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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717화 (71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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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구천현녀의 도움을 받아서 다함께 대륙 남부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해남성(海南聖)이었고 중원에서 가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해안지역이었다. 물론 운남성을 통해 남만지역으로 가면 더욱 남쪽으로 갈 수 있겠으나 적어도 중원대륙의 해안에서는 가장 아래에 있다.

화룡진인이 말했다.

[저 바다 너머에 뭔가가 있다.]

끼룩 -

해안이라서 갈매기 소리가 컸고 여기저기에는 평화로운 어촌마을이 보였다. 만일 누군가가 휴양을 하고싶다면 여기서 살고깊을 만큼 경치좋은 바닷가. 그러나 화룡진인의 시선은 수평선 너머의 어딘가를 진지하게 노려보고 있었고 경계심과 살기가 가득했다. 그만큼 '너머'에 있는 게 사악하고 흉흉한 존재라는 뜻이다.

나는 화룡진인에게 물었다.

"신적 존재일까요?"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사기(邪氣)의 숫자가 수백만에 이르니, 곧 흉흉한 재앙이 닥치리라.]

"수백만!!어찌 그리 많습니까?"

나는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강력한 고위이족이 쳐들어오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수백만이라는 단위가 나오자 논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대군만큼이나 거대한 규모의 적이 어디서 몰려온다는 말인가?

그러자 옆에서 마찬가지로 수평선 너머를 보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인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립되었나 보군. 결국 원인은 신단수가 망가져서 해신의 견제가 풀려서겠지만..."

"천우진. 뭐 알고있냐?"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단 내 술수로 탐색해 보마."

위잉

천우진의 손에서 광구가 떠오르더니 빛의 속도로 전방으로 사출되었다. 그 빛은 잠시 후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나는 신기해서 천우진에게 물었다.

"그 술법은 뭐야?"

"필요해서 내가 지금 만들었다. 그래서 이름이 없군."

"......"

"조금 기다려라."

농담이겠지?

잠시 후 천우진이 말했다.

"해신족(海神族)이 해저에서 대군을 이루어서 진군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대략 이백 리 정도 떨어진 거리고, 해신족 마법사들이 지속족으로 인신공양을 하면서 가호를 받고 있군."

"......!!"

해신족!!

놈들은 [옛 지배자]인 해신의 끄나풀이 아닌가? 전 세계의 바다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이족 괴물들이 왜 이 근처에 수백만 대군을 이루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언덕 밑에 보이는 어촌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해신족 대군이 그 정도면 이 어촌은 몬론이고 중원 전체가 박살날 거야. 가만둘 수는 없어."

해신족이 타고난 신체능력은 인간보다 월등하게 높은데다 타고난 유연성과 전투감각도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나쁘지 않아서 전략전술도 쓸 줄 알고 무술은 물론이고 주술사들이 마법도 쓸 줄 알았다. 대명제국의 정예병 대군이 나서더라도 해신족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고작 일만 마리의 해신족을 상대로 난다긴다하는 초고수들이 전멸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당산이 듣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해신족을 우리가 나서서 미리 막자는 건가."

"당산. 뭔가 말하고 싶은게 있나본데."

내가 힐끔 당산을 쳐다보자 그가 염증이 난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건 오지랖이야."

"뭐?"

"지금의 중원과 대명제국은 창힐과 팔부신중의 소유나 마찬가지잖아?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놈들이 알아서 해신족을 막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 집은 자기가 지키는게 기본이잖아. 게다가 우리는 팔부신중 놈들한테 우리 행동을 들켜서는 안 되고,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금요를 찾는 거 맞지?"

"......"

그는 옆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못본 체 하고 그냥 가자고. 이건 우리가 감당할 일이 아냐. 이런데서 힘빼다가 백웅 네가 죽기라도 하면 엄청난 손해야."

당산의 말은 언뜻 재수없어 보였지만 사실 옳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사리에 맞다는 걸 알면서도 반박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놈들이 진군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이 남해성 일대의 백성들 수십만 명은 생지옥을 겪게 될 거다. 그걸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냐?

해신족은 잔혹한 놈들이라서 살인과 약탈은 기본이고 인간을 잡아먹거나 구워먹는 일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인신공양을 위해서 인간을 꼬치처럼 꽂아놓는 꼴도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어촌 사람들이나 남해성 사람들이 그런 지옥을 겪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자 당산은 비직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상관이야? 넌 이미 놔둬도 될 이유를 손에 넣었으면서."

"뭐라고?"

