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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흠칫
이변을 먼저 알아챈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였다. 그는 의념 절기를 운용해서 천령단의 막강한 공격을 피하며 빈틈을 찾는 식으로 2명의 호법사자급 고수와 대치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근처에서 일어난 파장이 급격히 확산되며 자신의 기(氣)를 집어삼키는 걸 빠르게 감지한 것이다. 그는 예민한 초감각으로 이게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파앗
미야모토 무사시는 갑자기 기척을 숨기듯 시공의 단면을 베어서 크게 물러났다.
[놈! 어딜 도망가느냐.]
무사시의 신형이 멀리로 도망치자 약이 오른 독고준이 수신류 원로와 함께 그를 추적해갔다. 본래 무사시의 은신술은 절대지경의 고수가 아니면 알아챌 수 없으나 지금은 무사시 또한 크게 당황한 상태였기에 절기가 완전한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피피핑
세 명의 고수들이 허공을 날며 멀어지는 사이에, 세계수의 중턱 동굴에서는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다소 파리한 안색으로 머리를 짚고 있었는데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급급여율령."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근!
[큭… 흐흑.]
백련교주는 진소청과 싸우던 중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소청은 너무 큰 빈틈이 나버린지라 일격에 그를 난도질해서 즉사시킬 수 있었으나,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창끝을 내렸다. 진소청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계가 왔구려."
[끝을 내라.]
백련교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는 설령 조문을 당했어도 한동안 싸울 수 있었으나 시한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진소청 같은 절대지경의 고수와 겨룬다면 그 시간은 더욱 급격히 짧아지는 게 분명했다. 진소청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갈사가 당신에게 물어보라 했소. 만일 이 파멸하는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이 아닌 다른 자라도 괜찮은지."
[물론이다. 그런 영웅이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고 헌신했으리라.]
진소청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지금까지 당신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소. 의뭉스럽게 모든 걸 속이고 결국 자기 외의 타인은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을 뿐."
[부정하지 않겠다. 허나... 내가 본 중에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대꾸한 백련교주가 천천히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지금 이 상황... 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그 신뢰의 절대적인 부재(不在)를 증명하지 않는가?]
"......."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물어뜯었노라.]
그렇다.
결국 누가 먼저 뒤통수를 치냐의 대결에서 백웅 일행이 선공을 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순서가 달라졌거나 계획이 뒤틀렸다면 지금쯤 백련교주의 손에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있는 건 진소청이었으리라.
진소청은 말했다.
"당신에게 소교주라는 약점이 생긴 이유를 알고 싶소."
[이제 알아서 뭣 한단 말인가…?]
백련교주가 비웃듯 말하자 진소청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교주. 나는 전생자(轉生者)의 동료요. 그리고 우리가 따르는 백웅은 바로 그 전생자. 그는 언젠가 당신을 구해줄 것이오."
[......?]
백련교주는 황당한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제 자기 죽음을 앞두고 초연해졌다 생각했는데 진소청이 꺼낸 말이 너무 의외였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본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진소청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그럴 수가. 그래서 너희는 내 약점을... 그리고 칠요와 사대신기를 모으면서 십이율과 팔부신중까지 끌어들이는 계획을.]
"난 거짓말하지 않소. 제발 부탁하오, 교주."
진소청이 바로 지금 교주에게 진실을 털어놓은 이유는 완전히 교주를 궁지로 몰아서 죽기 직전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만일 교주가 도망치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자유가 있었다면 결코 이런 비밀을 털어놓지는 못했으리라.
[큭... 크크크....]
교주는 이윽고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하!!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일이구나. 세상에 그런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을 수가....]
그는 한동안 껄껄 웃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중얼거렸다.
[잠깐... 그럼... 그 분도... 설마....]
"그 분?"
[.......]
교주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후후.... 약점이 생긴 이유.... 그건 내 혈육의 정 때문이겠지....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무슨 말이오?"
교주는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백웅이 마주치게 될 나, 독고운천은 전생자의 한낱 말 한 두 마디에 감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본대로 나는 수신류의 서고에서 모든 세계의 이면을 알게 된 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성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대를 기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서는 줄 수 있다.]
"어떤 단서요?"
[사대신기를 가져온다면... 그리고 신녀(神女)의 예언이 증명되었음을 내 앞에 보여준다면... 독고운천은 그 자에게 복종하리라.]
"......!!"
순간 교주는 씁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내 평생의 한이었다....]
쉬이익
교주의 몸에서 서서히 암흑의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계약에 따라서 어둠이 그의 영혼을 영겁의 옥좌로 데려가는 것이다. 교주는 천천히 손을 늘어뜨렸다.
[...피곤하군....]
파사삭....
교주의 무면탈이 떨어져서 땅에 굴렀고 그의 옷가지만이 남았다. 남은 그의 영육은 모래가 되어서 사라져버렸다. 한 때 중원제일인으로 불리던 절대자의 허망한 최후를 보자 진소청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 때 진소청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진소청."
진소청은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천우진."
"가자. 시간이 없다."
"...정말 했나?"
진소청은 재촉하는 천우진을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천우진이 맡은 임무가 어떤 임무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우진이 가진 술법사로서의 의무감과 정의로움을 생각하면 결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천우진은 피곤한 듯한 어투로 대꾸했다.
