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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그토록 정체를 숨기던 창힐이 이미 낙양에 나타나있고, 심지어 지금의 환란을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는 낙양의 창힐을 쓰러뜨려야 하는 거요?"
내 질문에 뜻밖에도 망량은 차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
나는 망량의 반문을 듣자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창힐을 당연히 쓰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망량은 마치 그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망량이 말했다.
[백웅. 당신이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창힐이 얼마나 강한가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오. 당신은 이미 [옛 지배자]와 모두 싸울 각오가 되어있으니 이제 와서 힘의 차이는 중요한 게 아니지.]
"으음."
[당신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창힐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소. 그건 단순히 창힐을 두렵게 만드는 걸 넘어서서, 그 존재가 선(善)인지 악(惡)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오.]
"그, 그렇군."
나는 망량이 핵심을 짚자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창힐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다.
놈이 [옛 지배자]의 반열에 있고, 지금까지 팔부신중을 조종해서 무수한 환란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극악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 끈질기고 빈번한 계책이 분명히 하나의 목표를 지니고 있을 텐데 그 목적이 뭔지 아직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표정이 신중해지자 망량이 말했다.
[창힐이 정말로 극악무도한 존재인 게 확실하다면 우리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쥐어짜내서 그를 쳐부숴야만 할 것이오. 그러나 그렇게 대응하기에는 창힐은 너무 강력한 존재이며, 또한 섣불리 들이댈 수도 없소.]
"망량. 당신은 창힐의 목적을 알 것 같단 말이오?"
[가설의 단계이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소. 그러나 당신에게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으니 아직까지는 말할 수가 없소. 좀 더 사실증거가 모인다면 말해주겠소.]
나는 그의 말에 투덜거렸다.
"선입견이라니... 어차피 인간을 갖고노는 괴물들이 상대인데 조금 삐딱하게 보면 어떻단 말이오?"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섣불리 말해줄 수가 없소.]
"응?"
[백웅. 당신의 모든 행동, 그리고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가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그리고 수틀리면 적대해서 눕히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그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는 가정을 배제하고 있소. 자칫했다가는 수천 년의 후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당신만큼은 만사를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만 하오.]
"그런가... 아니, 그건."
나는 망량의 말이 품고 있는 가정을 눈치챘기에 깜짝 놀랐다.
"우리가 창힐 팔부신중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싶은 거요?"
망량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또한 손을 잡지는 않더라도 굳이 적대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소.]
"......!!"
[백웅. 창힐의 위치가 어떻다 생각하오? 우리의 궁극적인 적이 삼황오제라면, 그 삼황오제의 적이 창힐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소?]
"그, 그건."
[적의 적은 아군이 될 수도 있는 법.]
정말로 그런가?
나는 창힐과 손을 잡는다는 발상을 해본 적도 없었기에 당황했다. 내가 이마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형, 그만하시오. 이 놈은 너무 깊이 생각하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놈이야. 더 혼란스럽게 할 필요 없소."
[사제.]
"사형의 가정이 너무 앞서나간 것도 사실이오. 지금 우리는 당장 행동할 지령이 필요하니 거국적인 가설에 대한 토론은 할 때가 아니오. 언제 신공표가 찾아올지 모르니 한시가 바빠."
그 말도 맞군.]
망량은 천우진의 말에 납득한 후 내게 말했다.
[일단은 당산을 찾아가 보시오.]
"당산을?"
[그게 제일 나을 거요. 알고 있겠지만 그는 현재 사천당문에 있소.]
"알았소."
우리는 망량과의 대화가 끝난 후 그의 계책대로 움직였다.
파앗
구천현녀의 도움을 받아 다같이 사천당문 근처로 이동하자 녹림이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나는 이 숲을 알고 있었는데, 사천당문에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근처의 지형이었다. 내가 기억을 더듬어서 사천당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광경이 나타났다.
폐허.
본디 으리으리했던 사천당문의 모든 돌벽, 담장, 누각 등이 모조리 부숴져서 잿빛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또한 백골이 되어 있는 시체도 곳곳에 보여서 한때 이 곳에서 살육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저벅...
저벅
사천당문의 본전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건물 바로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앳된 인상이 남아있지만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녹색 장포를 입고 있는 그는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구각사(構珏蛇)가 침입자가 있다고 알려왔는데 역시 당신이었군."
