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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699화 (69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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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축융에게 덤비는 순간, 팔부신중 천인(天人) 삼장법사는 격정 대신 염려에 휩싸여 있었다.

과연 이게 옳은가?

그러나 오랫동안 쌓아왔던 팔부신중끼리의 유대는 이 자리에서 등돌리고 도망치는 걸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승산이 낮다고 하더라도, 축융이 제대로 된 인과율을 갖고 나타난 게 아닐거라는 어렴풋한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 장기전으로 버티자.'

어차피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쳐도 전멸당할 위험은 크다. 그럴 바에야 천인은 힘을 모아서 시간을 끌고, 축융이 인과율을 소모하게 유도할 생각이었다.

건달파가 처참하게 잡아먹히는 걸 본 가루라가 포효했다.

[ 감히!! 이거나 먹어라!!]

쿠오오오

가루라가 숨을 크게 들이키자 그의 가슴팍이 두 배나 부풀어올랐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빛의 기둥이 뿜어져 나갔다.

신염(神炎)!

[ 오오오...!! 제법.]

축융도 가루라 본체의 신염은 무시할 수 없는지 직접 손을 들어서 청색의 방어막을 소환했다. 청색의 방어막과 신염의 기둥이 부딪히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섬광이 무한대로 확산되듯 번져 나갔다. 반경 삼십 리는 폭염에 휩싸여 지하까지 움푹 패였다.

쿠콰쾅

버섯구름이 신시의 상공으로 피어오르며 지상의 참극을 예고했다. 폭발의 충격만으로 모든 게 날아가고 있을 때 가루라는 먼지구름 사이로 청색 불꽃이 날아오는 걸 알아챘다.

' 이깟 거!'

콰앙!!

가루라가 다시 한 번 입에서 신염을 발사해서 청색 불꽃과 부딪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방금 전과는 달리 상쇄되지 않았으며 불꽃은 마치 뱀처럼 넘실거리며 가루라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쉬쉬쉬쉭!

[ 크아앗.]

가루라는 비명을 지르며 전신에서 신염을 내뿜었으나 이미 청염은 그의 몸을 가시덤불 채찍으로 내려친 것처럼 난도질한 후였다. 가루라가 전신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틀거리자 축융이 껄껄 웃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 좋아, 결정했다. 가루라 너는 살려서 내 애완동물로 삼아주마.]

[ 크아아!! 잘난 체 마라.]

디리링

가루라가 포효하며 덤벼드려 했으나 마후라가의 음률이 그를 진정시켰다. 가루라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자 마후라가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 가루라. 네 신염만이 축융에게 먹힌다. 우리가 너를 보조해야 최소한의 승산이 있다.]

[ 으으.]

[ 네가 당하면 이길 도리가 없다. 우리도 건달파처럼 축융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냉정해져라.]

[ 알았다.]

이윽고 팔부신중 셋이 대형을 이루며 신중하게 숨을 고르자 축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팔부신중이 그에 비해 약하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방어태세로 나오면 해치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인 삼장법사가 말했다.

[ 축융이여. 뭘 원하여 지상에 소환되었는가?]

[ 네 주인의 면상을 보고싶다는 마음이 강하구나.]

축융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을 이었다.

[ 하나하나 다 쳐죽이면 나오겠지...?]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천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 인간주술사 하나를 제물로 한 소환이 얼마나 갈까? 너야말로 앞날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 크크. 건방진 걱정을 하는군.]

축융은 껄껄 웃더니 갑자기 하늘로 두 손을 뻗었다.

[ 전욱이시여. 힘을 빌려주소서.]

파아앗!!

허공에 열려있던 검은 십자를 뚫고 만귀전의 빛이 내려쬐더니 축융을 비추었다. 그와 동시에 팔부신중들은 거의 동시에 축융에게 부여된 인과율이 크게 늘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그들은 본체 상태에서 신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인과율을 감지할 수 있었다.

[ ......!!]

[ 이, 인과율의 한도가!]

팔부신중들이 황당해했다. 축융이 말했다.

[ 오제 전욱께선 이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특히 저 놈이 칠요 얘기를 한 순간부터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 인과율을 처리해준다 하셨지.]

[ 으... 말도 안 되는.]

[ 자, 일단 말이나 해 보거라.]

축융은 크게 인심을 쓰듯 말했다.

[ 칠요를 갖고 있으면 내놓고 없으면 위치를 말해라.]

