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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제갈사는 자신의 전투력이 눈앞의 제갈유룡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사법과 마력에 있어서는 제갈유룡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했으나 사실 그마저도 그렇게까지 유리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제갈유룡은 언젠가부터 팔부신중과 손을 잡았으며 [옛 지배자]와의 계약도 거리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갈유룡은 정파 삼대기인 중 일 인인 태산노옹으로써 정파무림의 태두급 실력 자였기에 무공도 굉장히 뛰어났고, 술법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즉에 지선(地仙)이 되어서 20대에 천계에 등선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천재가 바로 제갈유룡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재능과 두뇌가 누구에게 크게 뒤진다 생각해본 적 없는 제갈사였으나 그런 그로서도 제갈유룡만큼은 늘 꺼려지는 상대였다. 자신이 뛰어난 그 이상으로 자신의 형은 출중한 천재였기 때문이다.
즉 - 무공, 술법, 마법의 세 가지 방면에 있어서 모두 대가(大家)의 성취를 이뤘을지도 모르는 괴물.
아마 정면으로 제갈유룡과 싸운다면 삼 초도 되지 않아서 죽고 말 게 분명하다. 백웅이라 해도 천우진의 도움이 없다면 제갈유룡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기에 제갈사는 일단 말로 시간을 끌었다.
“토요(土曜)를 여기 갖고 왔나? 나도 칠요를 하나 갖고 왔는데.”
제갈유룡을 동요시킬 셈으로 제갈사는 간교한 거짓말을 했으나 제갈유룡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대꾸했다.
“좋아. 그럼 칠요를 쓰면 되겠군.”
“잠깐….”
“죽어라.”
투두둥
절기(絶技)
입운등룡(入雲登龍)
푸른 회오리가 몰아치는 듯 했다. 제갈유룡은 마치 병풍이 펼쳐지듯 현란한 신법과 함께 제갈사의 지척에 날아들어서 수강(手?)을 날렸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서 일류의 경지를 갓 넘은 제갈사의 무공실력으로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제갈사는 눈을 부릅떴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직접 상대하니 느낌이 다르잖아.”
애초에 제갈유룡이 정파 삼대기인 태산노옹으로 활동하면서 정파무림의 그 누구도 그 무공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분은 가짜일지언정 그의 실력만큼은 진짜였고, 무림에서 손꼽히는 초고수를 상대로는 심심풀이로 배운 얼치기 무공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퍼벅
너무나 당연한 듯 제갈사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마법이나 지식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제갈사였으나 무공에는 그리 노력을 쏟지 않은 탓이었다.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친형제를 죽이는데도 일말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은 제갈유룡은 비산하는 피분수 속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정화술(淨化術).”
제갈유룡의 몸 주변에 묻어있던 피가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다. 술수를 발동시켜서 핏자국을 없앤 제갈유룡은 나직이 말했다.
“피의 저주라니 같잖군. 이런 저급한 마법을.”
제갈유룡이 고개를 들어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인형(人形)을 부리다니 수법은 여전하군. 직접 형님과 대면하는 건 겁이 나는 것이냐, 사(邪).”
“당연히 겁나지.”
저벅
저벅
“이 귀여운 동생의 머리통을 서슴없이 부수는 형님은 존경받을 수 없다고.”
동굴 뒤편의 어둠속에서 천천히 제갈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이하게도 방금 전 제갈사는 제갈유룡의 수강에 살해당했는데도 즉시 되살아 난 것이다! 물론 그게 진짜 부활능력이 아니라 인형을 통해 자신의 몸을 갈아탔다는 걸 알아 첸 제갈유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혼대법(移魂大法). 저게 제갈사의 소유가 되다니… 최악이군.”
직접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으나 제갈유룡은 동서고금의 지식을 통달하고 있었으므로 이혼대법의 전승과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데다 조종당하는 것 조차 눈치 첼 수 없으며, 달인은 자신의 혼을 마음대로 빙의시킬 수도 있는 전설의 사술(邪術)! 배교교주에게 전승되는 저 극악한 술법을 상대로는 제갈유룡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가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뭐어. 그러는 형님도 본체는 아닐 것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해라.”
