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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그럼 우선 나부터!"
파앗
검마는 자신을 향해 날듯이 달려오는 홍길동의 분신 다섯을 보며, 책사 제갈사의 말을 떠올렸다.
[ 검마 서문대룡. 넌 이번 계획에서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아줘야겠다.]
[ 어떤 것인가?]
[ 계산대로라면 세계수의 핵이 붕괴한 후, 십이율주와 그 부하들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퇴각할 거다. 왠지 모르겠지만 놈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에 전력보존에 집중하겠지. 네 임무는 퇴각하는 율주를 상대로 붙잡아두는 것이다.]
[ 알았네.]
[ 좀 들어봐. 네 임무가 어려운 이유는 죽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냉혹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말을 이었었다.
[ 죽는 건 쉽지. 멋지게 돌격해서 꼴아박아서 죽는게 얼마나 쉬워? 하지만 네 진짜 임무는 율주의 절대지경, 천의무봉(天衣無縫)을 끌어내어서 놈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거다.]
[ 으음. 과연... 어렵군.]
[ 내가 너희에게 도청의 마법을 걸어서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는 있지만, 무(武)에 관해서는 달라. 너는 반드시 율주가 보유한 절대지경의 밑바닥을 긁어내고 생존해서 그 깨달음을 직접 아군에게 전해줘야 한다. 그래야 백웅에게로 그 정보를 넘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이해했네.]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 다시 말해두지. 딴놈들은 다 죽어도 넌 살아돌아와야 한다. 그것도 율주의 밑바닥을 최대한 끌어내서!]
동료의 건승과 무사를 기원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제갈사의 말은 철저한 효율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니, 제갈사가 동료들을 보는 시선은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검마는 제갈사가 원래 그런 성격인걸 알고 있는데다가 흑도(黑道)에서 수십 년을 지내는 동안 익숙해져 있었기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단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제갈사는 칠요를 두 개나 해방시킨 십이율주, 그리고 아마도 절대지경 고수에 맞먹을 홍길동을 상대로 생존해 오라고 한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파무림 전원을 상대로 싸우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다.
지금은 집중한다.
검마는 다음 순간, 검을 떨쳐서 한 자루의 어검을 발출했다.
탈혼검기(奪魂劍技)
진영검(眞影劍)
어검은 검마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홍길동의 분신이 사방에서 덮쳐오는데 비해 검은 하나뿐인지라 도저히 대적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홍길동이 공령백팔환을 이용해서 분신 하나하나를 실체화시키며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퍼엉!
"큭."
그 순간 홍길동은 어깨죽지를 살짝 베인 채 뒤로 물러섰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일순간 그가 만들어낸 분신이 모조리 터져버리면서 본체까지 손상을 입은 것이다! 홍길동이 물러서있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비슷한 계열의 기술같지만 다른가. 임자 만났구만."
십이율주의 평에 홍길동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실체를 숨기는 건 제가 더 잘 하는데요."
"무의미한거 알잖아? 결국 너와 검마가 싸우면 천일지투(千日之鬪)가 될지도."
"......"
"간만에 상대할만한 고수를 만났군."
우웅
십이율주가 서서히 구름다리 쪽으로 걸어왔다. 홍길동을 시켜서 검마의 전력을 탐색한 십이율주가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검마는 생각했다.
'역시 신중하군.'
칠요를 두 개나 해방시킨 동방무림의 절대자라면 그 전력은 검마보다 압도적으로 강할게 분명하다. 그냥 힘으로 밀어도 될 상대일텐데도 일단 탐색부터 착실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이 본거지가 파괴되고 팔부신중에게 추격당하는 상황이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날 정도의 자제심과 침착함이었다.
구웅
공기가 밀려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마는 갑자기 눈 앞에 거대한 쇄(鎖)가 시야를 가득채우는 걸 알아챘다. 그의 감지영역을 일순간 벗어나는 속도로 십이율주의 선공이 날아든 것이다. 그러나 검마는 이미 속도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혈월인(血月刃)
핏빛 칼날이 검마의 몸 주변을 감싸는 듯 했다. 그리고 십이율주의 은하구절편이 마치 검막과 같은 그 경계를 돌파하는 순간, 십이율주의 목젖에 검마의 칼날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마술과도 같이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어버린지라 십이율주는 간발의 차이로 혈월인 절초의 반격을 피해냈다.
