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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그로부터 약 반 식경 심이율주와 격전을 벌이던 검마는 일백 초수 째에 깨달았다.
‘안돼.’
벌써 몇 번이나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공방은 화려하면서도 정묘하며 복잡했고 가히 절대지경 고수들의 격전다웠다. 그들이 나누는 합 자체가 예술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대등해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자신과 십이율주 사이에 놓인 거대한 격차를 이해했다.
그 이유로 이미 십이율주의 부하인 홍길동은 절벽 밑에서 날듯이 뛰어올라와 있었지만 그저 팔짱을 낀 채 관전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검마는 점차 피폐해져가고 있었고 체력과 기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다.
카강!!
은하구절편과 검마의 장검이 부딪히자 갑자기 검의 이빨이 나갔다.
‘역시 신기에는 못 미치는가….’
검마는 탄식성을 내심 흘렸다. 그가 쓰는 검은 꽤 알려진 명검인 호조(毫曹)였는데 천하 오대 명검에는 미치지 못해도 전설의 검에 속했다. 아무리 무형의 검을 의념으로 다룰 수 있어도 명검이 있으면 전력이 상승하기에 어떻게든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거궐과 쌍을 이루는 명검인데도 신기은하구절편이 품고 있는 가공할 잠재력 앞에서는 칼날이 퇴색되는 듯 했다. 검마는 검이 부러지지 않게 강도를 기로 유지하며 뒤로 물러섰다.
파앗
십이율주는 이 장 뒤로 물러서는 검마를 추격하지 않았다. 대신 권태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시 때와 똑같군. 결국 너도 천의무봉을 꺾을 힘은 없어.”
검마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적의 방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리 절대적이라 생각지는 않소.”
“그래? 그건 무사시와 다르군.”
이어진 율주의 말에 검마는 잠시 동요했다.
“무사시 하고는 이렇게 오래 싸우지 않았거든.”
“…….”
이건 무슨 소리인가?
검마는 지금까지 모든 검기를 동원해서 율주와 맞붙어서 그의 기술을 끌어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다만 말도 안 될 정도의 정확성으로 반격이 날아왔으므로 검마 또한 굴공참을 이용해서 재 반격과 방어에 몰두했다. 그 결과 일백여 초수를 나누었으나 아직까지 천의무봉이 어떤 경지인지, 어떤 원리로 반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검마는 지금의 자신이 무사시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붙어봐야 알겠지만 아직은 무사시가 좀 더 강할 것이며 실전에서는 그때의 운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무사시는 일 백여 초수나 나누지 않고 금세 율주와의 대결을 끝냈다니?
뭔가 수상하다.
자신과 무사시에게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건 단순한 무위의 차이가 아니라 익힌 무학의 차이임이 분명했다.
‘앗….’
그 순간 - 검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무영탈혼검법의 대가이자 수십 년 동안 검술을 고련해 온 천재이기에 할 수 있는 직감이었다. 또한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 서문휘(西門輝)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만무만식(萬武萬式)의 요체로 회귀하는 궁극의 경지가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만무만식의 요체.
자신과 미야모토 무사시의 차이.
검마의 두뇌와 경험은 순간적으로 그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 백웅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 차이를 알 수 없었겠지만 서문대룡은 능했다.
‘설마… 그렇다면….’
검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십이율주의 손에서 버틴 건 말 그대로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갈사가 준 임무 덕분에, 우연히도 율주를 상대로 가장 버티기 좋은 전략을 택했을 뿐, 실제로 율주를 이기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 말이리라!
눈앞의 존재야말로 무림의 절대자!
중원의 무림에서 백련교주 외에는 그 누구도 십이율주를 이길 수 없으리라.
이것은 상성의 문제에 가까웠다.
검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호리지차(毫釐之差)가 천양지차(天壤之差)였던가….”
“알아챘군.”
부웅 부웅
십이율주는 무감정한 눈으로 은하구절편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말했다.
“하지만 놔줄 순 없어. 그다지 겉보기에 화려한 경지는 아니다만 외부에 알려지면 이래저래 귀찮아질 수도 있거든.”
“…….”
“이 정도의 전력차를 느꼈는데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가?”
