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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 크윽."
제갈사는 진소청의 선전을 보면서도 암울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진소청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그의 재능이 굉장하단 건 알고 있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 틀렸어...'
진소청에게는 신살(神殺)을 위한 무기나 수단이 없다. 일시적으로 의념으로 신적 존재에게 타격을 줄 수는 있을 테지만 팔부신중 이상의 존재들에게는 거의 무의미하다. 무적상태의 적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약점을 찾아서 공략해야 하는 법인데, 진소청은 대책없이 돌격해버린 것이다.
물론 진소청이 성장을 거듭해서 신살을 행할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겠으나, 아무리 무예에 소양이 적은 제갈사라고 해도 그건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소청은 이미 큰 부상을 입은데다 체력과 기력이 떨어져서 그만큼 버틸 여유가 없다. 반드시 일 다경 내에 살해당하리라!
그는 순간적으로 백웅의 부재를 절감했다. 만일 백웅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진소청이 저렇게까지 폭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험을 하기가 꺼려지게끔 하는 억지력이 있기 때문이다. 백웅이 없다는 초조함이 진소청의 등을 떠민 점도 있으리라.
아무리 자신이 훌륭한 책략을 짜서 좋은 성과를 낸다 해도 그의 빈 자리를 메우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백웅은 언뜻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였으나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균형이 잡혔던 것이리라.
그러나 제갈사의 무력감은 잠시였다. 영민한 그의 두뇌는 순식간에 회전하여 이 상황의 타개법을 찾아냈고, 동시에 그 책략을 시행하는 자체가 자신에게 크나큰 손해라는 걸 알아챘다. 아직까지는 추슬러서 재기할만한 상황이었지만 진소청을 구하려다보면 자신은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리라.
' 어쩔 수 없지.'
진소청을 원망할 수는 없다. 자신의 폭력적인 재능을 살린다 해도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각오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소청은 자신이 탈출할 수준까지 강해지는데
운명을 걸었지만 그 도박이 실패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책사로써 진소청을 살리는데 집중해야만 한다.
동료의 실패를 책임지는 것도 책사의 몫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염력을 집중해서 말했다.
" 천우진. 들리나?"
[ 무슨 일이지?]
천우진과는 유기적으로 연계해야 했기에 그가 축지법으로 멀어진 지금도 마법으로 만든 통신단말을 이용해서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천우진의 술력으로 보조해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사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 난 아마 약속장소에 못 따라갈 것 같다. 넌 계획을 계속 진행해라."
[ 무슨 소리지? 너 설마...]
" 진소청이 위기에 처했다. 그 녀석을 서장에 있는 배교의 신전에 맡길테니 너는 백웅이 귀환하면 때를 봐서 그를 회수해."
[ ... 그만둬라.]
천우진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 네가 사라지면 남은 놈들은 어쩌란 말이냐?]
" 크크.... 망한 판이라도 이득은 봐야지. 난 진소청을 포기 못한다."
[ 미친 놈. 알았다.]
피잇
통신이 끊겼다. 제갈사는 이제 힘이 거의 다 떨어져서 눈 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마력이 소모되면서 육체능력도 점차 희미해지는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제갈사는 아직까지는 여력이 남은 걸 확인하면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오소서.
위대한 마도사 - 사마리아의 왕이여.
스스스스....
어둠의 영이 제갈사의 부름에 따라서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 영은 부정형으로 꿈틀거리며 사악한 영력을 뿜어내었는데, 물컹거리는 실체가 삽시간에 제갈사가 있던 밀실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제갈사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존재가 말했다.
[ 마음을 정했나보구나... 나의 제자.]
" 제자처럼 친밀한 관계였던 적이 있습니까?"
[ 섭섭한 소리군... 서로 이용하기만 할 뿐이라면 이 세상 만물이 마찬가지.]
" 그렇군요."
제갈사는 속으로 비웃었다. 눈 앞의 상대는 그에게 사법과 마법을 가르친 스승격이었으나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극악의 화신이었다. 저런 놈에게서 가르침받으면서 영혼을 빼먹히지 않은 게 그간 다행이었다. 지금도 겉으로는 배려하는 척 하면서 제갈사의 영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뻐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제갈사가 말했다.
" 진소청을 구해주십시오. 또한 보호도 해 주셔야겠습니다."
