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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구천현녀가 만들어낸 은빛 통로로 한 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뒤이어 서문혜도 따라왔고, 나는 주변의 풍경이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별하늘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혹시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았다.
' 숨이 쉬어지는군.'
달 또한 대기가 희박한 우주공간일 거라고 생각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그게 아니다. 숨이 멀쩡히 쉬어지고 있었고 서문혜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구천현녀가 말했다.
[ 시해지술로 절대생존을 유지시키는 중입니다. 공기의 문제는 없을테지요.]
" . . . 아. . . "
나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부 무음(無音)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공기가 없기 때문에 소리가 전파되지 않는 듯 했다. 아무래도 이 곳에서 육성으로 대화하는 건 불가능한 듯 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전음을 쓰는 게 나아보였다.
......
나는 광활하게 뻗어있는 무미건조한 회백색 대지, 그리고 한없이 깜깜하기만 한 우주공간을 보자 이질감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둥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가볍게 몸이 튀어올랐다. 딱히 신법이나 경공을 쓴 것도 아니었는데 몸 자체가 너무 가벼운 것이다. 나는 마도지식으로 이 현상이 달의 중력이 약해져서 일어난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신중해졌다.
' 천근추 수법으로 중심을 잡아야겠군.'
경공을 못 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섣불리 크게 뛰어오르는 건 자중해야 할 듯 했다. 자칫했다가는 달에서 튕겨져나가서 우주의 미아가 될 수도 있다.
타닷
나는 서문혜와 함께 뛰어서 대략 십여 리 정도를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제곡의 신전처럼 보이는 건 어디에도 없었고 그저 황량한 백색 대지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저만치에 내가 살던 별이 보이는 걸 보니 황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구천현녀가 그때쯤 말했다.
[ 이 대지에서는 제곡의 영향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나는 입 대신 전음으로 대답했다.
[ 달이 반왕전 아니었습니까?]
[ 그렇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직접 오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그리고 이 대지에 신력(神力)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신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달이 반왕전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만귀전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삼황오제의 거처에는 엄청난 존재감이 끓어오르게 마련이었고 신력 또한 활화산처럼 유동했다. 그러나 굳이 구천현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 달의 정경은 딱히 삼황오제의 만신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 광활한 곳에서 천우진을 찾는것도 참 힘든 일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고 있다가 서문혜의 전음을 들었다.
[ 백웅 님. 저 멀리에 뭔가가 움직입니다.]
뭔가가 움직인다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서문혜와 거의 동시에 기척을 숨기며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지켜보았다. 거리는 대략 오 리 정도였는데 확실히 분지 아래쪽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안력을 돋우어서 그 모습을 확인하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 이족인가... 아니, 그건 아닌것 같기도...'
이족이라기 보다는 꽤 사람처럼 생겼다. 머리와 팔 다리의 형태가 딱 인간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몸에 날개가 달렸고 눈이 여러 개 달려있는 듯 했다.
쉽게 말하자면 벌인간.
이족이라면 이족이겠지만 저렇게까지 인간과 유사한 경우는 요괴나 이형종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내 지식 안에서는 저런 벌인간을 목격한 적이 없었으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섣불리 조우하는 것도 좋지 않았기에 나는 서문혜와 함께 몸을 바싹 엎드린 채 벌인간의 행동을 관찰했다.
공기가 없는 달인데도 벌인간은 날개를 팔락대며 잘 움직이는 것 같았다. 놈은 분지 바닥에서 뭔가를 캐내는 중인 듯 했는데 한참 후 자신의 품에 뭔가를 한아름 안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벌인간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 그 분지로 다가가서 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깊이가 십여 장은 될 법한 깊은 분지의 바닥에는 마치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식물이 있었는데 역시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식물이 줄기를 뻗어서 안개덩어리를 뭉친 듯한 꽃을 피운 걸 발견했고, 그런 꽃이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여기는 물도 공기도 없는데 어떻게 생명체가 자라는거지?'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구천현녀가 말했다.
[ 아까 벌인간이 가져간 것은 이 식물의 꽃이었던 것 같군요.]
[ 이 꽃은 뭘까요?]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구천현녀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정도면 달의 생태계는 매우 독자적인 듯 했다. 나는 일단 식물과 꽃을 몇 개 따서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근처에 숨어서 벌인간이 다시 오지 않는지 기다렸다.
