밑에는 총독부의 거대한 부지와 건물이 보였고, 상공에는 비행선이 떠다니고 있었으며, 병졸들이 최신예 총기를 들고 경비를 서는 게 보였다. 물론 총기를 든 병졸 따위가 우리를 막을 수는 없겠으나 알 수 없는 흉흉한 기운 때문에 우리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네게 향해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하오. 어차피 여기 쳐진 결계를 안 걸리고 돌파할 순 없소."
"백웅이여, 그 역할을 내가 하겠소. 시끄러워지면 들어가시오."
중절모와 흑사병 의사의 가면을 쓰고 있던 파우스트 박사가 미끼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가방을 딸깍 하고 열었는데, 다음 순간 그의 몸 전체는 시꺼먼 혼돈의 덩어리로 변한 것 같았고 옆에 시꺼먼 맹수가 소환되어 있었다.
[크아아아.]
마치 악마처럼 변한 파우스트 박사는 천지를 울리는 괴성을 지르더니 총독부의 전면으로 돌진했다.
쿠콰콰콰
그가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째로 찢어지며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건물까지 같이 박살이 나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절대지경 고수의 신체능력을 상회한다...!!'
어떻게 저런 변신술을 쓸 수 있지? 일반적인 주술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다! 뿐만아니라 저 변신술에서는 마력(魔力)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는 마법도 아닌 듯 했다.
나는 신기해서 말했다.
"저 능력은 뭐지?"
베루스는 뭔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독일 최고의 학자이자 공생자(共生者)이며 이율배반자(antinomie). 인류가 지배자와 싸우기 위해서 만들어낸 기술을 연구하다가 그 자신이 모순을 품게 되었소. 그가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 어서 들어가야하오."
"알았소."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듯 했지만 지금은 파우스트 박사에게 신경쓸 때가 아니다. 저 정도의 능력이면 충분히 시선을 끌고 몸을 뺄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은 이 혼란을 틈타서 내부로 진입하는게 중요했다.
파앗!
구천현녀의 전이술을 다같이 이동하자 총독부 내부건물의 넓은 회랑에 들어와 있었다. 역시나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고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흑백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앞에는 고귀한 복장을 입은 금발 벽안의 백인 사내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놓쳤던 동방의 쥐새끼가 돌아왔군... 오늘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구천현녀의 시해지술 덕분에 놈의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반문했다.
"넌 누구냐?"
"나는 풀카넬리. '그 분'을 모시는 연금술사다..."
촤르르륵
풀카넬리의 몸뚱이가 갑자기 모래처럼 변해서 사라졌다. 동시에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더니 뒤죽박죽으로 변했고 사방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무수한 흉기가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우진이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급급여율령!!"
퍼엉!
"크아아아아악."
풀카넬리는 폭음과 함께 튕겨져 나가며 전신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공간을 조종해서 공격해 왔지만 천우진의 진언 한 방에 생사가 위중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술법경지가 높지 않는 내가 봐도 그의 마력이 와해되어서 회생불늘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풀카넬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마, 말도 안돼! 현자의 돌의 조각으로 공간마법을 썻는데... 여기에는 마도결계도 펼쳐쳐 있는데 어떻게 주문 한번으로..."
"급급여율령!"
퍼벅
천우진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진언을 읊었고, 풀카넬리는 완전히 육편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천우진에게 있어서 마도사라는 건 절대 봐줄 수 없는 극악한 무리였기에 살상도 서슴지 않는 듯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베루스가 놀란 듯 말했다.
"풀카넬리 저 자는 서방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 연금술사이며 마도사인데... 그의 마법을 너무도 쉽게 깨는군."
"저런 잔챙이와 놀고있을 시간 없소."
싸늘하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를 뿐이니!"
콰과광
다음 순간, 총독부 내부의 풍경이 완전히 와해되었고 눈에 보이던 것들이 마치 유리처럼 산산히 깨어져 나갔다.
"크아악!"
