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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천우진은 힐끔 내 옆에 있던 서문혜를 보더니 말했다.
" 부친의 명복을 비오."
" 감사합니다."
뒤늦게라도 동료의 사망을 애도해주는 천우진이었다. 나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 아무튼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건지 서로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데?"
" 너부터 말해봐라. 그래야 내가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한번 더 정리해서 말해줄 수 있으니까."
" 알았어. 여기 흑요석..."
파앗
나는 천우진에게 흑요석의 술법을 시전해 줬다. 그러자 천우진은 잠시 음미하듯 받아들이다가 말했다.
" 그랬군. 왜 구천현녀께서 이 자리에 있으신지 궁금했는데 그런 이유였어."
" 신공표가 내게 '힘'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어. 망량은 너를 데리고 가면 될거라고 말했고."
" 일단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마."
천우진은 말을 이었다.
" 5년 전, 나는 제갈사놈의 책략대로 이 달이 반왕전일 거라는 예측을 하고 달로 오게 되었다. 다행히 고대의 술수 중에는 우주의 진공을 안전하게 넘나들 수 있는 게 있어서 몇 개의 술수를 응용하니 쉽게 올 수 있었지. 게다가 세계수의 힘을 얻었기에 술력이 강력해져서 쉬웠다."
" 흠. 이 달은 반왕전인 거야?"
" 좀 끝까지 들어 봐라."
약간 신경질을 낸 천우진이 말했다.
" 이 달은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지만 이족(異族)은 꽤 많이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벌인간 부족을 비롯해서 대략 7개 부족이 있지. 물론 인간과 유사한 문명을 이루고 있는 건 이 벌인간들 뿐이고 나머지는 전형적인 사악한 이족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벌인간 부족에 잠입해서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었다."
" 지금도 알아보고 있는 중인가?"
" 아니. 좀 성가시게 되었다는 말이다."
천우진은 몸을 뒤로 길게 뉘이며 말을 이었다.
" 이 달 자체는 반왕전이 아니고 반왕전으로 통하는 차원문의 역할이다. 그리고 나는 반왕전에 한 번 잠입한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 나와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다시 들어갈 기회를 얻기 위해 계속 머물고 있는 중이지."
나는 천우진의 말을 듣자 의아해서 대꾸했다.
" 그럼 뭐가 성가시다는 거야? 성가실 일이 없어 보이는데."
" ......"
천우진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 예전에 네 녀석이 몇 번이고 싸웠던 월요의 수호자, 기억나냐?"
" 이자나기노미코토."
" 그 놈이 과거에 지배하던 영지가 바로 이 달이었고, 아직도 그 추종자인 거대무리들이 남아 있지. 그놈들은 제곡이 달을 지배하게 되자 금성(金星)으로 피신했으나 다시 달을 거쳐서 우리가 사는 지구(地球)로 회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 ......?"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서문혜가 침착하게 천우진의 말을 받았다.
" 이유가 있겠군요. 그들이 우리 별로 회귀하려는 이유."
" 그렇소. 목적은 보나마나 이자나기노미코토의 부활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문제는 수천 년 동안 금성으로 쫓겨나 있던 놈들이 되돌아올 수 있게 된 이유..."
천우진은 순간 참혹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말했다.
" 그건 나 때문이오."
" 무슨?"
갑자기 왜 천우진이 자기탓을 한단 말인가?
여태껏 본 적 없던 모습에 나와 서문혜가 약간 당황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 내가... 세계수를 부숴버렸기 때문이야."
" 잠깐.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차분하게 설명 좀 해줘."
" ......"
그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후우, 나는 신시의 결전 당시에 제갈사의 책략대로 신단수의 중심에 잠입해서 그 핵을 부숴버렸다. 그 덕에 아군은 십이율주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그건 사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 신단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신단수는 즉 세계수. 아홉 개의 세계를 이어서 평행세계를 통괄시키며 강대한 역장(力場)을 발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혼돈에서 태어난 가장 완벽한 생명체이며 가장 신의 본질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그건 [옛 지배자]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어. 신단수는 동북 지역을 지킴과 동시에 이 세계에서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신물(神物)이었던 거다."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생존권...?"
천우진이 말했다.
" 이 달이 천혜의 방어막이 되어서 외부세계의 유성이나 혜성을 막아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단수는 외계(外界)에서 강력한 이족이 섣불리 넘어올 수 없도록 막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 그럼 신단수가 붕괴된 지금은, 강대한 이족이 다른 세계에서 쉽게 넘어오게 되었단 말이냐?"
" 그래."
그는 약간 고개를 떨구었다.
" 이자나기노미코토를 따르다가 금성으로 내쫓긴 거대 일족의 이름은 아마츠카미(天津神). 한때 동영을 지배하던 이계의 신족들은 이제 곧 달을 경유해서 지구에 강림할 것이다. 조만간 지상은 틀림없이 큰 혼란에 빠지겠지..."