위이잉
아니나 다를까 약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어디에선가 벌인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벌인간이 아까처럼 한 마리가 아니라 무려 수백 마리나 되었고, 놈들은 이윽고 식물에 달라붙어서 경쟁하듯 열심히 꽃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놈들이 다 따고 날아가자 은밀히 뒤를 쫓았다.
얼마나 갔을까.
나는 벌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뭔가 흔적이 많아지고, 여기저기에 고대의 유적같이 생긴 건축물이 보인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벌 인간들이 떼를 지어서 거대한 신전같은 건물이 앞다투어 들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근처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 여긴 확실히 도시 같군...'
지상에서 보았던 그 어떤 건축양식과도 다르다.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게 고려되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이형의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듯 했다. 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도시를 지켜보다가 하늘 위에 뭔가가 날아다니는 걸 알 수 있었다.
삐이익
기이한 소리를 내며 빛을 내뿜는 커다란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저 새의 위에 뭔가 타고 있는 걸 발견하며 모습을 숨겼다. 나는 새 위에 타고있는 놈을 본 적이 있었기에 눈을 부릅떴다.
' 저건, 봉선의식 때 봤던...!!'
그 존재는 사람의 얼굴에 개의 귀, 그리고 알 수 없는 짐승의 몸을 하고 있었다. 외양은 두말할 것 없이 괴물이었으나 그 존재에게서는 사악함 대신에 신령스러움이 흐르고 있어서 신적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투선 예를 소환하던 의식.
그 때 예가 내 설득에 힘입어 적궁백시를 주려고 할 때 팔괘가 그의 몸 근처에 소환되어서 막았고, 동시에 천상에서 동방상제 제준이자 제곡의 사도인 사비시신(奢比尸神)이 방해했다. 사비시신은 그 때 예를 말리며 말했었다.
[ 제준의 뜻 다음과 같다. 적궁(赤弓)도 백시(白矢)도 천제(天帝)의 소유. 필멸자(必滅者)에게 내리기에는 과한 축복일지니.]
하지만 예는 성질을 내면서 그의 만류를 뿌리쳤고, 나는 그 생에 적궁백시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결과는 썩 좋지 않았으나 여하튼 인상깊은 일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
신령스러운 새 위에 타고 있는 건 바로 제준의 사도, 사비시신!
그 때 나와 서문혜의 몸이 살짝 빛으로 뒤덮였다. 구천현녀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게 들렸다.
[ 조심하십시오. 인간의 무공이나 은신술로는 사비시신에게서 완전히 기척을 감출 수 없으니 임시로 시해술을 걸었습니다. 오래는 모습을 숨길 수 없으니 서둘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 구천현녀 님. 사비시신과 싸우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 지금의 저라면 이길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대에게 수요를 공양받아서 전신의 힘을 되찾았기 때문. 본디 저 사비시신은 삼황오제의 사도로써 막강하기 짝이 없는 천신급 존재라는 걸 기억해 두십시오.]
[ 예, 알겠습니다.]
[ 그리고 지금은 잠입해 있는데다 이 곳은 제곡의 수중에 관리되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분란을 일으키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상황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의 봉선의식에서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저 하늘위에 날아다니는 사비시신은 정통적인 삼황오제의 사도에 속했다. 그 말은 과거에 내가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와 임명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삼황오제에게서 막강한 권능을 받아 사역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 그리고 인간인 나와 달리 원래부터 신적 존재인 사비시신은 사도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게 가능하겠지...'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이 자리에 삼황오제 제곡이 직접 나타나서 우리를 모두 잡아갈 가능성도 있다. 지금 이 자리는 사비시신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 되었다.
삐이이
다행히도 사비시신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 새를 타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사비시신이 가 버린 후 구천현녀에게 말을 걸었다.
[ 달은 반왕전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반왕전이 아니라면 삼황오제의 사도인 사비시신이 직접 순찰을 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 ......]
[ 구천현녀님?]
구천현녀가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렇다면, 달 그 자체가 거대한 차원문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 네?]
[ 사비시신의 역할은 문지기로 보입니다.]
[ ... 흐음!]
