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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신공표가 나타나는 순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칠 주야 후에 다시 보자. 그 때 내가 동료로 삼을만한 힘을 보여준다면 네놈과 동맹을 맺어 주지. 물론 구천현녀의 힘은 제외하고서다.]
그 때 신공표는 나와 그렇게 약속하고 갔었다. 신공표에게 칠요를 모으는데 힘을 합치자고 제안하자 내 힘을 얕보고 거절했으나 구천현녀가 윽박지르자 유예를 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약속했던 칠 주야에 아직 못미치는 때였는데 벌써 나타나다니?
내가 신공표를 빤히 쳐다보자 신공표가 말했다.
[내가 일찍 온 게 이상하느냐?]
"아직 준비가 안됐어."
[흐응...]
나는 신공표가 묘한 눈으로 내 주변의 동료들을 살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하나하나를 보다가 문득 천우진에게서 시선이 멈추었다. 천우진은 신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마주 보았다.
신공표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인간을 한꺼풀 벗어던진 놈이구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천우진."
[너 정도 되는 놈이 어째서 저 녀석을 돕는 거지?]
"알려준 이유는 없다."
천우진은 내 흑요석을 받아서 신공표가 어떤 존재이며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텐데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기색이었다. 조금 뜻밖인 것은 그런 천우진은 태도를 신공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래서 딱히 화를 내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천우진을 힐끗 보았다.
"저 녀석이 그렇게 강해졌다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천령단의 무한의 내공이나 절대지경의 막강한 압박감 같은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왕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통천교주 신공표가 인정할 정도라면 현재의 천우진은 격이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신공표가 뜻밖의 말을 했다.
[백웅이라 했던가? 너희 일행과 손을 잡겠다.]
"......!!"
이렇게 쉽게?
그것도 그저 천우진을 보기만 하고 결정할 줄은 몰랐기에 예상밖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도 저쪽 의도대로 휘둘리는 것 같아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칠요를 찾으러 우리와 함께 행동하는 건가?"
[그전에 너희가 도와줄 일이 있다.]
"아."
역시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신공표가 그렇게 착한 놈일 리가 없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신공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으냐?]
"싫다는 건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금오도의 통제권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 일을 도와준다면 너희가 칠요를 모으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
금오도의 통제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옆에 있던 천우진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금오십천군이 말을 듣지 않나 보군."
[...뭘 아는척 하느냐?]
"틀렸다면 사과하지."
신공표는 당당하게 팔짱을 꼇다.
[맞다.]
"사과 안 해도 되겠군."
[그래라.]
나는 그들의 대화를 보자 할 말이 없어졌다.
"......"
신공표 저 놈은 여기에 농담따먹기 하러 온건가?
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간에 신공표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십천군 놈들이 나를 적대하면서 성채 안에 꼭꼭 숨어들어간 상태이다. 그 녀석들을 해치워야 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들고 번거로우니 너희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으음."
십천군이 신공표와 적대관계로 돌아섰다고?
나는 뜻밖에 상황에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신공표에게 물었다.
"그들은 한때 통천교주였던 네 부하 아닌가? 왜 너를 거부하지?"
[놈들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새로운 주인이라..."
짐작가는 건있다. 본래 황궁의 [옛 지배자]가 복마전의 중간관리자로 있었고, 그 존재가 마왕 달기를 자신의 사도로 임명한 것이다. 천계와 적대하여 봉인당한 금오도 간부들 입장에서는 그들만큼 강력한 동아줄이 없을테니, 옛 주인인 통천교주 신공표를 거부할 수밖에 없으니라.
'아무리 통천교주 신공표의 힘이 강력해도 진짜 [옛 지배자]에는 미치지 못하니까...'
나는 확인할 게 있어서 질문했다.
"그럼 달기는? 그 녀석은 묶여있었는데 혹시 봉인에서 풀려났나?"
[아니. 녀석은 계속 묶여 있다.]
"흐음."
