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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검마가 베루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건 꽤 지난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무공이나 무림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화적인, 술법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명석한 두뇌 덕에 최소한의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베루스에게 말했다.
" 이 [신의 무덤]에 봉인된 놈은 지표상의 모든것을 한번에 없앨 정도의 존재라는 거군..."
" 그렇소. 그리고 아무리 거신이라 해도 그럴만한 존재는 한정되어 있소. 그런 존재는 신화속에서도 결코 흔한 존재가 아니오. 그러므로 내 생각엔..."
베루스는 그 말을 하고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 ......"
뭔가 말하기에는 아직 단서가 부족한 걸까?
베루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검마. 하지만 저 밑의 봉인을 이용해서 무사시와 교섭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오."
" 으음."
" 내가 직접 마주친 무사시는 '싸운다'고 하는 극한의 감정에만 지배받는 투귀(鬪鬼). 자신이 소멸하든 말든 그런 건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닐 게 분명하오."
" 그렇겠지."
그런 건 베루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현재의 무사시와 칼을 부딪힌 검마는 상대가 어떤 감정상태인지를 무사의 육감으로 그 자신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으리라.
하지만 - 그럼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밑에 있는 봉인을 풀면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실이다. 전생자인 백웅이라면 나중에 이 정보를 이용해서 크게 일보전진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무의미했다. 검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베루스에게 말했다.
" 베루스. 당신은 어떻게 내게 시간역행의 기억을 전수할 수 있는 것이오?"
" 나는 나를 제외한 단 한 명의 기억을 전승하며 시간의 굴레를 되돌릴 수 있소."
" 역시 그랬군. 그래서 혜아는 몰랐던 거야."
검마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말했다.
" 그렇다면, 이번에 만일 실패하면 내가 아닌 혜아의 기억을 전승해줄 수 있겠소?"
뜻밖의 제안에 베루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 이상한 선택이군. 저 여인은 뛰어난 무술실력을 지니고 있으나 당신에게는 미치지 못하는데."
" 이유가 있소. 부탁하오."
" 그렇다면야 한번 시도해보겠소."
" 우리는 다시 내려가 볼테니 시간을 끌어 주시오."
" 알았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승산이 희박한 싸움.
하지만 그 싸움 속에서 검마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본래라면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사파지존인 검마라 해도 이토록 절망적인 싸움에서 끝까지 자신의 정신력을 지키며 냉정하게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검마는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 백웅의 기억을 전승받은 영향인가?'
검마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아수라장을 겪어왔다고 자부하지만 전생자인 백웅에는 비할 수 없었다. 백웅은 실제로 23번 죽었으며 죽을 위기는 그 몇 배를 훨씬 넘었으리라. 사람이 한두번 죽을뻔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알고 있는 검마는 현재의 백웅이 지니고 있는 담대한 정신력이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백웅이 겪어왔던 온갖 간난신고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아주 평범한 상황이기 때문에 냉정해질 수 있으리라.
" 그럼 내가 다시 무사시를 막겠소."
" 부탁하오. 한 식경만 벌어주시오."
" 해 보지."
파앗
검마와 서문혜는 베루스의 공간전송을 받아서 다시금 [신의 무덤] 최하층으로 올 수 있었다. 단 이번에는 한번에 최하층에 도착해서, 이전에 가보았던 기억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문혜가 말했다.
" 아버님. 어떤 작전이 있으십니까?"
" 혜아야."
" 네?"
검마는 차분한 눈으로 눈 앞에 꽂혀있는 거대한 심장과 창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 네게는 신화의 혈맥과 힘이 존재한다. 그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 네..."
" 사실 제갈사가 한번 내게 언질을 해준 바가 있다. 그는 하필 너에게만 신화의 힘이 발현된 이유를 선조회귀(先祖回歸) 현상 때문이라고 했었다."
" 선조회귀?"
서문혜가 의아해하자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 수십, 수백 대 이후에 선조의 혈통과 기질이 발휘되는 현상이라고 했지. 아마 네 어머니의 가문인 서씨(徐氏)의 가계는 먼 옛날 거신족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고 극도의 우연 끝에 네게 혈통의 특징이 발현된 것이라 본다. 네가 백발인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 ......"
" 너는 그 힘을 이어받은 걸 저주라 생각지 않는다 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도중에도... 왜 하필이면 너인지, 어째서 내 딸이 저주스러운 신화의 진실과 연결되어야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 아버님..."