"명계는 활동이 정지되었고 죽은 놈은 모조리 [옛 지배자]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잖아? 어차피 죽어도 생지옥이 예약되어 있다면 지금 기를 쓰고 그들을 살릴 이유는 대체 뭐지? 네가 신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결말은 같아."

"......"

"인정해. 이건 오지랖이라고."

사실, 망량이 직접 명계에 가서 인간의 윤회전생을 확인한 것에는 이런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선(善)을 행할 이유가 없으니 그저 내키는대로 살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제갈사나 당산처럼 악(惡)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현재를 즐기기만 하는 게 최선의 삶의 태도이다.

죽어도 구원이 없다는 건 선(善)의 존재이유를 빼앗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소리가 된다.

그것까지 긍정하게 된다면, 내가 다수를 위해 소수를 죽이는 전략이 당연시된다.

그건...

"아니야."

나는 당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못본 체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아니! 충분히 이해했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난 이 일을 방관할 수 없어."

"하아...?"

당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볼 때 내 행동이 어리석음의 극치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합리성에 따르자면 지금 내가 해신족의 진군을 막으려는 행동은 손해만 보는 행동이었다. 이 자리에 당산이 아닌 제갈사가 있었어도 당산과 똑같은 말을 했을것이다.

그렇지만 - 만일 이 어촌사람들이나 중원 남부인들의 희생이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납득하게 된다면, 내 생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내가 기를 쓰고 신을 쓰러뜨리려는 일련의 행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인간에게 윤회전생을 되찾아주는 걸로 자기만족을 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억지부려서 미안해, 그래도 난 사람들의 희생을 최대한 막고 싶어. 그러니 날 도와줘."

"......"

좌중이 침묵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천우진이었다.

"천하의 바보천치 녀석. 하지만 나쁘진 않아."

"천우진"

"네놈 의지가 그렇다면 방금 전 추가로 알아낸 정보도 이야기해 주마. 지금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수백만의 해신족 대군이 아니라 놈들이 인신공양 의식으로 불러내고 있는 존재다."

"뭐? 놈들이 뭔가를 소환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래. 아마 화룡진인이 느끼 기운은 해신족 대군이 아니라 '그 존재'의 소환이 임박하면서 발생한 강력한 마력이겠지."

"그게 뭔데?"

천우진은 팔짱을 꼈다.

"아마 용(龍)일 거라고 생각한다. 방금 전 술법을 통해서 해저도시에서 본 것은 거대한 용의 형상이었으니까."

"용은 신성한 존재잖아. 이족인 해신족 따위가 어떻게 용을 소환할 수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짐작가는 게 없군."

천우진도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때 화룡진인이 뭔가를 깨달은 듯 약간 창백한 안색이 되었다.

[설마...!!]

"화룡진인. 왜 그러십니까?"

[마,만일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생각보다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지금 저 놈들은...]

화룡진인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연하게 말했다.

[백웅이여. 아마 이 일에는 천계(天界)도 머지 않아 끼어들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그들이 개입하기 전에 최대한 막아서 민간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

"어떤 예상을 하셨기에 그러십니까?"

[이제야 알아챘다. 저 너머의 바다 아래에 소환되는 존재는 내게 친숙한 파동을 내뿜고 있다. 그 존재가 용이라면... 아마 광리왕(廣利王) 오윤(敖閏)이 분명하다.]

"광리왕 오윤이라면..."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남방적룡왕(南方赤龍王)! 해신족 진영에 용왕이 소환되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 파장이 분명하다.]

남해용왕 광리왕 오윤!

그는 분명히 바다를 지키는 사대용왕의 일원이었으며 일천 년 전, 종말의 거룡에 맞서 중원대륙을 지키기 위해 광범위한 결계를 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종말의 거룡이 내뿜은 광선에 동해용왕 오광과 서해용왕 오흠이 차례로 격추되면서 나머지 용왕의 생사도 불분명해졌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천우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제야 알겠군. 어째서 이족놈들이 용을 소환할 수 있는지를... 놈들이 소환하는 용이 어째서 해골바가지였는지 알 것 같다."

"남방용왕 오윤이 천계를 배신한 거냐?"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반고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수왕의 일족이라서 애초에 천계를 배신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농락당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있지."

"......?"

천우진이 말했다.

"아마 사해용왕은 일천 년 전, 종말의 거룡과의 전투에서 모두 죽어서 격추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천계에 속해있기에 죽어서도 천계에 영혼이 되돌아가서 오랜 세월을 거쳐 부활하게끔 되어 있지. 그렇기에 지금 용왕이 소환된다는 건 용왕의 혼이 천계의 소속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게 천계를 배신했다는 뜻 아냐?"