피잉
실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홍길동의 분신이 수십 체나 날아들어왔다. 조그마한 공간일 뿐인데도 인영이 꽉꽉 들어차 있었으며 그들 하나하나는 손아귀에 강기를 품고 있었다. 검마는 상대방이 이대일로 합공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에 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어검(御劍)
진(眞)
무영탈혼(無影奪魂)
홍길동 분신들이 단번에 강기덩어리를 수십 개나 발사하자 검마의 검이 사라져서 광자(光子)의 덩어리로 변했고, 완전히 무형으로 변해버린 검마의 검결은 속도를 반전시켜서 되려 강기를 절삭해 버렸다. 빛무리가 아비규환처럼 몰려들며 종래에는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홍길동은 검마의 반격에 뒤로 크게 물러나면서 절대지경의 방어절초를 쓸 수밖에 없었다.
공령백팔환(空靈百八幻)
오의(奧義)
염공익(念空翼)
투웅!
"크윽."
홍길동은 염체의 날개를 펼쳐서 빛의 구름을 튕겨냈는데도 그 반탄력 때문에 자신의 몸이 소리와 같은 속도로 절벽 아래로 날려가는 걸 알아챘다. 염공익은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방어무예인데도 이 정도였으니 제대로 맞았다면 몸이 수십만 조각 나버렸으리라.
' 율주를 도우려는 마음이 급해서 실수했구나!'
그리고 자신의 무예가 환(幻)의 묘리에서는 앞서 있으나 검마의 무영탈혼검 절기에 담긴 장중한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 딱히 절대지경에 우열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홍길동은 자신의 단점으로 검마의 장점을 상대해버린 꼴이었기에 밀리고 만 것이다. 차분하게 견제만 했으면 되었을텐데 너무 공격하려 나섰다가 반격당했기 때문이다.
'젠장. 분명 검마를 처음 봤을 때는 절대지경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무사시! 뭐하려고 저런 괴물을 키운 거냐.'
휘이잉
홍길동이 절벽 밑으로 날려가는 시간은 고작 숨을 서너번 쉴 정도에 불과했으나 장내에 남은 두 절대고수에게 있어서는 마치 천추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십이율주는 검마의 무영탈혼을 맞이하자마자 자신의 보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 이건 어떨까.]
심적권청의 순간에 십이율주의 의사가 검마에게 전달되었다. 검마는 그 의지에서 묘한 즐거움같은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칠성탐랑(七星貪狼)
교묘한 보법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 했다. 검마는 십이율주의 발 밑에서 태극이 꿈틀거리는 듯한 환영과 함께 그의 몸이 자유자재로 광자의 틈새를 출입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칠성탐랑의 보법이 절대지경의 무학이며, 도가 칠성의 묘리를 담고있다는 걸 파악한 검마는 일단 공격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완벽한 보법이다...'
마치 굴공참과 같았다. 굴공참의 원리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공간을 조종해서 유리함을 손에 넣는 것인데, 율주가 펼친 칠성탐랑은 마치 굴공참을 보법으로 전환한 것만 같았다. 어찌되었든 저런 보법을 상대로는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물러난 것이다.
잠시동안 길항상태가 유지되는 듯 하다가 십이율주가 별안간 월하정야갑을 낀 손을 내밀어서 냉기를 뿜어냈다.
파아아앗
"......!!"
검마는 순식간에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물론이고 시야에 보이는 거의 대부분의 장소가 마치 북극같은 한기에 휩싸였음을 알 수 있었고, 엄청난 한파와 진눈깨비가 몰아치는걸 느꼈다. 갑작스럽게 지형을 바꿔버린 십이율주 하은천이 은하구절편을 휘둘렀다.
쩌저정!
빙룡(氷龍)이 허공에 크게 만들어졌고, 하은천은 그 빙룡에 올라타듯 뛰쳐올라서는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검마는 그가 난데없이 술수를 부려서 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황당했으나 이내 자신에게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못잡는가...!!'
물론 허공답보나 무공술을 써서 저 빙룡을 쫓는 건 가능했으나, 검마는 아직까지 십이율주의 절대경지인 천의무봉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 상성이 안 좋은 기술이라면 되려 반격당해서 허망하게 죽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술법에 있어서 최상의 경지에 올라있으며 칠요도 두 개나 갖고 있는 십이율주에 비해서는 전략의 폭이 너무나 좁은 것이다.
십이율주가 말했다.
"쫓지 마라."
검마가 망설이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율주의 힘이라면 직접 그를 때려눕히고 갈 수도 있을텐데 굳이 도주를 선택한다는 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함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하지?'
십이율주와 제대로 겨루면 검마는 십중팔구 사망할 것이다. 상대가 어떤 수를 쓰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다 십이율주가 무공에 있어서도 한수 위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대에게 무작정 선공을 하는 건 자살행위다.