" ......!!"
아마츠카미(天津神)!
나는 아베노 세이메이와의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 당신들 중원인들은 삼황오제의 가호를 받았고, 반도인들은 단군, 삼사, 십이율 등의 보호를 받았지. 그러나 동영땅에서는 태초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를 비롯해서 아마츠카미(天津神)들이 쫓겨난 후 변변찮은 가호도 하나도 없이 마(魔)와 요괴에 맞서야 했다. 그래서 중원보다 더 극악한 악행과 참극도 심심찮게 일어났지.]
동시에 천황과 나눴던 대화도 생각났다.
[ 그 곳은 타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불리며 자네들이 생각하는 신계(神界)같은 곳일세. 그러나 내가 생각해보니, 바로 그 곳이야말로 이족의 근거지일 듯 하더군.]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요?]
[ 천황에게만 비전(秘傳)되기를, 타카마가하라는 신(神)이 찾아온 대지가 아니라 불길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이며 통로일세. 그곳에서 도래한 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이 동영땅에서 신으로 군림한 곳이지. 나는 바로 그곳이 이족이라는 존재들이 거처하는 장소일 거라 생각하네.]
[ 고려(高麗)의 거창(居昌)이라는 지역에 타카마가하라의 통로가 있다고 알고 있네. 거기에 가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일세.]
" ......"
상황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생각하다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 즉... 원래 암천향에 살고 있던 이족이자 신족이 아마츠카미라는 놈들이고... 그 우두머리가 이자나기노미코토였고... 그놈들이 동영을 지배하며 깽판을 치다가... 삼황오제에게 이자나기노미코토가 봉인된 후 금성으로 쫓겨났다는 건가?"
" 꽤 상황분석력이 좋아졌군."
" 제길. 니가 칭찬하니까 어색하잖아."
나는 투덜거렸지만 천우진은 그다지 안색이 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자신의 공(功)이 아니라 과(過)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안색이 좋을수가 없는 것이다.
" 그 말대로다. 곧 아마츠카미들은 지상에 도래할 것이고, 그걸 막을 여력은 현재 없어. 이건 모두 세계수를 파멸시킨 내 잘못이다."
" 응? 삼황오제가 알아서 막지 않겠냐."
이어진 천우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 삼황오제가 막을 거라면 애초에 아마츠카미들이 제곡의 영토인 달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겠지. 하지만 내가 5년간 머물면서 얻게 된 정보에 따르면 제곡은 아마츠카미들을 지상에 들여보내 줄 생각으로 보였다."
" ......!!"
" 아마 이자나기노미코토의 봉인이 풀리는 것도 방관하겠지."
뭐라고?!
이건 정말 예상 못한 일이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삼황오제들이 이 세계의 윤회전생을 갖고 노는 개새끼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문명이 최소한 유지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옛 지배자]인 이자나기노미코토가 부활하는 걸 그저 방관하고, 그 추종세력이 달을 거쳐서 지상에 회귀하는 것까지 봐 준다니?!
슈우욱
그 때 내 옆에 구천현녀가 영체를 드러내며 말했다.
[ 천우진이여. 그렇다면 삼황오제는 이미 자신들의 가면을 벗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구천현녀시여.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구천현녀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로했다.
[ 신단수는 이족을 억제하는 역할이었으나 삼황오제와 천계의 영향력을 암암리에 막는 역할도 하고 있었지요... 신단수가 부숴진 김에 그들은 이자나기노미코토를 부활시켜 인과율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자기자신들이 직접 칠요를 뽑아서 세계를 멸망시킬 빌미를 만들 생각일 것입니다.]
" ......!!"
[ 아마츠카미들이 지상에 도래하여 날뛰기 시작하면 삼황오제의 의도대로 되겠죠. 아마츠카미들은 [옛 지배자] 정도는 아니지만 중상위 신격이므로 천계의 힘으로는 그들을 막기 힘듭니다. 지상의 문명은 붕괴되고 반도, 대륙 할 것 없이 아마츠카미에게 지배당해서 악신을 섬기게 되겠죠.]
" 아니 그건..."
[ 삼황오제는 바로 그 직후에 질서의 재창조를 내세우며 칠요를 꺼내들거나 직접 강림해서 아마츠카미를 다 죽이고 세계를 일소하려는 계획일 겁니다.]
나는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 아마츠카미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가면을 벗으려는 건가.'
삼황오제에 의한 세계의 파멸!
그건 이미 전욱이 칠요를 들고 중원대륙을 멸망시키는 광경을 직접 보았던 내가 소름끼치게 체감했던 일이었다. 삼황오제 중 대부분은 종말까지 기다리기를 싫어하며 빠르게 '가면'을 벗으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반대하는 건 기껏해야 여와 정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 그렇겐 안 돼!!"