위잉
제갈유룡이 장검을 뽑아들자 서릿발 같은 검강이 즉시 아로 맺혔다. 아무런 준비동작이나 기합도 없이 한 호흡으로 완성된 강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건 그가 뛰어난 초절정검객임을 뜻했다. 무림인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심장이 철렁할 만큼 두려운 장면이었고, 제갈유룡이 검극을 겨누며 말했다.
“서로 준비해 둔 인형이 얼마나 빨리 떨어질까? 계속 널 베기만 하는 나일까, 계속 베여죽기만 하는 너 일까.”
“하하. 꼭 이런 식으로 소모전을 해야 해?”
“감춰둔 패가 있다면 곧 꺼내들게 될 것이다.”
쉬칵!
이번에도 제갈유룡이 달려들자 제갈사가 빙의해서 조종하던 ‘인형’의 목이 일 초 만에 베여 나갔다. 결국 인형이나 초상기인이라고 하더라도 사용자의 본래 역량과 비례했기에 제갈사의 능력이 딸리는 이상 결코 제갈유룡을 이길 수 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인형으로 마음대로 몸을 갈아탈 수 있는 건 제갈유룡도 마찬가지였기에 제갈사는 한도 끝도 없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간혹 마법과 사술을 이용해서 반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갈유룡은 그때마다 그에 맞는 술법으로 제갈사의 반항을 무효화시켜버렸다. 알고 있는 술법이 어찌나 많은지 최소한 2백여 가지 이상의 상급주술을 자유자재로 시전하는 게 가능했다.
퍼벅
쉬칵
한동안 끔찍한 살육이 계속되었고 그리 넓지 않은 공동은 제갈사의 시체로 가득찼다. 제갈유룡이 압도적으로 유리해보이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전혀 긴장을 놓지 않고 무미건조한 살육을 이어나갔다.
파(破)!
제갈유룡이 파괴의 언령을 발출하자 제갈사처럼 생겼던 인형들이 한번에 셋이나 걸레조각처럼 찢겨 날아갔다. 제갈유룡은 제갈사의 인형을 웬만큼 죽였다 생각하며 말했다.
“이혼대법의 성취가 높아서 내가 봉인술을 쓰려는 걸 잘도 피하는구나. 네가 날 두려워해서 싸우기 싫다면 그것도 좋다.”
화르륵
‘제갈유룡’들은 제갈사의 시체를 한데 모아서 불로 태웠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시체더미의 불꽃을 지켜보면서 뭔가를 기다렸다.
키리리링!!
갑자기 크게 뿌리 근처의 대지가 맥동하는 듯 하더니 새파란 영기가 여기저기에서 마치 질척한 물감처럼 흘러나왔다. 보통의 영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시공간에 확실한 매질을 전파하는 듯한 강렬한 촉감! 제갈유룡은 그 기운에 자신의 영력의 주파수를 맞추며 뭔가를 찾아냈다.
키리리링 -
뿌리의 결을 따라서 한참을 걸어가던 제갈유룡은 새파란 영기의 농도가 너무나 짙어서 숨이 막힐 만큼 강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한동안 감회어린 눈으로 눈앞의 거대한 뿌리더미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난 저 안에 세계수의 씨앗과 환생체가 있다고 확신한다. 사, 덤빌테면 덤벼봐라.”
제갈유룡은 전혀 제갈사를 얕보지 않았다. 정면승부의 인형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제갈사를 이겼으나 그 또한 제갈사가 자신과 맞먹는 지략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인형끼리 소모전을 치룰 리 만무했으나 그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인형의 재질을 이용해서 세계수에 연료를 주는 걸로 응수했다. 그 결과 세계수의 영기가 가장 응축된 부분 - 씨앗이 잠들어있을 장소를 찾아낸 것이다.
백이면 백 틀림없다.
지금 제갈사는 한 수를 써 올 것이다.
주르륵
그가 도발하듯 초상기인 하나를 움직여서 뿌리의 결을 검으로 자르기 시작하자 마치 선혈 같은 수액이 배여 나와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한참동안 씨앗을 찾아서 움직였는데도 제갈사의 움직임이 없자 그는 내심 실망하며 중얼거렸다.
“겁쟁이인가.”
후두둑
“찾았다.”
그는 이윽고 영기가 밀집된 뿌리줄기를 가르다가 수박만한 뭔가가 쏟아지듯 땅에 떨어지는 걸 발견했다. 그건 씨앗이라기엔 너무나 컸지만 새파란 빛으로 번득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끝이다!
