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693화 (692/1,615)

693====================

암천향(暗天鄕)

쿠구구구….

마치 하늘을 뚫을 듯 구름너머까지 뻗어있던 신단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게 멀리에서 보였다. 신단수의 결계는 팔부신중이 깨버린 부분이 뚫려 있었으나, 이내 그런 손상 따위 무의미할 정도로 결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도망쳐!”

쿠쿠쿵

신단수의 하단에서 진을 짜고 있던 십이율의 고수와 술법사들은 다들 기겁하며 도망쳤다. 팔부신중이 쳐 들어온다는 걸 의식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하며 광범위한 천재지변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나무 줄기의 파편이 떨어지면서 마치 거암처럼 지반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나마 수준이 높은 무인과 술법사들이 부하들을 인솔해서 물러나기 시작하자 상황이 조금은 안정 되었다.

“율주는? 율주는 어디 있나?”

혼란 와중에 북해빙궁주(北海永宮主)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는 은발의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서방혼혈의 오십대 사내였는데 십이율 문주 중에서도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십이율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일전에 북해문의 정예를 모조리 끌고 왔는데 난데없이 신단수가 무너지기 시작하니 그로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천공이 어두워지며 엄청난 크기의 그림자가 장내에 있던 수백 명의 인간들을 뒤덮었다.

“......!!”

거암!

그것도 크기가 무려 일백 오십 장이 넘어 보이는 바위였다. 저런 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신단수의 중간에 박혀 있던 고대의 거암이 줄기의 압력이 약해지자마자 튕겨지듯 땅으로 낙하하는 것이었다.

‘안 돼!’

북해빙궁주는 자신의 음한공력을 모두 뻗어낸다 해도 저런 거암을 부술 수는 없다는 걸 직감하며 순간적인 절망에 휩싸였다. 신법으로 피하면 자기 목숨은 살릴 수 있겠지만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쥐포가 되어버리고 말리라.

조의선인(早衣仙人)

절기(絶技)

강갑권왕(强鉀拳王)!

콰과과광

지상에서 큰 바람이 뿜어지며 한 신형이 거암에 달려들어 일권을 올려 꽂자 거암이 내려올 때와 같은 속도로 허공으로 튕겨지더니 천공에서 비산(飛散)했다. 단 일 권으로 절벽만한 바위를 박살내는 신위!

그러자 파편들이 떨어지는 걸 고수들이 기를 뿜어내어서 피하거나 막았다. 북해빙궁주도 일조하면서 외쳤다.

“조의선인 문주!! 대단한 신위구려.”

과연 지상의 무림인 중에서 일백 오십 장이나 되는 바위를 도로 튕겨서 일 권에 산산조각 낼 수 있는 권술사가 몇 명이나 될까?

타앗

마치 새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앉은 조의선인의 수장, 십이율 문주 삼강 (三强)의 일인은 양쪽 팔에 강철처럼 생긴 기구를 장착하고 있었다. 얼굴이 깡마른 인상인데도 전신이 두툼한 근육질인 그는 팔짱을 낀 채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왜 신단수가 무너지는 건가.”

“잘 모르겠소. 혹시 율주와 연락할 방법이 없소?”

“이미 불종(佛宗)과 해동밀천(海東密天)을 찾아봤다. 하지만 불종측은 원거리 통신 술법이 없고 해동밀천은 천주가 살해당했다.”

“뭣…!! 누구한테.”

“제갈사가 틀림없다.”

“…….”

북해빙궁주는 이빨을 까득 깨물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배신했구나! 쓰레기 같은 중원 놈들.’

당연히 그들은 몇 달 간 얼굴을 보아왔고 소개받았으므로 백웅진영의 책사인 제갈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사 자체가 무명(無名)인 데다 얌전히 있기에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 자가 아군을 살해한 것이다. 조의선인 문주가 말했다.

“나머지 문주는 거의 다 찾았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서 아무르 강 쪽으로 가자. 그 곳에 우리 문파의 영지가 있다.”

“너무 멀지 않소? 차라리 모단강(牡丹江) 정도로 물러나서 사태를 보는게….”

북해빙궁주가 말을 하다가 곤혹스러운지 말했다.

“아니 그것보다 율주를 찾는 걸 벌써 포기한단 말이오? 팔부신중과 싸우는 건 어쩌고?”

그 때 옆에서 새로 나타난 고수가 끼어들었다.

“십이율주가 우리 둘에게 내린 지령이었다. 이변이 생길 경우 이곳에서의 전투를 포기하고 즉시 조의선인의 본거지로 대피하는 거다.”

“사울아비 문주.”

사울아비들을 통솔하는 십이율 문주, 척준기(拓俊企)는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명할 시간 없다. 빨리 움직이자.”

“율주의 뜻이 뭔지 모르겠소.”

“글쎄… 굳이 말하자면… 전력보존이겠지.”

“무엇을 위해서? 싸울 때 싸우지 못한다면….”