[ 무슨 조건으로?]
" 그 대신 당신의 만마전에 종속되겠습니다."
[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넌 이미 내 제자로서 종속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건 거래조건이 될 수 없다.]
" 계약조건을 추가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때 약속해주신 지위를 포기하죠."
[ 호오...]
이어진 제갈사의 제안에 마왕은 쉽게 수긍하며 받아들였다. 제갈사처럼 두뇌가 뛰어난 천재는 얼마 없었기에 내놓는 제안에 별로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왕은 신규계약서를 소환한 후 제갈사의 가슴팍을 쳤다.
투웅
계약서가 빨려들듯 제갈사의 심장에 흡수되었다.
" 크윽..."
[ 계약은 성립되었다.]
제갈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라면 틈을 봐서 마왕의 이공간에 있는 계약서를 훔쳐내서 계약을 무효화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계약이 가중된 것이다. 이제 그는 죽게 되면 빼도박도 못하고 완전노예신세였고 생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럼 일 좀 해 주시지요."
[ 크크... 내 쪽이 손해인 것 같은데. 저런데서 인간을 구출해오라니.]
" 우는 소리 할 거 없잖습니까? 당신이 팔부신중에 뒤지는 존재는 결코 아니니."
[ 그렇지... 크크크.]
우우웅
잠시 후 제갈사의 눈코입으로 어둠의 안개가 새어들어왔다. 제갈사는 그 안개가 몸 안에서 피 대신 꿈틀거리면서 자신의 몸이 이형(異形)의 무언가로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끝장났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
' 전혼탈겁도 안되는군.'
어쩔 수 없다.
마왕강림(魔王降臨)에는 그만한 대가를 줘야하기 때문이다.
파아앗!!
다음 순간 제갈사의 몸으로 눈을 뜬 존재는 시꺼먼 안광을 발하며 몸을 안개처럼 변화시키고는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그의 몸 주변에는 수백 개나 되는 고대의 주문이 휘돌고 있었으며 하나하나가 극악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왕 시몬 마구스는 머지않아 진소청이 싸우는 전장에 도착하고는 생각했다.
[ 볼수록 미친 인간이군. 곧 죽겠군.]
아직까지 내면에 제갈사의 의식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시몬 마구스는 머지않아 제갈사를 노예처럼 부릴 날을 생각하니 흡족해하며 자신의 손을 뻗어서 어둠의 안개를 뿌려냈다.
스스스
어둠의 안개는 은밀히 진소청 주변을 감싸더니 갑작스럽게 확장해서 주변 오십 리를 어둠으로 뒤덮었다. 축융과 팔부신중은 물론 그 어둠의 안개에 해를 입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생명체를 즉사시킬 수 있는 어둠이었다. 시몬 마구스는 다시금 고대주문을 외웠다.
[ 네자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낮에는 태양의 젖꼭지가 빛을 발하고 밤에는 달의 활시위가 팽팽해지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창조의 넷째 날이다.]
그 순간, 진소청의 몸이 멀리로 이동되어 버렸다. 자신의 안개 범위에 있는 건 뭐든지 순간이동시킬 수 있는 그의 사법(邪法)이었다.
동시에 이 전장에 훼방꾼이 나타난 걸 알아챈 축융이 포효했다.
[ 네놈!! 그 인간을 내놓아라!!]
휘리리릭!!
청염의 채찍이 시공간을 무시하고 날아왔다. 그 채찍공격은 팔부신중도 일격에 중상을 입을 수 있는 막강한 공격이었고 시몬 마구스는 내심 큰일났다고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대신격과 직접 싸우는 건 너무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꽈광!!
[ 크흑.]
축융의 채찍을 주문으로 방어했으나 시몬 마구스는 자신의 왼쪽 팔이 타들어감을 느꼈다. 제갈사의 몸에 강림했으나 역시 힘이 많이 딸리는 것이다. 다만 축융은 자신이 본체를 끌고와도 이기기 힘든 상태이니 수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대신에 히죽 웃으며 축융을 비웃었다.
[ 덩치만 큰 거인족... 커억.]