더 이상은 계책이 있어도 무의미하다. 제갈유룡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즉시 세계수의 씨앗을 손에 넣어서 이 자리를 전이술로 뜨려고 했다. 그가 씨앗을 손에 쥔 채 전이술로 이동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술법이 써지지 않는다.
설마 토요를 발동해 버렸나?”
순간적으로 제갈유룡은 당혹해서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토요 팔괘도가 한 번 발동되면 시전자조차도 술법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 자신의 초상기인이 술법을 못 쓰는 가장 유력한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
제갈유룡의 얼굴이 강하게 굳어지자 뒤편에서 슬그머니 제갈사의 인형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형님. 내가 이렇게 나올 걸 알면서도 당하는군.”
“…네 사법의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 아닌가? 형님과 내가 마지막으로 본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지?”
제갈사가 제갈유룡의 손에 들려있는 세계수의 씨앗을 냉큼 뺏어서 안았다.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즉시 제갈유룡의 가공할 무공에 척살당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제갈유룡은 가만히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한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냐. 아무리 수련한다고 한들 인간의 능력으로 이혼대법을 그 수준으로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 네 마력은 상식을 초월했어.”
“…….”
제갈유룡은 잠시 후 뭔가를 알아챈 후 제갈사의 오른쪽 눈을 노려보았다.
“그 눈… 그 마안(魔眼) 덕분이구나!”
화르르륵!!
제갈사의 오른쪽 눈은 일반적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어서 내부의 눈동자가 섬뜩한 혈광(血光)으로 빛나고 있었다. 또한 강력한 마력을 실시간으로 뿜어내고 있어서, 뭉개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왼쪽 눈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미치광이 마도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제갈사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쓰다듬으며 낄낄거렸다.
“아아? 문제야. 내면의 흑염소가 날뛰는 기분이라고. 이걸 얻는다고 내 밑천을 다 썼다고 하면 믿겨져? 형님. 난 이번 일이 끝나면 당분간 폐인 신세야.”
“마왕(魔王)과 계약했나.”
“정답.”
제갈사의 시꺼먼 눈이 귀기를 뿜어냈다.
“이 ‘눈’이 발동하는 동안 이혼대법은 ‘접촉’의 제약이 사라지고 ‘시야’만으로 상대의 백(魄)을 제어할 수 있다는 거지.”
“…….”
“제갈유룡. 넌 이혼대법에 걸렸다.”
제갈유룡은 이를 악물었다.
저건 아마 영지주의(靈知主義) 마도(魔道)의 최후 비기 중 하나!
말은 쉽지만 마왕의 마력이 담긴 저 ‘눈’은 결코 정상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도사라면 계약 자체를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고, 설령 계약을 시도한다 해도 노예처럼 수탈당해 만마전에 영겁토록 빨아 먹히는 게 정상이리라. 그러나 제갈사는 마도와 배교 술법 모두에 정점에 도달해 있기에 마안의 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이혼대법은 원래 접촉해서 상당한 시간동안 백을 끌어와서 상대의 영혼에 간섭할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제약이 있다. 그러나 저 마왕의 눈은 그 제약을 철폐하고 그저 시야만으로 이혼대법을 걸 수 있게끔 하는 것이리라.
스스스스스
제갈유룡의 인형들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서서히 이혼대법이 풀리려는 기색이 보였다. 그가 가진 가공할 주술력과 술법으로 해주하려 들자 제갈사의 안색도 잠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제갈사는 마안을 빛내며 명령했다.
“자살해라.”
푸콱
잠시 후 제갈유룡의 초상기인들은 일제히 목에 칼을 꽂고 자살했다. 극성에 달해 마왕의 눈으로 강화된 이혼대법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본능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는 자살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제갈유룡이 제갈사를 노려보았다.
“왜 남겨뒀지?”
“몰라서 물어? 다 죽이면 즉시 다른 놈으로 갈아탈 건데 퇴로를 막아야지. 내가 이혼대법으로 강제하는 동안 그 육체는 네 감옥이다.”
“…….”
그 말에 제갈유룡이 차갑게 비웃었다.
“그 눈은 강력한 만큼 시간제한이 있을 게 분명 한데 고작 이 자리의 승리를 얻으려고 모든 걸 내던졌나?”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안 되나?”