북해빙궁주가 회의감을 느끼는 걸 보자 사울아비 문주 척준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충분히 무력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율주에게 있어서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란 거겠지…. 그는 우리와 달라.”

그렇게 십이율의 전력들은 전원 신단수에서 물러났다.

처음부터 일사불란한 연계가 되어 있었고 수장들끼리도 협동이 잘 되었기에 사상자는 많지 않았으며 이윽고 인기척조차 사라질 정도가 되었다.

십이율 고수들이 떠난 자리에 침묵이 흐르다가 어느 순간 세 명의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앗!

“재밌군. 세계수가 붕괴할 줄은….”

본체에서 되돌아와서 인화(人化)하여 아름다운 흑발 미녀의 모습이 된 팔부신중 야차(夜叉) 상관완아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사실 결계가 부서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단수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팔부신중 긴나라의 제안에 따라서 은신한 채로 근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세계수는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핵이 붕괴되고 그 생명력을 잃어 침몰하기 시작했다. 팔부신중 세 명은 쓸데없이 본체상태가 되어서 인과율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인간형으로 재변신한 것이다.

팔부신중 건달파(乾?婆)걸선의 모습으로 대꾸했다.

“저들을 추적해서 죽이지 않아도 되겠나?”

그 질문에 옆에 있던 두툼한 인상의 긴나라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럴 필요까지야. 인과율만 낭비할 뿐…. 저런 벌레들을 굳이 쫓아가서 잡을 이유는 없어.”

“정말인가? 우리의 본체에 비해서는 벌레이지만 나는 무림에서 오래 활동했기에 십이율의 저력을 잘 알아. 저 자들이 뭉치면 제갈유통의 중원장악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건달파는 생각지 않고 말을 내뱉는 바보가 아니었다. 당연히 정파 삼대 기인이자 개방의 전대장문인인 걸선으로 활동하면서 모았던 지식과 경험에 따라서 십이율 고수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한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몽땅 죽여 버리는 게 앞으로 편할 것이리라.

그러나 긴나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라고 생각 안 해본 게 아니다. 하지만 저들을 죽이면서 얻는 이득보다 인과율의 낭비가 더 손해지. 뭣보다 우린 아직 십이율주와 백련교주의 면상도 한번 보지 못했다.”

“음.”

“십이율은 제갈유룡 혼자서 처리하라고 하면 돼. 토요까지 빌려갔는데 그 정도도 못하는 놈은 아닐 테지. 게다가 이렇게 세계수가 붕괴했다면 놈들은 전력의 7할 이상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렇긴 하군.”

긴나라는 딱히 인정이 넘쳐서 패주하는 십이율 고수들을 잡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단지 세계수가 붕괴한 지금, 더 이상 힘의 균형에서 십이율이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는 책사였기에 소탐대실(小耽大失)의 우를 범하는 게 가장 싫은 선택이었다.

야차가 자신의 낫을 휘둘렀다.

끼이이잉 -

기묘한 소리가 울리면서 진동했다. 야차는 그 진동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강한 기운이 흩어져있군.”

“어떻게?”

“강자라고 판단되는 기운이 총 세 군데… 그 중에서 어떤 게 십이율주나 백련교주인지는 모르겠다.”

“백련교주는 아닐 거다.”

“왜?”

“…백련교주 탐색은 바깥쪽에 있는 세 놈에게 맡겨둬도 충분해. 그럼 셋 중 하나가 십이율주겠군.”

긴나라의 말에 건달파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눠서 추적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본체의 봉인은 지금 상태에서 쉽게 풀 수 있는데.”

일리가 있는 제안이었다. 팔부신중의 본체 하나하나가 압도적 힘을 갖고 있다면 나눠서 찾는 게 가장 빠른 법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만 있어도 십이율주를 단독으로 죽이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 건달파였다. 그러나 긴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인간들의 저력이 생각보다 강하니 어떤 수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옛 지배자]의 화신도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했다. 여태껏 우리가 상대했던 놈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했으니, 우리의 특수능력이 아니었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으음. 놈들이 또다시 이계의 존재를 소환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가능성은 있다.”

“그렇군….”

건달파가 납득하자 긴나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린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수 없어. 창힐님이 약속한 ‘그 때’가 올 때까지….”

“그럼 몰려다녀야겠군.”

“그래. 조금 귀찮아도 반드시 이기면서 전력소모를 줄인다.”

긴나라는 책사 중에서도 보수적이며 신중한 책략을 짜는 유형이었다. 그 때문에 기이하고 천재적인 책략을 짜는 자들에게는 밀리는 편이었으나, 그 견고함 때문에 도리어 버티는 싸움이나 우세를 차지한 싸움에서는 더욱 승률이 높았다. 이로써 십이율주에게는 희망이 한 꺼풀 더 사라져버린 것이다.

야차가 말했다.

“사냥 시작이다.”

팔부신중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바로 그 때, 십이율주 하은천은 자신을 가로막은 한 사내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중턱보다 훨씬 아래쪽까지 내려와 있었고 막 신시를 벗어나서 백두산에서 떠나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 무인은 구름다리의 맞은편에 서서 검극을 십이율주에게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면 배겠소.”