[ 말하지 못하겠다면?]

[ 크크...]

축융은 그저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참혹한 결과가 기다릴 거라는 암시나 다름없었다. 팔부신중들은 방금 전에 잡아먹힌 건달파를 생각하자 가슴이 무거워졌으나 기죽지 않았다.

천인이 외쳤다.

[ 우습게 보지 마라!!]

그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볼 생각인 듯 했다. 승산은 희박했고 아마 축융의 손에 고통받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쿠콰쾅

잠시 후 팔부신중과 축융이 격돌하는 소리가 신시를 불태웠다. 천인이 술법을 외우며 마후라가가 음률으로 보조했고 가루라가 축융을 공격했다. 축융은 시종일관 여유롭게 팔부신중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이윽고 공격의 수위가 강해지자 부담스러워진 듯 했다.

[ 읏...]

너무 얕본 것일까?

축융은 가루라의 공격력이 자신의 예상을 상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감정의 격류가 그의 힘에 영향을 주는지 방금 전보다 훨씬 강맹한 불꽃이 날아온 것이다. 물론 그는 불꽃의 거인이었으므로 신염에 직격당해도 그렇게 큰 피해는 입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듯 했다.

축융의 눈이 빛났다.

[ 까불지 마라. 네놈들 약점은 다 안다.]

즈오오

그의 입에서 천천히 초고대의 주언(呪言)이 흘러나왔다. 그건 인간의 언어체계나 성대로는 결코 발음할 수 없는 소리였다. 동시에 축융의 전신에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나오며 격렬하게 소비되었다.

[ 안돼!]

[ 막아라.]

그 주문영창을 본 팔부신중들은 깜짝 놀라서 합공의 수위를 높였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주언이 울려퍼지자 기이한 문자들이 수백 만 개나 허공에 떠올라서 주변을 감쌌고, 팔부신중들은 일제히 비틀거렸다.

[ 크으...]

[ 으으으.]

마후라가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허둥대며 악기를 떨어뜨렸고 가루라는 고개를 숙이며 괴로워했다. 또한 천인도 경직되어서 전개하던 술법을 멈추고 만 것이다. 팔부신중들이 일순간에 와해되자 축융이 껄껄 웃었다.

[ 크하하하하!! 황제 공손헌원을 찬양하라.]

[ 빌어먹을... 아무리 최초의 문자라 해도... 우리가 다 뭉쳐있었다면...]

천인은 분한 듯 중얼거렸으나 이미 상황은 글러먹어 있었다.

주언 한번에 전력이 반감된 팔부신중 측은 더 이상 축융을 이길만한 여력이 남지 않은 것이다. 그걸 가장 잘 아는 것은 축융이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 만귀전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는데 간만에 재밌구나.]

축융은 청염을 휘감은 채찍을 휘둘렀다.

[ 즐겨보자꾸나.]

제갈사는 팔부신중과 축융의 전투를 사역마로 지켜보며 생각했다.

' 최초의 문자.'

창힐이 만든 세계 최초의 문자.

황제 공손헌원이 '약속'을 증거하는 용도로 만들라고 한 문자.

그게 팔부신중의 약점이라는 건 백웅의 전생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만들어지자마자 황제 공손헌원에게 바쳐진 문자인지라 위대한 종족조차 수집하지 못한 문자였다. 그래서 팔부신중과는 거의 힘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축융은 그 최초의 문자를 쓸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축융과 폭왕의 화신 사이에 힘의 격차는 별로 없음에도 축융은 압도적으로 팔부신중을 누를 수 있는 것이다.

' 예상대로군.'

제갈사는 만귀전에 들어가서 팔부신중 토벌자로 축융이 추천받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얼추 짐작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만귀전의 2인자라 하더라도 마왕급 존재 8명을 상대로 너무 여유로운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힘의 균형을 생각할 때 아무리 려가 축융이며 강하다고 해도 인과율에 제약받는 상태에서는 꽤 긴장해야 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사는 한 가지 가정을 세운 것이다.

축융은 팔부신중 최대의 약점인 최초의 문자를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욱은 축융 하나만 보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고, 축융 본인도 당연히 팔부신중을 다 잡아족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으나 정황만으로도 그렇게 판단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제갈사는 축융소환의 술법을 빌려오면서 이걸로 단번에 팔부신중을 격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팔부신중을 격퇴시켜봤자 백웅 일행에게는 실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본진에서 백련교주, 십이율주와 회동하며 그들에게 신뢰가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모든 게 공멸하는 판을 짜게 된 것이다.

