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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704화 (70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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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검마는 팔부신중과 축융의 대결이 이뤄지고 있을거란 사실은 알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무사시와 결판을 내던 시점에서는 다 끝난 일일 것이고 자신이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책사의 명령대로 잘 움직여서 임무를 수행하는 거였고, 무사시와의 결전도 사실 변수에 불과했다.

검마가 요녕성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약 나흘이 지나서였다. 그는 객잔에 앉아서 창가의 햇빛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있던 서문혜가 말을 걸었다.

" 아버님. 무슨 생각을 하세요?"

" 혜아야."

검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문혜는 신시의 싸움에 끼어들게 하기에는 너무 약했기에 일부러 요녕성에서 기다리게끔 했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살아서 만나게 되었는데도 검마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우(蚩尤).

묘족(苗族)에게 군신(軍神)으로 숭앙받는 신화상의 존재. 물론 치우라는 존재가 현실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중원인은 거의 없으리라. 삼황오제조차 그저 역사상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하는 판에 치우는 한낱 신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바로 그 치우는 신화의 시대에 실존했으며, [옛 지배자]의 힘을 지니고 있는 삼황오제에 맞서서 싸웠던 최강의 거인이었다. 백웅의 전생기억을 넘겨받은 검마는 바로 그 치우라는 엄청난 존재가 자신의 딸, 서문혜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백웅의 전생 중에 서문혜의 몸을 차지했던 흉신의 종복, 나인교주가 서문혜에게 치우에 대해서 아는지 계속 캐물었었기 때문이다.

검마는 그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사별한 아내 서미령의 처가인 서씨 가문이 알게모르게 요동에 있다는 신의 무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했지만 그 이상은 진행하지 못했다.

' 십이율 때문이었지.'

요동과 요녕성은 십이율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지역이다. 이 곳에서 검마의 부하들이 활동하며 정보를 캐면 너무 큰 의심을 사기 때문에 검마는 현지인과 학자를 간접적으로 고용할 뿐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십이율은 반쯤 궤멸했으며 십이율주도 어쨌든 죽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생사결을 벌여서 미야모토 무사시도 죽었다. 지금이라면 검마가 대놓고 요녕성에서 활동하며 [신의 무덤]에 대해서 조사해도 거칠 게 없는 것이다.

그는 서문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 너에게도 백웅의 기억을 전승했지."

" 네."

" 두렵지 않으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좁은 세상... 그 세상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수 있는 존재들과 네가 관련되어 있다는 게."

서문혜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저는 도리어 좋습니다."

" 진심이냐."

" 제게 만일에 치우의 힘이 잠들어 있다면, 그 힘으로 백웅 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테니까요. 언제까지 은인께 짐이 되기는 싫습니다."

" ......"

검마는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하나뿐인 딸이 한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고, 자신은 그 각오를 응원해야하는 입장이라는 게 그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원래 강호의 적수와 싸우는 상황이라면 서문혜의 태도를 칭찬하겠지만, 지금 싸우는 상대는 신이나 마왕같은 엄청난 존재들이었다.

패배하게 되면 어떤 꼴이 되는지는 이미 백웅의 전생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인간세상의 그 어떤 고문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리라. 어쩌면 그냥 죽는 게 나을수도 있다. 그 비극의 수준을 알고 있는 검마로써는 차마 딸을 섣불리 격려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검마는 굳은 눈으로 서문혜에게 말했다.

" 혜아야. 만일 네가 회복할 수 없는 위중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면... 나는 너를 베어 편하게 해 주겠다. 너 또한 내게 그리 하거라."

차마 부모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서문혜는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었기에 되려 환하게 웃었다.

" 아버님을 믿습니다."

죽는 게 나은 상황이 되면 차라리 혈육의 손에 죽겠다는 각오.

그 각오가 부녀 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검마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아니, 원래 세상이 미쳐있었던 거겠지.'

세계의 혼돈에 휘말리고자 한다면 광기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것이다. 검마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는 객잔 입구에 다가오는 자에게 말을 걸었다.

" 당산. 이제 왔는가?"