검마의 눈빛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버지로써 크나큰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다. 백웅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도 혈육이 앞으로 어떤 고초를 겪을지 알고 있으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거, 나는 백웅이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 믿고 그 사실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혜아야. 너는 저 창을 뽑다가 신적인 존재가 네게 호통을 쳤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 보아라."
검마가 조용히 계책을 알려주자 서문혜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건 마치 백웅이나 제갈사와 같은 무모한 계책이었기 때문이다. 서문혜가 말했다.
" 아버님. 실패하면 큰일입니다. 베루스까지 같이 죽을지도..."
" 베루스는 내가 볼 때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를 보호하려 들기 때문에 약해보이는 것 뿐, 그가 진심을 다하면 아마 천지천상의 힘의 균형을 기울일 수 있을게 분명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는 존재겠지."
" ......"
" 그는 무사시에게 당할 자가 아니고, 우리가 걱정할 상대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걱정부터 해야한다."
서문혜가 말했다.
" 제가 걱정하는 건 실패했을 때 제가 혼자서 마지막 역행 기회를 등에 지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사시를 상대할 계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 그것도 걱정마라. 너 혼자 가지는 않을 것이다."
" 네?"
" 무인이 아닌 제갈사에겐 말하지 않았다만... 내게는 하나의 가설이 있다. 지금은 그걸 증명할 기회다."
검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고요히 눈을 반개하며 최고의 집중상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서문혜는 그런 부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 해내야 해.'
그녀는 검마가 딸인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구멍투성이인 임시계책을 자신있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실패확률은 성공확률보다 몇 배나 높았고, 검마가 마음속에 지고 있는 부담은 보이는 것의 수십배일 것이다. 그러나 검마는 그 부담감을 모두 끌어안고 자신이 죽을 길을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왜인가.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이리라.
서문혜는 이 순간, 그저 말 뿐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가 세워졌다.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아버지가 모두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타닷
서문혜는 검마의 집중상태가 고조되기 시작하자 창대에 달려들어서 창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쉽게 뽑히는 걸 느꼈고 창대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기운이 훨씬 더 옅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 개째를 뽑았을 때, 아까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 감히!! 거신족이여, 네 동족을 구하러 내 봉인에 간섭했느냐? 거기 가만히 있어라, 곧 내가 너희를 잡으러 가리라. 허나 만일 그 창을 그만 뽑고 물러난다면 한번 봐 주겠다!]
서문혜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려대는 그 외침을 듣자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잠시 두통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신을 모아서 그 외침에 화답했다.
[ 신이시여! 이 봉인을 더 이상 뽑지 않겠습니다. 무례에 사과드리며, 대신에 하나의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서문혜가 화답한 게 뜻밖인지 머나먼 존재는 잠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소 서늘한 말투로 서문혜에게 대답했다.
[ 자세히 보니 인간에게 거신의 형질이 발현한 거군. 그래, 너같은 잡종이 본좌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 하는가?]
상대는 대화를 들을 의지가 있는 듯 했다. 왜냐하면 서문혜가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그나마 '잡종'은 되기 때문에 벌레인 인간보다는 대화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문혜는 본좌라고 칭한 존재에게 말했다.
[ 어떤 [옛 지배자]에게 빙의된 자가 저를 죽이려 합니다. 그 자를 없애 주십시오.]
[ 호오...]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뭔가 비웃듯 말했다.
[ 머나먼 곳에서 온 놈이 감히 이 곳에서 난장을 치고 있었군. 저런 놈은 없애버려야겠지.]
수락한 건가?
서문혜는 내심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어진 말에 마음이 덜컹거렸다.
[ 대신 그 육체는 앞으로 내 것이며 네 영혼은 만귀전의 것이 될 것이다. 너는 내 시종이 되어 영겁토록 만귀전에 거하리라. 이 계약을 받아들이겠는가?]
영겁토록 만귀전에 속하게 된다.
그것은 사후에도 전혀 구원을 기대하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인육을 즐기는 삶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서문혜는 이 제안을 들을 거라고 미리 예상했다. 그리고 검마가 충고해준대로 대꾸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 그럼 본좌도 힘을 빌려줄 수 없다.]
[ 그럼 창을 다 뽑아버리겠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니.]
[ 뭐라고!]
[ 어쩌시겠습니까?]
서문혜의 말에 상대편은 화가 부글부글 끓는 듯 노성을 침음성처럼 흘리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은 듯 말했다.