십이율주는 씁쓸하게 웃는 듯 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검마에게 심리전을 걸면서 싸움을 쉽게 하려는 모양이었으나 검마에게 한 줌의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자에게 더 강해지는 그의 절대지경 특성상 검마처럼 유연하면서도 냉철하게 싸우는 상대는 그다지 상성에 맞지 않았다.
“자, 그럼 끝내볼까.”
타닷
십이율주가 은하구절편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구 돌진하는 듯 격한 움직임이었으나 검마는 그 한순간에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자신과 십이율주가 격돌하는 수십만 개의 경우의 수가 스쳐지나가는 걸 알아챘다. 무수한 초식과 변초, 의념절기가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경우의 수가 백만 가지를 훨씬 넘었음에도 그 중에서 자신이 십이율주를 티끌만큼도 건드릴 수 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무(無)의 가능성을 직접 대면하게 되자 검마는 아찔해졌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십이율주의 공격에 맞섰다.
콰쾅!!
폭음과 함께 십이율주의 발차기가 진공을 터뜨리며 검마의 신형을 위로 띄웠고, 십이율주는 폭축권(爆蹴拳)에 이어서 구불텅거리는 은하구절편의 쇄를 거미줄처럼 늘어뜨렸다.
수라일천마상(修羅一千魔狀)
잠시 후 십이율주의 신형이 마치 빛의 화살처럼 사라지더니 검마의 몸 근처에 수백 개의 광선이 종횡하며 그어졌다. 그 하나하나는 절초였으며 쇄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가공할 물리력을 가했다.
“커헉!!”
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검마의 입가에서 선혈이 토해졌다. 너무나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었으나 도저히 막거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순간에 모조리 치명타를 입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 땅에 내동댕이치면 그대로 즉사라는 걸 알아챈 검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혈월인!
쿠궁
검엽(劍葉)이 휘날리는 듯한 호신강기가 펼쳐지며 검마가 금세 오뚝이처럼 일어서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이미 내장이 몇 개나 터져버리고 뼈가 부러진 상태였기에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혈인(血人)처럼 변해버렸는데도 똑바로 십이율주를 바라보며 검을 곧추 세우고 있는 검마를 보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이상하군.”
검마가 침묵하자 십이율주가 의혹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선공을 그냥 받지 않고 회피했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내게 맞선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인가?”
“…후후… 쿨럭.”
검마는 피를 토해내며 웃었다.
“말은… 똑바로 하시오. 막거나 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막거나 피해도 소용이 없는 거잖소.”
“뭐 그건 그렇지.”
우웅
그 순간 십이율주의 몸에서 크게 초록색 영기가 일어났다. 그 영기는 금세 그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십이율주가 자신의 팔을 휙휙 돌렸다.
“회복 끝.”
“……!!”
“안 놀라네.”
검마는 아무런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놀라지 않았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십이율주도 꽤 의념절기를 썼기 때문에 체력과 기력이 소모되어 있었는데 술법 한번으로 모조리 회복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세계수라고 하는 신단수의 힘을 빌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한 번에 목요의 힘으로 회복해버린 십이율주의 힘은 기상천외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검마는 이제야 제갈사의 작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군. 이런 놈과 손을 잡고 팔부신 중과 싸워봐야… 이용당할 수밖에 없지. 놈의 밑천을 아직도 다 못 알아냈으니…. 그가 옳았다.’
세계수까지 박살냈는데도 멀쩡히 전력을 보존 하고 있는 자!
그런 자가 만일에 전생중인 백웅의 비밀을 확실히 알아내고 그를 봉인하려 든다면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검마는 다시금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검을들었다.
“그럼… 가겠소!”
“호오. 대단한 기백이야.”
십이율주는 감탄한 듯 말했다. 심지어 옆에서 보고 있던 홍길동조차 검마의 결의에 감탄했다. 이미 수준차이와 승패가 명확해졌는데도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 하는 모습이라니! 무인이라면 지금의 검마를 대단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파앗
검마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지금까지 남겨두었던 모든 잠력을 다해서 신법에만 모든 힘을 다하는 듯 했다.
“…….”
“…….”
십이율주와 홍길동은 잠시 굳어서 황당한 눈으로 검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말을 해 놓고 도망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십이율주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홍길동에게 말했다.
“쫓아!”
“네?"
“저 놈의 임무는 날 막는 게 아니었다. 내 정보를 동료들에게 주려는 거야!”
“하, 하지만….”