그리고 부숴지는 공간 여기저기에서 잔해와 함께 마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고 우리가 발을 디딘 곳 외에는 마치 만장단애가 가득한 험난한 지형처럼 변해 있었다.
'이 총독부 전체가 결계이며 현실조작이었던가?'
천우진이 자신의 술법으로 수십 명의 마도사들이 만들어낸 결계를 한방에 부숴버린 모양이었다. 천우진의 경지도 경지지만 나는 이 곳의 엄중한 방어체계에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나 혼자 잠임했으면 공간술법에 걸려서 잡혔겠군...'
그냥 총독부에 뛰어드는 것은 팔진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거나 다름없다. 공공이나 천우진처럼 답도적인 힘으로 먼저 결계부터 깨버리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장소였던 것이다. 대마도사 풀카넬리는 이 결계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혼자 덤빈 것 같지만 천우진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알 수 없었으리라.
한번에 총독부의 결계를 부숴버린 천우진이 내게 말했다.
"구천현녀의 힘은 아껴둬라. 가급적이면 나와 다른 동료들이 싸우겠다."
"갑자기 왜?"
"그들의 힘은 막강하지만 강대한 만큼 인과율이 소모된다. 너무 이런데서 전신 구천현녀의 힘을 낭비하면 써야할 때 쓸 수 없을수도 있어."
"......!! 알았어."
나는 흠칫했다. 암천향에서는 인과율이 별 상관이 없기에 마구 싸웠지만 지상계에서는 그게 아닌 것이다. 구천현녀의 위력은 충분히 인과율의 제약을 받을 수준에 도달해있었고 어쩌면 소모성일 확률이 컸다. 내가 표정이 굳어지자 화룡진인이 내면에서 말을 걸었다.
[백웅이여, 당분간 내 힘을 써라.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빠르게 전진해서 마치 혼돈이 뒤엉킨 듯한 거대한 늪지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곳 전체가 이미 마력에 타락한 이공간이 되어 있었지만 이곳은 특히나 더 끔찍했다. 여기저기에 죽지도 살지도 않은 듯한 시체들이 참혹하게 뜯겨서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고 사악한 촉수와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늪지대 맞은편에는 음울한 인상의 늙은 마도사가 서 있었는데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너희의 주인, 수호자를 구하러 왔느냐? 그러나 이 곳에 우리의 모든 동료는 물론이고 황금여명회와 장미십자회의 모든 회원이 와 있으니,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이미 몸이 이족화 되었는지 이족 특유의 공감각을 이용한 음파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마도사 주변에 '회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력은 심상치 않았다. 베루스가 질린 듯 말했다.
"저놈들 모두가 사악한 계약을 했소. 쉽지 않을 것이오."
"......"
확실히 이 자리를 구천현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저놈들의 마법에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황천행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놈들 하나하나가 대마도사인가...'
화룡진인의 힘을 빌려서 마법에 저항하면서 베어넘겨야 겠다. 우리가 싸울 준비를 굳히고 있을 때 당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놈들 바보야?"
"뭐?"
"싸움 끝났어."
화르륵
[크아아아악...]
다음 순간, 마치 인화된 기름이 끓어오르는 듯한 녹색 불꽃이 마도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냥 불에 타는 게 아니라 마치 몸 내부에서 칠공으로 독염을 토하는 듯한 끔찍한 광경이었고, 그들은 눈 코 귀 입이 녹아내리며 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고통이었다.
당산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사천당문 십대절독 최강, 신선폐(神仙廢)! 공기에 흘려보냈는데 저 놈들은 독에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군."
"......!!"
신선폐!
그건 독으로 일가를 이룬 사천당문에서도 너무나 취급이 어렵고 희생자가 많아서 제작을 할 수 없었다는 전설의 십대절독이었다. 십대절독의 하나이긴 하지만 나머지 9개와는 달리 제작과정에서 당문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봉인된 것이다. 그러나 당산은 천재였기에 당문을 멸망시킨 후 어떻게든 신선폐를 다시 제작해서 복원한 모양이었다.