[ 꽤 당돌하군. 하지만 너는 꽤 유능해 보이니 이번 한 번만 힘을 빌려주마.]
[ 감사합니다.]
상대가 비웃듯 말했다.
[ 네가 감사할 수나 있을까...]
우우우
다음 순간, 서문혜는 자신의 의식이 끊기며 머나먼 차원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강림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문혜는 갑작스럽게 의식이 튕겨 날아가면서, 만장단애에서 밀쳐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에 절규했다.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고 수십 마리의 귀신들이 마중나와서 그녀의 영혼을 만귀전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서문혜는 위대한 존재가 강림함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이 만귀전에 내팽개쳐 졌다는 걸 알아챘다.
가기 싫어.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와중에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게 어떤 길인 줄 알 수 있었다.
수라의 길.
백웅이 줄곧 선택하곤 했던 마지막 선택은, 평범한 존재에게는 말 그대로 생지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 것이다. 백웅이었다면 이토록 거친 대우는 하지 않았겠지만
역시 서문혜의 행동이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 버텨야 해...'
서문혜는 안간힘을 써서 어떻게든 이 세상에 자신의 영혼을 붙잡아두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신족의 피가 섞인 서문혜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신격의 힘을 빌리려 하면 비참한 결과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파앗
[ 흐음.]
동시에 서문혜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한 구석에 명상을 하고 있는 검마를 힐끗 쳐다보더니 관심을 두지 않고 지상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그 존재에게 있어서 일개 인간따위는 버러지나 다름없었기에 신경쓸 이유도 없었다.
지상에 도달한 '그 존재'는 서문혜의 몸을 빌어 두 존재가 전투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베루스라고 하는 서양 예수회의 술법사와 괴물로 화한 미야모토 무사시가 싸우는 모습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종일관 엄청난 힘으로 베루스를 베어죽이려 하고 있었지만 베루스는 시꺼먼 방어막을 소환하여 버티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만 베루스의 방어막도 한계가 있는지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그 존재는 양손을 뻗어서 자신이 해치울 존재를 향해 권능을 시전했다.
퍼엉!!
시공간이 조작되며 괴물 무사시의 모습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시간을 정지시키고 수십 개의 음인(陰刃)을 생성시켜서 베어버리는 공격을 맞이하자 아무리 무사시의 내구도가 좋아도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괴물 무사시의 시선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서문혜에게로 향했고,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네놈... 무슨 생각으로 훼방을...]
그 말에 서문혜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 너 따위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 영지에 침범한 자는 썩 나오거라.]
우드득 우드득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무사시의 인면(人面)이 마치 군체와도 같은 괴물의 몸뚱이 속에 파묻히고, 대신 그 자리에서 마치 용(龍)과 같은 파충류의 머리가 쑥하고 밀려나왔다. 잠시 후 무사시의 몸 자체가 인간에서 용인(龍人)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했고 더 이상 인간의 흔적이 남지 않게 되었다.
사망한 무사시를 괴물로 변화시킨 진짜 실체가 무사시의 인격을 집어넣고 직접 바깥으로 나오는 현상이었다. 용인으로 화한 존재는 컥컥거리며 웃어대었다.
[ 흐후후후. 크큭. 이번에는 네가 나와 놀아주려 하느냐? 시덥잖은 네 영역을 지키고자? 이깟 대륙 따위는 너나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 터.]
서문혜에게 강림한 존재가 싸늘하게 받아쳤다.
[ 닥쳐라. 나는 너 따위가 조롱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니 그 아가리를 닫는 게 좋을 것이다. 장난감을 갖고노는 건 좋지만 우리 사이의 관계를 잊지 말라.]
[ 흐음. 그렇겠지. 무례를 사과하마.]
뜻밖에도 용인은 순순히 사과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의 '장난감' 앞에 나타난 존재는 함부로 조롱할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섣불리 싸움을 걸었다가는 그의 본체에까지 타격이 갈 수도 있었다. 용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나는 폭왕, 백 개의 별을 태운 자! 그대 오제(五帝) 전욱(?頊)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음이다.]
[ 주제를 파악했으니 다행이군.]
그랬다.
서문혜의 몸에 강림한 것은 바로 삼황오제 전욱!
한때 북방의 지배자였던 전욱에게 있어서 이 척박한 평원 또한 그의 영토였으며, 그는 모종의 사정에 의해 [신의 무덤]이라고 하는 봉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서문혜의 요청에 따라 그녀를 사도로 삼으며 이 자리에 강림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