[다만 나로서도 녀석의 봉인을 풀어주기는 껄끄로운 상황, 그 일은 생각지 마라.]
뭐지?
신공표는 현재 마음만 먹으면 금오도에 봉인되어 있는 달기의 봉인 정도는 풀어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말투가 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하기 싫다는 어투였다. 나는 이 일을 캐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 캐물으면 신공표가 역정을 낼거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대신에 나는 말했다.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목표가 뭔지 먼저 알아야겠다."
[그건 무슨 소리지?]
"궁극적인 목표를 말하는 거다. 우리 목표는 칠요를 일단 다 모아서 만신전으로 가는 길을 열고,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의 자주권을 얻는 거다. 엉망진창이 된 윤회전생도 바로잡고."
[......]
"우리의 목표가 네 목표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다른 부분도 있겠지. 단지 우리 입장에서는 네게 힘을 빌려주더라도 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 알아야만 해. 그래야 동맹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흐음.]
나는 단오하게 힘주어 말했다.
"금오도에 쳐들어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우린 네가 금오도를 손에 얻은 후 뭘 하고싶은지 알아야 한다. 이건 양보 못해."
내 말에 신공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한참 후, 그녀는 말했다.
[나는 이 편하적인 세상의 균형을 얻고 싶다. 그걸 위해서는 존재의 계(界)가 얽히는 특이점에 도달해야 한다. 실제와 허상의 세계가 중첩되는 지점을 알아야 해.]
"뭐...?"
[그걸 위해서는 금오도의 협력이 필수적이지.]
삼황오제와 싸우거나 인간을 멸망시키겠다거나 하는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신공표의 말은 내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가의 지식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았고 그저 어려운 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존재의 계?
얽힘?
특이점?
중첩?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천우진의 표정이 크게 달라졌다 그는 잠시 후 말했다.
"삼황오제를 정면으로 쓰러뜨리는 걸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거군."
신공표가 훗하고 웃었다.
[인정하지. 예전에 직접 그들의 본체와 맞닥뜨렸을 때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내가 아무리 혼돈의 재능에 있어서 극에 달한 자라고 해도 정면승부는 불가능했어. 그들의 본체는 진정으로 우주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녀는 뭔가 끔찍한 경험을 회상하듯 잠시 몸을 떨었다.
[그래서 여의봉에 갇힌 동안 까마득하게 생각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다.]
"......"
[칠요를 모으는 것도 내 목표에 도움이 된다. 나와 너희들은 뜻이 잘 맞을 것 같군.]
상황을 잘 파악할 수가 없다. 신공표는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를 제대로 설명한 모양이었는데 너무 고차원적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신공표에게 지금의 인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군..."
인류문명이 고대 통천교주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걸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자 천우진이 내게 영파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냥 받아들여라. 그게 좋다. 그리고 시간을 끌어 봐.]
좋아.
나는 천우진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알겠다. 금오도를 치는 걸 도와주지. 단, 지금은 조금 곤란해."
[왜지?]
"우린 먼저 금요부터 얻어야겠어. 세계의 균형이 하루가 다르게 뒤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칠요를 얻는걸 미루면 미룰수록 경비만 강화될 것이다."
[흐음... 금요의 위치는 아느냐?]
"당장은 모르지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단서가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다."
[알았다. 그럼 나도 금요를 얻는 일을 먼저 도와주지. 그 다음에 바로 내 일을 도와주는 걸로 하자.]
설마 신공표 쪽에서도 도와주겠다고 하다니!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한다."
[그리고 말해둘 게있는데, 구천현녀.]
스윽
구천현녀가 소리소문없이 영체를 드러냈다. 신공표는 그녀를 곱지못한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그 원숭이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마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럼, 준비가 되면 이 부족을 불태워라. 너희를 도우러 오겠다.]