순식간에 검마의 진짜 의도를 알아챈 십이율주였으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홍길동이 크게 당황하며 십이율주의 등 뒤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놈들이… 왔습니다.”
"큭."
“섣불리 움직이면 당합니다.”
휘이이잉
십이율주가 월하정야갑으로 만들어낸 눈보라 몰아치는 절벽 위. 그들의 뒤쪽에는 세 명의 인영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팔부신중이었다. 야차, 건달파, 긴나라의 셋은 십이율주라고 하는 목표를 정면으로 확인하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긴나라가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허허. 십이율의 주인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군.”
십 이율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긴나라의 눈이 살의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직접 보니 그리 대단한 놈도 아니군. 너무 호들갑을 떨었던 건가?”
“왜 우리 십이율을 공격한 거지?”
십이율주가 긴나라에게 묻자 긴나라는 후덕한 뱃살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우리의 왕께서 지상이 깨끗하게 평정되길 원하신다.”
“…….”
“그럼 잘가거라, 인간.”
파아앗
섬광과 함께 팔부신중 셋이 동시에 자신들의 본체를 드러냈다. 그 찰나에 십이율주는 목요와 월요를 동시에 꺼내들며 중얼거렸다.
“벌써 싸우고 싶진 않았는데.”
십이율주와 팔부신중들이 격돌하는 순간 제갈사는 쿨럭거리며 땅에 쓰러졌다.
“…….”
계획이 거의 다 되었다.
생각하는 만큼 십이율주를 외통수로 몰았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모조리 도청마법을 검과 동시에, 삼사의 일인인 풍백에게도 마왕과의 계약을 이용해서 강력한 도청마법을 걸었으며, 심지어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에 사역마를 배치해서 시각적 정보를 손에 넣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다 들킬만한 일이었으나 제갈사는 십이율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전혀 계획에 틈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검마까지 잘 도망쳐서 계획의 성공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장소에서 자신의 오른쪽 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후, 후후… 대충 짐작은 간다. 삼사의 정체라는 것도….”
그는 킬킬 웃었다. 생각 외로 큰 성과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지금 얻게 된 정보를 백웅에게 전하기만 해도 틀림없이 그의 여정이 수십 년은 단축되리라. 아직까지 율주의 약점을 정면으로 잡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큰 성과다.
물론 - 그건 백웅이 생환했다는 전제하이지만. 제갈사는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검마나 천우진 등은 백웅의 전생에 말려들었으면서도 이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마도(魔道)에 깊게 접한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천재일우의 기회 그 자체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달려들어야 하는 건 사실 백웅이 아니라 동료들 쪽인 것이다.
‘다른 놈들은 백웅이 왕(王)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사실 본능적으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 너머에 있는 범우주적인 공포, 혹은 신화적 절망의 거대함이 너무 아득하기에 인지하기 싫으리라. 차라리 그게 보통 인간에 게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저벅.
“…역시 와 있었구만.”
제갈사는 깊숙한 동굴의 끝, 어딘가에 서 있는 어둠 속의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그 자는 횃불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제갈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갈사와 시선을 나눈 그 자가 천천히 말했다.
“서로 생각하는 건 비슷한가 보군.”
“내가 그쪽의 수를 읽었다고 인정하긴 싫은가 봐?”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군. 어차피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상 같은 건데.”
“그렇긴 해.”
제갈사는 히죽 웃으며 상대에게 말했다.
“사실 내 계획에서 가장 성가신 시점이 바로 지금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그쪽 면상이 안 보였으면 했다고.”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히 좀 비켜줬으면 해.”
횃불을 들고 있는 기인이 입을 열었다.
“사(邪), 너는 세계수의 뿌리에 고여 있는 영력을 손에 넣고 그 안에서 다시 천 년의 생명을 삭히게 될 세계수의 씨앗을 얻으려고 하는 거겠지.”
“뭐 그렇다만.”
“그렇게는 안 돼. 이건 내가 가져야겠다.”
상대가 강하게 반대의사를 보이자 제갈사는 씩 웃었다.
“그럼 내 인생에 도움 안 되는 형님을 쳐 죽일 수밖에….”
그랬다.
제갈사를 가로막은 마지막 인물 - 그것은 황궁의 사신위 중 주작이자, 제갈세가의 현 가주이자 복마전의 제사장인 제갈유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