"당산(唐傘)!"
폐허가 된 사천당문 내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당산이었다. 그는 5년 동안 정말 많이 성장한 듯 이젠 성인이라 해도 무방해 보였다. 그는 내 옆에 서문혜와 천우진이 있는 걸 보더니 말했다.
" 언제 돌아온 거지?"
" 얼마 전에."
" 그래... 뭐, 일단 안에 들어와서 얘기하자고."
우리는 당산의 인도에 따라 그나마 형태를 유지한 본전으로 들어갔다. 이 건물만은 그 동안 당산이 세심하게 관리한 듯 먼지도 거의 없었고 가구도 깔끔했다. 그리고 당산은 차를 내 온 다음 말했다.
"흑요석 줘. 백마디 말보다 그게 낫잖아."
"......"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뚫어져라 당산을 쳐다보았다. 뭔가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산. 먼저 네 입으로 듣고 싶다. 5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흠. 어떤 일이라... 별 일 없었는데."
"그래도 말해 줘."
"굳이 말하자면 신의 무덤을 찾다가 검마 어르신의 권유로 나는 중원에 되돌아 왔어. 그리고 내 무예를 좀 더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 년 정도는 틀어박혀서 수행을 하다가 경지에 올랐다 생각하자 여기로 되돌아왔지."
"여기라는 건 사천당문 말이냐?"
"그래."
"돌아와서 뭘 했지?"
나는 괜히 캐 묻는 게 아니었다.
이 건물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심상치 않다는 걸 계속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문혜와 천우진도 내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당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산은 피식 웃더니 차를 크게 한 번 들이키고는 말했다.
"하고싶은 대로 했어."
"......"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저질렀군."
이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당산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사천당문에 복수를 시작했을 것이고, 그에게 원한을 산 사천당문의 직계자손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더라도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 건물의 지하나 비밀장소에는 지금도 고문받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호 사형은 용비천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지. 나 또한 백웅 당신 덕에 꿈을 이뤘으니 기쁘기 한량없어. 하하하."
당산이 자못 유쾌하게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저 놈의 잔인한 본성은 제갈사에 못지 않았기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된 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 채로 살갗이 벗겨진 인간도 있으리라.
'이게 맞는 일인가?'
나는 용비천이 죽어도 싼 놈이라 생각했기에 전생을 하는 동안 극호에게 용비천을 처단할 기회를 계속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산의 경우는 좀 다르다. 당산에게 있어서 당가 혈족들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지만 그 복수의 범위는 틀림없이 대학살이며 지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마 저 녀석은 죽을 죄까지는 지지 않은 당가혈족이라 해도 잔인하게 죽였으리라.
하지만...
[백웅, 우리 솔직해 지자고. 나와 당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학대받고 약탈당하며 살아왔지.]
[나는 사천당문이 적이었고 당신은 소을촌 촌장일가가 적이었지. 나는 복수할만한 재능이 있었고 당신은 그럴 재능이 없었다는 것 뿐 아닌가? 당신에게 나와 같은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면 언제고 같은 일을 했을거야. 실제로도 당신은 해 버렸고.]
[난 당신이 마음에 들고 존경스러워. 입발린 소리 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잖아? 후후. 아주 통쾌해!]
나는 언제나 당산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복수를 저질러버린 내 입장에서는 당산에게 당당하게 반박하거나 지적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원죄(原罪)의 굴레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하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냉담하게 말했다.
"당산. 이제 그만 사천당문 전대가주 당무극을 편하게 해 주는 게 어떤가?"
"응? 어떻게 알았어?"
"네 성격으로 볼 때 가장 큰 복수의 대상을 그리 편하게 죽여줄 리 만무하지. 지금도 살려놓고 괴롭히고 있을게 뻔하잖나."
"맞아. 백웅이 돌아올 때까지의 심심풀이로 삼고 있었지."
"그만 해라.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당산이 히죽 웃었다.
"그러지 뭐."
티잉
당산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은은한 진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실을 이용한 장치로 고문기구에 연동시켰으리라. 아마 당무극의 일생도 그 한 번의 진동과 함께 끝났을것이다.