아직 앳된 소년인 당산은 검마를 보자 포권했다.

" 어르신. 간만에 뵙습니다."

" 그 술법사는 데려왔는가?"

" 요녕성 서문(西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왜? 직접 얼굴을 보며 같이 움직이면 될 텐데."

당산이 대답했다.

" 그는 자신의 임무가 아닌 일에 휘둘리는 걸 불쾌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억지로 붙잡아놔서 이번 탐색일을 해주긴 하겠지만 그를 자극하진 마십시오."

" 흠..."

그랬다.

당산이 제갈사에게서 받은 임무는 바로 예수회에서 가장 강력한 술법사를 빌려오는 것이었다. 이름이나 정체는 잘 모르지만 백웅의 전생기억 속에서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제갈사는 당산을 사자로 보내서 마테오리치와 교섭한 후 술법사를 빌려오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면 팔부신중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었기에.

물론 신시의 결전에 맞춰서 불러오지 못했기에 당산은 때늦게 신시에 도착해서 폐허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축융이고 팔부신중이고 전혀 남지 않았다. 당산은 크게 당황했지만 머지않아 검마와의 접선지로 향했고 도시 내에서 전령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위치와 상황을 확인한 것이다.

검마가 말했다.

" 그 술법사는 강한가?"

" 저는 술법을 잘 모릅니다만, 그 자는 맨몸으로 물 위를 언제까지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보이는 능력들은 상식으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산이 조심스레 말을 추가했다.

" ... 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 그래야겠군."

검마는 당산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은밀하고 집요한데다 광오한 천재성을 가진 당산이었기에, 그의 평가는 되려 보통사람보다 객관적인 면이 있었다. 천재 당산이 보기에 힘의 차이가 그 정도로 현격하다면 예수회 최강이란 명성이 아마 사실일 게 분명했다.

검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가 보세."

" 정말로 책사들이 하나도 없는데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 내 자의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문제될 건 없네. 제갈사는 자신이 필요하면 자기 쪽에서 연락하겠다고 내게 말했고, 이번 일도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니."

그는 객잔을 나서며 말했다.

" 그리고 제갈사가 정말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지령을 내렸겠지. 그는 그런 남자다."

" 알겠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요녕성의 서문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곳에는 검고 긴 망토를 두른 괴인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괴인은 검마를 보자 자신의 머리를 가린 두건을 벗으며 말했다.

" 반갑소."

" 당신이 마테오 리치의 요청에 따라 와준 분이오?"

" 그렇소. 나는..."

금발벽안을 지닌 괴인은 뭔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 베루스라고 부르시오."

베루스라는 이름인가.

검마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말했다.

" 베루스, 우리 일을 돕게 해서 미안하오. 그쪽도 바쁠테지만 우리 일에 조금만 협력해 주시오."

"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오?"

검마가 베루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 이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내 부하들이 그 동안 알아낸 [신의 무덤]의 후보지요. 전승을 모은 결과 총 다섯 곳으로 압축되었지."

" ......"

" 왜 그러시오?"

베루스는 검마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이 [신의 무덤]을 왜 찾는지 설명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해주지 않겠소."

역시 그렇게 나오는가.

검마는 차분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 신의 무덤에는 거신족이 잠들어있다는 전승이 있소. 우리는 [옛 지배자]에 대항하기 위해 그 거신족을 깨워서 힘을 얻으려는 것이오."

" 거신족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소? 그들은 엄연히 신족이며 한때 이 세계를 지배한 적이 있소. 본디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월자들이란 말이오! 그런 자들을 함부로 깨웠다가는 큰일날 것이오."

" 반대한다는 말이오?"

베루스가 찝찝해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 적어도 당신들 중에서 술법이나 [옛 지배자]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갖고있는 자는 없는 듯 하군. 문외한들이 어설프게 옛 존재들의 유적을 건드리다가 일어난 참사는 숱하게 많으므로 돕고싶지 않소."

" 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이미 당신의 조력을 약속했는데."

검마가 따지고 들자 베루스는 끙하는 소리를 냈다.