"왜? 그럴 이유가없지. 선인들이라면 몰라도 용왕은 그게 안돼. 이 세계의 생멸을 같이 하는 정령(精靈)과도 같은 존재들이야. 신선보다 훨씬 천계에 충성심이 높아. 정확히는 이 세계의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축에 가까워."

"으음."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 용왕의 혼이 죽어서 약해진 순간 누군가가 그 혼을 탈취해서 타락시킨 것이다."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천우진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머나먼 수평선을 쳐다보았다. 수평선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푸른빛을 흘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불길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새어나오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천우진이 쳐다보는 방향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알아챘나 보군."

"제,제길... 진짜냐?"

내가 말을 더듬자 천우진이 손가락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용왕의 혼이 아무리 사후에 약해졌어도 그걸 잡아서 타락시킬 수 있는 건 대라신선도 할 수 없는 일. 그 정도의 마력을 지닌 존재이며, 해신족에게 용왕의 혼과 육체를 허락해줄 수 있는 존재. 그런 놈은 딱 하나 뿐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해신(海神)!"

해신이 천 년 전에 거룡에게 격추당한 사해용왕을 붙잡아서 자신의 노예로 만든 게 분명하다!

사해용왕의 행적이 그동안 묘연했던 이유이기도 하리라.

"맞아."

천우진은 한 줌의 동요도 없는 고요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해신이 조만간 직접 오겠지. 친정(親征)해서 중원을 차지하려고."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해신은 사해용왕을 타락시켜 그들을 이족군대의 선봉장으로 내세울 생각인 거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용왕의 시체를 되살려서 그 힘을 고스란히 쓸 수 있다면 정말 강력하겠지요."

[그렇다면... 천계가 확실히 나설 일이 되겠군요.]

"그들이 나서면 이 세상의 인과율은 금방 난장판이 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창힐과 팔부신중까지 가세하게 되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돈이 되겠지요."

거기까지 말한 천우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백웅. 여기를 막으려 한다면 해신은 몰라도 사해용왕과는 필히 싸우게 될 거다. 각오는 되었냐?"

"으음..."

사해용왕과 싸운다.

나는 딱히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인지라 망설여졌다. 그들이 고대의 신화적 존재라는 건 알고 있어도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놈들이 언제 진군할지 알겠어?"

"잠깐 기다려 봐라."

파앗

천우진은 다시 술수를 부렸다. 그리고 얻어낸 정보를 내게 말해줬다.

"해신족 대주술사의 대화를 들으니 대략 십 주야 후에 진공할 생각으로 보이는군."

"열흘이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금요를 얻는 일, 금오도 탈취를 돕는 일, 아마츠카미의 귀환, 해신족 방어 등등의 일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일들이 시급하게 닥쳐온 게 아니라 날짜를 두고 흩어져 있군.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계획을 잘 못 짜겠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해용왕의 소환이 끝나기 전에 미리 차단할 수는 없을까? 제사장이나 주술사를 미리 죽이거나 인신공양을 막아서."

"그럴 단계가 아니다. 이미 육체는 실체화 소환을 끝냈고 혼이 소환대는 건 시간문제라서 막아봤자야. 그렇게 심화되었으니 화룡진인이 직접 마력을 느낄 정도가 된 거지."

"음...그러면 망량의 조언을 얻어야겠군."

이 판국에서 뭔가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지금은 결단보다는 이성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감정을 앞세우는 걸 멈추고 망량의 조언부터 듣기로 했다.

스아앗

그 날 밤, 우리는 검은 거울을 호수에 던져서 망량을 소환했다. 망량은 소환되자마자 내게 말했다.

[상황설명은 할 필요 없소. 아까의 상황을 명경으로 다 보고 있었소.]

"망량. 어찌하는 게 좋겠소?"

[결론적으로 해신의 침략을 막아야 하겠지만 당장 뛰어드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오. 그러니 필요한 일부터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게 필요하오.]

망량이 눈을 빛냈다.

[우선 서방의 멀린에게 접촉해서 대영제국 심장부를 직접 공격할 전력을 지원받으시오. 그리고 즉시 심장부를 공격해서 마도사 놈들을 다 없애고 금요부터 획득하면 되오 여기까지 채 열흘이 걸리지 않을 것이오.]

"금요를 갖고와서 해신족을 막으면 되오?"

[그건 금요의 위력을 생각하면 너무 아까운 짓. 게다가 칠요를 소유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른 누구보다도 제천대성이 먼저 나서서 당신을 공격해 뺏으려 들 것이오.]