“…….”

십이율주 하은천은 그 경고를 무시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옆에 서 있던 만하령문의 대장로, 홍길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맞은편에 서 있는 검호(劍豪)의 결계(結界)같은 공격범위가 매우 위협적으로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무형지기가 의념을 띄고 견제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저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 손끝이라도 들이민다면 그 순간 베인다.

전투는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상대방 또한 절대지경에 들어선 초고수라는 걸 의미했다.

"흠."

십이율주는 힐끔 홍길동의 옆구리에 들려있는 청월과 명룡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구름다리 맞은편의 사내에게 말했다.

“이거 자네 동료 맞지?”

“그렇소.”

“본의 아니게 인질을 잡게 됐군. 이놈들을 절벽 밑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비켜.”

십이율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협박했지만 사내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십이율주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던져.”

휘익!

다음 순간 홍길동은 망설이지 않고 혼절해 있는 청월과 명룡자를 낭떠러지로 던져 버렸다. 그들은 적이 된 자에게 일부러 잔정을 남길 정도로 착한 인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절벽 맞은편의 사내는 빠르게 발검(拔劍)했다.

피잉!

무형의 검기가 날아가더니 반월을 이루었고 이내 서서히 청월과 명룡자의 몸을 떠받치듯 어디론가 날아갔다.

스스스스 -

얼핏 공격하려고 내뿜은 검기 같았지만, 십이율주와 홍길동은 저 검기가 살상능력이 없고 완전한 힘조절로 낭떠러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게끔 하는 묘예(妙藝)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땅에는 솜털처럼 내려앉게 되리라. 이윽고 청월과 명룡자의 모습은 장내에서 사라져서 구름 밑으로 가 버렸다.

가히 예술의 영역에 도달한 검기였기에 홍길동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훌륭하군….”

그러자 십이율주가 곱지 못한 시선으로 홍길동을 보았다.

“야. 이런데서 적을 칭찬하면 어떻게 하냐?”

“아, 죄송. 근데 쩌는 건 쩌는 거죠. 분신 쓰는 입장에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어요. 저게 얼마나 정밀한 감각이 필요한데.”

“하여간… 좀 닥쳐.”

변명하던 홍길동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힘만 쎄다고 대장로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십이율주는 신경질을 내다가 품속에 있던 웬 손가락만한 나무통을 꺼냈다. 그리고 나무통을 살짝 흔들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혼절해있는 극호가 나타났다. 십이율주는 은하구절편을 들어서 극호의 머리를 조준하며 말했다.

“훌륭한 검기라는 건 인정해주지. 당신은 대단한 검객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잔재주를 못 부리게 직접 이 친구의 머리를 으깨주지.”

“…….”

“그래도 비키지 않을 건가? 거기서 우리 둘을 상대로 이 젊은 친구를 구할 수 있을까? 백련교주가 와도 힘들걸?”

이번의 협박은 굉장히 압박이 강했다. 십이율주의 말대로 현재 검객이 무슨 수를 써도 십이율주의 지척에 혼절해있는 극호의 목숨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검객은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극호는 목숨을 걸고 신단수의 정상까지 갔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임무는 성공한 것.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네가 뭔데 이 놈이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를 멋대로 판단하는 거지?”

“그는 사나이이며 동료이기 때문이오.”

검객은 더욱 기세를 강하게 표출하며 말했다.

“동료는 서로 보듬어주기만 하는 게 아니오. 같은 뜻을 공유한다면, 때로는 흔들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 적인 당신에게 그 사정을 이해받을 필요는 없소.”

“…….”

“극호가 개죽음 당한다면 나 또한 그 책임을 지고 당신과 동귀어진 하겠소.”

흔들리지 않는군.

‘완성된 전사(戰士)다.’

십이율주는 내심 감탄했다. 그것은 검객의 실력에 대한 찬탄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연마되어있는 상대의 정신력과 의지에 대한 감탄이었다.

세상에 실력 좋은 고수는 많으나 전사로써의 신념과 행동원리를 철저히 지키는 자는 극히 드물었고, 그런 자는 적아를 가리지 않고 그 용맹을 존경 받을만 한 것이다.

십이율주가 말했다.

“아마 제갈사의 명을 받고 내 발목을 붙잡으려 여기에 있는 거겠지. 아무리 우리라도 절대지경의 고수를 상대로 쉽사리 이길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런 만장단애가 수없이 펼쳐진 계곡에서 우리를 붙들어두는 데만 전념하면 매우 귀찮아지겠지. 지형 또한 마치 짜놓은 것처럼 완벽하군.”

“그렇소.”

“뭐어… 어쩔 수가 없구만. 웬만하면 말로 하고 싶었는데.”

치리링

십이율주는 수투 월하정야갑을 꺼내서 양손에 낀 후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은하구절편을 손에 들며 중얼거렸다.

“널 죽이고 가야겠다. 검마(劍魔) 서문대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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