마도사들은 마치 벌레가 몸을 뒤틀듯 끝도 없이 죽어가다가 몇몇은 이족에게 몸을 바치거나 괴물로 변신해서 버텨냈다. 그러나 그 때는 적의 진형이 크게 무너졌기에 우리는 다같이 덤벼들어서 마도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퍼벅
쉬칵
나는 마도사 한 놈의 목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그 절단면에서 촉수가 마치 거품처럼 뿜어져 나오는 걸 보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룡진인의 화염이 촉수를 즉시 불태워버렸지만 쳐다보기에 더러운 장면이었다.
'제길. 이 놈들은 자기 몸을 뭐라 생각하는 거야? 이미 촉수덩어리나 다름없잖아.'
하긴 [옛 지배자]나 고위존재들에게 직접 힘을 얻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할지도 모른다. 자기자신의 몸과 피를 지배자에게 바치고 몸을 촉수로 탈바꿈시키는게 일반적인 실력향상으로 보였다. 인간의 몸을 멀쩡히 유지한채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제갈사가 특이한 경우였다.
슈슈슉
약 사십여 명의 마도사를 베었을 쯤에 여기저기에서 마도사들이 전이술을 써서 나타났다. 서방 마도사들의 본거지인 건 틀림없는 듯 끝도없이 몰려드는 것이다. 그러자 천우진이 큰 술법을 쓰려 했으나 당산이 말렸다.
"여기는 내 독에 맡겨. 이 놈들은 무림고수들과 달리 호흡법과 내공으로 독을 몰아내는 걸 전혀 못 하는것 같군."
스아앗
당산은 또 다시 신선폐와 십대절독을 공기에 섞어서 마도사들을 중독시켰다.확실히 마도사들은 독에 대해서는 아주 취약한지, 보통의 무림인들이라면 내공을 격발시켜서 독에 저항하며 독술사를 베어버리려 할텐데 그런 대응이 전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원래 강대한 마력을 보유한 걸로 보이는 놈도 금세 독에 중독되자 촉수덩어리 괴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심 독의 위력보다도 당산의 실력에 무림인으로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용독술이라는건 사실 굉장히 어렵고 섬세한 기술이라서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공기중에 살포하면 아군까지 같이 중독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당산은 아주 자연스럽게 적만 중독시키는 신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 학살이나 다름없이 싸움이 이어질 때였다.
쿠궁!
땅이 둔중하게 울리며 허공에서 웬 신령스러운 빛을 휘감은 자가 떨어져 내렸다. 척봐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그 자는 동방인으로 보였는데 크게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순간 당산이 슬그머니 신선폐를 날려서 그를 중독시키려 했으나, 그는 같잖다는 듯 안광을 뿜어내며 당산을 공격했다.
퍼벙
"크으윽."
당산은 빛으로 공격받자 전신이 마비된듯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크흐흐,이거 독 이름 바꿔야겠는데... 신선 못 죽이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다음번에는 내가 너한테 말해줄게."
나는 당산의 말을 대충 받으면서 새롭게 나타난 적에게 말했다.
"당신은 대라신선이며 전욱의 현손인데도 어찌 서방에서 이토록 잔악무도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당신은 동방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천계의 상위존재일 텐데 어째서."
[크크크...내 야망을 인간 따위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느냐.]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창힐은 그 때의 약속대로 동방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오백 년이나 빨리! 이제는 내가 서방을 차지하여 새로운 대신(大神)이 되리라.]
"......"
쿠구구구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투선(鬪仙)이 전력으로 싸울 때 내는것, 그 이상으로 보였고 그가 마도를 수행하면서 얻은 또다른 힘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금요는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 방해하려는 놈은 다 죽인다!]
상대는 팽조(彭祖).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존재이자 - 대라신선이며 신의 직계혈족인 서방 마도사의 수장이 눈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