" 소리 좀 지르지 마라. 결계를 치지 않았다면 다 들켰겠군."
" 아마츠카미라는 놈들은 언제 달에 오는 거지? 놈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다."
천우진이 비교적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제곡이 그들을 달에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 원칙상 아마츠카미들은 달을 경유하지 않으면 금성에서 바로 지구로 갈 수 없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삼황오제가 그들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안전장치지. 그러나 제곡 본인이 그걸 원하는 이상 이 방법은 무리다."
" 두 번째 방법은?"
" 칠요 중 금요(金曜)의 힘을 빌려서 금성을 봉인하는 것이다."
" 뭐?"
" 잘못 들었냐? 금요의 힘으로 금성을 봉인하면 된다고."
" 그게 돼?"
" 제기랄...!! 네놈은 어떻게 5년동안 달라진 게 없냐? 하나하나 다 놀라면서 망둥이처럼 펄떡대는 버릇은 언제 고쳐지는 거냐."
천우진이 갑자기 성질을 내다가 말했다.
" 금요는 금성의 백(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조그마한 기물에는 금성의 모든 영력(靈力)이 맺혀 있으니, 금요를 매개로 봉인술을 시전하면 아마츠카미들이 다시 수천 년 동안 봉인될 게 분명하다. 달에 오기 전부터 봉쇄하는 거지."
" 오오!"
금요에 그런 힘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금요가 서방세계 수호자의 봉인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든 빼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츠카미들이 귀환하여 세계가 파멸로 몰리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해봄직 했다.
서문혜가 옆에서 듣다가 놀란 듯 말했다.
" 칠요는 정말 대단하군요... 아무리 신급 보패라고 하지만 칠요의 행성 중 하나를 봉인해버릴 수 있다니."
" 삼황오제가 종말에 대비해서 직접 최선을 다해서 만든 게 칠요라고 할 수 있소. 신급 보패라는 말조차도 칠요를 낮게 평가한 거겠지."
나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 그럼 마지막 방법은 뭐야?"
" 세계수를 되살리는 거다. 봉인이 다시 만들어지면 아마츠카미들이 귀환하지 못하겠지."
" ......? 죽었잖아. 핵이 부숴졌는데 어떻게 살려."
내 말은 멍청한 소리가 아니다. 아무리 천우진과 내 술법실력 차이가 천양지차라 하더라도 나 또한 술법의 기초를 알고 있다. 신단수의 핵이 부숴졌다는 건 인간으로 치면 심장이 터진 것과 마찬가지라서, 두 번 다시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자 천우진이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 세계수를 되살리는 방법은 있다."
" 무슨... 아!"
나는 반문하다가 뭔가를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내 머릿속에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 사(邪), 너는 세계수의 뿌리에 고여 있는 영력을 손에 넣고 그 안에서 다시 천 년의 생명을 삭히게 될 세계수의 씨앗을 얻으려고 하는 거겠지.]
[ 난 저 안에 세계수의 씨앗과 환생체가 있다고 확신한다. 사, 덤빌테면 덤벼봐라.]
그랬다.
신시의 결전 당시에 제갈사와 제갈유룡은 세계수의 뿌리 부근에서 마주쳤고, 그들의 공통된 목적은 세계수 씨앗의 회수였다! 세계수의 씨앗을 갖고 있으면 다시 뿌려서 생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세계수의 회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제갈사가 신단수의 씨앗을 갖고 있어!"
" 그래. 제갈사한테서 씨앗을 받아 오면 다시 신단수를 키울 수도 있지. 명계에 가서 살아돌아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말한 천우진이 슬며시 바깥을 쳐다보며 말했다.
"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지상에 돌아가서 금요를 찾는 거라고 본다. 지금 당장 우리의 힘으로는 명계 최심부에 가서 그 둘을 구출할 수 없으니 칠요라고 하는 담보를 먼저 손에 넣어야겠지."
" 그렇겠군."
나는 팔짱을 끼며 생각하다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 아마츠카미들이 귀환하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남았지?"
" 길면 삼 년, 짧으면 일 년이다."
" 시간이 없군..."
나는 탄식성을 흘렸다. 천우진은 아마 반왕전에 잠입하려다가 아마츠카미의 정보를 주워듣고는 그 정보를 캐내는 쪽으로 선회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 월궁 항아의 광한전이라는 건 반왕전 내부에 있던가?"
" 확인 못 했다. 내가 반왕전에 발을 들인 건 사실이지만 심부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어."
" 월궁 항아는 반왕전의 안쪽에 있다는 말이군."
" 그런 거지."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 좋아, 돌아가자."
천우진이 아군에 들어왔으니 신공표의 조건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삼황오제의 이목을 속이고 만신전 내부로 진입할 정도의 술법사는 그 이외에는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