“넌 바보다. 이 자리에서 날 고문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육체적 고통은 뭐든 정신요결로 참아낼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강력한 이혼대법이라지만 내 정신방어까지 초상기인을 통해서 뚫을 순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배교의 마왕이 예전에 세계를 지배했겠지.”
“맞아.”
“이 자리에서 한 번 이기고 앞으로 넌 영원히 내 일에 끼어들 수 없게 되는 거지. 오른쪽 눈은 망가지고 왼쪽 눈은 마력에 불타서 맹인(盲人)이 될 테니까.”
“…뭐 그렇겠지.”
“이 한 번의 승리에 그 정도의 의미가 있나? 난 정말 이해되지 않아서 묻는 것이다, 사.”
제갈유룡은 냉철한 시선으로 질문했다. 제갈사를 조롱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가 중요한 가치로 두는 부분이 너무나 달랐기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제갈사의 지금 전략은 책사 실격이다.
도저히, 제갈무후의 후예라 자처할 수 없을 지경이다.
얼핏 보기는 좋아보였으나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유룡은 제갈사의 목표 또한 적당히 합리적인 이득을 얻고나서 책사답게 대국(大局)을 살피는데 집중하리라 생각했고, 그런 전략적 시야에서는 자신이 앞서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사는 뜻밖에도 소국(小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장의 승리를 위해서 이후의 유지력을 모조리 포기해버린 것이다. 제갈유룡이 판단할 때는 아무리 봐도 세계수의 씨앗을 얻는 데 그 정도의 이득은 있을 수 없었다.
제갈사가 염세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대국만 겨눠보면서 고수인 양 행세하는 건 이제 질렸어. 그래봤자 신이 볼 때는 하찮은 개미이고 필멸자일 뿐인데 무슨 의미가 있지?”
“뭐라고? 그게 책사로써 할 소리인가?”
“원래라면 나도 지금 내 행동을 병신처럼 생각 했을건데 말야, 형님. 만일에 무한히 계속 둘 수 있는 기(棋)가 있다면 어떤 전략을 짤 텐가?"
“……?”
제갈유룡이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유룡이 감조차 안 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수천만 번이고 수억 번을 두더라도 왕을 위한 초석(礎石)을 두는 게 책사가 할 일이야.”
푸욱!
제갈사는 말이 끝나자마자 제갈유룡의 심장을 단검으로 강하게 찔러서 비틀었다.
“윽."
제갈유룡은 비틀거렸지만 육체적 고통에 익숙하다는 말은 사실인 듯 눈을 부릅뜰 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갈사는 단검의 손잡이를 심장에 꽂은 채 물러서며 말했다.
“형님 말대로 나는 당분간 전면에서 퇴장하게 되겠지. 근데 얌전히 퇴장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형님도 같이 가 줘야겠어.”
“무슨… 말이냐.”
“그 단검은 서서히 영혼에 잠식해 100일 후 타락시킨다. 그걸 몰아내려면 적어도 십 년 정도는 딴짓 못하고 해주(解呪)에만 전념해야겠지.”
“…….”
이 자리에 십 년간 봉인시킨 건가.
아마 효율적인 전략이긴 하다. 여기에 있으면 팔부신중도 찾으러 오기 힘들 것이고, 팔부신중이 자신의 저주를 해제해 줄 의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검에 마력이 깃들어서 몸을 갈아타는 술법이 전혀 발동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
제갈유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는 자기가 졌지만 결국 대국에서는 저절로 그가 이긴 셈이었다. 제갈사가 맹인이 되고 모든 지지기반을 잃고 굴러 떨어진다면 제갈유룡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혼대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천재지략가가 적이 아니란 것 만으로도 운신의 폭이 매우 넓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단검의 저주 같은 건 장수의 술법을 써서 오백년 후 종말의 시기를 겨누고 있는 제갈유룡에게 있어서는 크게 고려할 것도 되지 못 했다. 제갈사의 행위는 전체적으로 자살행위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수를 뒀는데도 제갈사의 표정이 너무 편해보여서 당황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제갈사를 저렇게 행동하게끔 만든 것인가?
제갈유룡은 제갈사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한숨을 쉬었다.
“팔부신중이 앞으로 독주(獨走)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