나는 구천현녀의 가설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곳에 제곡의 신력이 깊게 미치지 않으면서도 사도인 사비시신이 돌아다니는 게 설명된다.
달 그 자체가 반왕전이 아니다.
달은 삼황오제 제곡의 반왕전으로 통하는 문일 것이다.
' 오거천문을 열이 지키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인가?'
만귀전으로 통하는 관문인 오거천문은 만귀전의 신격인 열이 직접 지키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봉래도에서 굳이 엄중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삼황오제들이 신선들에게도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차원문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시에 나는 삼황오제들이 거점을 지키는 체계를 생각하자 골치아파졌다.
' 빌어먹을... 삼황오제를 쓰러뜨리려면 만신전으로 통하는 문의 문지기를 먼저 쓰러뜨려야 하는데...'
정작 그 문지기들은 하나같이 대라신선을 뛰어넘었거나 삼황오제의 사도!
이런 식이면 삼황오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전멸할 가능성이 지대했다.
나는 수상한 눈빛으로 아까 벌인간들이 들어간 건물을 살피다가 서문혜에게 눈짓을 했다. 우리는 잠시 후 건물 내부로 진입해서 은신술을 쓰며 접근했고, 오래지 않아 내부 광경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우우우
벌 인간들 수천 마리가 거대한 광장에 모여 있었고 그 곳에는 아까 벌들이 따던 꽃이 작은 동산을 이루듯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참수당한 벌 인간들의 목이나 사지 따위가 여기저기에 흩날려 있었다. 생각 외로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더 무서운 일은 잠시 후 벌어졌다.
화르르륵
백염(白炎)이 치솟아오른다. 그 백염은 동산처럼 모여있던 꽃무덤을 한꺼번에 불태웠는데 문제는 벌 인간들의 시체도 같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염의 화력이 정점에 오르자 일순간 제단에서 새들이 나타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새들은 예전에 사비시신과 함께 소환되었던 것들이니 아마 제곡 휘하의 신격들이리라.
삐이이이
그 광란의 춤이 끝난 후 벌 인간들은 한숨 돌렸다는 듯 여기저기로 가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 인신공양이군...'
벌 인간들은 현재 삼황오제 제곡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번영과 제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곡이 좋아하는 꽃을 따서 바침과 동시에 자신들 중 일부를 죽여서 인신공양으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유지를 위해.
" ......"
기분이 이상하다.
인신공양을 하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요괴나 이족, 반마(半魔)들도 위대한 존재를 섬기면서 인신공양을 하는 것 마찬가지였다는 걸 알게 되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필멸자와 신의 격차가 새삼 엄청나게 크다는 것 또한 느껴졌다.
' 음... 수확이 있군.'
그렇다면 다음번에 달에 올 수가 있다면, 저 커다란 안개꽃을 따 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전형적인 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야. 따라와."
벌 인간은 정확히 우리를 보고 있었다. 시해지술로 존재감을 완벽하게 없애고 무공을 이용해서 기척까지 숨겼는데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진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원어다.
나와 서문혜는 동시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본 후, 군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벌 인간은 우리를 데리고 웬 커다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말했다.
" 참 뭐라 해야할지. 암천향에서 살아돌아왔다는 말이냐?"
이 건물 내부에는 공기가 존재하는 듯 말을 멀쩡하게 할 수 있었고 술수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벌 인간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나는 씨익 웃었다.
" 좀 대단하지 않냐?"
" ... 흥."
" 그나저나 그 모습은 변신술로 바꾼 거냐."
내 질문에 벌 인간이 대꾸했다.
" 그 정도로는 제곡의 권속인 사비시신을 속일 수 없지. 이건 변신술이 아니라 세계를 속이는 술수다."
" 그렇게 말해도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투덜거렸지만 벌 인간은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 사형이 불러서 왔겠지? 사형은 무사하시냐."
" 그래."
" 다행이군. 네 녀석도 잘 돌아왔다."
어?
이 녀석이?
나는 다소 눈에 이채를 담고 벌 인간을 쳐다보았다.
" 넌 5년동안 많이 변했군."
예전의 녀석이라면 저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스스
그러자 천천히 벌 인간의 모습이 인간의 것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놈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 불만 있냐?"
인상을 쓴 채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의 주인은 천우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