" ... 정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세 가지 안전수칙을 지켜줘야겠소."

" 무엇이오?"

베루스는 손가락 세 개를 내밀고는 천천히 하나씩 꼽아서 내리기 시작했다.

" 하나. [옛 존재]의 부름을 듣게 되면 즉시 내게 말할 것. 둘, 수상한 물건을 만지거나 이종족에게 함부로 접촉하지 말 것. 셋, 내가 후퇴하자고 하면 반론하지 말고 즉시 후퇴할 것."

" 좋소."

검마는 베루스의 말에 동의했다.

' 어차피 저 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군.'

베루스의 말대로 이 중에서 이족이나 술법에 정통한 건 베루스 뿐이었다. 천우진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테지만 천우진에게는 좀 더 중요한 사명이 주어진 모양이었다. 그들은 무예는 뛰어났으나 이런 분야에서는 초보였기에 전문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수상한 유적을 찾아볼까."

베루스는 잠시 후 손 위에 웬 물결치는 문양을 떠올리더니 그걸 물고기 모양으로 바꾸었다.

파앗!

물고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펄떡이다가 지도의 한 점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루스가 망설임 없이 지도에 자신의 팔을 쑥 집어넣었고 뭔가를 확신한 듯 말했다.

" 여기가 수상하군. 따라오시오."

슈르륵

베루스는 이윽고 마치 지도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빨려들듯 집어넣었고, 당산이나 검마 등은 그가 하는 행동을 따라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은 지도를 통해서 공간을 이동해서 웬 이름없는 야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산이 베루스에게 물었다.

" 당신이 쓰는 건 술법이오 마법이오?"

베루스는 당산의 물음에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 신앙심이오."

" 신앙심? 그것도 힘이 될 수 있소?"

" 나는 수호자님과 특수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순 없소."

말을 얼버무린 베루스가 높이가 이백여 장 쯤 되어보이는 작은 산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 이 곳의 공간이 일그러져서 균열이 생겨있소. 아무래도 차원을 겹쳐놓은 쐐기가 있는 듯 한데 쐐기를 뽑으면 겹쳐있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거요."

" 그 곳은 [신의 무덤]이겠소?"

" 모르겠소.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한데..."

" 뭐가 이상하오?"

" ......"

베루스는 말없이 다시 물고기를 소환해서 허공에 날렸다. 그러자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 물결을 따라가듯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났는데 베루스가 한탄했다.

" 이런...!! 글러먹었군."

" 무슨 일이오?"

" 여긴 쐐기만 박혀있는 게 아니오. 이 내부의 유적에 들어가서 [열쇠]를 찾아야 진짜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문제는 이 내부에 들어가는 조건이 혈통(血統)이란 점이오."

" 혈통?"

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이 곳이 거신족의 유적이라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거신족이거나 거신족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만이 유적을 탐색할 수 있겠지."

그 순간 당산이 검마와 서문혜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검마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나와 혜아가 한 번씩 들어가보겠소. 쐐기를 뽑아주시오."

" 그러지."

우우웅

베루스가 뭔가 주문을 외우자 허공에 시꺼먼 문이 생겨났다. 검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신통방통하고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달리 말하자면 베루스가 엄청난 실력의 술법사라는 뜻이었다. 수준이 낮을수록 힘겹게 끙끙대고 수준이 높을수록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베루스가 없었다면 결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 저 자는 왜 예수회에 있을까? 정체가 뭐지?'

검마는 못내 궁금했으나 지금은 그런걸 캐낼 때가 아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차원의 문으로 걸어들어갔다.

투웅!

하지만 검마는 즉시 알 수 없는 반탄력 때문에 튕겨나갔다.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옆에 있던 서문혜가 문 안으로 걸어갔는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빨려들듯이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가 있었다.

" ......!!"

" 들어갔군. 그녀가 단서를 찾아주길 바랍시다."

베루스가 감상을 말했지만 검마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 순간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 이럴수가...'

거신 치우의 유적을 탐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으나, 이로써 서문혜에게 거신의 피가 이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딸이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눈 앞에서 보아버린 심정은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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