꽈릉
시몬 마구스는 난데없이 채찍을 얻어맞자 당황했다. 축융은 화가 났는지 힘을 몇 배로 담아서 후려쳤고 그 전력공격을 맞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다. 그제서야 마왕 시몬 마구스는 정신이 번쩍 든 듯 했다.
' 뭐냐? 저 놈 뭐가 저렇게 센 거지?'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간들을 조종하고 인신공양하며 수천 년간 사법을 모아서 마왕의 경지에 이른 후 그는 신조차 두렵지 않다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의 거인 축융이 가진 힘은 그가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기껏 고대존재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차원이 다른 신격이었다! 삼황오제도 아닌 자가 저렇게 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 설마 무스펠하임의 제왕만큼 강한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그가 갖고있는 모든 마법이 통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힘에 그만 겁을 집어먹은 시몬 마구스는 급히 마력을 전개해서 공간이동했다. 아무리 격차가 나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 게 섯거라!]
축융의 호통과 함께 청염의 채찍이 수십 리의 시공을 격하고 날아와서 그를 공격했지만 시몬 마구스는 세피로트 제 4계의 염마술(念魔術)을 시전하며 막아냈다.
[ 서란다고 서겠냐!]
파앗
그는 진소청을 데리고 성공적으로 전장을 이탈한 후 그대로 배교 주르반의 사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치명상을 입은 진소청을 아공간에 집어넣어서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제갈사와의 계약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기가 새어나오며 제갈사의 몸에서 마왕이 빠져나왔다. 제갈사가 털썩 주저앉자 마왕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두 번째 조건대로 명계의 내부까지 데려다주지. 지금 네 상태로는 지옥문지기의 눈을 피하는 게 무리일테니.]
" 너무 친절한 거 아닙니까?"
시몬 마구스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 네가 완전히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그렇게까지 손해도 아니지...]
" 그렇습니까?"
[ 지금까지는 계약의 최소치 때문에 네 인간의 껍질을 놔두기로 배려했으나... 너를 중마(衆魔)로 전생(轉生)시키면 틀림없이... 굉장한 게 나올 것이다.]
제갈사가 버린 '지위'라는 것은 인간의 혼으로써의 형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약조건을 던져버렸으니 이제 그의 영혼은 죽고 나서 마왕의 손에 의해 끔찍한 고문을 겪게 되고, 타락하여 음차원의 마물로 전생하게 되리라. 마물로 전생하고 나면 인간일 적보다 수십 배나 강해지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 ......"
그리고 그건 틀림없이 내가 아니라 내 껍질을 뒤집어쓴 무언가겠지.
저 놈은 이혼대법을 극성으로 터득했으며 마법도 잘 쓰는 최강의 악마(惡魔)를 패로 거두고 싶은 거겠지.
종말의 계시에 데미우르고스가 되기 위해서.
제갈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놈.'
자신의 가설대로라면 이 거래는 결코 손해가 아니다.
아니 - 틀림없이 제갈사가 이득을 봤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다 끝나면 스스로 정신을 박살내기로 마음먹었다.
전생자에 대한 비밀과 자신의 지식이 알려지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제갈사가 진소청을 구출하던 시점, 검마는 황량한 강가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큰 부상을 입었기에 내공을 운용해서 스스로 기력과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상당한 힘을 회복했다. 백웅이 준 영약 덕분에 내공이 아주 출중해졌기에 회복력도 좋은 것이다. 다만 육체의 부상은 시간이 지나야 나을 수 있으리라.
그는 이제 제갈사의 지령을 기다리지 않고 약속했던 집결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자기 임무를 다 했으며 집결지에서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강가에서 더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의 지평선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영이 이윽고 육안으로 확인할 정도로 커지고,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마침내 삼 장 거리를 마주하게 되자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 우연이군."
정말 우연이었다. 상대는 검마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그냥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을 따돌리다보니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
" 여긴 무슨 일이오?"
" ... 부상을 입었나?"
" 그렇소."
상대방은 근처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말했다.
" 하루 기다려주지. 몸 상태를 최고로 만들어라."
" 어쩌라는 거지?"
" 무사와 무사가 병기를 들고 마주쳤다면 해야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 ......"
" 피차 임무를 벗어난 몸일 테니 제대로 겨뤄보자."
검마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 좋소, 미야모토 무사시."
이것도 운명일까?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생사결이 막 전투에서 빠져나온 검마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