"아!"

[해신족은 달리 막을 수 있소. 그러니 일단 목표는 사흘 내에 금요를 획득하는 걸로 하시오. 그리고 나서...]

나는 망량의 계책을 홀린 듯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계책대로 하면 잘 풀릴 거라는 자신감이 내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망량의 말은 지금 상황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있었다.

"알겠소! 속전속결로 진행하리다."

파앗!

우리는 하루동안 쉬면서 진소청이 깨어나길 기다린 후, 멀린이 있는 서방 콘월의 호수로 갔다. 그리고 멀린을 강하게 불렀다.

"멀린이여! 우리는 당신들을 돕기 위해 왔소. 금요를 수호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으니 이야기를 들어 주시오."

우우웅

잠시 후 호수 근처에서 멀린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는 환영 상태로 자신의 수염을 떨면서 일행을 쳐다보다가 침음성을 흘렸다.

[...동방의 기인 백웅. 그대에게는 강력한 신격이 강림해 있군. 또한 신인(神人)들을 거느리고 있으니...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이번 생 초반에 멀린에게 말을 잘못했다가 거의 불쾌감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린이 선선히 대화에 응하려는 기색이었으니, 구천현녀나 화룡진인, 천우진 등의 힘이 굉장히 크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길게 말할 때가 아니오. 현재 대영제국의 총독부가 대마도사들의 소굴이 되어있고 서방의 수호자가 금요를 수호하기 위해 고통받고 있음을 알고 있소. 우리는 그 분을 구출하러 왔소."

[음...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우리끼리만 가서는 힘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우리에게 지원을 해 줬으면 하오. 그 곳은 마의 소굴이며 강력한 사법과 마물로 수호되고 있을테니."

[......]

멀린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베루스. 파우스트 박사. 그들을 도우시오.]

순간, 어둠의 거울이 허공에 비춰지는 듯 했다. 그리고 소리소문 없이 두 명의 신형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베루스였다. 또한 한 명은 서방의 학사 차림을 하고 있는 깡마르고 창백한 인상의 괴인이었다.

'베루스의 실력은 알고 있고...파우스트란 자도 강한건가?'

멀린은 추가로 말했다.

[그대들의 힘이 강대한 건 알고 있으나 만용을 부리지 마시오. [옛 지배자]의 화신이 나타나면 반드시 도망치시오.]

"무슨 말이오?"

[싸움이 길어지면 마도사들이 지배자의 화신을 소환할 우려가 있소. 그리고 그들이 소환한 화신은... 극히 위험한 존재. 여태껏 우리 마법사들이 섣불리 수호자님의 구출을 시도하지 못했던 건 그 화신이 끼어들 가능을 우려했기 때문이오.]

"누구의 화신이오?"

[...최악의 혼돈이지. 다시 말하지만, 마도사들이 수상한 짓을 하기 전에 재빨리 끝내야 하오.]

"알았소."

우리는 멀린에게서 물러난 후 간단하게 베루스, 파우스트 등과 인사했다. 직후 나는 고대의 부적을 불태워서 신공표를 소환했다.

신공표는 빛과 함께 나타난 후 우리를 힐끔 둘러보더니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래서 이 인원으로 금요를 찾으러 가겠단 말이냐?]

"그래. 도와줘. 위치는 멀린에게서 들었고 이 수정구를 갖고 있으면 차원결계도 깰 수 있어."

나는 멀린에게서 받은 수정구를 들었다. 이 수정구가 있으면 설령 마도사들이 차원결계로 수호자의 위치를 감췄다 하더라도 금세 알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방수호자와 소통하는 것도 가능하다. 신공표가 차갑게 웃었다.

[후후...너희가 먼저 싸워 봐라. 재미있으면 거들어 주마.]

"...알았어."

이제 와서 저런 태도를 보여도 딱히 화도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공표가 어떤 놈이냐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곁에 서 있던 진소청에게 살짝 전음을 보냈다.

[진소청. 말한대로 잘 부탁하오.]

[물론이오. 그녀를 계속 주시하겠소.]

진소청은 아직까지 완전히 피로가 회복되지는 않은 듯 핏기가 없는 얼굴이었으나 대환단의 효과 덕분인지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신공표가 배신하려 한다면 내 목숨을 걸고 그녀를 막겠소.]

그냥 직감이다.

배신하려는 신공표를 막을 수 있는 건 구천현녀나 화룡진인이 아니라 진소청 뿐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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