"했지. 아주 신나게... 때려 부쉈지. 뒷감당 같은 건 생각지 않고...."
"괜찮은가?"
천우진이 비직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네놈이야말로 부모가 뒈진 듯한 면상을 해놓고 왜 남 걱정을 해 주는가?"
"음."
천우진의 비웃음을 듣고 나서야 진소청은 자신이 깊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백련교주를 기습해서 죽였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과 신념을 꺾었던 탓이었다. 진소청이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책사가 극악한 놈인 시점에서 각오를 했어야 했어.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는 수밖에."
"...앞장서라."
"그러지."
천우진이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계수고 뭐고... 이제 다 끝장이야."
쿠콰콰쾅
[크크크, 이런 짜증나는 놈들... 도대체 몇 번을 살아나는 거냐?]
폭왕의 화신은 거대한 폭염을 수십 줄기나 일으키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아까부터 팔부신중의 본체 셋을 상대로 쉴 새 없이 몰아치며 압도하고 있었으나, 해치웠다 싶으면 팔부신중들이 어느새 부활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재생하듯 복원하는 게 아니라 난데없이 어디선가 깜짝 나타나는 형식이라서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천인이 대꾸했다.
[당신이야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당신 정도의 상위 [옛 지배자]가 기껏 인간세상의 다툼에 끼어들다니.]
[크크크... 아까부터 줘터지면서 아가리만 살아서... 응?]
피잇
순간 폭왕의 화신이 마치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일그러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난데없는 소멸이었기에 한창 폭왕의 화신을 상대하고 있던 팔부신중들은 황당해했다.
[엇?]
[뭐지?]
팔부신중 가루라가 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천인도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잘 모르겠군.... 저것도 무슨 작전인가?]
[큰 마법을 시전 할 셈인가?]
[그럴 거면 이 자리에서 했을 텐데.]
그들 중 누구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
그러나 그 싸움을 멀리에서 원격으로 지켜보고 있던 십이율주 하은천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괸채 중얼거렸다.
"백련교주가 죽었군...."
소환술사인 백련교주가 죽었기 때문에 폭왕의 화신도 이계로 되돌아간 것이다.
소환마법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였다.
누가 죽였는가?
그건 보나마나 백웅의 세력이다. 적어도 십이율이나 만하령문은 백련교주를 당장 칠 계획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그들의 본거지이므로 기다렸다가 반격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이율주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제갈사가 백련교주와 손잡고 나를 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는데.'
삼대세력 중에서 가장 유리한 상태이며 전력이 높은 건 십이율이었기에 이약(二弱)이 일강(一强)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제갈사 입장에서는 굳이 백련교주를 처치해서 얻는 실익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웅 일행이 백련교주부터 암살하고 보는 이 작전에 대해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들의 힘만으로 나와 삼사, 십이율 만하령문 모두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제갈사 쯤 되는 책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호기나 만용을 부릴 리가 없는 것이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적아의 전력을 판별한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악수였다.
십이율주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풀썩!
풀썩!
"크으윽...."
"주군...."
난데없이 십이율주 옆에 서 있던 삼사들이 한꺼번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하은천은 크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그는 일어서자마자 은하구절편을 휘둘러서 크게 영기를 뿌렸다.
파아아앗
일시적으로 은하구절편에 응축되어 있던 영기가 퍼져나가며 삼사들의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무슨 일인가?"
"주군... 큰일 났습니다.... 저희가 예속되어있는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십이율주는 상황을 빠르게 알아챘다. 그리고 분노에 앞서서 극도의 황당함에 몸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미친...."
그는 제갈사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챌 수 있었다.
물귀신 작전!
하지만 눈치채봤자 이미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야 만 것이다.
죽던가.
광기에 몸을 맡기던가.
그는 실로 헛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 제갈사 백 명이 덤벼도 무력적으로는 자신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제갈사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제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정상인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미친 전략을 세워서 엄청난 행동력으로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삼사의 몸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삼사를 구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심장이 터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십이율주 하은천은 그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너희의 힘은 내가 잘 쓰겠다."
우사와 운사는 눈을 감았다.
"부디…."
"미래를 구원해주시옵소서."
그들은 차례로 빛이 되어서 십이율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고, 풍백도 체념한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대단군(大檀君)이시여. 부디 이 땅, 고려의 백성만이라도...."
"...그러지."
삼사가 모두 십이율주에게 흡수되자 그는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시꺼먼 천공이 보이는 광활한 대지에 서서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이들을 모두 제압했습니다."
"홍길동."
홍길동의 발밑에는 극호, 명룡자, 청월이 모두 혼절해서 쓰러져 있었다.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 혼자서 모든 침입자를 잡아낸 것이다. 십이율주는 홍길동이 매우 유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하게 말했다.
"무의미하군."
"네?"
"대장로. 날 따라오게. 패배한 싸움에서 더 이상 미적거릴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쿠구궁
다음 순간 그들은 갑자기 큰 진동이 울리며, 서 있던 대지 한 켠에 검은 구멍이 움푹 뚫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천공(穿空)에 홍길동이 깜짝 놀라자 십이율주가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작됐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곁에 희미한 의식이 남아있던 극호는 그들의 대화를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누운 상태로 십이율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세계수의 핵이 부서졌어. 신단수는 곧 죽을 것이다.