운이 좋다면 동귀어진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는 제갈사에게 받은 지령이 실패하는 셈이다. 검마는 아직까지 율주의 역량을 끌어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선택을 강요받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검마의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 그래도 일단 싸운다!'
파앗!
검마의 신형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기세로 눈보라를 뚫고 활처럼 쏘아졌다. 광범위 절기로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육박전으로 빈틈을 끌어내기로 한 것이다. 십이율주는 빙룡의 머리 위에 선 채 쏘아져오는 검마를 보며 천천히 은하구절편을 들었다.
꽈앙!
십이율주가 술법으로 방어막을 만들어내었으나 검마는 탈혼검기를 집중시켜서 손쉽게 뚫어버리고는 십이율주의 목을 노렸다. 그 순간 검마는 마치 시공이 회오리치는 듯한 격렬한 유동(流動)과 함께 강제로 심적권청의 순간에 진입했다.
[ ... 이 정도로 집요할 줄은 몰랐다. 네 돌격에서 자만이 아닌 신념을 느꼈으니 인정한다, 검마.]
그리고 흑백으로 점철된 함묵의 공간 속에서 십이율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제대로 싸워주마.]
십이율주에게서 순간 안광이 폭사했다.
[ 그리고 이 준신(俊神)의 기예(技藝)를 눈에 새기고 죽어라!]
절대지경
천의무봉(天衣無縫)
'받아라!'
검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중 하나인 진영검(眞影劍)을 어검으로 내쏘았다. 아까 홍길동의 실체분신을 일격에 소멸시켰던 이 절기는 무영탈혼의 극에 도달한 것으로써, 실체와 검영이 분간되지 않으며 합일되는 순간 수십 배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홍길동의 분신과 비슷해 보였지만 아무래도 검마는 전신을 구현화시키는 게 아니라 검기에 집중할 수 있으므로 훨씬 공격에 용이했다.
더욱이 진영검에는 굴공참과 칠대절학의 묘의까지 스며있으므로 질 수가 없다. 거기에다가 구십구합리귀를 통해서 온갖 단점까지 메울 수 있었으니, 무사시조차도 진영검을 상대로는 전력을 다해서 막든가 반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
진영검의 검강이 십이율주를 뚫으려는 순간 율주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뜻밖의 무공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삼극무진본(三極無盡本)
투두둥
세 개의 장인(掌印)이 십이율주의 왼손에서 튕겨서 진영검의 기세를 중화시켰다. 놀라운 것은 장인 하나하나에 실력있는 공력의 속성은 제각기 달랐고 저마다 쾌(快), 중(重), 환(幻)의 서로 다른 절기였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결코 승패가 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율주의 오른손은 동시에 은하구절편을 휘둘러서 정확하게 검마의 약점을 때려온 것이다.
쿠궁!
"......!!"
쿨럭
검마는 자신의 옆구리에 은하구절편의 쇄를 정통으로 얻어맞자 호신강기를 일으켰음에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에 큰 타격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으나 그는 크게 당황해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검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방금 전에는 십이율주가 그저 공수를 함께 했다고 이해하면 간단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절대지경의 무학은 하나만 펼쳐도 엄청난 심력과 기력을 소모하는데다가, 속성이 다른 걸 동시에 구현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방금 전 펼쳐진 삼극무진본과 은하구절편의 반격은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미리 궤도를 읽은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검마의 검류는 실체와 검영이 분간이 가지 않는데다가 마음만 먹으면 수십만 개의 궤적을 만들어낼 수 있어서 도저히 감만으로는 피하거나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마 또한 절대지경답게 공격하는 순간에만 실체화시키는 게 가능했는데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반격한다는 말인가?!
당황하는 검마를 본 십이율주가 빙룡 위에 올라서서 말했다.
"왜 그러지? 뛰어난 재능으로 절대지경에 올랐으니 이제 나와 좀 싸워볼만하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나?"
"......"
그는 차갑게 말했다.
"너도 나름대로 뛰어나니까 그런 감정을 착각이라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 내 절기를 파해하려면 지금 수준으로는 무리일걸."
타앗
십이율주가 내려앉았다. 그는 은하구절편을 늘어뜨린 채 손가락을 까닥였다.
"들어와."
검마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여기가 자기 운명의 분수령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천의무봉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내야 할까?
"......"
운명의 한 걸음.
검마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가겠소."
이대로는 부족하다.
천의무봉이 무엇인지 기필코 알아내야 한다.
백웅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사선을 넘기로 작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