파앗
신공표는 웬 고대의 부적을 내게 건네준 후 전이술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신공표와의 만남이 지나간 걸 느끼자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찌되었든 신공표와의 동맹전선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아까 신공표가 주절대던 '목표'가 무슨뜻인지 넌 이해한 거 같은데 설명해 줄 수 있냐?"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이해했다는 보장이 어딨는데?"
"이해 못 했으면 그렇게 말할 놈이 아니잖아, 너는."
"흥..."
천우진은 짜증이 나는듯 잠시 미간을 모으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녀가 깨달은 경지는 나와도 관련이 있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술법사로써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환신지경(幻神之境)이란 [세계의 기록]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어. 다만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닿을 수가 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돼."
"으..."
천우진은 역정을 내려 했지만 서문혜나 당산 또한 어리둥절해하는 걸 보자 내게 신경질을 내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자기만 아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대신에 그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쉽게 말하자면, 존재의 계가 얽힌다는 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특이점의 현상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그 특이점을 알게 되면 '길'이 열리지. 신공표는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계의 기록]에 도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그러니깐..."
나는 천우진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신공표의 목표도 환신지경이랑 말이지?"
"...환신지경은 비유에 불과해. 굳이 말하자면, 술법은 삼황오제의 힘이지만 그 한계를 초월해서 [옛 지배자]만이 인식하고 열람할 수 있는 대우주(大宇宙)의 권능을 얻어오는 경지를 말하는 거다."
"......!!"
천우진은 손깍지를 꼈다.
"술법사의 궁극에 달한 존재로써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어. 결국 우리는 삼황오제의 힘을 사역하는 신관(神官)인데, 신의 지배력에서 벗어나고싶다는 말이야. 삼황 복희의 권능을 빌려와 봤자 그와 동률에 있는 삼황오제는 절대 못 이기니깐."
"그게 가능해?"
"어느 쪽이든간에 우주의 권능에 손을 뻗는 행위이고, 결론은 같으나, 방법론의 차이다. 나도 솔직히 그녀의 이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내가 환신지경을 얻으려는 방법과 굉장히 큰 차이가 있을거야."
그렇게 말한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더 쉽게 말해줄까? 그녀가 말했단 '편파적인 세상의 균형'을 얻는다는 건 결국 신(神)이 된다는 말이야. 아무리 혼돈의 재능을 타고난 최강의 인간이라 해도 신 그 자체인 삼황오제와는 맞서싸울 수가 없으니 신이 되어서 신과 싸우겠다는 말이라고."
신이 된다!
물론 신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경향은 있었으나 여기서 표한하는 신이란 결국 [옛 지배자]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것도 하급이아니라 삼황오제처럼 전우주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수준의 존재를 의미한다.
나는 신공표가 품고있는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천우진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신이 되어서 신과 싸운다...'
보통 인간이 저런 발상을 했다면 미친놈이라 했겠지만 신공표가 했다면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진짜로 [옛 지배자]를 목전에 두고 있는 고대의 통천교주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꿈을 실천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일이 벌어질까?
동시에 나는 방법론에 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한 걸까.
내가 침묵하자 당산이 말했다.
"너무 규모가 큰 얘기라서 나는 실감이 안 나는군.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며칠동안 진소청이 깨어나는 걸 기다리면서 정비하자. 진소청이 완전히 깨어난 다음에 금요를 시도하는 게 안전해."
안전하다는 이유는 딱히 금요를 지키는 사악한 대마도사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만일의 경우 신공표의 배신에도 대비를해야 할 건데, 진소청의 전력은 그 경우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륵!
그 때 화룡진인이 영체를 드러냈다.
[백웅이여. 사악한 기운이 지금 대륙 남쪽 바닷가에서 고개를 들었다.]
"네?"
[심상치 않는 기운이다. 살펴보러 가야하지 않을까 싶구나.]
"......"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야겠군요."
마를 감지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화룡진인이 구천현녀보다 나았다.
그런 화룡진인이 수천 리를 격하고 심상치 않다고 느낀 마력이라면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