공멸작전은 애초에 축융 혼자서 팔부신중을 쳐부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성립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백웅 일행 또한 창힐에게 주목받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백련교 십이율을 와해시켰다 해서 팔부신중이 그들을 어여삐 봐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팔부신중은 어쨌든 쓰러뜨려야 할 상대였다.

만일에 만귀전에서 전욱이 확답을 주지 못했다면 제갈사는 전력을 다해서 십이율 백련교와 힘을 합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욱이 충분한 힘을 주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그들을 배신해서 자기 이득부터 챙긴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 하나의 의문점이 남는다.

어째서 축융은 최초의 문자를 알고 있는가?

그건 창힐이 황제에게 직접 갖다바친 공물인데?

그걸 알고 있는 건 오로지 황제와 같은 삼황오제들 뿐이다. 그리고 축융은 대신격이긴 하지만 그 항렬에 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축융에게 삼황오제 중 누군가가 최초의 문자를 알려줬단 말인가?

전욱일 거라고 강한 의심이 갔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대(神代)의 비사(秘事), 그것도 치우나 거인족과 연관되어 있는 복잡한 고대사였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 ......"

본인에게 지금 물어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제갈사는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을 하는 와중에 여러 마리의 사역마를 움직여서 근처 지형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한 까까머리 청년이 서 있는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재주도 좋군. 저 난장판에서 상처하나 없나?"

제갈사를 호위한답시고 따라나선 진소청은 멀쩡히 서 있었다. 엄청난 존재들이 격돌하는 와중에도 자기자신을 보호하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제갈사는 어쩌면 진소청이 더 강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절대지경이 대단하다고 해도 신력의 대폭발이 수십 번이나 쏟아지는데도 멀쩡한 건 이상하기 때문이다.

' 저 놈의 재능은 정말 인간같지도 않군.'

제갈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고 살아오며 많은 천재와 달인들을 보아왔으나 그 중에서도 진소청은 단연 일재(溢才)였다. 무엇보다도 싸우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같은 건 살아오며 진소청 외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순간 제갈사는 뭔가에 생각이 닿였다.

진소청의 눈에 결의의 빛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진소청은...

진소청의 진짜 목적은.

" 그럴 리가."

하지만 그의 직감은 현실이 되었는지, 잠시 후 제갈사는 보이지 않는 눈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소청에게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진소청!! 어디 가는 거냐!"

듣지 않는다.

사역마의 시선에는 창을 꼬나쥐고 거대한 존재들에게 다가가는 한 까까머리 사내의 등만이 비칠 뿐이었다.

" 당장 멈춰!! 돌아와!! 이런 빌어먹을!"

제갈사는 이번 계획을 실행한 이후 최초의 예측불가 변수를 맞이하고는 생애에서 손꼽힐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늘 겉으로는 놀란척하면서도 머릿속은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던 냉혈한이 제갈사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정말로 상식 외의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윽고 뚜벅뚜벅 걸어가던 진소청이 사역마를 찾아냈는지 사역마 앞에 서서 말했다.

" 단서를 찾았소. 그리고 지금은 기회... 난 더 강해져야 하오."

사역마를 통해서는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제갈사의 마력이 충만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극도로 피폐해져서 전혼할 기회도 몇번 남지 않은 지금의 제갈사로서는 불가능했다. 제갈사는 멍청히 은신처에 앉아서 진소청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살아남으면 다시 봅시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청의 몸이 뇌신지혼을 발동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빛줄기가 향하는 곳은 마신 축융과 팔부신중이 격전을 벌이는 장소였다.

털썩

제갈사는 그 순간 정신집중이 풀어지면서 사역마의 시선이 끊기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엄청난 환통때문에 머리가 깨질것같았는데도 정신을 집중해서 시야를 유지시키고 있었는데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자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갈사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 개... 같은... 그게 되냐? 그게 될 거 같아?"

제갈사는 이를 악물었다.

" 미친 새끼!! 당장 돌아와."

그랬다.

진소청이 제갈사를 따라간 진짜 목적은 제갈사 소환의식의 호위가 아니었다.

생사지투(生死之鬪) 속의 깨달음!

자신이 진정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험난하고 극악한 전장(戰場)에서 절대지경의 깨달음을 향상시키는 투신(鬪神)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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