천우진은 더할 나위없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복수는 끝났을 텐데도 네 얼굴에는 유열이 멈추지 않는군. 넌 희생자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 타고난 악(惡)이다."
"후후후후후!!"
당산은 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서 웃었다.
"맞아. 사실 내가 굳이 괴롭힘당하지 않았더라도, 난 언젠가 사천당문을 몰살시켰을지도 모르지. 그게 내 본성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도산검림이 일상인 무림(武林)에서 나같은 존재는 패주이며 영웅이라고 칭송받지 않는가?"
"알 바 아니다. 쓰레기같은 놈."
"이 정도는 애교로 봐 줘. 5년 내내 마냥 놀기만 한 것도 아니니까."
"......"
천우진이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나는 당산에게 흑요석을 줘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당산이 꽤 놀랐다는 듯 말했다.
"뭐야... 뭐 이렇게 판이 커졌어? 내가 무림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구만."
"당산. 너는 그 동안 망량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과 한번도 연락하지 못했나?"
"응. 할 방법이 없었잖아. 사천당문을 몰살시키고 난 다음에는 사천의 문파들이랑 좀 놀아주고 있었지."
어깨를 으쓱인 당산이 말했다.
"뭐 아무튼. 서방에 금요를 찾으러 가는 일이라면 나도 끼워줘. 소소하게나마 도움은 될 수 있을 거야."
"금요를 지키는 건 강력한 마도사 집단이야. 목숨을 보장하지 못해."
"재밌을 거 같은데."
"그것보다는 네가 혹시 당문의 의술을 좀 안다면 진소청의 상태를 빨리 회복시킬 수 있는지를 봐 줬으면 한다."
"흐음."
나는 목갑에서 진소청을 꺼내서 당산에게 진맥하게 했다. 당산은 찬찬히 맥을 짚어보다가 말했다.
"내게 진소청을 보여줬다는 건 당신이 갖고있는 화씨일문의 의술로는 딱히 답이 없어서인거지?"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화씨일문의 의술이 부족한 건 아냐. 내 수준이 조금 부족할 뿐이지."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당산은 뭐가 재밌는지 킬킬거리다가 말했다.
"난 천재라서 사천당문의 의술도 다 익히긴 했지만, 사실 나한테도 뾰족한 방법은 안 보이는걸. 하지만 진소청을 빨리 회복시킬 방법은 알 것 같아."
"그게 뭐냐."
"대환단을 먹여 봐. 천년설삼이나 흑백련은 기운이 편중되어 있어서 가사상태의 진소청에게 먹이기엔 좋지 않겠지만 대환단은 중용의 기운이니 쉽게 몸에 받아서 회복하겠지."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소림사 대환단만큼 상세회복에 좋은 건 없었는데!
'바, 받아놓고 까먹고 있었다...'
하도 이번 생에 챙긴 보물과 축복이 많다 보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아니, 더 큰 일이 여기저기에 쏟아져 있으니까 신경을 못 쓴 거 아닐까? 나는 급히 대환단을 꺼내서 진소청에게 먹여서 깨웠다.
스스스
진소청은 한참 후 얼굴에 붉은 기가 강하게 돌다가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다. 하지만 아직은 주변을 아른거리며 인식하는 수준이었고 적어도 사나흘은 더 기다려야 거동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당산이 말했다.
"망량은 아무래도 금요행에 나를 데려가라는 뜻으로 당신을 내게 보낸 거 같은걸."
"정말 죽어도 후회 안하기다."
"흐흐흐. 그런 말 하면 창피할텐데..."
당산은 왠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녀석 설마?
하지만 나는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가정을 지워버렸다. 인정하기 싫은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산을 동료로 다시 받은 후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구천현녀여. 즉시 대영제국으로 가 주십..."
반드시 금요를 손에 넣어야 한다!
"앗?!"
파지직 파지직
하지만 구천현녀에게 내가 요청을 하기도 전에 장내에 심상치 않은 푸른 기류가 몰아치는 듯 했다. 우리 모두는 그 기류가 천공에서 마치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이지러지며 사천당문 전체를 감싸는 걸 알아챘고 거의 동시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쿠구궁
잠시 후 땅에 뇌전이 한 줄기 떨어졌다. 그 뇌전과 함께 나타난 자는 오연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약속대로 다시 왔다.]
신공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